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화 〉#17 말괄량이 히어로 스페이드는 괴롭힘 당한다(2)
13호의 말에, 스페이드는 깜짝 놀라 눈을 깜박깜박 감았다 떴다.
“빌런이라고?!”
“응. 빌런.”
“...너잖아, 빌런.”
“아니, 나 말고. 나 아니라니까.”
농담이길 바랬는데, 능청스런 표정을 짓는 13호를 보자면 농담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다.
스페이드는 진의를 파악하고자 13호를 뚫어져라 노려봤지만,
“유진이네? 옆에는 누구?”
갑작스레 끼어든 목소리에 황급히 고개를 돌릴 수 밖에 없었다.
이쪽을 향해 손을 휘휘 저으며 다가온 건 동기인 친구들.
하필 이런 때에!
이런 녀석이 있을 때에!
“뭐야, 어제도 그렇고 몸이 안 좋은 것 같았는데, 좀 쉬지. 대출해주겠다니까.”
“끄응... 저번에 빠졌던 것도 있고, 진도를 못 따라가겠어서....”
“에헤이, 시험이야 족보 적당히 받아서 공부하면 되는데.”
“정~말. 귀찮은 애야아~.”
“......성실하다고 해줘.”
스페이드가 쓸데없이 성실하고 고지식한 성격이라는 걸 아는 친구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뿐이다.
그건 그렇고,
“그래서, 진짜로 누구야? ......어디선가 본 것도 같고?”
“오, 조금 잘생긴 것 같은데. 우푸푸, 혹시 사귄다거나?”
“아, 그게.......”
스페이드는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꼈다.
그도 그럴게 13호는 빌런이다. 지금은 뜸하지만 예전에는 지명수배까지 될 정도라, 자세히 보면 알아차리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대낮의 대학교에 위험한 빌런이 나타났다고 알면, 그것도 히어로인 자신과 함께 있다는 걸 알면 일이 커질지도 모른다!
어떻게 변명해야하나 당황하는데, 스페이드는 13호의 낌새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다.
13호는 턱에 손을 댄 채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스페이드, 어떻게 소개하면 좋지? 이럴 때면 무난하게 남친이라고 할까? 아니면 솔직하게 주인님 같은 것도 괜찮고, 객관적인 관점에서 앙숙인 적이라던가――”
“......유진아, 이 사람 뭐야?”
“위험한 사람...?”
이 새끼, 일부러 이러는 거다.
스페이드의 눈이 빙점 아래로 내려가듯 차가워졌다. 힘 조절을 하지 않고 13호를 뻥, 차버렸다. 마력으로 강화된 발에 13호가 저 멀리 데굴데굴 굴러갔다.
“그냥, 모르는 사람이야.”
“......어, 어, 어?”
“죽는 거 아니야, 저거...? 목이 꺾였는데.”
“트, 특이한 오빠랑 아는 사이네. 일단 바쁜 거 같으니까, 머, 먼저 가볼게~.”
친구들은 황급히 인사하고는 다급하게 떠나갔다. 아무래도 이상한 사람과는 엮이기 싫다는 분위기가 양파냄새처럼 팍팍 풍긴다. 스페이드는 울 것 같았다. 내 학교 생활 어떡해? 내 이미지 어떡해?
“아야야야... 인정사정 없잖아. 잘못 맞으면 어디 하나 부러진다고... 응?”
“13호.”
흙먼지가 묻은 옷을 털어내며 일어서려하는 13호의 앞에, 스페이드가 떡하니 섰다.
“무슨 짓이야 이 미친 놈아아아아아아~~~~~~~~~! 너 때문에, 너 때문에... 죽어버려어어어어~~~~~~~!”
그리고는 멱살을 붙잡고 영혼이 빠져나올 기세로 탈탈탈탈 흔들었다.
어라... 원래라면 암시 때문에 해를 입히는 행동은 못 할텐데.
이 순간은 분노가 암시를 뛰어넘은 것 같았다. 세뇌 심도가 약하다는 말이네, 메모메모.
“뭐, 뭐야... 그렇게 나에 대해 밝히는 게 싫어?”
“당연하지! 너 같은 거랑 아는 사이라는 것 자체가 싫어! 아는 체하지 마! 부탁이니까 지구의 자원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 24시간만 숨 좀 멈춰줘...!”
하하하, 이 여자는 사람은 숨을 쉬지 않으면 죽는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네.
그나저나 세뇌 심도를 높이려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도로시의 말대로면 일단은 세뇌가 얼마나 깊게 되었는지 확인이 필요하고, 다음으론 작은 것부터 시작해서 자발적으로 명령을 수행하게 함으로써 세뇌 심도를 높일 수 있다던데....
13호는 잠시 고민하다, 말을 이었다.
“그럼 이렇게 하자. 내 부탁을 들어주지 않으면, 내가 네 남자친구라고 네 친구들한테 퍼뜨리겠어.”
“안 돼... 그러지 마......! 그러지 말아주세요.......”
“......그렇게나 싫은 거냐. 이렇게 손 쉽게 패배 선언을 받아내다니 씁쓸해진다고.”
이어진 13호의 요구에, 스페이드는 이 이상 다시는 없을 정도의 살의를 느꼈다.
* * *
‘으으으으으으으~~~~~~!’
스페이드는 쭈뼛쭈뼛 강의실로 향하며, 붉어진 얼굴로 부들부들 떨었다. 단순히 절정을 금지 당한 몸이 달아올라서만이 아니다.
수요일인 만큼 사람도 많아서, 계단을 오를 때면 평소보다 몇 배는 신중해졌다.
그도 그럴게, 지금 속에 아무 것도 안 입었으니까.
――‘팬티를 벗어줘. 그리고 오늘 하루 그대로 수업을 듣는 거야. 알겠지?’
13호 그 자식, 진짜 죽이겠어. 죽여버릴 거야. 갈가리 찢어버릴 거야. 입에다 폭탄을 쑤셔 박고 손톱 사이에 바늘을 찔러넣을 거야!
원래라면 정강이까지 오는 청바지를 입고 있었지만, 13호가 준비해 둔 치마를 입게 했다. 준비성이 철저하다. 미친 새끼. 변태 새끼. 죽어죽어죽어죽어.
“어, 왔네. 그 사람은?”
“......모르는 사람이라니까.”
“근데 아까까지 바지 아니었어? 그 치마 좀 짧은 것 같은데.”
100명을 수용하는 커다란 강의실에 들어가니, 먼저 갔던 동기들이 맞아주었다.
김아유, 진예은, 안석하. 동기이자 학교 안에서는 항상 붙어다니는 친구들이다. 빌런들과의 싸움으로 황폐해질 것 같은 마음을 치유해주는 소중한 아이들이기도 하다마는.
지금은, 좀...!
“응? 몸 안 좋으면 진짜 돌아가지.”
영 상태가 좋지 않아보이는 스페이드의 모습에 친구들이 걱정했지만,
“괜찮아, 진짜로.”
스페이드는 힘겹게 웃으며 거절했다.
솔직히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다. 하지만 언제 빌런이 여기 나타날지 모르니까, 돌아갈 수도 없다.
13호 이 자식, 이런 식으로 덫을 쳐?!
“히익.......”
조심조심 의자에 앉자, 나무의 차가운 감촉이 스커트의 얇은 천을 뚫고 그대로 닿아서, 섬뜩했다.
울고 싶다.
스커트는 전투복을 입을 때가 아니면 잘 안 입긴 하지만, 어차피 안이 보이지 않게 항상 주의한다. 당연한 거지. 여자의 당연한 소양이다.
그치만 안에 아무것도 안 입었다는 게 이렇게나 압박이 될 줄이야.
누가 보는 것도 아닌데 식은땀이 나고 전라로 돌아다니는 기분이 든다. 결론으로 13호는 꼭 죽인다. 반드시 죽인다. 백 번 천 번 죽일 거야...!
부우웅- 하고 손에 들고 있던 스마트폰이 울렸다. 아톡이다.
확인해보니, 자신이 입고 있던 다홍색 팬티에, 13호가 코를 처박은 채 킁킁 대는 사진이었다.
죽여버릴 거야, 씨발 새끼.
* * *
‘응...... 일단 절대 안 들을 것 같은 명령을 시켜보긴 했는데.’
사람 한 명 없는 적당히 한산한 뜰에서, 나는 벤치에 앉은 채 스페이드의 팬티를 손가락에 걸어 빙글빙글 돌리고 있었다.
설마 누군가 보진 않겠지. 내 팬티 아니니까 상관은 없는데. 아니, 체포당하려나.
“스페이드 언니를 괴롭히는 건가요?”
깜짝 놀랐다. 아무도 없었을 텐데 어느샌가 내 뒤에 아리아가 서 있었다.
감정의 폭이 작아 보이는 무표정한 얼굴에 캐주얼한 여대생룩. 평소에는 대충 입는 실내복이나 전투복 대신 입던 무녀복만 보다가, 이런 차림을 보니 신박했다.
“어때요, 예쁘죠? 예쁘죠? 예쁘죠? 예쁘죠?”
아리아는 옷을 과시하듯 양 팔을 살짝 펼쳐보였다.
“응. 귀엽네.”
“알고 있어요.”
무표정한 얼굴이지만 뺨이 살짝 붉어졌다. 응, 귀엽네.
“제대로 칭찬 안 했으면 13호 오빠를 찌르고 저도 죽었을 거예요.”
“그러지 마라?!”
입만 안 열면 귀여웠을 텐데.
“사랑하는 오빠에게서 칭찬을 들을 수 없다면 살아있을 의미가 없으니까요. 혼자 죽기도 싫으니 죽을 때는 반드시 오빠랑 죽을 테고요. 기쁘죠? 오빠는 죽더라도 이 귀여운 저랑 같이 가는 거니까. 혼자 두지 않아요.”
“그러니까 무겁다고, 네 사랑.”
그 날, 계약을 다시 새긴 뒤로 아리아는 줄곧 이런 느낌이다. 저쪽 미래의 나는 이 여자한테 무슨 짓을 했길래 요 모양으로 만든 걸까.
“...? 13호 오빠? 왜 그렇게 뚫어져라 보나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올빼미처럼 고개를 갸웃 기울이는 아리아.
성가신 부분도 있긴 하지만, 적어도 그녀는 완벽하게 세뇌된 상태라고 볼 수 있다. 몸도 마음도 완전히 복종한데다, 스스로의 인격도 남아있고... 뭐랄까, 안정감이 있다.
아리아의 말에 따르면 저쪽 미래의 나는 히어로들을 완벽하게 세뇌하기 위해 엄청나게 연구를 했다는 것 같으니까.
“갈 길이 너무 멀어서. 어떻게 하면 너만큼 세뇌할 수 있으려나. 이대로면 언제 세뇌가 풀릴지 몰라서 조마조마하게 속 졸이면서 살아야한다고.”
내 평화롭고 알콩달콩 끈적끈적한 생존기를 위해서 그런 리스크는 최대한 제거하고 싶다.
“걱정 마세요. 저는 좀 특이한 케이스니까요.”
“응?”
“그리고 지금은 도로시도 있고, 미래의 일을 알고 히어로측의 정보도 아는 제가 있어요. 오히려 저쪽 미래보다 더 완벽하게 세뇌시킬 수 있도록, 오빠를 확실하게 보좌해드릴테니까요.”
무표정하고 담담한 어조지만, 그 목소리에서는 감출 수 없는 열과 성의가 보였다.
그렇게 말해주니 든든하다.
“반드시 그 여자들을 오빠의 완벽한 육노예로 만들어드리겠어요!”
내용은 여자를 세뇌해 이런 짓 저런 짓 하겠다는 쓰레기 같은 짓거리지만.
아리아는 생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럼 다음 순서를 위한 첫걸음이에요. 얼마 안 있으면 예지한 시간이 되겠네요.”
“......다시 한번 묻는데, 아리아 넌 이대로 괜찮은 거야? 네 동료인데?”
“몇 번이나 말씀 드렸잖아요. 제 몸도 마음도 13호 오빠의 것. 오빠가 바라신다면 세상의 절반이라도 오빠에게 바치겠어요.”
“그래, 고맙다, 아리아.”
“별 말씀을.”
아리아는 활짝 핀 백합꽃처럼 생긋 웃었다.
* * *
“석하는 오후에 수업 없지? 바로 갈 거야? 예은이랑 유진이는 점심 어떻게 먹어?”
“나 오늘 1학식 가고 싶어~ 신메뉴 나왔다던데~.”
“나도 점심은 먹고 돌아갈래... 1학식 콜.”
“그래서, 유진이는?”
“아, 나는...... 오늘은 식욕이 없어서. 너희끼리 가.”
동기들의 제안에, 천유진――히어로 스페이드는 힘겹게 거절했다. 다들 스페이드를 걱정했지만, 정말 별 거 아니니까 가라고 스페이드가 재차 말하자 하는 수 없이 그녀를 남겨두고 떠나갔다.
어찌어찌 오전 강의가 끝났다.
그나마 강의 중에는 앉아만 있으면 되니까 괜찮겠지, 하고 생각했는데,
‘바, 바람 같은 게 슝슝 들어와서....’
누군가 옆을 지나치기만 해도, 혹은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감싸고 있는 속옷이 없어 무방비한 음부에 서늘한 자극이 몰려왔다.
안 그래도 13호 때문에 잔뜩 민감해진 데다, 일주일이나 한껏 달아오른 몸이다. 앉아 있는 내내 필사적으로 헐떡임을 참아내며 부들부들 떨었다.
거기다 이 이상한 상황에 느껴버려서, 보지가 젖어버렸다고 느꼈을 때는, 심지어 허벅지를 타고 흐르는 게 아닐까 싶었을 때는 정말 눈앞이 깜깜해지는 것 같았다(간신히 화장실에 가서 허벅지 부근에 흐른 것은 닦아냈다. ‘자위금지’ 때문에 보지를 직접 닦지는 못했다...).
‘일단 그래도 뭐라도 먹을까... 오늘은 8교시까지 있고.’
별수 없다고 생각하고 일어나려는데, 문득 복도 쪽이 술렁이는 게 느껴졌다. 동시에 애앵~하는 소리와 함께 강의실의 스피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전달합니다. 현재 1학식 부근에서 빌런이 나타났습니다. 가까이 있는 학생 및 교원 분들께선 서둘러 대피해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전달합니다――]
빌런!
‘거기다 1학식이면...... 애들이 간 데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