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38 - IF : 만약 그녀가 용사였더라면. (12)
한낱 인간의 몸으로 마족의 숨통을 끊은 건 찬양 받아야 할 법한 일이었지만, 그 결과가 나에게 이로운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내가 승리하는 방법은 마족을 죽이는 것만이 아니라, 마족을 죽이고 수녀님의 안정을 확인하는 것.
만약에라도 수녀님의 안전이 완벽하게 확인되지 않는다면 내 패배나 마찬가지일 터였다.
"아, 아아, 아아아아아......!!!!"
그런 의미에서, 나는 실패한 거라고 봐도 좋겠지.
소중히 여기던 수녀님이 피투성이가 되어, 차가운 대지 위에 몸을 뉘이고 있다면 그 누구든 그런 생각을 할 터였다.
...수녀님. 어째서 당신이 거기에 누워있는 건가요.
당신은 그곳에 있을 사람이 아니잖아요.
저를 위해 친절을 베푼 당신이, 어째서ㅡ
"수녀님, 정신 차리세요... 수녀님, 제발ㅡ 수녀님ㅡ!!"
수녀님의 몸을 흔들고, 두들겨도 그 차가운 몸뚱이에 온기가 돌아오는 일 따위는 벌어지지 않았다.
이미 싸늘하게 식어버린 시체가 대체 어떻게 살아날 수 있을까.
쿵, 하고 심장이 내려앉는 소리와 함께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내 무언가 또한 동시에 죽어버렸다.
수녀님.
수녀님.
ㅡ에반젤린 씨는?
"에반젤린 씨ㅡ!!!!!!!!!!!!!"
"...아직은 살아있으니 너무 소리 지르지 말거라."
희미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마음을 놓으며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다행이다.
당신이라도 살아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상실의 아픔은 지금까지 겪었던 고통보다 훨씬 더 아팠지만, 직전에 겪은 상실과 비교했을 때는 그나마 나았다.
에반젤린 씨. 정말, 살아있어줘서 감사합니다.
"에반젤린 씨... 수녀, 수녀님이... 수녀님이ㅡ"
"...죽었더냐?"
"......네."
내 입에서 튀어나간 힘 없는 대답에, 에반젤린 씨는 답하지 않았다.
마치 잔뜩 지친 사람의 목소리처럼 희미하게 들리는 음성에, 내 심장이 철렁이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걱정하지는 않았다.
북부의 여왕인 에반젤린이 겨우 이런 곳에서 쓰러질 리가 없을 테니.
그래, 에반젤린 씨는 절대 죽지 않아.
그런 막연한 믿음이 있었다.
그런 막연한 믿음이 있었을 터인데ㅡ
"...미안하구나, 엘리."
"......에반젤린 씨?"
"......죽는 건, 나 혼자만으로 끝내려고 했는데."
"...에반젤린, 씨."
"너를, 혼자 두어서, 미안하구나."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ㅡ
거짓말이야!!!!
하지만, 내가 아무리 소리를 지른다고 한들 죽은 사람이 살아돌아오지는 않았다.
이름을 부르고, 그 몸뚱이를 쥐어 흔들고, 세상이 떠나가라 울기 시작해도, 그녀는 눈을 뜨지 않았다.
잔뜩 망가진 몸으로ㅡ 후유증에 시달려 식칼조차 제대로 쥐지 못하는 몸으로 여러 인간들을 상대한 것이 한계였다는 것 마냥, 에반젤린 씨는 눈을 감은 채로 더 이상 움직이시지 못했다.
마치, 죽은 것처럼.
"다, 당신이 죽을 리가 없잖아요."
"..."
"부, 북부의 여왕이 이렇게나 허무하게 죽는다고요? 겨우 후유증 따위로?"
"..."
"인간의 몸으로, 용사가 아닌데도 숱하게 마족들을 죽였잖아요! 그 몸뚱이 하나로, 칼날을 휘둘러서! 그런데, 그런 당신이 겨우 인간 따위를 상대하다가 기력을 다 쏟아 죽었다고요? 거짓말일게 분명하잖아요!?"
그런 장난 같은거, 제가 좋아할 리가 없잖아요.
차라리 당신의 기억이 사라진 것 따위의 장난이었다면, 처음에는 놀랄 지언정 어떻게든 받아들일 수 있었을 텐데.
그런데 당신이 죽었다면ㅡ 당신을 영영 볼 수 없게 되었다면, 나는 대체ㅡ
나라는 인간은 대체ㅡ
"...뭘, 어떻게 하라는 뜻인가요."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이정표는 다름 아닌 바로 당신이었다.
당신은 인간의 삶이 그저 이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 스스로 이룩하는 것이라고 했지만, 내 인생의 이정표는 언제나 당신이었더랬다.
그런데, 그런 당신이 죽었다고?
그것도 겨우 인간을 상대하다가?
"...인정 못 해."
인정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당신이. 에반젤린이라는 인간이. 자존심 드높기로 유명한 북부의 여왕이, 겨우 그따위 인간들을 상대하다가 지쳐서 죽었다고ㅡ?!!!?!
웃기지마!
만약 죽는다고 하더라도, 그녀는 이렇게 죽을 사람이 아니었어!
그딴 인간들 때문에 죽을 하찮은 목숨이 아니었단 말이야!!!
"안 돼, 안 돼, 안 돼, 안 돼, 안 돼ㅡ 안 돼ㅡ!!!!!!!!!!!!!"
지금까지 쌓아온 일상이 무너진다.
지금까지 모아온 인간성이ㅡ 지금까지 숨겨둔 인연이ㅡ 지금까지 간직한 사랑이 전부, 전부, 전부, 전부, 전부ㅡ
깨져나간다.
깨져나가고, 터져나가고, 흘러넘쳐 그대로 바닥을 검게 물들여, 주변의 모든 것들을 회색빛으로 덧칠해ㅡ
"아, 아하하... 아하, 아하하하하하하하!!!!!"
ㅡ결국에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것이었다.
너는 결국 혼자가 될 것이라는 듯 오로지 혼자만 존재하게 만들어, 이 세상의 끝을 보기 전까지는 멈추지 못하도록 가속을 넣는, 그런ㅡ
"전부, 전부 죽여버릴 거야. 마족, 마왕, 그것들과 연관된 건 전부 다!!!!!!!!!!!!"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가 어두움 숲속 전체를 향해 퍼져나갔다.
이토록 처절하게 비명지르는 이를 과연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만약 인간이라고 부를 수 없으면 대체 무어라 불러야 하지?
마법사? 마녀? 그것도 아니라면 원래 불렀던 것처럼 용사? 그것도 아니라면ㅡ
ㅡ악마?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ㅡ 죽여 없애버리겠어ㅡ"
그래.
분명 그것은 악마라고 불리울 터였다.
그 누구도 변명할 수 없고, 항거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그런.
괴물과도 같은 악마가.
***
배신이라는 건 인간만이 당하는 것인 줄 알았다.
설마 동족이 내 뒤통수를 치고 등 쥐에 칼날을 꽂아 넣을 줄은 몰랐는데.
단순히 폭력과 살육을 멈추라는 말 하나 따위로 나에게 칼날을 겨눌 줄은 예상치도 못했더랬다.
먼저 용사를 무력화시키고, 동족들을 설득해서 쓸모없는 살육을 멈추는 것이 내 계속이었건만ㅡ
"...겨우, 살았구나."
얼마 전까지는 커다랬던 몸이었지만, 지금이 되어서는 잔뜩 줄어든 상태였다.
같은 동족에게는 쉽게 죽지 않을 몸뚱이가 이렇게 된 것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다.
이를 테면 용사가 내버린 성검에 찔렸다던지 그런 것들.
물론 상대가 용사가 아니었기에 단번에 절명하거나 그러지는 않았지만, 마왕의 몸뚱이는 유일하게 성검에 만큼은 연약했기에 단순한 배신에도 이토록 치명적으로 다가왔더랬다.
"다른 동족들은, 어떻게 됐을까."
새로이 실권을 잡은 동족에게 지배 당하고 있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나 같은 지도자가 사라진 것을 기뻐하고 있을까.
확실히 오래 해먹기는 했더랬다.
금방이라도 사라진다고 한들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아하, 아하하, 아하하하하!!!!!"
솔직히 말하자면, 이대로 내 목숨을 동족들에게 맡기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을지 몰랐다.
어차피 쓸모도 없는 몸뚱이. 차라리 동족에 손에 죽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지.
그래도, 동족에게 죽고 싶지는 않았다.
영하ㅡ 혹은 그 이하를 넘나드는 극한의 상황에서 마주한 동족들과의 유대를 허무하게 날려보내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하지만.
동족이 아니라면 어떨까.
"...용사로구나."
나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미친듯이 웃고 있는 용사의 모습에 마음이 동한 건 대체 왜일까.
이런 하찮은 몸뚱이라도, 이런 하찮은 영혼이라도 용사의 빈 자리를 채워주고 싶다고 느낀 건 대체 왜일가.
동정심이라도 든 건가?
그것도 아니라면 지금껏 용사의 모든 것들을 갉아먹어온 스스로에 대한 사죄인가?
그렇지만 그것도 아니라면 나는 대체ㅡ
"용사."
"..."
"내 말이 들리느냐, 용사?"
이런 식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염치 없는 짓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 용사를 가만히 놓아두고 싶지는 않았다
나를 죽이고, 내 영혼을 거두어 가기로 약속되어있는 인간이 이토록 허무하게 사라지는 것을, 나는 바라지 않았다.
마왕이라면 마지막까지 마왕으로 있다가 사라지겠다.
어떻게 보자면, 그런 의미가 담긴 선전포고일 터였다.
"당신ㅡ"
"알아볼지 모르겠지만, 얼마 전까지 마왕의 자리에 있었지. 비록 지금은 동족에게 배신 당해 이런 꼴이 되어버렸지만 말이다."
얼마든지 성인의 몸뚱이를 유지할 수는 있었지만, 성검에 당한 상처가 너무도 깊어서 회복할 틈이 없었다.
도망치지 않는다면 살해당할 것이 분명했으니까.
...어째서 도망친 건지는 모르겠지만서도.
'원래라면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으려고 했건만.'
이런 게 어떻게 마왕이라는 걸까.
이미 모든 힘을 잃어버리고, 겨우 명줄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한계인 상태인 생명체를 과연 마왕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건가?
겨우 인간 따위에게도 패배할 법한 하찮은 존재.
그럼에도 스스로를 마왕이라고 소개한 건 마지막 남은 자존심 떄문일까, 그게 아니라면 상대에 대한 동정 때문일까.
"너와 나누고 싶은 대화가 있는데, 허락해주지 않겠느냐? 염치 없는 일이지만, 지금은 너와 이야기를 하고 싶구나."
이기적이라고 욕해도 좋을 정도의 뻔뻔함이었다.
나로 인해서, 동족들로 인해서 죽은 인간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심지어 용사의 소중한 이들까지 결국 동족의 손에 죽었지.
그런 내가, 그녀에게 과연 무슨 말을 해줄 수 있다는 걸까.
짙은 자괴감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