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8화 〉#26 빌런은 아름답고도 최강인 마녀를 사냥하고자 한다(4)
“......스페이드. 손길이 어째 음흉하지 않나요.”
“13호님의 명령대로 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고 하니 할 말이 없었다.
굳이 여기까지 재야되냐 싶을 정도로, 스페이드는 라헤의 몸을 꼼꼼하게 재나갔다. 상의 아래로 손을 집어 넣어 허리 둘레를 잰다거나, 팔뚝, 팔길이, 허벅지 두께, 발사이즈까지....
“라헤 대장. 브래지어도 벗어주지 않으면 잴 수 없습니다.”
“...일단 저 카메라를 좀 치워주시지 않겠어요?”
라헤의 시야 끝에, 이쪽을 향하는 작은 카메라가 몇 개나 보였다.
[안 보고 있을 테니 안심해.]
능청스런 목소리가 이어폰 너머로 들려왔다. 스페이드가 고개를 저으며 거절하니, 어쩔 수 없었다.
라헤는 대장의 상징인 흰 전투복의 끈과 단추를 끄르고, 앞섶을 벌렸다. 그러자 새하얀 브라에 감싸인 투명하고 흰 피부가 드러났다. 프런트 후크를 끄르자, 잘 익은 과실 같은 유방이 튕기듯 튀어나왔다.
라헤는 팔로 유방을 감아 유두를 가렸지만, 스페이드가 억지로 떼어냈다.
“그럼 재겠습니다.”
여전히 멍한 눈으로, 스페이드가 줄자를 가져다 댔다. 카메라를 통해 13호가 보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과, 부하에게 이렇게 당하고 있다는 것이 묘한 긴장감을 불러일으켰다.
“오.......”
스페이드의 눈이 커졌다.
“대단해... 크기... 탄력... 허리도 잘록하고... 이게 뭐야... 불공평 해....”
“저기, 스페이드?”
스페이드의 손길에 음흉함과 원망이 섞인 것처럼 느껴지는 건 기분탓일까?
스페이드는 단순한 가슴 둘레를 재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유두의 길이며 유륜의 지름 같은 민망한 치수까지 재고는 그제야 측정을 마쳤다.
“그럼 지금 측정한 데이터를 13호님에게 보내겠습니다.”
“뭐?!”
주섬주섬 옷을 챙겨입느라 깜짝 놀란 라헤가 막으려 했지만, 이미 스페이드는 단말기의 조작을 마친 뒤였다.
[......97... 63... 90....이거 어떻게 계산하는 거더라...? ......뭐? G?! G라고?!]
“......!”
라헤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매만지며 허겁지겁 옷을 정돈했다.
“그럼, 이제 올라가셔도 됩니다.”
아무래도 스페이드의 안내는 여기까지인 것 같았다.
영 불안한 기분이 들었지만, 떨쳐내고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마치 죽어있는 것처럼 조용한 건물 안을 혼자 걸어가려니 기분이 영 이상했다. 13호가 보낸 사람은 스페이드 뿐이었던 걸까. 이왕이면 안내인으로 좀 더 붙여줘도 좋았을 텐데.
[그런데 신기하네. 히어로란 족속들은 목숨을 초개처럼 여기는 줄 알았는데. 부하들을 위해 적진 한복판에 무방비하게 찾아오는 대장이라니.]
그렇게 말하는 13호 자신이 그렇게 하도록 세뇌하지 않았는가.
라헤야 세뇌당한 척을 하기 위해 오긴 했지만... 아니, 애초에 그렇지 않더라도 왔을 테지만, 어쨌든 13호의 진의를 파악하기 어려워 라헤는 눈살을 찌푸렸다.
“오해예요. 목숨은 소중합니다. 부하들의 목숨이라면 더 그렇죠.”
[정의란 것과 저울질하면?]
“정의가 우선입니다.”
[......너랑은 잘 안 맞을 것 같아.]
“그부분은 오히려 마음이 잘 맞는데요. 빌런과 마음이 맞을 리가 없잖아요.”
라헤는 후후, 하는 웃음을 흘렸다.
“그래도 정의에 반하는 일이 아니라면, 저는 제 무엇을 희생하더라도 부하들을 우선할 겁니다. 그게 대장의 의무니까요. 설령 제 목숨을 바치더라도... 소중한 동생 같은 부하들을 지키고 죽는 편을 선택할 겁니다.”
어째서 자신이 이런 말을 하는 건지는 모르겠다.
어쩐지 13호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니 마음이 편해지고... 솔직해지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불사의한 기분이 들었지만... 아마 기분 탓이겠지.
[그래? 그렇군. 뭐든지 하는 거지?]
철컥, 하는 소리가 들려오고, 별안간 나아가던 라헤의 앞에 격벽이 내려졌다. 하나가 아니라, 그 뒤로도 몇 개나 되는 격벽이 통로 저편에 나타난 게 보였다.
“......이건?”
[파수 프로그램이 멋대로 작동해버렸어.]
“이대로 돌아가면 되나요?”
[잠깐잠깐잠깐잠깐. 부하들을 버리고 갈 생각이야? 스페이드도 내 명령이 없으면 평생 그대로일 텐데?]
“......어쩌라는 건가요 그럼. 부수고 가면 되나요?”
[비싼 거니까 그렇게하지 말아줘... 억지로 부수려 하면 터지도록 세팅되어 있고. 내재된 파수 프로그램이 적성 반응을 발견하지 않으면 아군으로 판단해서 바로 열어 줄 거야.]
“적성 반응... 무기를 버리라고요?”
[어떻게 판단할지는 항상 랜덤으로 결정 되어서... 그렇네. 산출 결과가 나왔다. 잘 들어. 격벽을 열려면 꼭 해줘야 하는 일이니까.]
뭘까. 라헤는 긴장하며 귀를 기울였다. 만약 무기를 버리라고 해도 마법이나 맨주먹으로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으니까 상관은 없겠지....
그렇게 생각하는데, 위잉- 하고 기계 팔에 들린 카메라가 가까이 다가왔다.
[사진을 찍으면 된대. 우리 AI는 고성능이라 사진으로 충분히 적의를 판별할 수 있다고하네.]
“......그런게 말이 될 리가.”
[이런게 하이테크란 거지. 우리 천재 과학자는 대단하다니까?]
도저히 믿기 어려운 이야기지만 뭐... 상관 없다.
사진 정도야 얼마든지 찍어도 되니까.
어쩐지 카메라가 로우 앵글인 게 신경쓰이지만....
[그런데 이게 특정 부위를 찍어서 확인하는 거라....]
“특정부위라니, 어디죠? 얼굴? 손?”
[여성의 그곳 있잖아. 사타구니 사이.]
라헤가 반사적으로 카메라를 걷어차려하자, 기계팔은 날렵하게 라헤의 발을 피해냈다.
[위험해! 비싼 자재라고! 고장나면 내가 도로시한테 혼나!]
“사람 바보 취급하나요...!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고기능 하이테크 AI가 그렇게 말하는 데 어떡하라고! 그리고 가장 비밀스런 장소에 본래 성격이 보인다는 의미겠지. 자, 어떡할래? 격벽은 AI가 통제하는 거라서 내 쪽에선 열 수도 없고, 혹시나 억지로 부수려 했다간 장치된 폭탄이 터져서 너도 네 부하들도 위험해질 거야.]
라헤는 아득 입술을 깨물었다. 정말이지 말도 안 된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는 것도 사실이니... 라헤는 한숨과 함께 머리를 짚었다.
“......좋아요. 어쩔 수 없으니.”
[좋아. 부하를 끔찍이 아끼는 상사로구만.]
“그런데 이 카메라, 혹시 당신쪽으로 영상이 보내지는 건 아니겠죠.”
[.......]
말이 없는 게 불만스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보지 말아 달라고 해도 들어줄 이유는 없을 테니까.
라헤는 포기하는 마음으로, 스커트 아래로 손을 뻗어 속옷을 끌어내렸다. 가터벨트 때문에 허벅지 중간까지 밖에 내려오지 않는 게 성가셨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전부 벗어버릴 수도 없고....
기이잉- 하는 소리와 함께, 카메라가 가까이 다가왔다.
[카메라가 잡기 어려운 모양이야. 스커트를 들춰줘.]
“읏.......”
라헤는 수치심으로 얼굴을 붉히며, 스커트의 앞을 잡고 천천히 들어올렸다.
가려져 있던 비밀스런 그곳이, 사람의 손을 거의 타지 않은 깨끗한 음순이 드러났다. 음순의 위로 가지런히 난 음모가 보인다.
[음모가 상당히 깨끗한데... 평소에도 관리하는 거야?]
“......주기적으로 트리밍이랑, 속옷 라인에 지장 없을 정도로 제모를 하는 편...이에요.”
[그렇구나... 덕분에 아주 보기 좋아.]
당신 보기 좋으라고 이러는 거 아니야.
그렇게 말할까 했지만, 의미 없다고 생각해서 관뒀다.
카메라는 음흉하게도 여러 각도에서 라헤의 보지를 관찰하며 그 광경을 렌즈에 담았다. 그러다 기이잉- 기이잉-하고 어딘지 불만스런 소리를 냈다.
[자세히 보여달라는데?]
“여기서 뭘 더 하라는 건가요...?”
[안쪽까지 확인할 필요가 있는 모양이야. 그러니까 네 손가락으로 그곳을 벌려서... 알겠지?]
정말이지... AI라고 한다면 구체적이고 자세한 근거를 제시할 필요가 있겠지만... 이해는 하지만 납득이 가느냐는 또 다른 문제다.
그래도 역시 거절할 수 없었으므로, 라헤는 오른손을 음부에 가져가 검지와 중지로 꽃잎을 벌렸다.
깨끗한 분홍빛의 소음순이며 탱글한 음핵, 요도구, 질의 입구까지, 카메라는 어느 것 하나 놓치지 않고 똑똑히 기록해나갔다.
‘......기분이... 이상한데요....’
단순히 보여지는 것 뿐인데, 어쩐지 보이지 않는 손에 거기를 만져지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카메라 너머에서 그 13호도 보고 있을 테지만... 거기에 딱히 혐오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보지의 촬영을 대강 마치고 나니, 카메라는 스스로 라헤에게서 멀어지고 격벽이 천천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축하해. 무해하다고 인증된 모양이야. 그곳이 예뻐서 잘 됐네.]
“도저히 의미를 알 수가 없네요....”
어쩐지 풀 마라톤을 뛴 것 같은 피곤함을 느끼며, 라헤는 계속해서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그 뒤로도 몇 개나 되는 격벽이 있었기 때문에, 그 때마다 악취미스런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고양이 귀를 쓴 채로 포즈를 취하고 사진을 찍는다든지, 남성의 성기 모양을 한 오브제에서 액이 나올 때까지 손으로 만지작거리거나, 격벽에 떠오른 야한 대사를 따라 읽으며 녹음을 한다거나... 정말이지,
“당신, 나를, 바보 취급 하고 있지?!”
[아이고, 이 몹쓸 AI가. AI가 나빴네 정말. 못된 AI 문제야. 내가 아니야.]
“진지하게 연기하는 척이라도 하던가!”
[흐음. 믿어주지 않는 건가... 섭섭하네.]
읏.......
진정해라. 본래 목적을 잊어선 안 된다.
자신은 세뇌당한 척을 하기 위해 여기 있는 것이다.
“뭐... 믿어드리겠어요. 예, 믿어요. 믿는다고요. 전부 AI 때문. 당신 탓은 아니란 거죠.”
[그건 그렇고, 다음 격벽에 도착했을 텐데. 이번에 해줘야 할 건――]
“......? 잠깐. 뭔가, 소리가 들리는데요?”
라헤는 발을 멈추고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예민한 라헤의 귀에, 격벽 저 너머에서 희미한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이 목소리...... 익숙하다.
[아아, 들렸나 보네. 격벽을 지나다 보면 자연스레 알게 되었겠지만, 네 또 다른 부하가 너를 기다리고 있거든.]
틀림 없이 클럽에 대한 얘기였다.
[네 스마트폰으로 영상을 보냈는데, 확인해 봐. 귀여운 부하가 네가 오는 걸 기다리고 있다고.]
라헤는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휴대폰을 꺼냈다. 클럽의 무사를 알려준다며 저쪽에서 만들었던 톡방에, 지금 막 동영상이 하나 업로드 되어 있었다.
재생시키고, 영상을 확인한 라헤는 으스러져라 이를 깨물었다.
“13호...... 당신,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어요.”
[아이고, 무서워라. 마지막 층에서 기다리고 있으니까 어서 오라고, 대장님.]
아마도 조금 전 촬영한 것으로 보여지는 영상에서는, 클럽이 보기 민망한 모습으로 찍혀있었다.
복도 한복판에 주저앉아 있는 클럽은, 전투복 사양의 부츠와 스커트 차림에, 트레이드 마크인 클로버 문양의 리본을 머리에 하고 있었지만, 상의는 온데간데 없이 반라 상태였다.
드러난 봉긋한 가슴 끝에는 로터가 붙여져 있었으며, 손으로는 스커트를 젖히고 소중한 그곳에 딜도를 스스로 넣었다 뺐다하며 자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얼굴은 수치심과 괴로움으로 물들어 있어, 한 눈에 보기에도 본인의 의지가 아닌 게 분명했다.
라헤 대장님, 이라며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도움을 청하고 있다.
스페이드와 마찬가지로, 세뇌술을 이용해 명령한 게 분명했다.
“큭.......”
당장에라도 구하러 달려가고 싶은데, 격벽에 가로막힌 현실이 답답했다.
[다음 요구가 나왔네. 거기 기계 팔이 내민 크림을 몸에 바르도록 해. 가슴이랑 거기는 가능한 신경 써서 발라줘.]
라헤는 시키는 대로 그녀에게 내밀어진 크림을 구석구석 바르기 시작했다. 성분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부하가 기다리는 지금 망설일 시간은 없었다.
애초에 세뇌된 척하는 지금 거절할 이유도 없다!
라헤는 온몸 구석구석, 팬티도 내리고 그 안쪽까지 꼼꼼하고 세심하게 발라 나갔다.
크림은 피부에 스며들 듯 금방 사라져갔다.
묘하게 몸이 따끔하고, 이상한 기분이 들었지만....
[아직 부족한 모양이야. 질 안에도 발라줄래?]
거절하고 싶은 욕구를 가까스로 억누르고, 질 안에까지 손가락을 찔러넣어 처덕처덕 크림을 발랐다.
“......다 발랐어요.”
격벽이 올라가고, 라헤는 서둘러 통로를 뛰어나갔다.
[다음은 이거야. 이 액체를 입에 머금고 3분 동안 가글하면 돼.]
마시는 거였다면 독이 아닐까 걱정했겠지만, 단순히 입을 헹구는 거라면 괜찮을 것이다. 라헤는 뜸 들이지 않고 내밀어진 컵을 받아들고 안에 든 액체를 입 안에 머금었다.
3분 후, 충분히 가글을 마친 액을 바닥에 뱉어내자, 삐-하는 소리와 함께 격벽이 올라갔다.
“클럽......!”
맞은편의 반투명한 격벽 너머에, 클럽의 모습이 보였다.
“라, 라헤 대장님...... 흐, 흐으으읏......! 아앙...!”
영상에서 본 것처럼, 클럽은 주저앉아 가랑이를 벌린 채 계속해서 딜도로 음부를 쑤시고 있었다.
명백하게 본인의 의지가 아닌 것으로 보이는데도, 손은 멈추지 않는다.
“저희 때문에 여기까지... 크윽... 응... 앙... 잠... 그만......!”
클럽은 견디지 못하고 찌르르르- 몸을 떨며 가버렸다. 이미 그녀의 아래 바닥은 애액이며 조수, 오줌 등으로 흥건하게 젖어있었다. 도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여기에서 이러고 있었는지....
[자, 서둘러 부하를 구해야지. 다음은... 그렇네. 지금 주는 약을 삼키면 돼.]
“......독약은 아니겠죠.”
[당연하지. 단순히 침입자가 적인지 아군인지 판단하기 위한 AI 프로그램이니까. 안심해도 좋아.]
지금 상황에 13호가 굳이 독을 쓸 이유는 없겠지.
혹여나 거짓말이라 해도 빌런의 독이라면 통하지 않는다.
라헤는 찰나간의 망설임을 떨쳐내고, 내밀어진 약을 단숨에 삼켰다.
삐이-하는 소리와 함께 격벽이 올라간다.
“클럽!”
라헤는 서둘러 달려가, 클럽의 손에서 딜도를 빼앗아 들었다.
“아... 대장님... 안 돼요...... 자위... 멈추면.......”
“클럽! 그만! 이제 그만해도 돼요!”
딜도를 빼앗긴 클럽은, 맨손으로나마 자위를 재개하려 했다.
[자위를 계속하도록 명령해 뒀거든. 지금 꽂고 있는 이어폰, 클럽의 귀에 대줄래?]
역시 세뇌 때문이었나.
라헤는 분노를 참으며 13호의 목소리가 나오는 이어폰을 클럽의 귀에 꽂아주었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클럽은 안심한 표정으로 자위를 멈추더니, 그대로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며 잠에 들었다.
클럽의 귀에 꽂아주었던 이어폰을 다시 자신의 귀에 꽂았다.
[뭐, 보여주기 위한 퍼포먼스였달까. 내 세뇌에 걸리면 이렇다는 거지... 두 사람을 원래 상태로 되돌리려면, 내 명령대로 하는 수 밖에 없다는 거야.]
“그렇군요... 굳이 제게 부하들을 보여준 이유는 그런 거였나요....”
라헤의 두 눈에 투지가 불타올랐다.
“당신은, 정말이지 저를 우습게 보고 있나보네요.”
[하지만 부하들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해줄 거지?]
“.......”
[아니, 분명 해줄 수 밖에 없을 거야. 확신하고 있어.]
그야 그렇게 세뇌했을 테니까.
13호의 목소리에서는 그 사실을 확신하는 오만함이 가득 차 있었다.
[올라오도록 해. 이 이상 벽은 없어. 다음 층에 올라와서 가장 끝에 있는 방이야. 기다리고 있을게.]
그 말을 끝으로 통화가 끊겼다.
지금 13호는 부하들을 인질로 잡았다는 생각에 방심하고 있을 게 분명하다. 거기다 자신을 세뇌했다고 생각하고 있을 테고.
확실히 라헤는 부하들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목숨조차 버릴 생각이었다. 각오는 되어 있다.
그러나 지금은, 정의를 위해 부하를 버릴 때다.
어차피 이대로 13호의 말에 따른다고 해도, 두 사람을 풀어줄 리가 없다. 자신이 순순히 투항한다 해도, 의미 없는 희생이 될 뿐이겠지.
만약 세뇌에 걸렸다면 자신의 판단력을 흐려서 그런 생각은 못하게 했겠지만... 즉, 이렇게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자신이 세뇌에 걸리지 않았다는 증거가 된다.
라헤는 허리춤에 달린 검을 한 번 더 확인하고, 상의를 벗어 클럽의 위에 덮어주었다.
브래지어 뿐인 거의 반라 상태가 되었지만, 소중한 부하를 위해서다. 이 정도야 보여도 상관 없다. 13호에겐 지옥 가는 길에 마지막 선물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라헤는 계단을 따라 올라갔다.
* * *
마지막 층의 복도를 따라 나아가자, 커다란 방이 나왔다. 문을 여니, 안 쪽에 13호가 거들먹거리며 앉아있는 게 보였다. 그 뒤에는, 언제나와 같은 한복 차림의 아리아가 다소곳이 서 있었다.
‘어째서 아리아가 여기에...? 분명 기지에 있었을 텐데요...?’
의문은 들었지만 깊이 생각할 시간은 없었다.
“기다리느라 목 빠지는 줄 알았어, 라헤.”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요.”
“다 고지식한 AI 탓이지. 도로시한테 손 봐 달라고 할게. ...그보다, 그 잠깐 사이에 상당히 개방적인 차림새가 됐는데? 클럽의 모습을 보고 달아오른 거야? 너 같은 여자라면 언제든 안아줄 수 있어. 환영해.”
“두 사람을 풀어주신다고 하면 제 발가락 정도는 핥게 해드릴 수 있는데요.”
“호오?”
13호가 큭큭거리며 웃었다.
“라헤, 아니지. 그게 아니잖아. 부하들을 위해서라면, 너는 뭐가 될 수 있다고? 자, 직접 말해볼래?”
“뭘요?”
“엉? 응... 뭐지...? 세뇌가 잘 안 됐나...?”
13호가 뭔가 중얼중얼거리기 시작한다. 슬금슬금 도망치려는 것처럼도 보여서, 라헤는 필사적으로 기억을 뒤져보았다.
그렇다, 그때 아리아는....
“저는... 부하들을 위해서라면, 육노예든... 고기인형이든 되어드릴 수... 있습니다.”
아리아가 했던 말을 기억하며 천천히 중얼거리자, 13호는 그제야 안심한 듯 한숨을 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세뇌는 완벽한 것 같네!”
이제 이 이상 감출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자, 라헤. 이리 와라. 네게 노예로서의 기쁨을 가르쳐주마. 모든 건 부하들을 위한 거니까, 안심하고 내 노예가 되도록 해. 부하들을 위해서일 뿐이야... 알겠지?”
“네, 알겠습니다....”
라헤는 13호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13호는 세뇌에 대한 신뢰로 완전히 무방비한 상태다.
이대로 가까이 다가가서,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가 된다면, 그 때가 네 마지막 순간이다.
라헤는 지옥의 염열처럼 활활 불타오르는 분노를 감춘 채, 겉으로는 감정 없는 인형처럼 13호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