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72화 〉#17 말괄량이 히어로 스페이드는 괴롭힘 당한다(2) (72/271)



〈 72화 〉#17 말괄량이 히어로 스페이드는 괴롭힘 당한다(2)

13호의 말에, 스페이드는 깜짝 놀라 눈을 깜박깜박 감았다 떴다.

“빌런이라고?!”

“응. 빌런.”


“...너잖아, 빌런.”


“아니,  말고. 나 아니라니까.”


농담이길 바랬는데, 능청스런 표정을 짓는 13호를 보자면 농담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다.

스페이드는 진의를 파악하고자 13호를 뚫어져라 노려봤지만,

“유진이네? 옆에는 누구?”

갑작스레 끼어든 목소리에 황급히 고개를 돌릴 수 밖에 없었다.


이쪽을 향해 손을 휘휘 저으며 다가온 건 동기인 친구들.


하필 이런 때에!


이런 녀석이 있을 때에!


“뭐야, 어제도 그렇고 몸이 안 좋은 것 같았는데,  쉬지. 대출해주겠다니까.”

“끄응... 저번에 빠졌던 것도 있고, 진도를 못 따라가겠어서....”

“에헤이, 시험이야 족보 적당히 받아서 공부하면 되는데.”


“정~말. 귀찮은 애야아~.”


“......성실하다고 해줘.”

스페이드가 쓸데없이 성실하고 고지식한 성격이라는 걸 아는 친구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뿐이다.

그건 그렇고,

“그래서, 진짜로 누구야? ......어디선가 본 것도 같고?”

“오, 조금 잘생긴 것 같은데. 우푸푸, 혹시 사귄다거나?”

“아, 그게.......”

스페이드는 식은땀이 흐르는  느꼈다.

그도 그럴게 13호는 빌런이다. 지금은 뜸하지만 예전에는 지명수배까지 될 정도라, 자세히 보면 알아차리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대낮의 대학교에 위험한 빌런이 나타났다고 알면, 그것도 히어로인 자신과 함께 있다는 걸 알면 일이 커질지도 모른다!

어떻게 변명해야하나 당황하는데, 스페이드는 13호의 낌새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다.

13호는 턱에 손을 댄 채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스페이드, 어떻게 소개하면 좋지? 이럴 때면 무난하게 남친이라고 할까? 아니면 솔직하게 주인님 같은 것도 괜찮고, 객관적인 관점에서 앙숙인 적이라던가――”


“......유진아, 이 사람 뭐야?”

“위험한 사람...?”

이 새끼, 일부러 이러는 거다.


스페이드의 눈이 빙점 아래로 내려가듯 차가워졌다. 힘 조절을 하지 않고 13호를 뻥, 차버렸다. 마력으로 강화된 발에 13호가  멀리 데굴데굴 굴러갔다.


“그냥, 모르는 사람이야.”

“......어, 어, 어?”

“죽는  아니야, 저거...? 목이 꺾였는데.”


“트, 특이한 오빠랑 아는 사이네. 일단 바쁜 거 같으니까, 머, 먼저 가볼게~.”


친구들은 황급히 인사하고는 다급하게 떠나갔다. 아무래도 이상한 사람과는 엮이기 싫다는 분위기가 양파냄새처럼 팍팍 풍긴다. 스페이드는 울 것 같았다. 내 학교 생활 어떡해? 내 이미지 어떡해?


“아야야야... 인정사정 없잖아. 잘못 맞으면 어디 하나 부러진다고... 응?”

“13호.”

흙먼지가 묻은 옷을 털어내며 일어서려하는 13호의 앞에, 스페이드가 떡하니 섰다.


“무슨 짓이야  미친 놈아아아아아아~~~~~~~~~! 너 때문에, 너 때문에... 죽어버려어어어어~~~~~~~!”


그리고는 멱살을 붙잡고 영혼이 빠져나올 기세로 탈탈탈탈 흔들었다.

어라... 원래라면 암시 때문에 해를 입히는 행동은 못 할텐데.


이 순간은 분노가 암시를 뛰어넘은 것 같았다. 세뇌 심도가 약하다는 말이네, 메모메모.

“뭐, 뭐야... 그렇게 나에 대해 밝히는 게 싫어?”


“당연하지!  같은 거랑 아는 사이라는 것 자체가 싫어! 아는 체하지 마! 부탁이니까 지구의 자원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 24시간만  좀 멈춰줘...!”


하하하, 이 여자는 사람은 숨을 쉬지 않으면 죽는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네.

그나저나 세뇌 심도를 높이려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도로시의 말대로면 일단은 세뇌가 얼마나 깊게 되었는지 확인이 필요하고, 다음으론 작은 것부터 시작해서 자발적으로 명령을 수행하게 함으로써 세뇌 심도를 높일  있다던데....

13호는 잠시 고민하다, 말을 이었다.

“그럼 이렇게 하자. 내 부탁을 들어주지 않으면, 내가 네 남자친구라고 네 친구들한테 퍼뜨리겠어.”

“안 돼... 그러지 마......! 그러지 말아주세요.......”

“......그렇게나 싫은 거냐. 이렇게 손 쉽게 패배 선언을 받아내다니 씁쓸해진다고.”

이어진 13호의 요구에, 스페이드는  이상 다시는 없을 정도의 살의를 느꼈다.

* * *



‘으으으으으으으~~~~~~!’

스페이드는 쭈뼛쭈뼛 강의실로 향하며, 붉어진 얼굴로 부들부들 떨었다. 단순히 절정을 금지 당한 몸이 달아올라서만이 아니다.


수요일인 만큼 사람도 많아서, 계단을 오를 때면 평소보다 몇 배는 신중해졌다.


그도 그럴게, 지금 속에 아무 것도  입었으니까.

――‘팬티를 벗어줘. 그리고 오늘 하루 그대로 수업을 듣는 거야. 알겠지?’

13호 그 자식, 진짜 죽이겠어. 죽여버릴 거야. 갈가리 찢어버릴 거야. 입에다 폭탄을 쑤셔 박고 손톱 사이에 바늘을 찔러넣을 거야!


원래라면 정강이까지 오는 청바지를 입고 있었지만, 13호가 준비해 둔 치마를 입게 했다. 준비성이 철저하다. 미친 새끼. 변태 새끼. 죽어죽어죽어죽어.

“어, 왔네. 그 사람은?”

“......모르는 사람이라니까.”

“근데 아까까지 바지 아니었어? 그 치마 좀 짧은  같은데.”

100명을 수용하는 커다란 강의실에 들어가니, 먼저 갔던 동기들이 맞아주었다.

김아유, 진예은, 안석하. 동기이자 학교 안에서는 항상 붙어다니는 친구들이다. 빌런들과의 싸움으로 황폐해질 것 같은 마음을 치유해주는 소중한 아이들이기도 하다마는.

지금은, 좀...!


“응?  안 좋으면 진짜 돌아가지.”

영 상태가 좋지 않아보이는 스페이드의 모습에 친구들이 걱정했지만,

“괜찮아, 진짜로.”

스페이드는 힘겹게 웃으며 거절했다.

솔직히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다. 하지만 언제 빌런이 여기 나타날지 모르니까, 돌아갈 수도 없다.

13호  자식, 이런 식으로 덫을 쳐?!

“히익.......”


조심조심 의자에 앉자, 나무의 차가운 감촉이 스커트의 얇은 천을 뚫고 그대로 닿아서, 섬뜩했다.

울고 싶다.

스커트는 전투복을 입을 때가 아니면 잘 안 입긴 하지만, 어차피 안이 보이지 않게 항상 주의한다. 당연한 거지. 여자의 당연한 소양이다.


그치만 안에 아무것도 안 입었다는 게 이렇게나 압박이  줄이야.


누가 보는 것도 아닌데 식은땀이 나고 전라로 돌아다니는 기분이 든다. 결론으로 13호는 꼭 죽인다. 반드시 죽인다. 백 번 천 번 죽일 거야...!

부우웅- 하고 손에 들고 있던 스마트폰이 울렸다. 아톡이다.

확인해보니, 자신이 입고 있던 다홍색 팬티에, 13호가 코를 처박은 채 킁킁 대는 사진이었다.

죽여버릴 거야, 씨발 새끼.



* *


‘응...... 일단 절대 안 들을 것 같은 명령을 시켜보긴 했는데.’


사람   없는 적당히 한산한 뜰에서, 나는 벤치에 앉은  스페이드의 팬티를 손가락에 걸어 빙글빙글 돌리고 있었다.

설마 누군가 보진 않겠지.  팬티 아니니까 상관은 없는데. 아니, 체포당하려나.

“스페이드 언니를 괴롭히는 건가요?”


깜짝 놀랐다. 아무도 없었을 텐데 어느샌가 내 뒤에 아리아가 서 있었다.

감정의 폭이 작아 보이는 무표정한 얼굴에 캐주얼한 여대생룩. 평소에는 대충 입는 실내복이나 전투복 대신 입던 무녀복만 보다가, 이런 차림을 보니 신박했다.


“어때요, 예쁘죠? 예쁘죠? 예쁘죠? 예쁘죠?”


아리아는 옷을 과시하듯 양 팔을 살짝 펼쳐보였다.

“응. 귀엽네.”

“알고 있어요.”


무표정한 얼굴이지만 뺨이 살짝 붉어졌다. 응, 귀엽네.

“제대로 칭찬 안 했으면 13호 오빠를 찌르고 저도 죽었을 거예요.”

“그러지 마라?!”


입만 안 열면 귀여웠을 텐데.

“사랑하는 오빠에게서 칭찬을 들을 수 없다면 살아있을 의미가 없으니까요. 혼자 죽기도 싫으니 죽을 때는 반드시 오빠랑 죽을 테고요. 기쁘죠? 오빠는 죽더라도  귀여운 저랑 같이 가는 거니까. 혼자 두지 않아요.”

“그러니까 무겁다고,  사랑.”


그 날, 계약을 다시 새긴 뒤로 아리아는 줄곧 이런 느낌이다. 저쪽 미래의 나는 이 여자한테 무슨 짓을 했길래 요 모양으로 만든 걸까.

“...? 13호 오빠?  그렇게 뚫어져라 보나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올빼미처럼 고개를 갸웃 기울이는 아리아.

성가신 부분도 있긴 하지만, 적어도 그녀는 완벽하게 세뇌된 상태라고 볼 수 있다. 몸도 마음도 완전히 복종한데다, 스스로의 인격도 남아있고... 뭐랄까, 안정감이 있다.

아리아의 말에 따르면 저쪽 미래의 나는 히어로들을 완벽하게 세뇌하기 위해 엄청나게 연구를 했다는  같으니까.

“갈 길이 너무 멀어서. 어떻게 하면 너만큼 세뇌할 수 있으려나. 이대로면 언제 세뇌가 풀릴지 몰라서 조마조마하게 속 졸이면서 살아야한다고.”

내 평화롭고 알콩달콩 끈적끈적한 생존기를 위해서 그런 리스크는 최대한 제거하고 싶다.

“걱정 마세요. 저는 좀 특이한 케이스니까요.”


“응?”

“그리고 지금은 도로시도 있고, 미래의 일을 알고 히어로측의 정보도 아는 제가 있어요. 오히려 저쪽 미래보다 더 완벽하게 세뇌시킬 수 있도록, 오빠를 확실하게 보좌해드릴테니까요.”

무표정하고 담담한 어조지만,  목소리에서는 감출 수 없는 열과 성의가 보였다.
그렇게 말해주니 든든하다.

“반드시 그 여자들을 오빠의 완벽한 육노예로 만들어드리겠어요!”


내용은 여자를 세뇌해 이런 짓 저런 짓 하겠다는 쓰레기 같은 짓거리지만.

아리아는 생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럼 다음 순서를 위한 첫걸음이에요. 얼마 안 있으면 예지한 시간이 되겠네요.”


“......다시 한번 묻는데, 아리아 넌 이대로 괜찮은 거야? 네 동료인데?”

“몇 번이나 말씀 드렸잖아요.  몸도 마음도 13호 오빠의 것. 오빠가 바라신다면 세상의 절반이라도 오빠에게 바치겠어요.”


“그래, 고맙다, 아리아.”

“별 말씀을.”

아리아는 활짝 핀 백합꽃처럼 생긋 웃었다.



* * *


“석하는 오후에 수업 없지? 바로  거야? 예은이랑 유진이는 점심 어떻게 먹어?”

“나 오늘 1학식 가고 싶어~ 신메뉴 나왔다던데~.”

“나도 점심은 먹고 돌아갈래... 1학식 콜.”

“그래서, 유진이는?”

“아, 나는...... 오늘은 식욕이 없어서. 너희끼리 가.”


동기들의 제안에, 천유진――히어로 스페이드는 힘겹게 거절했다. 다들 스페이드를 걱정했지만, 정말 별 거 아니니까 가라고 스페이드가 재차 말하자 하는  없이 그녀를 남겨두고 떠나갔다.


어찌어찌 오전 강의가 끝났다.


그나마 강의 중에는 앉아만 있으면 되니까 괜찮겠지, 하고 생각했는데,

‘바, 바람 같은 게 슝슝 들어와서....’


누군가 옆을 지나치기만 해도, 혹은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감싸고 있는 속옷이 없어 무방비한 음부에 서늘한 자극이 몰려왔다.

안 그래도 13호 때문에 잔뜩 민감해진 데다, 일주일이나 한껏 달아오른 몸이다. 앉아 있는 내내 필사적으로 헐떡임을 참아내며 부들부들 떨었다.


거기다 이 이상한 상황에 느껴버려서, 보지가 젖어버렸다고 느꼈을 때는, 심지어 허벅지를 타고 흐르는 게 아닐까 싶었을 때는 정말 눈앞이 깜깜해지는 것 같았다(간신히 화장실에 가서 허벅지 부근에 흐른 것은 닦아냈다. ‘자위금지’ 때문에 보지를 직접 닦지는 못했다...).

‘일단 그래도 뭐라도 먹을까... 오늘은 8교시까지 있고.’


별수 없다고 생각하고 일어나려는데, 문득 복도 쪽이 술렁이는 게 느껴졌다. 동시에 애앵~하는 소리와 함께 강의실의 스피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전달합니다. 현재 1학식 부근에서 빌런이 나타났습니다. 가까이 있는 학생 및 교원 분들께선 서둘러 대피해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전달합니다――]

빌런!

‘거기다 1학식이면...... 애들이 간 데잖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