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7화 〉#29 그리고 빌런은 분노했습니다(2)
“공부 중?”
“......과제.”
보스의 명령대로, 오늘 하루는 스페이드에게 시간을 쏟기로 했다. 그렇게 돼서 아침부터 스페이드에게 찾아갔더니, 책과 노트북을 꺼내놓고 뭔가를 끄적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 대학생이었지. 세뇌된 상태로도 웬만한 일이 없으면 대학은 꼬박꼬박 다니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뭐야? 과제 하는 중이니까 쓸데 없는 짓 하면 죽여버릴 거야. 세뇌 때문에 네 명령에 저항할 수는 없겠지만 온 마음을 다한 저주를 너한테 퍼부어버릴 테니까.”
“아, 그래.”
“이렇게 말해봤자 분명히 손대겠지만! 오늘은 또 어딜 만질 거야? 어딜 또 추행할 거냐고! 쓰레기! 죽어버려!”
스페이드는 체념한 듯 과제 노트를 향해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러나 이따금 내 반응을 살피듯 흘끔흘끔 나를 훔쳐본다.
으음... 스페이드는 반응이 재밌으니까, 이 기회에 즐겁게 성희롱을 즐기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그치만 일단 보스 명령도 있으니 그런 건 자제할까.
일단은 ‘죽기 전에 먹고 싶은 걸 먹게 하라’는 게 보스의 명령이니, 스페이드가 먹고 싶어하는 걸 알아야 한다.
하지만 스페이드가 이렇게나 나를 경계하면 제대로 대화도 못한다. 세뇌 암시로 친밀도를 확 올리는 것도 가능은 할 테고, 의식을 빼앗고 원하는 답만 하도록 만드는 것도 할 수는 있지만... 마지막 자비를 베풀어주는 건데, 그런 건 좀 피하고 싶다.
일단 경계심을 풀어주도록 할까. 스스로 말하고 싶은 생각이 들도록.
흠흠, 하고 목을 가다듬고, 나는 스페이드의 맞은 편에 앉았다.
“......?”
스페이드가 의심스런 눈초리로 흘겨봤다.
“아니, 신경쓰지 마. 그냥 지켜보는 것 뿐이니까.”
안심감을 주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웃으며 말했더니, 더더욱 경계하는 눈으로 쳐다봐졌다.
“그래서 스페이드, 요즘 공부는 잘 돼가?”
“...으, 응....”
“다행이네. 나 때문에 공부 일이 많이 뒤처지거나 하면 미안하니까.”
“.......”
“왜 그렇게 얼어있어. 괜찮아. 아무 일 없어. 해치지 않아요.”
“.......”
“학교에서 좋아하게 된 남자 같은 건 없니?”
“우리 학교, 여대인데....”
“아, 그렇구나. 그렇네. 그러고 보니 스페이드, 요즘 용돈이 부족하진 않고?”
“네가 내 아빠야?!”
괜한 경계심만 더 산 모양이다.
“진짜 무슨 일이야? 본론을 말해, 본론을. 또 뭘 숨기고 있는데.”
“수, 숨기다니 그런 거 없는데....”
“어제 일 때문이야?”
스페이드가 툭 던진 말에, 순간 심장이 뚫리는 줄 알았다.
“무, 뭐.......”
“어제 밤에, 너네 보스랑 한 얘기.”
“드, 들었어?”
“.......어쩌다보니, 잠이 안 와서.”
들었다는 것 같다.
“내가, 너희 보스의 동생을 죽였다고. ...그럴지도 몰라. 그 동생이란 사람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스페이드는 별 다른 감정을 보이지 않고, 그저 덤덤하게 펜을 놀렸다. 살짝 보니, 의미 없는 낙서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죽는다면, 그래도 상관없어.”
“상관 없는 거냐.”
“상관 없어.”
스페이드는 고개를 까닥 끄덕였다.
“애초에 히어로를 한다는 건, ‘각성자’로 산다는 건 그런 거잖아. 빌런을 숙청하는 권리가 주어진 대신, 약하면 죽어. 인권도 미래도 아무것도 없어서, 언제 죽든 상관없는... 그게 우리야. 그게 나야. 매일 언제 죽을지 생각하면서 사니까, 딱히 오늘 죽는다고 해도 별다른 감흥이 없어.”
“미래가 없긴. 그럼 공부는 왜 하는데. 대학은 왜 가는데.”
“‘내일 세계가 멸망한다고 해도 오늘 나는 사과를 심겠다’... 그 말 몰라? 그런 거야, 멍청이.”
스페이드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그러니까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동정하지 말고, 신경 쓰지 말고, 죽여. ...무섭지도, 거부하지도 않을테니까.”
스페이드는 표표하게 미소지었다. 어깨까지 오는 붉은 단발머리. 그리고 뺨에서 목에 걸쳐 난 커다란 스페이드 문양.
“네게 그 보스는 소중한 사람이잖아? 그러니까 하라는 대로 해. 히어로니까, 목숨 따위에 미련은 없어. ...아, 대장한테는 미안한가. 라헤 대장, 우릴 살린다고 지금 그렇게 고생하는 건데.”
나는 미소짓는 그녀의 얼굴을 말 없이 쳐다보다, 덜컹, 자리에서 일어났다.
“......먹고 싶은 거 있어?”
“마라탕.”
“또 특이한 걸....”
“뭐래? 요즘 여대생들은 누구나 좋아하는 걸.”
죽기 전 마지막 음식이 마라탕이라니, 그건 또... 참.
나는 덜컹, 의자를 밀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과제 끝나면 잠깐 데이트나 하자.”
“......음?”
“쓸데없는 짓은 안 할 거야. 진짜 그냥 놀러 가자고. 준비해 줘.”
“......그래? 의외로 신사적이네, 너. 그치만 평소대로 해도 괜찮은 데. 그렇게 생각하는 나도 이상한가?”
스페이드는 짐짓 아무렇지 않다는 듯, 킥킥거리며 웃었다.
해탈한 것 같은 표정이, 태도가, 그 얼굴이... 진심으로 부아가 치민다.
“잘 부탁할게, 13호.”
이제야 알았다. 그녀의 눈가가 살짝 부어올라 있었다.
어제 그 이야기를 듣고, 그녀도 밤새 뭔가 생각했던 걸까. 울거나 했던 걸까. 자기도 빌런들을 죽여왔으니, 본인의 죽음을 한탄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 걸까.
짜증이 난다.
태연해 보이려는 그녀의 모습이, 표표하게 받아들이는 그 모습에 열이 받는다.
“예쁘게 차려입어. 인생 최고로. 나 같은 거랑 나가는 거라 불만이겠지만.”
“불만이야 있지만, 어쩔 수 없네. 그치만 여긴 옷이 없어. 기지에 돌아가야 되는데?”
“나가면 옷부터 사자. 경비를 끌어다 쓰지 뭐.”
“그래도 되는 거야? 그러다 짤린다?”
“......참모 이름으로 달아놓으면, 어떻게 되지 않을까.”
“최저네 너!”
“그리고 그거 틀렸다. 이렇게 해야지.”
스페이드의 손에서 펜을 뺏어 들고, 대강 생각나는 대로 끄적여 주었다. 아마 맞을 것이다.
“어? ......어?”
“그럼 좀 이따 올게.”
나와 과제노트를 번갈아 쳐다보며 멍한 표정을 짓는 스페이드에게, 나는 손을 휘휘 저어주고는 떠나갔다.
* * *
낮의 한가로운 시간이 지나고, 밤이 되었다.
현재 13호가 있는 곳은 고문실이다. 옆에 있는 시트 위에, 스페이드는 ‘인형’ 상태로 앉아있다. 살짝 열린 두 눈에는 빛이 없고, 이따금 몸이 흔들흔들 흔들리는 것 말고는 별 다른 반응은 없다. 당연하지만 이제 곧 있을 일, ‘처형식’에 대한 공포도 보이지 않는다.
13호는 그녀의 뺨을 쓰다듬고, 가볍게 입을 맞춰주었다.
...온기가 느껴졌다. 살아있는 사람다운 온기다.
복잡한 생각을 하고 있자니, 별안간 문이 열리고 보스인 바이올렛이 들어왔다. ‘처형식’을 위해서인지, 밤인데도 편한 복장이 아닌 평소 일할 때와 같은 날카로운 정장 차림이었다. 타이트 스커트 아래로 뻗은 다리가 눈부셨다.
“13호, 준비는 끝났어?”
“예. 보시는 대로.”
“......흠. 일으켜 세워 봐.”
일어나라, 라는 말과 함께 스페이드의 팔을 붙잡고 일으켜 세우니, 스페이드는 휘청휘청 시트 앞에 일어나 섰다.
“심문은 가능한 거야?”
“예. 물어보는 대로 답할 겁니다.”
“그래? 이봐, 대답해 봐.”
보스는 스페이드에게 이것저것 질문하기 시작했다. 이름이나 나이, 취미나 간단한 산수 문제 같은 대답하기 쉬운 것부터, 어떤 체위를 좋아하냐는 등의 조금 민감한 질문까지 하나하나 물어보며, 스페이드의 반응을 확인했다.
“아무래도 진짜 문제 없는 것 같네.”
“그렇습니다, 보스.”
“그럼 마지막 질문이야, 스페이드. ...4년 전, 【폴리스 몰】 테러 사건을 알고 있어?”
스페이드는 까닥,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 미성년 히어로가 한 명, 능력의 유용성을 인정받아 그 사건에 투입되었다고 들었어. ...그게, 너야?”
“예... 그렇습니다.”
바이올렛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렇다면, 그 테러범도... 알고 있어?”
스페이드의 눈가가 살짝 떨린듯한 느낌이 들었다.
잠깐 뜸을 들이나 싶더니, 스페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폭파 능력자... 였습니다... 그리고 제가... 죽였습니다.”
짜-악!
바이올렛의 손이 올라가, 스페이드의 뺨을 거세게 때렸다.
어찌나 기세가 셌는지, 스페이드의 목이 푹 꺾이며, 그대로 시트 위에 쓰러졌다.
“보스?!”
“.......”
바이올렛은 쓰러진 스페이드를 거칠게 붙잡아 다시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는 찡그린 얼굴로 노려보더니,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13호.”
“예, 예!”
“내 동생은 빌런이었고, 히어로라면 죽이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해. ......하지만,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어. 내 안에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가 없어.”
그렇게 말하며, 바이올렛은 무거운 눈으로 스페이드를 내려보았다.
예쁘고 고운 얼굴... 지금은 자신에게 얻어맞은 뺨이 빨갛게 부어올랐지만....
바이올렛은 그런 스페이드의 얼굴을, 다시 한번 때렸다.
짜-악! 하는 날카로운 소리가 나고, 또 다시 스페이드의 목이 돌아갔다.
“비명 하나 안 지르는 구나.”
바이올렛은 저항조차 하지 못하는 스페이드를 마구 때리기 시작했다. 근처에 놓아둔 짧은 채찍까지 들어, 스페이드를 인정사정 없이 때린다.
채찍의 날카로운 아픔에, 인형 상태인 스페이드의 입에서 괴로운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13호는 주먹을 꽉 쥔 채, 그 모습을 지켜보다――
“보스, 그만하십시오!”
결국 견디지 못하고 팔을 내밀어, 채찍을 든 바이올렛의 팔을 붙잡았다.
“괜한 화풀이입니다. 보스는 이런 거 좋아하지 않잖아요!”
“...........................”
바이올렛이 무시무시한 눈으로 스페이드를, 그리고 13호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차가운 살기가 흘러, 시선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눈을 천천히 감았다 뜨며,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라앉혀간다.
“......나도, 나도 동생은 잘못했다고 생각해, 13호. 죽는 것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
바이올렛의 팔에서 차츰 힘이 빠졌지만, 13호는 그래도 놓지 않았다. 바이올렛도 뿌리치지 않았다.
“생각은, 그렇게 하지만...... 그렇다면, 이 분노는, 어떻게 하라는 거야... 응? 13호...? 왜 내 동생은 죽어야 했지? 왜 나는 이렇게 분노를 참을 수가 없는 거야? 왜 빌런도 히어로도 이렇게 초개처럼 목숨을 잃어야 하지? 왜 세상은 이 모양 이 꼴인 거야?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
바이올렛은 고개를 저으며 눈물 흘렸다. 그 모습을, 13호는 안타깝게 쳐다봤다.
“나는, 나는 어쩌면 좋으냔 말야....”
“보스.......”
훌쩍, 바이올렛은 눈물을 닦으며 다시금 날카롭게 스페이드를 내려봤다.
“......됐어, 13호. 더 이상 괴롭히진 않겠어. 이대로, 내 【언령】으로... 단숨에 처형할게.”
상대가 무방비하다면, 혹은 일반인이라면 바이올렛은 ‘죽어’라는 말 한마디로도 상대방을 죽일 수 있다.
그만큼 강력한 힘이다. 마력을 가진 히어로한테는 쉽게 먹히지 않지만, 지금처럼 세뇌되어 무방비가 된 스페이드라면 어렵지 않게 적용시킬 수 있겠지.
“보스, 다시 한 번 생각을....”
“싫어. 어떻게 해도 용서가 안 돼. 용서할 수 없어. 무슨 말을 하더라도, 듣지 않겠어.”
바이올렛의 결의는 흔들림이 없어 보였다.
‘......결국, 이럴 수 밖에 없나.’
13호는 손을 뻗어, 주머니에 넣어둔 약을 듬뿍 적신 손수건을 만졌다.
바이올렛은 【언령】이라는 강력한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그래봐야 입이 막히면 평범한 여자나 다름없다. 마력을 이용한 신체강화는 거의 못 한다.
즉, 능력을 사용하기 전에 입을 막으면 쉽게 무력화할 수 있다.
‘......보스, 지만.’
보스의 명령이라면 뭐든 들어주고 싶다. 13호 자신의 목숨이라도, 종잇장처럼 버려 줄 자신이 있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싫었다.
스페이드와 함께 지내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정이 생긴 것일 수도 있다. 그게 아니라면 보스가 누군가를 죽이는 걸 보기 싫은 걸 수도 있다.
무슨 이유가 되었든, 이 상황을 용납하고 싶지 않았다.
쓰러진 채 괴로워하는 스페이드를 차가운 눈으로 내려다보며 마력을 가다듬는 바이올렛 몰래, 13호가 손수건을 꺼내들려던――그 때였다.
“13호.”
“네, 보스.”
“세뇌도구는 준비 돼있어?”
...........................................?
“........................예?”
13호의 몸이 경직 됐다. 갑작스런 질문에, 삐질삐질 식은땀이 새어나왔다.
“세뇌, 라니 갑자기 무슨 말씀이신지.”
“시치미 떼지마, 13호. 보스로서, 거짓말하는 건 허락하지 않겠어.”
바이올렛의 날카로운 시선이, 이번엔 13호를 향했다.
“너, 날 세뇌하려던 거 아니야? 13호?”
13호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 모습을, 바이올렛은 한숨과 함께 쳐다봤다.
엉거주춤하게 손수건을 꺼내들고, 13호는 어쩔 줄을 몰라 바이올렛의 얼굴을 쳐다보고, 어깨에서 힘을 뺐다.
“...들켜버렸습니까.”
“상사를 세뇌하려는 부하라니, 진짜 막 돼 먹은 하극상이잖아.... 무슨 짓을 할 생각이었어? 응? 야한 짓도 시키고, 막 그러려고?”
“뭐, ......조금은....”
“야앗!”
바이올렛의 발이 올라와, 그대로 13호의 복부를 퍽, 걷어찼다. 별로 아프지는 않아서, 한 발짝 뒤로 물러나는 데서 그쳤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지, 바이올렛은 손에 든 채찍으로 13호를 짝짝 때렸다. 아프고 쓰렸지만, 버티지 못할 건 아니었다. 태연한 13호의 모습에, 바이올렛이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보스, 역시, 이건 아닌 것 같습니다. 도저히, 용납할 수 없습니다.”
“너라면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 한 없이 무른 녀석이니까.”
“......저도 죽이시렵니까.”
“어쩔까나.”
바이올렛은 쿡쿡 웃더니, 싸늘한 미소와 함께 13호를, 스페이드를 번갈아 쳐다보고... 다음으론, 힘을 뺀 미소를 지어보였다.
다음으로 이어진 말에, 13호는 귀를 의심했다.
“13호. 나를 세뇌해 줘.”
“........................................에?”
탱그랑- 바이올렛이 대충 내던진 채찍이 바닥을 뒹굴었다.
“이해가 안 되는데, 지금 내 안에 가득한 분노를 참을 수가 없어. 동생을 죽인 스페이드를 죽이지 않고서는, 히어로들을 몽땅 죽여버리지 않고서는 분이 안 풀릴 것 같아. 분노가 몸을 지글지글 태우는 기분이야. 아무 것도 모르고 지냈을 때는 그래도 괜찮았다고 생각했는데...... 정말이지, 괴로워 죽겠어. 그리고 어딘가 석연찮은 점도 있고....”
“석연찮다니.”
“아무 것도 아냐. 신경 쓰지 마. 그건 됐고.”
그러니, 라며 그녀는 말을 이었다.
“나를 세뇌해, 13호. 명령이야.”
당당한 눈으로, 어딘가 아쉬운 눈치로, 그녀는 그렇게 제안했다.
13호는 얼이 빠져, 그런 보스를 쳐다볼 뿐이다.
정말이지 이해가 안 되는 상황에 한 순간 공황에 빠졌지만... 그래도 정신을 차리고, 다시 한 번 확인하듯 물었다.
“정말 괜찮습니까, 보스?”
“그렇게 해 줘. ......내 마음을, 편하게 해 줘, 13호. ...이런 나쁜 마음, 먹고 싶지 않아.”
촉촉이 젖은 눈으로 올려다보면, 거절할 수가 없다.
“아, 그리고 세뇌할 거라면 이렇게 해주라.”
이어서 바이올렛은 몇 가지 요구를 덧붙였다. 세뇌한다면, 이렇게 하면 좋겠다든가.
13호는 머리를 긁적이며, 어쩔 수 없다는 듯 손수건을 그녀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
“보스. ......저 평생, 보스를 따르겠습니다.”
“고마워, 13호. 못난 보스라 미안해.”
최고의 보스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그녀의 입가를 손수건으로 덮자,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눈에서 빛이 사라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