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화 〉#14 패배한 빌런이지만 오늘도 역시 포기란 없다(3)
메르는 공중에 둥둥 뜬 채로 로비에 출현했다. 그녀의 능력인 중력조작을 이용한 거겠지. 굉장히 편해 보였다.
“하웅...... 졸려어....”
3번대의 대장, 메르. 밤색 단발머리의 여성이 공중에 뜬 채 여전히 잠이 덜 깬 듯 눈가를 문질렀다. 몸짓 하나하나, 목소리 하나하나가 요염하고 성숙한 분위기를 풍기는 여성이다.
문제가 있다면, 잠이 덜 깬 것 같은 그녀가 캐미솔 차림으로 떠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속옷과 뭐가 다른 걸까 싶은 캐미솔 바지도 반쯤 내려와 허벅지에 아슬아슬하게 걸려있는 정도고, 캐미솔 상의는 끈이 어깨 아래로 흘러내려 속옷이 보이고 있었다.
압도적으로 천 면적이 적은데다 얇은 두께의 캐미솔은 안이 비쳐 보인다. 실루엣만으로도 확연하게 보이는 모델 같은 성숙한 몸매에, 13호는 물론이고 지켜보던 다른 여성들까지도 무심코 꿀꺽, 침을 삼켰다.
한동안 이어진 침묵을 깬 것은 당황을 감추지 못한 라헤였다.
“메, 메, 메, 메르! 당신이란 사람은! 대장이나 되어서 무슨 꼴인가요?! 제대로 옷 입고 나오지 않겠어요?! 실도 그렇고 당신이란 사람들은 대장이라는 자각이 있는 건가요?! 제대로 규정에 맞는 복장으로――”
“흐응... 변함없이 라헤는 고지식하네에....”
“그치? 그치? 규정 신경 쓰는 사람 솔직히 얼마나 된다고 그래. 어차피 지부 안에선 대장들이 법인데.”
“정말이지 당신이란 사람들은...!”
골치가 아프다는 듯 머리를 싸매는 라헤와, 그런 그녀를 놀리는 듯한 대장 둘.
그 모습을 13호는 몰래 지켜보았다.
‘대충 대장들의 성격이 보이네.’
작은 정보 하나하나가 나중에 어떻게 쓰일지 모른다. 특히 세뇌 하기 위해서는 이런 성격 정보가 특히 중요하니까.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어딘가에 적어두고 싶지만 일단 마음 속에 메모메모 해두자.
“컥?!”
탱그랑-!
홀로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 속 노트에 메모를 적어넣고 있는데, 별안간 머리 위를 짓누르는 무게에 풀썩 쓰러져버렸다. 손 위에 들려있던 접시를 놓쳐, 바닥에 떨어졌다. 다행히 깨지지는 않았다.
“버릇 없는 강아지네. 뭘 그렇게 뚫어져라 보고 있니?”
‘......메르.’
3번대의 대장인 메르가 13호 위의 중력을 몇 배로 늘린 것이다.
오만한 눈으로 13호를 내려다보는 메르는, 둥실둥실 공중을 움직여 쓰러진 13호의 위에 통, 하니 올라탔다.
“이건 매너가 없는 걸까 예의가 없는 걸까~ 강아지 주제에 인간님을 그런 눈으로 쳐다봐도 되는 걸까~?”
“그럴... 거면, 옷을, 제대로 입던가...!”
“어머나, 누가 강아지에게 말을 해도 된다고 했지? 멍, 하고 짖어봐. 멍, 하고. 안 하면 이대로 중력을 2배로 늘린다?”
놀리듯 말하고는, 그녀는 기다리지 않고 마력을 더했다.
늘어난 중량감에 13호가 신음소리를 흘렸다. 이대로면 빈대떡이 될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얼마 안 있어 13호를 짓누르던 무게가 단숨에 사라졌다.
바이올렛의 “【사라져라】”는 한마디에.
“................어머나?”
“당장 그 천박한 엉덩이 치워, 이 창녀야.”
자리에서 일어난 바이올렛이, 한껏 적의를 담은 눈으로 메르를 노려보고 있었다.
둘 사이에 시선이 맞부딪쳐 파직, 파직- 하는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바이올렛의 시선을 오만하게 받아들이던 메르가 까딱, 손을 움직였다.
“【꺼져】.”
바이올렛을 노리고 내리누르려던 마력의 움직임이, 바이올렛의 명령에 안개처럼 흩어지며 사라졌다. 메르의 눈가가 움찔 떨렸다.
“휴전 협정이니 뭐니 해놓고 남의 물건을 개취급하다니, 거기다 말도 없이 다짜고짜 공격하려 들고. 히어로란 것들은 예의가 없네. 다 너처럼 창녀 같은 것들 뿐이야?”
“......방금 그게 네 능력인 언령인가 뭔가구나? 너처럼 품위가 없는 느낌인게 딱 어울리네.”
마치 배경에서 고오오오오- 하는 소리가 들릴 것처럼 두 사람이 대치한다.
둘 사이에 끼인 채 13호는 식은땀을 흘렸다. 어라어라어라.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걸.
음, 으음...! 이 분위기를 타파하려면 어떻게 할까, 생각하고 나니 입이 멋대로 움직였다.
“두, 둘 다 저 때문에 싸우지 말아요!”
붙잡힌 공주님 같은 대사다. 언젠가 꼭 하고 싶었다.
그리고 이어진 건 빙점 아래로 내려간 듯한 차가운 시선. 다행이다. 더이상 서로 노려보지는 않는 구나. 나는 당장에라도 차가운 시선에 얼어죽을 것 같지만 의미있는 희생이었다.
멍하니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여전히 대치하고 있는 둘 사이에 라헤가 끼어들었따
“둘 다 그만. 지금은 휴전을 맺은 상황입니다. 무엇보다 당신들 둘이 싸운다면 안 그래도 반파된 기지가 완전히 무너져버려요.”
“......그렇게 하려면 일단 저 창녀의 무거운 엉덩이부터 치우게 해.”
“들으셨나요? 메르.”
“에에~ 라헤가 그렇게 무섭게 노려보니 알겠어~.”
13호 위에 앉아있던 메르의 몸이 공중에 둥실 떠올랐다.
“그리고 바이올렛, 부디 당신은 포로라는 자각을 좀 더 가져주셔야겠습니다. 물론 협정의 내용에 따라 저희들이 당신에게 손 대는 일은 없겠지만, 만약의 경우 당신 쪽에서 손을 댄다면... 저희는 당신에게 반격할 정당한 권리가 생깁니다.”
“......당하는 걸 보고만 있으라고? 너희가 내 것인 내 부하한테 이런저런 짓을 하더라도?”
“모쪼록 조심해달라고 부탁드리는 것뿐입니다. 당신 손으로 부하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고 싶으신 거라면 말리지 않겠습니다만.”
바이올렛은 분한 눈으로 라헤의 얼굴을, 그리고 13호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이내 칫, 하고 혀를 찼다.
“아하하하, 바보 같은 얼굴이네. 젖비린내 나는 얼굴이 아주 잘 어울리는 걸.”
“저 창녀 같은 여자가...!”
메르의 놀림에 바이올렛이 어깨를 부들부들 떨자니,
“그리고 메르, 당신은 당장 내려와서 무릎 꿇고 안도록 해요.”
라헤는 공중에 뜬 메르의 팔을 붙잡고, 억지로 바닥으로 끌어내렸다.
“엥? 나 말이야?”
“음식을 소중히 여기지 않은 당신을, 혼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나요?”
“에, 저기, 나 동긴데? 대장인데?”
“음식을 소중히 여기지 않은 당신을, 혼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나요?”
“어......? 복붙? 저기, 라헤?”
“음식을 소중히 여기지 않은 당신을, 제가, 혼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나요?!”
“아, 아하하하.......”
“웃지 마세요. 전 지금 진지하게 화를 내고 있으니까. 조금 전 이 남자의 그 이해할 수 없는 농담도 포함해서.”
어머나, 무서워라.
서슬퍼런 얼굴로 화를 내는 라헤와, 무릎을 꿇은 상태에서도 요염한 색기를 흩뿌리며 쓰게 웃는 메르를 13호는 바닥에서 주섬주섬 일어나며 찬찬히 바라봤다.
* * *
그리고 4번대 대장인 실은 일련의 광경을 똑똑히 지켜보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이 그녀를 경박한 여성으로 알고 있을 테지만, 실제로 그녀는 사람을 화나게 만드는 장난은 잘 치지 않는다. 장난을 치더라도 한 번 더 생각하는 편이다.
가장 가벼워 보이는 그녀이지만, 이 세 명의 대장 중에선 늘 한발짝 떨어져서 방관자로 있는 것도 그녀다.
‘......정말이지 언제 철들려나.’
그런 그녀의 시야에 비치기로, 라헤도 메르도 아직 어린 것처럼 밖에 보이지 않는다. 라헤는 너무 고지식하고 사고에 유연성이 없고, 메르는 쓸데 없이 요염하고 성숙한 분위기를 풍기는 주제에 감정에 많이 휩쓸린다. 거기다 여왕님 기질도 있다.
지금 메르는 조금 불안정한 상태다. 부하가 【시궁쥐】의 쥐새끼들한테 잡혀갔던 데다, 정말 목숨을 불태워가며 탈출한 부하의 증언에 따르면 상당히 몹쓸 짓을 당한 모양이니까.
메르는 상당히 분노한 상태다. 히어로들은 숫자가 많지 않기 때문에, 각자 지부에 있는 인원들과 말 그대로 목숨을 나눌 수 있을 정도로 친밀하다.
그런 부하가 몹쓸 일을 당했으니, 메르의 빌런에 대한 분노는 이만저만이 아닐 터다. 성숙한 이미지를 연기하는 만큼 전혀 티를 안 내지만, 하루하루 발걸음이 위태로워 보이는 게 같은 대장인 실의 시선에서는 확연하게 보였다.
‘아무리 그래도 화풀이는 아니지.’
시궁쥐와 관련도 없는 다른 빌런에게, 그것도 앞으로의 작전을 생각하면 어떻게 쓰이게 될지 모르는 상대를... 정말이지, 사려의 얕음에 한숨이 나올지경이다.
그래도 다행히 저 13호란 빌런은 성격이 좋은 건지 비굴한 건지, 딱히 사과를 요구하지도 않고 에헤헤 웃으며 일어났다. 그리곤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식사를 마저 준비한다. 바닥에 떨어진 접시를 주워들고 걸레를 가져와서 닦고....
아무리 그래도 분한 표정 하나 짓지 않는 건 뭐랄까, 패기가 없어보인다고 할까. 비굴해보이는 인상이라 호감이 가지는――
‘......응?’
눈치 채지 못하게 13호를 훔쳐보던 실은, 이상함을 느끼며 눈썹을 모았다. 살짝 소름이 돋았다.
왜일까.
메르에 의해 더럽혀진 바닥을 아무 말 없이 비굴하게 닦고 있는 13호는, 어째선지 웃고 있었다.
마치 깊은 심연으로 끌어들이는 듯한, 어둡고 음습한 미소를.
* * *
아침 식사를 끝마치고 간단히 옷을 갈아입거나 하는 등 준비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얼마 후, 나와 보스, 그리고 나머지 히어로들은 전부 로비에 모여 ‘협상’ 내용을 정리하기로 했다.
협상 내용은 지금까지 들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빌런 조직 【시궁쥐】들을 소탕하기까지 ‘휴전’ 및 ‘협력관계’를 가진다는 내용이다.
“저기, 궁금한 게 있는데 어째서 우리들한테 협력을 요청하는 거야? 너희 대장들만 모여 있어도 못 당할 빌런 따윈 없다고 생각하는데.”
대강의 내용을 전해들은 후, 나는 소소한 의문을 내비쳤다. 그러자 라헤는 고개를 끄덕이며 성실히 답해주었다.
“대장급의 히어로들은 생각보다 제약이 많습니다. 적인 당신에게 알려줄 수는 없겠지만, 어떤 상황에서든 편하게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에요. 그리고 무엇보다 대장들은 반드시 따로따로 떨어져서 활동해야 해요.”
“왜? 같이 있는 편이 훨씬 낫잖아?”
“대장급들은 능력을 사용하는데 막대한 마력을 사용합니다. 문제는 가까운 위치에서 서로 능력을 사용하려하면, 어떠한 충돌이 일어날 수 있다고 하더군요. 일반 대원 정도로 힘을 제한하면 문제는 없지만, 그래서야 굳이 대장이 나서는 의미가 없죠.”
그렇기 때문에 대장급 인원들은 반드시 따로따로 출격해, 서로의 위치를 확인하며 능력을 써야된다고 한다.
귀찮네.
“그리고 무엇보다 그런 ‘예지’가 있었습니다. 당신은 【시궁쥐】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들은 얘기가 있습니까?”
“딱히 없어. 다른 조직 얘기는 잘 몰라.”
“――‘비각성자의 각성화’. 그게 최근 【시궁쥐】들이 연구하던 거야. 그것을 위해 히어로들을 납치했고, 마력을 착취하고 실험을 했다고 하네.”
메르가 도중에 끼어들었다. 그녀의 음색에 명백한 노기가 포함되어 있었다.
“예지에 따르면 이미 개발도 실험도 끝냈고, 지금은 단원들에게 직접 실시하는 중이라고 하네. 사회에 해악이 될 짓거리들을 하고 싶어 난리가 난 놈들이 힘을 얻게 되는 거야. 그 뒤는 딱히 생각하지 않아도 되겠지?”
그거...... 진짜 큰 일이겠는데?
각성자의 스펙이야 이 놈이고 저 놈이고 차이가 크지만, 만약 스페이드 같은 녀석이 100명쯤 나타난나서 난동을 부린다고 하면... 생각만해도 끔찍하다.
거기다 어떨지 모르지만 대장급의 각성자가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도시 하나를 통째로 말아먹는 것도 일도 아닐 것이다.
이 타이밍에서 라헤가 말을 받았다.
“이 예지에 따르면, 이 시궁쥐의 단원 중 한 명이 상당히 귀찮은 능력에 각성해 버리게 됩니다.”
“귀찮다면?”
라헤는 한숨과 함께 말을 이었다.
“‘천칭자리’... 저와 같은 별자리에 선택을 받는 각성자가 생겨요. 능력은 ‘상대가 강하고 많을수록 더욱 강해진다’는... 정말이지 여러모로 곤란한 능력입니다.”
어, 뭐야 그거.
그냥 사기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