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37 - IF : 만약 그녀가 용사였더라면. (11)
차라리 눈앞의 마족을 따라간다면 편해질 수 있을까.
아니, 마족 따위를 따라가봤자 아무것도 되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인간들의 노예가 되어 마족들을 죽여왔는데, 이제는 또 마족들의 노예가 되어서 인간들을 죽이라고?
그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니, 더 이상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무기도 없이 덤비려고 하다니, 별로 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은데 말이지이~"
"..."
확실히, 마족을상대로 손에 아무것도 들지 않는 건 일종의 자살 시도나 다름 없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다른 뾰족한 수가 없었다.
맨손이라도, 끌려가고 싶지 않다면 맞서는 수밖에.
"그러니까, 상대가 안 된데도?"
"큿...!"
"용사 주제에 성검을 버리고 다니니까 이렇게 쩔쩔 매지, 안 그래?"
단순한 주먹의 휘두름에조차 몸을 굴려야 하는 이 불합리함을 대체 누구에게 불평할 수 있을까.
빗맞은 주먹에 나무가 부서지고, 땅이 갈라지고, 허공이 비명을 지른다.
마족이라는 것들은 하나 앝이 인간의 이지를 벗어난 것이어서, 단 한 순간도 방심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 이게 제압을 위해 억누른 힘이라니...'
만약 본인이 성녀가 아니었다면, 용사가 아니었다면ㅡ 그리고 이 손에 성검이 들려있지 않았다면 그들에게 맞설 수 있었을까.
뭐, 결국 마왕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리기는 했지만 만약 그 셋 중 무엇 하나라도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그들에게 진즉 죽어나갔을 터였다.
그리고 지금 상황이 바로 그 셋 중 하나가 없는 상황이었고.
"벌써 지친 것 같네에~ 왜, 손에 성검이 들려있지 않으니 나 같은 마족도 죽이지 못할 것 같나?"
"..."
분하지만, 맞는 말이었다.
성검이 없으면 그저 마족의 손아귀에 놀아나는 장난감에 불과한 몸뚱이.
...이럴 줄 알았으면 북부에 있을 때 단련이라도 조금 해둘 걸 그랬네요.
공세는 커녕 피하기만 했는데도 거칠어진 숨결에 어깨가 덜덜 떨려왔다.
"뭐어, 이제 슬슬 질리니까 팔 다리 하나 쯤을 부러뜨려 놓을까~"
"크흣?!?!!"
순식간에 뻗어진 손이 그대로 내 팔을 움켜쥐는 순간 우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뼈가 부러졌다.
멀쩡하던 뼈가 가루로 화하는 것과 동시에, 격통이 느껴졌다.
아파, 아파, 아파, 아파...!!
마족 앞에서 꼴사나운 비명을 내지르고 싶지는 않아 어떻게든 소리를 억눌었지만, 눈물이 나오는 것까지는 막지 못했다.
"이런 가녀린 팔로 어떻게 동족들을 그리 죽여댔는지, 쯧쯧..."
"이거, 놓으세요..."
"놓으면, 뭔가 더 보여줄 수 있으려나~"
마치 쓰레기를 내던지듯 툭, 하고 떨어진 손에 부러진 팔이 달랑거리며 아래로 축 늘어졌다.
움직이지, 않아.
물론 그게 당연하겠지. 평범한 인간 따위, 팔이 부러지다 못해 가루가 되었으면 분명 움직이지 못할 테니까.
하지만 나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었다.
"...!!"
"아까워라..."
물론 맞았다고 해도 별다른 타격을 주지는 못했겠지만, 일단 상대를 당황시켰다는 점에서 꽤 좋은 시도였다고 할 수 있겠지.
...아픈 건 싫지만, 이기기 위해서라면 참아내는 수밖에.
어차피 아프다고 해서 죽는 것도 아니었으니, 지금은 그저 버티고 또 버텨낼 뿐이었다.
신성력을 사용할 수 있다는 건 과연 축복일까 저주일까.
쉽게 죽지 않는 건 분명 장점이었지만, 타인을 살릴 때는 그 힘이 제대로 닿지 않는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신기한 몸이네에... 분명 뼈를 가루로 만들어 놨는데, 그새 회복했다고?"
"다음에는 당신의 뼈를 가루로 만들어 드리죠."
얼마나 두들겨야 할까.
손에 쥐여진 돌로, 저 녀석의 머리통을 으깰 수 있을까?
상대에게서는 그 어떠한 위기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특별한 일을 할 수 있는 동물을 본 것처럼, 그저 그 눈동자에 자그마한 흥미를 퍼뜨릴 뿐이었지.
그래서일까.
'저 얼굴을 일그러지게 만들고 싶어.'
비명을 지르고, 살려달라고 땅을 기어다니게 만들어서, 결국 본인이 살 수 없다는 현실에 절망하여 엉엉 우는 꼴을 보고 싶어.
얼마나 많은 시간이 들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그렇게 할 수 있게 된다면 분명.
분명ㅡ
"죽어버려, 역겨운 마족 같으니."
ㅡ엄청나게, 기분 좋을 텐데.
***
가장 무서운 적은 압도적으로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생명체도, 그 무엇보다 빠른 속도를 가지고 있는 생명체도 아니었다.
가장 무서운 적은 바로 쓰러지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죽지 않는 생명체ㅡ 혹은 무언가였다.
"제길, 제길, 빌어먹을ㅡ!!"
"하, 흐아, 하... 푸하하하, 아하하하!!!!"
아파, 재미있어, 마파, 재미있어, 아파, 아파, 아파!!!
팔이 부러지고, 어깨가 짓눌리고, 다리가 찢어지고, 배가 터져나가고ㅡ
제압을 위한 힘을 넘어서 나를 죽이기 위한 힘까지 사용하는 마족은 충분히 위협적이었지만, 동시에 우스웠다.
마족이 한낱 인간을 죽이기 위해 이 정도로 필사적이었던 때가 있던가?
"무서워? 내가 무서워? 아하, 아하하하하!!!!"
"미친 건가..."
"저는, 언제나, 미쳐있었답니다."
미치지 않아서야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그 고된 여정을, 그 빌어먹을 인간들의 손가락질을, 그리고 너희 같이 불합리안 존재들을 상대로 멀쩡한 정신으로 버텨내는 건 불가능이나 마찬가지였다.
아파도 아프지 않은 척.
아니, 그 아픔에 자극을 받아 더더욱 빠르고 날렵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심장이 꿰뚫리거나 머리가 통째로 날아가지 않는 이상은 죽지 않으니, 끝까지 물고 늘어졌다.
"이 미친 년이 진짜ㅡ"
"팔, 불편하신가 보네요?"
단단한 몸뚱이 때문에 몇 번이고 돌을 쥐기는 했지만, 아무런 타격이 없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한쪽 팔만 집요하게 노리니 점점 충격이 쌓이고 쌓여,결국 절뚝거리는 지경까지 가게 되었다.
성검이 있었다면 저 기분 나쁜 머리통을 잘라낼 수 있었을 텐데.
아쉬운 마음에 손을 쥐락펴락하니 검붉은 핏덩이가 끈적하게 묻어나왔다.
"당신, 여기서 이런 식으로 죽는 건 별로 바라지 않죠?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까, 도망치는 건 어때요?"
"...뭐?"
"당신을 살려주겠다는 뜻이에요. 기뻐하셔도 좋다고요? 용사와 맞서서 살아남은 마족은 몇 없으니까. 만약 그렇게 된다면 당신은 그 몇 없는 마족들 중 하나가 되는 거랍니다."
"..."
입꼬리를 샐쭉 치켜올리고는 상대를 잔뜩 비웃었다.
분명 이길 수 있는 상대인데도 불구하고 이길 수 없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천천히 상대를 향해 걸음을 옮기니, 마족의 몸이 움찔거리더니 한 걸음씩 물러서기 시작했다.
겁을 먹었구나.
아무래도 본인은 스스로가 겁을 먹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듯 싶었지만서도.
"크, 크흐... 웃기지 마. 겨우 인간 따위에게ㅡ 성검도 없는 용사 따위에게 도망칠 리가 없잖아아아아아아!!!!!!!!"
냉정을 잃은 돌진은 제 명을 단축할 뿐이었다.
하지만 이쪽에서도 상대를 확실하게 죽일 수 있는 방법은 마땅치 않은 상태.
그렇다면 죽을 때까지 공격해서, 언젠가의 죽음을 노린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건 바로 마음 놓고 상대를 공격할 수 있는 환경이겠지.
"커헉?!"
"잡ㅡ 았ㅡ 다ㅡ"
잔뜩 흥분한 상태로 돌진하는 마족의 균형을 무너뜨리고는 그대로 그 위에 올라탔다.
팔과 어깨를 동시에 짓누르고, 상대가 정신을 차리기 전에 곧바로 얼굴에 주먹을 꽂아넣는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손에 들린 돌덩이를 꽂아넣었다.
피가 터져나오지 않았다는게 아쉽기는 했지만, 머릿속까지 전해지는 충격 때문인지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는 꼴이 참으로 우스웠다.
"당신들도, 생명체기는 하네요? 머리를 얻어맞으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걸 보면 말이에요."
"빌어, 먹을ㅡ"
"죽어요, 빨리."
퍽ㅡ!! 퍽ㅡ!! 퍽ㅡ!!
과연 내 손에 들린 돌덩이가 먼저 가루가 될까, 아니면 내 밑에 깔린 마족의 머리통이 곤죽이 될까.
그 의문에 대한 답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밝혀졌다.
역시 마족은 마족이라고, 용사의 근력으로 휘두른 돌덩이에 계속해서 두들겨 맞았음에도 아직까지도 머리의 형체가 남아있었다.
안타깝게도, 먼저 깨져나가는 건 마족의 머리가 아니라 내 손에 들린 돌덩이구나.
" 손으로 누군가를 때리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겠네요."
"켁, 케엑..."
"살려달라고 빌면 살려줄 수도 있다구요? 아, 마족들은 호전적이라서 절대 그런 비굴한 말 따위는 하지 않으려나요?"
뒷골목을 전전할 때 이런저런 인간들에게 꽤나 두들겨 맞고, 용사의 직함을 목에 걸고 있을 때도 남겨진 자들에게 숱하게 뺨을 맞았더랬다.
그래서 그런지 다른 이에게 맨손으로 맞는 것도, 맨손으로 다른 이를 때리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게 되었지만ㅡ
ㅡ이미 같은 인간도 맨손으로 죽인 마당에 맨손으로 때리는 것 쯤이야 지금의 나에게 있어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죽어, 죽어, 죽어, 죽어ㅡ"
"..."
퍽ㅡ!! 퍽ㅡ!! 퍽ㅡ!! 퍽ㅡ!!
보통의 인간이라면 주먹을 휘두를 때 본인의 손이 다치지 않도록 조절했겠지만, 이번 같은 경우에는 조금 달랐다.
자신의 손이 박살나는 한이 있더라도 온 힘을 다해서 휘두르는 주먹.
분명 평범한 인간과는 궤를 달리하는 내구성을 가진 마족의 몸뚱이었지만, 이 정도로 무식하게 휘둘러오는 힘을 정면으로 마주한다면 분명 서서히 무너질 수밖에 없을 터였다.
어쩌면, 겨우 인간 따위의 주먹질에 숨이 멎을지도 모를 정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