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화 〉#12 빌런은 씁쓸히 패배를 곱씹는다(1)
C급 히어로 ‘아리아’. 본명은 신예린.
그녀는 코코와 같이 정규 히어로가 아니다. 무당의 가계에 속한 그녀는 그 영향인지 【예지】라는, 다른 이들에 비해 상당히 이질적인 능력에 각성했다. 그 때문에 그녀의 본 소속은 【특수배속실】이다.
코코도 본 소속은 7번대가 아니지만, 그래도 자주 보게 되는 그녀와는 달리 아리아는 거의 볼 일이 없었다. 【특수배속실】이라는 특수성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데서 보게 되다니.
“어, 어떻게 네가 오게 된 거야?!”
“오늘은 컨디션이 좋아서요. 【예지】로 이곳의 위치를 알았어요. 침입자 방지용 도어락이나 센서 같은 건 디지털 재머로 처리해뒀구요.”
부채 같은 무늬의 무릎까지 오는 짧은 도포, 머리에는 꽃갓을 쓴 차림의 아리아는 느릿한 움직임으로 품에서 꺼낸 봉을 스페이드의 수갑에 가져다 댔다. 그것만으로 찰캉! 하는 소리와 함께 수갑이 풀렸다.
“일단 도망칠까요, 스페이드 언니.”
* * *
아리아는 느릿느릿 복도를 걸었다. 속이 터질 것 같은 답답한 걸음걸이였지만, 일단 스페이드도 속도를 맞추기로 했다.
대강의 이야기를 전해 들으니, 라헤 대장은 애플이 배신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한다. 그런 그녀를 방치할 수도 없어서, 스페이드와 체크에게 아리아와 코코, 두 사람을 각각 보낸 것이다.
‘세뇌당한 건 아직 모르는 구나... 배신했다고만 알고 있는 거야?’
“그런데 아리아의 능력이면 좀 더 일찍 이 아지트를 알 수 있었던 거 아냐?”
“가능하면 이름으로 불러주세요. 히어로명을 안 좋아해요. 그리고 뭐... 제 능력은 컨디션을 좀 많이 따라서요. 편한 대로 쓸 수 있는 능력이 아니네요.”
“확실히, 【예지】라면 반칙 같은 능력이니까. 뭔가 제한이 있을만도 하지.”
대충 생각해도 ‘예지’라고 한다면 굉장한 능력 같은데 아직 C급이라는 건, 분명 능력을 사용하는데 성가신 제한이 있기 때문이리라. 아쉽네.
“대충 의욕이 없을 때는 능력을 쓸 수 없다고 할까요....”
“.......”
조금 얄미운 아이 같다.
스페이드도 아리아, 아니, 신예린에 대해서 잘은 모른다. 하지만 무슨 일에든 의욕이 없고 귀찮아하는 성격이라고는 생각하고 있었다.
게슴츠레한 눈, 틀어 올린 머리, 언뜻 보면 중성적인 얼굴. 놀랄만큼 눈에 띄는 고운 얼굴인데도, 그녀는 스페이드가 볼 때마다 늘 나른해 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다.
지금도 마찬가지. 빌런의 아지트에서 도망가려는 이런 상황에도 그녀의 걸음걸이에는 조금의 조급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외려 하품을 쩍쩍 하며 지루한 눈으로 걸어갈 뿐이다.
“조, 조금만 더 빨리 가는 게 낫지 않을까...?”
“아...... 이게 최대한 빨리 가는 건데요. 이 이상 빨리 걸으면 탈진해서 쓰러질 걸요... 운동부족이라.”
“심하잖아!”
“사실 반은 농담이에요.”
“......나머지 반은?”
“귀찮아서.......”
“우리 조금만 더 의욕을 내지 않을래?!”
스페이드는 속이 터지는 마음으로 아리아의 팔을 잡아끌었다. 아무튼 13호나 참모가 오기 전에 이 아지트에서 도망쳐야 한다.
“언니, 이렇게 급하게 갈 필요――”
아리아는 갑자기 입을 닫았다. “응? 뭐라고 말하려 했어?”라며 스페이드가 물었지만 그녀는 묵묵히 입을 다문 채 아무 말도 안 했다. 이상하다며 고개를 갸웃거리자니, 그제서야 아리아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말하기 귀찮아져서....”
신이시여. 어째서 이런 녀석에게 그 아까운 능력을 주셨나이까.
“정말이지, 너란 아이는....”
“하아, 귀찮아... 도망치기 전에 들릴 곳이 있어요.”
“응? 들릴 곳?”
“예. 여기서 위층에――”
위이잉- 쿠웅!
아리아가 뭔가 말하려던 순간, 하는 기계음과 함께 무언가가 복도 너머에 나타났다.
나타난 것은 3기의 로봇이다. 인간과 같은 기계병사가 2기, 척 봐도 흉악한 무기를 달고 있는 커다란 게 1기.
천장에서 언젠가 들어본 것과 비슷한 기계목소리가 들려왔다.
[의사인격 파수 프로그램 ‘파수군 3’입니다. 미등록 된 ‘침임자’ 및 탈주를 시도하는 ‘탈주자’ 이상 2명, 프로그램에 입력된 절차대로 신속한 포획 활동에 들어가겠습니다.]
“......센서 같은 건 무력화 했다고 않았어?”
“예에... 하아. 히어로협회의 한심한 과학팀의 한계라고 할까요... 어떻게 해도 이런 전개는 피할 수 없었다고 할까요... 피할 수 있는 미래는 예지하지 못했습니다... 하아.......”
나른한 한숨을 포옥 내쉬며 중얼거리는 아리아. 스페이드는 이제 싫다며 지끈거리기 시작하는 머리를 싸매쥐었다.
이런 상황에도 두 사람을 포획하기 위한 로봇은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다.
[투항하신다면 거친 일은 하지 않습니다. 저항하신다면 무력화하는 과정에서 다칠 수도 있음을 경고합니다.]
무미건조한 기계의 목소리. 투항하면 어떻게 되는 걸까. 기계한테 구속되어서 13호나 참모가 올 때까지 붙잡혀 있는 걸까. 그렇게 되면 더 심한 대우를 받게 되겠지. 저번 탈주건도 있고. 거기다 여기에는 자신을 구하러 온 아리아도 있다.
과연 강할까? 저 로봇들.
스페이드는 주먹을 가볍게 쥐었다 폈다.
그리고,
[투항하신다면 양손을 기계병사에게 내밀어주시면――]
A.I. 파수프로그램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가까이 다가가던 기계 병사 하나가 불꽃을 흩뿌리며 날아갔다. 이어서 또 다른 기계 병사도 날아간다.
눈 깜짝할 사이에, 세 기 있었던 로봇 중에 기능할 수 있는 건 한 기밖에 남지 않았다.
거대한 로봇의 눈 부근에, 경고하는 듯한 붉은빛이 들어왔다.
[――적성반응을 확인, 즉시 무력화 작업에 들어갑니다.]
그래도 조금도 무섭지 않았다. 우하하, 능력이다, 능력. 오랜만에 쓰는 능력이야! 마구 날려버려야지! 죄다 깨부숴버릴 거야! 울분을 풀어주마!
“해보시든가, 고철덩어리! 예린이는 조금만 뒤로 물러서! 금방 끝낼 테니까!”
철포와 철선건, 그랩용 집게를 움직이는 거대한 기계의 아래서, 스페이드가 흉악하게 웃었다.
스페이드는 주먹에 마력을 잔뜩 끌어모으며, 거대한 로봇을 향해 단숨에 내질렀다.
몇 백 kg은 될 것 같던 커다란 로봇은, 마력으로 신체를 강화한 스페이드에게 어이가 없을 정도로 맥없이 해체되었다.
마력을 잔뜩 담은 주먹에 폭탄을 지근거리에서 얻어맞은 것과 같은 충격을 받았던 로봇은, 그럼에도 몸 여기저기에 달린 도구와 무기들로 스페이드를 노렸다. 그러자 스페이드는 그러한 도구들을 공들여 하나하나, 거침없이 콰직콰직 뜯어버렸다. 결국 완전히 해체되고 나서야, 기계는 더는 기능할 수 없다는 듯이 작동을 멈췄다.
“그래서, 그냥 도망치는 게 아니라고?”
“예에. 위층에 올라가야 해요.”
“왜?”
두 사람을 습격한 로봇을 되려 무력화시킨 두 사람은, 그대로 거침없이 아지트를 휘저으며 위층에 올라왔다. 도로시의 실험실과 어비스의 보스인 바이올렛이 있는 사무실이 있는 층이다.
그리고 도로시와 바이올렛, 어비스의 두 사람은 스페이드가 낸 소음에 심상치 않은 상황이라는 것을 깨닫고 둘 다 복도에 나와 있었다.
“어비스의 남은 두 사람을 인질로 잡기 위해서요. ......하아, 귀찮아.”
* * *
“그래서, 넌 뭐야?”
“뭐긴 뭐예요... 미아라니까요. 길을 잃은 것 뿐이에요.”
아까 전까지 나와 참모, 체크와 클럽이 있던 방에 새로운 인물이 추가되었다. 문 앞에서 몰래 상황을 살피고 있던 7번대의 코코였다.
마력을 제한하는 수갑을 채우고 후드를 벗기자, 반항기 가득한 표정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보다 이게 무슨 짓이냐고욧! 당장 풀지 않으면 신고할 겁니다! 경찰아저씨랑 히어로들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고는 있죠?!”
“너도 히어로잖아.”
“히, 히, 히, 히어로라니, 제가 무슨 히어로라는 건가요~? 저, 저는 그냥 길을 잃어버린 일반인인데요~?”
“아라 양, 저 사람 알고 계신가요?”
“네. 7번대의 서브멤버 B급 히어로 코코 씨예요.”
“썩을! 비겁하다! 적을 조종해서 정보를 캐내다니, 비열함의 극치잖아! 더러운 놈들! 지옥에나 떨어져라! 온몸에서 오징어 냄새가 풀풀 나서 평생 여자들한테 경멸당해라! 분명 발냄새도 심할 거야! 치질이나 걸려버려라! 베베베베베!”
“13호님, 보는 것만으로도 안쓰러운 이 아가씨를 어떻게 할까요?”
“내가 뭐! 내가 뭐! 내가 뭐~~~! 누가 안쓰럽다는 거냐앗! 너 같은 건 ‘삐―’를 ‘삐―’해서 ‘삐―’해버린다 이 ‘삐―’ 같은 새캬!”
급기야 자체검열을 해야 할 정도의 상스러운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여자애가 쓸 법한 단어가 아닌데....
“......반항적인 여성도 취향이긴 합니다만... 이 정도로 안쓰러운 건 좀.......”
참모가 근심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얼마나 안쓰러우면 이 참모가 이런 표정을 지을까. 하여간 대단한 아가씨네.
다리를 바동거리며 반항하는 그녀를 내버려두고 클럽에게서 대강의 정보를 빼냈다. 【첩보부】 소속의 코코. 능력은 【환각】이며 기본적인 스펙은 잠입 등 은밀 임무에 특화되어 있는 히어로였다.
“본인이 전투를 좋아하지 않아서 그렇지, 은밀성만 따지면 A급 히어로 정도인 사람이에요.”
“헤헹~ 내가 좀 잘나긴 했지! 알았으면 알아서 나를 받들어 뫼시라고? 이거 당장 풀고 내 발가락에 키스하면 지금 이것도 봐줄게!”
가슴을 피고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코코.
아무래도 이 여자, 자기가 잡혔다는 자각이 없는 것 같다. 빡대가리인가.
이런 여자가 A급 취급 받는다는 현실에 한숨이 나온다. 사회에 인재가 부족한가 봐. 빌런 주제에 사회걱정을 하게 만들다니 하여간 대단한 여자다, 코코.
그녀가 있단 걸 알아챈 건 사실 요행이었다. 마침 체크의 질 좋은 마력으로 오감이 강화되지 않았다면, 코코가 방심하고 능력을 써가며 은밀하게 숨어있었다면 알아챌 일은 없었을 것이다.
뭐, 그래도 붙잡았으니 다행이지.
나는 손수건에 세뇌약을 적셔, 코코의 입가에 가져갔다.
“므읍?!”
코코는 다리를 바동거리며 저항하려 했지만, 남자의 완력은 이길 수 없었다. 몇 번인가 신음소리를 내던 그녀의 몸이 축 늘어지는 걸 확인하고, 나는 손수건을 떼어냈다.
자, 그럼 이제 어떡한다.
조금 더 뭔가 약점 같을 걸 알면 세뇌하기 쉬울 텐데. 애초에 쉬워보이는 여자긴 하지만.
일단 시험 삼아 한 발 뽑는 정도로 해둘까.
“야아아아아아아앗!”
퍼억!
갑작스레 허벅다리를 때리는 전력을 다한 일격에, 내 몸이 크게 휘청였다. 침대 위에서 클럽을 품에 안고 희롱하던 참모가 눈을 크게 떴다.
“바보 녀석들! 난 약 같은거 잘 안 듣거든! 은밀부대를 얕보지 마!”
내 자세가 잠깐 무너진 틈을 타, 코코는 번개 같은 속도로 내 옆을 스쳐 지나가며 탈출을 위해 문 쪽으로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