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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6화 〉#12 빌런은 씁쓸히 패배를 곱씹는다(4) (56/271)



〈 56화 〉#12 빌런은 씁쓸히 패배를 곱씹는다(4)

“뭐야....... 이거.”


참모의 능력으로 그림자를 통해 어비스의 아지트에 도착한 우리를 맞은 것은, 폭탄이라도 맞은 듯 처참한 흔적이 남은 아지트의 복도였다.


벽과 바닥 여기저기에 할퀴어진 자국, 무너진 자국, 찌그러진 자국 등이 무수하게 나있다.


발치에서는 도로시가 넋을 잃은 채 주저앉아 있었다. 참모가 도로시의 그림자를 도달점으로 지정했기 때문이겠지.


우리를 눈치챈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눈가에 다크서클이  얼굴은, 그 여느 때보다 피곤해 보였다.

“이제......  거야?”


“도로시, 무슨 일이 있었지? 어떻게 된 거야? 보스는?”


빠득,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도로시는 그대로 휘청휘청 몸을 일으키더니, 분노로 떨리는 손으로 내 멱살을 꽉 붙잡았다.

“잡혀갔어.”

“뭐.......”

“보스가 잡혀갔다고.”


으르렁거리듯 낮게 깔린 목소리로, 도로시는 얼굴을 들어 내 눈을 똑바로 노려봤다.


“왜 이렇게... 왜 이렇게 늦은 거야  멍청이들아아아아아아!!!!”


눈물과 분노와 회한이 서린 얼굴에, 나는 할 말을 찾지 못했다.

* * *

애플이 스파이였다는 것을 들키고, 나와 참모가 부재중인 사이 7번대의 서브 멤버 중 한 명인 ‘아리아’가 몰래 숨어들어 스페이드를 탈출시키고, 그대로 이어서 보스와 도로시는 납치하기 위해 올라왔다.


그러나 보스도 별자리에 선택받은 능력자. 능력자이자 히어로인 두 사람을 상대로 밀리지 않고 버텼다.


“......대장이...  여자가 나타났어.”

7번대의 대장, 천칭자리의 축복을 받은 능력자. S급 히어로 라헤.

그녀가 아지트에 출현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시점에 나는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고, 참모는 안색이 새파래졌다.


결국 그 시점에서 승산이 희박하므로 교섭을 하게 되었다. 보스가 순순히 잡혀 줄테니 도로시는 놔주는 것으로.


그렇게 보스는 끌려갔고, 도로시는 남아서 우리를 기다렸다.


“......가망이 없어... 내일이면 협회로 직접 데려갈 거래...... 그것도  대장이 직접... 어떡해... 어쩔 거야, 우리 보스! 어쩔 거냐고 이 바보들아아아~~~~~!!”

설명하는 내내, 도로시는 우리를 툭탁툭탁 때리며 서럽게 울었다. 눈 앞에서 보스가, 그것도 자신을 지키고 끌려가버렸으니 얼마나 서러웠을까. 홀로 횅하니 부서진 아지트에서 기다리는 동안 얼마나 불안했을까.

그런 데에 생각이 미치니, 정말 아무런 말도  수가 없었다.




풀썩.

아직 깊이 잠들어 있는 두 사람을 차에 태웠다. 이 아지트는 들켰으니, 히어로들에게 들키지 않았을 예비 아지트로 옮기기 위해서다.

정말이지 상황은  이상 없을 정도로 안 좋다. 보스는 빼앗겼고, 아지트의 위치는 들켜버렸다. 스페이드도 탈출했고, 스파이로 심어 놓은 애플도 붙잡혔다. ‘세뇌’라는 카드에 대해서도 전부 유출됐겠지. ......클럽을 이용한 통수 치기도 이제는 불가능하다.

아니, 애초에.

보스를 잃은 시점에서 이미 이 조직은 갈 길을 잃은 셈이다. 7번대를 함락하는 것도 보스의 명령 때문에 하던 것 뿐이니.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제.


“13호님, 괜찮으십니까. 안색이 안 좋습니다.”

“......글쎄.”


“이번 일은 전적으로  잘못입니다. 참모가 되어서 책략을 그르쳤습니다. 변수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참모의 잘못이 아니다. 아니, 하다못해 우리 둘의 잘못이다.


도로시로부터 전화가 걸려온  때마침 히어로 코코를 붙잡았을 때다. 쓸데없이 그녀에게 시간을 쏟아붓지 않았다면,  상황에 괜한 욕망을 불태우지 않았더면, 가능한 빨리 그녀를 붙잡고 아지트로 복귀했다면... 그렇다면 늦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네.

후회는 언제 해도 늦는다고 하지만, 안  수 없는 것도 후회다.


아냐,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하고 후회하는 것과 안 하고 후회하는 것 중에 하고 후회하는 편이 낫다는 말도 있고.


그래, 덕분에 이 코코라는 여자도 붙잡을 수 있었고, 시원하게 즐길 수도 있었으니까. 하고 후회하는 거다. 그리고 했으니까 후회한다. 뭐라는 거냐 썅. 상황이 상황인지라 대가리가 미쳐 돌아간다.

웃자, 웃어. 아하하하하하하하. 혀 깨물고 뒈지고 싶다 그냥.


“그런데 스페이드는 어떻게 도망친 거지? 암시 때문에 우리 허락 없이는 밖에 나갈 수 없었을 텐데. 해제했나? 애초에 어떻게 이렇게 빨리 아지트 위치가 판명된 거지...?”


아지트의 위치가 드러나지 않도록 애플이 자잘한 방해공작을 해두었을 텐데.


“히어로 아리아의 능력입니다. 그녀의 능력인 【예지】로 알아낸 거겠죠. 전지(全知)에 가깝다는 얘기를 듣는, 뭐든 알 수 있는 치트키 같은 능력입니다. 아라 양의 말로는 제약이 심해서 자유롭게 사용할 수는 없다고 합니다. 스페이드 양의 건에 대해서는... 보스에게 허락을 구한 거겠죠.”

“아니면 세뇌를 해제해버렸을 수도 있겠네. 네 말대로 뭐든 안다고 한다면.”

“그건 아닐 겁니다. 보스와 도로시 양에게, 스페이드는 조금도 손대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어비스의 일원에게 위해를 입히지 마라」, 라는 세뇌 암시가 아직 유효했다는 뜻이다.

제약이 심하다고 하더니, 원하는 대로 전부 아는 건 아니라는 뜻일까.

‘아아, 싫다. 어쨌든 싫어.’


겨우겨우 괴물 같은 여자를 하나 잡았다고 생각했고, 코코라는 예기치 못한 수확도 있어서 희희낙락하고 있었더니 요모양 요꼴이다. 이젠 아무 것도 하기 싫다. 의욕 제로다. 이대로 세계가 멸망해버리지 않으려나.

하. 하하.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포기해버릴까, 그냥.


“......주인님. 괜찮으신가요.”

“......클럽이냐. 너도 어서 뒤에 타. 빨리 도망치지 않으면 그 무서운 대장님이 올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이상한  보스만 데려갔다는 것이다. 대장급의 능력이 들은 대로라면 굳이 보스와의 교섭에 응할 필요도 없었을 테고, 아지트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13호와 참모가 돌아오는 대로 일망타진 할 수도 있었을 텐데.

알쏭달쏭하다. 진의를 알 수가 없다.

짐작가는 거라면, 보복일까.


나와 참모가 붙잡은 히어로들에게 했듯이, 괴롭히고 희롱하는  목적일지도 모른다. 우리야 세뇌하기 위해서라곤 해도, 어쩌면 그 대장님의 취향이 백합백합하다면 그렇고 그런걸 하기 위해 대장을 데려갔을 수도 있다.


‘크윽...... 이런 수치를 당할 바에야 죽음을 택하겠어!’

‘어머나. 그러면 너의 소중한 부하들을 네 눈앞에서 끝장내줄 수도 있어요.’

‘인질을 잡다니, 너희가 그러고도 히어로야?!’

‘오호호호, 당신이 빌런이고 저희가 히어로인 시점에서 각오했어야하는 게 아닌가요. 자, 어서 옷을 벗으세요!’


‘크, 으윽...! 이런 수치스러운 일이... 네 말대로 할테니, 부하들은 손대지 마....’

‘좋아요, 아주 좋아. 그저 조금만 맛만 볼 테니까 너무 무서워하지 마세요....’

그런 꼴리...안타까운 일이 벌어지고 있을지도. 그게 뭐야, 어딘가의 멍청한 빌런이랑 하는 짓이 똑같잖아. 히어로가 그 정도 수준이어도 되는 거냐. 후학을 위해 카메라를 지참해서 몰래 숨어들어야 겠군.

“13호님, 이사 준비가 끝났습니다.”

“어, 벌써? 도로시의 기재랑 도구들은? 다 버리고 가?”

“네가 신경  필요 없거든 쓰레기야. 동료랑 상사가 죽어갈 때 여자한테 헤롱헤롱 하고 있던 쓰레기야. 이 천재님이 필요한  알아서 챙길 테니까  입도 다물고 숨도 멈추고 찌그러져 있어 쓰레기야.”


도로시는 자초지종을 알고 나자 줄곧 이런 상태다. 마음이 아프다. 쿠크다스 같은 내 마음이 바사삭 부스러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나 이래봬도  녀석의 상사인데 이런 소릴 들어야 한다는 게 서럽기도 하다. 하지만 조금 전까지 우느라 퉁퉁 부은 데다 아직까지 촉촉하게 젖어있는 눈을 보자면 할 말은 아무 것도 없지만.

“복수할 거야.”

차에 올라타며, 도로시는 매서운 목소리로 말했다.


“무엇보다 스페이드, 그리고 아리아라는 계집. 절대로 용서 안 해. 반드시, 반드시 지독한 꼴을 보여주겠어....”

여자의 원한은 무섭다. 오뉴월에 서리가 내리다 못해 극악한 눈보라가 휘몰아칠 정도로 무서운 법이다. 나와 참모는 서로를 마주 보며 몸을 떨었다.

넓은 캠핑카 같은 차량에, 모두가 들어갔다. 붙잡은 히어로 둘, 클럽, 도로시, 그리고 참모. 운전을 맡은 참모는 운전석에 앉아있다.


좋아, 이대로 출발하면 된다.


“...야, 넌 왜 안 타?”

“도로시. 상사한테 반말하는 것까진 봐주는데, 야는 뭐냐, 야는.”

“쓰레기한테는 그것도 아까워. 부를 때마다 쓰레기라고 안 붙이는 것에 감사하도록 해, 이 재활용 불가 쓰레기야.”


“.......”

정말이지 상처받는다. 하지만 재활용 불가 쓰레기라는  인정한다. 아무리 내가 빌런이고 히어로라지만, 스페이드나 클럽이나... 여자들한테 그런 짓을 해댔으니 쓰레기라고 불려도  말이 없다.

그러니까 이런 일이 벌어져도, 역시 할 말이 없다. 적대하는 히어로들에게 소중한 사람을 빼앗기고, 질척질척한 후회 속을 구르고, 구제할  없는 쓰레기라고 매도 받아도 반론할 수 조차 없다.

나는 악인이다.


나는 빌런이다.

손해 보고, 빼앗기고, 비난 받는 것이 당연하다. 부조리하게 당하는  당연하다. 그렇지 않다면 자신을 절제하며 남을 배려하는 선한 녀석들에게 실례다.

세상의 9할 이상은 남을 배려할 줄 모르는 멍청이들이라고 생각은 하지만, 적어도 1할 이하의 선한 녀석들에게는 실례다.

“......야, 13호. 왜 그래? 진짜  타?”

  더 도로시를 바라보고,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톡톡 두드려준다. “이거 왜이래, 징그럽게.”라면서 정색하며 손을 쳐낸다. 상처입었다. 흑흑.


“가, 참모. 뒤를 맡긴다.”


“......진짜 가시려고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도로시가 이상하다는 듯이 나와 참모를 번갈아 보더니, 별안간 눈을 크게 떴다.


“간, 다니... 설마 너――혼자 가려고?!”


대답은 하지 않았다. 참모가 차에 시동을 거는 것과 동시에, 차의 문을 닫았다.


도로시가 뭔가 말하는 것 같았지만, 미안, 문이 닫혀서 안 들려.


다시 문을 열려는 도로시를, 클럽이 억누른다. 클럽에겐 미리 부탁해놨다. 도로시라면 붙잡으려고 달려들 것 같아서.

“잘 가~.”

떠나가는 차량을 향해 나는 가볍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차의 뒷유리 달라붙어, 당장에라도 울  같은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는 도로시가 보였다. 괜스레 미안해진다.


도로시에겐 미안한 일만 늘어나네. 저번에 클럽 때도 그랬고....

'슬슬 출발할까.'

나는 캠핑카가 아닌 다른 차의 키를 손안에서 빙글빙글 돌리며, 나는 건들건들 주차장을 가로질렀다. 목표로 했던 차를 찾고, 문을 열고 올라탔다.

후우, 내일 협회로 이송한다는 건, 오늘은 아직 7번대에 있다는 뜻이지? 하지만 그 대장이 마크하고 있단 거고? 보스를 구하려면  대장을 어떻게든 해야한다는 거네.

정말 엿같네. 하하하. 이제 그냥 웃자, 웃어.


“하, 하하, 아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푸헤헤헤헤헤헤헤헤! ......휴우.”

좋아. 한바탕 웃었더니 각오는 됐다.

그럼 이제 죽으러 가는 거다. 기다려주세요, 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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