Chapter 336 - IF : 만약 그녀가 용사였더라면. (10)
얼마나 달렸을까.
달음박질치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너무도 길어서, 머릿속으로 온갖 생각이 떠올랐더랬다.
두 사람은 무사할까.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겼다면 어떻게 하지?
그런 생각을 하니 속이 매스꺼워져, 순간 균형을 잃기까지 했다.
원래라면 이런 생각 따위 하지 않았을 텐데.
아무래도, 지금의 나에게는 두 사람이 상당히 소중한 존재가 된 것 같았다.
"에반젤린 씨! 수녀님ㅡ"
"...늦었구나."
"에반젤린 씨!!"
오두막 안으로 들어가기 전부터 짙은 혈향이 코를 찔렀다.
설마, 이건.
쿵쿵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으며 걸음을 옮기자, 피투성이가 된 에반젤린 씨가 나를 맞이해줬다.
...에반젤린 씨의 피는 아니야. 다행히, 다치신 것 같지는 않아.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너에게 원한을 가진 녀석들이 오두막을 습격해왔다. 대부분 입을 막아놓기는 했지만ㅡ 오두막 밖으로 나간게 패착이었어. 미안하구나, 지키지 못해서."
원래는 오두막 안에서 계속 농성을 할 생각이었는데, 밖에서 불을 지르려는 놈들이 있어서 결국은 나가서 싸울 수밖에 없었다며 에반젤린 씨가 사과를 해왔다.
에반젤린 씨가 왜 사과를 하시는 건가요. 대체 무슨 이유로.
그리고 지키지 못했다니 대체 뭘ㅡ
"...수녀님은요?"
"...살아남은 녀석들이 데리고 갔다. 쫒으려고 했지만, 몸 상태가 이러니 쫒을 수가 없었어."
그렇지 않아도 후유증 때문에 고생하던 몸이었는데, 격한 전투까지 치뤄내니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달달 떨리는 팔다리는 이미 제 기능을 상실한지 오래.
이런 몸으로 저 쓰레기들을 상대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그녀는 그녀의 역할 이상의 것을 해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면, 이번에는 내가 역할을 다 할 때겠지.
"다녀올게요, 에반젤린 씨."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무사히 돌아오거라."
그 대답을 끝으로 몸을 늘어뜨리는 에반젤린 씨를 뒤로 하고 서둘러 다리를 움직였다.
수녀님을 끌고간 녀석들이, 대체 어디로 갔지?
마을로 향했을까, 아니면 숲 속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갔을까.
나무의 그림자가 어둡게 드리운 숲을 바라보며 거칠게 숨을 내뱉었다.
혹시라도 수녀님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다면, 나는 과연 진정할 수 있을까.
"...죽여버리겠어."
왜 나를 괴롭히지 못해 안달인 거야.
너희들이 원하는대로 사라져줬는데 대체 왜?
사람을 구하지 못하는 용사 따위 쓸모 없다고 해서, 용사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숨었는데도 기어이 찾아내서는ㅡ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떠오르는 어두운 생각에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대로 이런 생각을 계속 했다가는 소리라도 질러버릴 것 같아서였다.
"...어떻...진짜..."
"죽...그...많..."
그렇게 한참 동안 숲속을 헤매던 도중, 희미하게 들려오는 대화 소리에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찾았다.
머릿속에 떠오른 세 글자에 지금까지 뛰어다니던 속도 그 이상으로 빠르게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찾았어, 찾았어, 찾았어!
수녀님을 데려간 빌어먹을 녀석들을, 찾았다고.
"미친, 벌써 따라왔다고?! 시간 끌기로 한 녀석은 어떻게 된 거야!"
"...설마 죽었나?"
본인들의 앞에 나타난 나를 보며 저들끼리 수군거린다.
도망치지 않고 가만히 있는다는 건 무언가 믿는 구석이라도 있다는 걸까.
그게 아니라면 나 따위는 자신들의 안중에도 없다는 뜻인 걸까.
어느 쪽이 되었던, 그들이 오두막을 습격해 수녀님을 납치한 이들이라는 건 변함이 없었다.
...수녀님이 무사한 걸 다행으로 생각해.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전부 내 손에 죽었을 테니까.
"수녀님을 보내주세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을 납치하다니, 최소한의 양심도 없는 건가요?"
"사, 상관이 없다니! 너를 숨겨줬으니까 상관이 있는 거지!"
"..."
그런 식으로 말하면, 이쪽에서도 할 말이 많았다.
당신들의 가족들이 죽은 건, 당신들의 탓이다.
당신들이 약하고, 빌어먹을 정도로 겁쟁이고, 내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죽은 것이다.
그렇게 외치고 싶었다.
그렇게 외치고 싶었는데, 저들과 똑같은 인간이 되기 싫다는 마음 하나로 꾹 참아낼 수 있었다.
"놓아주세요. 애초에 당신들과 제 문제잖아요."
"그, 그럴 수는 없지! 이 년 하나 잡아온다고 사람이 얼마나 많이 죽었는데!"
"그 괴물 같은 년..."
저들이 한 가지 잘못 생각하고 있는게 있다면, 눈앞의 인간들이 자신들을 해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왜 더 위협하지 않을까. 왜 도망치려는 시도를 하지 않을까.
에반젤린 씨의 이야기를 할 때는 그렇게나 떨고 있으면서, 어째서 내 말에는 전혀 떨지 않는 걸까.
그건 분명 내가 용사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었기 때문이겠지.
용사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며 욕하던 주제에, 내가 끝까지 용사이기를 바라는구나.
"컥ㅡ"
"이런 미친ㅡ"
"저는 기회를 줬고, 당신들은 그 기회를 버렸어요."
말로 해결하려고 한 건, 내가 저들을 죽이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그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준 것이었지.
"요, 용사가 이래도 되는 거야? 아, 아니면 마족 편에 붙은 건가? 그래, 오두막에 있던 그 악마 년도 어딘가 이상했어! 사람을 그렇게나 아무렇지 않게 죽이다니, 말이 안 되잖아! 그래, 그런 거였어. 용사가 타락해서 마족의 손을 잡지 않았다면ㅡ"
"닥쳐."
"...어?"
"죽기 순간까지, 그 더러운 주둥이를 놀리지마."
콰직ㅡ
피가 튀고, 손에 인간이었던 무언가가 짓눌려 터져나갔다.
아아, 인간의 몸뚱이란 이렇게나 약한 거였구나.
내 손에 죽어버린 쓰레기의 시체를 내려다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지금까지 마족들만 상대해와서 그런지, 평범한 인간의 몸뚱이가 어느 정도 수준의 강도를 가졌는지 모르고 있었더랬다.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나에게 욕을 하고, 돌을 던지고, 뺨을 때리던 것들 모두 이런 단순한 손짓 한 번에 무너질 정도로 아무것도 아니었었어.
고개를 돌려, 수녀님을 붙잡고 있던 손을 놓은 인간들을 바라보며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입을 막아두는 편이 좋으려나.
응, 역시 그게 낫겠지.
"오, 오지마! 오지 말라고, 이 괴물 같으니! 젠장, 그 녀석은 대체 어디로 간 거야! 용사년을 죽이자고 이야기 한 주제에 자기만 쏙 빠져나가고! 빌어먹을, 빌어먹을, 빌어먹을ㅡ"
"저를 죽이러 오셨다면, 본인이 죽을 각오도 하셨어야죠."
매일마다 마족들과 맞서며 언제나 죽을 각오를 하던 나였는데, 정작 이들은 그런 자그마한 각오조차 되어있지 않았다니.
어째서 세상은 희생하는 자의 것이 아니라 희생의 부산물에 기대어 사는 자들의 것인가.
빌어먹을 정도의 불합리함이었다.
혐오스럽고, 증오스럽고, 결국 환멸하게 될 정도로.
"아, 안 돼... 살려줘. 자, 잘못 했으니까! 자, 지, 지금 이 여자도 풀어줬잖아? 그, 그리고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을게! 그러니까 살려줘! 살려ㅡ"
남자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그도 그럴게, 평범한 인간은 머리통이 몸통과 분리되면 말을 하지 못하는 법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남자의 머리를 잘라낸 것은 내가 한 일이 아니었다.
다른 누군가.
이 소란을 듣고 찾아온ㅡ 아니, 어쩌면 위치를 듣고 찾아온 다른 누군가 때문이었지.
"거짓말은 아니었네~ 인간 따위가 하는 말이라서 솔직히 반쯤은 믿고 있지 않았는데 말이야."
"..."
"그나저나, 용사가 인간을 죽인 건가? 이거이거, 정말 재미있는걸~"
머리 위에 솟아난 뿔, 히죽거리며 웃고 있는 창백한 면상.
그리고, 손에 들고 있는 인간의 머리까지.
조금 전에 잘려나간 남자의 것이 아닌, 얼마 전에 보았던 남자의 것이었다.
다리가 다친 척 하며 나를 속이려 들던 그 남자의 머리.
"어떻게 데려가야 좋을까... 아니, 그냥 죽여도 상관 없다고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마왕이 보내서 온 건가요?"
"아? 아아, 뭐어... 그런 셈이지~"
손에 들린 머리를 던졌다 받았다 하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마족이, 이내 입꼬리를 주욱 찢어올렸다.
마치 어린아이가 곤충의 날개를 잡아뜯을 때와 비슷한 표정ㅡ
아니, 그것보다 훨씬 더 순수한 광기의 발현이었다.
"데려가서 인간들을 죽이게 하는 노예로 써먹어도 괜찮을 것 같은데ㅡ 응, 그게 좋겠네~"
"...수녀님, 도망치세요."
"하지만ㅡ"
"도망치세요, 당장."
눈앞의 마족이 틈을 보이고 있을 때, 어서 수녀님을 도망치게 해야 했다.
무례한 생각이지만, 수녀님이 이곳에 있으면 나에게 있어서 그저 방해만 될 뿐이었으니까.
심지어 위험하기도 했고.
머뭇거리면서도 나와 반대편 방향으로 뛰기 시작하는 수녀님에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도망치세요, 수녀님. 최대한 멀리.
"누구는 죽이고, 누구는 도망치게 두고... 너무한거 아니야?"
"닥치세요."
"이런, 너무 서러운 걸~ 기껏 살려서 데려가려고 마음의 준비까지 마쳐둔 상태였는데 말이야~"
말꼬리를 늘여말하는 꼴이 역겨워서 이가 갈릴 지경이었다.
마족이라는 것들은 하나 같이 전부 이런 녀석들밖에 없는 걸까.
그게 아니라면, 내가 만나는 것들은 전부 이런 녀석들 뿐인 걸까.
인간들 중에서도 마족들과 함께하자는 자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건 대부분의 인간들이 마족들을 혐오하는 것도 있었지만, 마족들의 손속이나 행동 하나하나가 인간들과는 어울릴 수 없기 떄문도 있었다.
애초에 근본적으로 섞일 수가 없는 종자들.
아마 그 어떤 마족이 와도, 이런 기분이 드는 건 막을 수 없을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