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1화 〉#30 추락한 빌런은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기로 했습니다(1)
자, 그럼 잠든 보스와 스페이드를 어떻게 해야할까.
공주님 안기처럼 품에 안아서 가는 것도 좋지만, 한 사람을 방치해두는 것도 신사로서는 좀 그렇다.
좋아, 그럼 여기서는 양 어깨에 쌀가마니처럼 짊어지고 가자. 음식은 소중하다. 쌀가마니 취급을 받을 수 있다니, 분명 이 여자들도 기뻐해줄 거다.
“흠......”
그러나 움직이기 전에, 나는 재빨리 문 쪽으로 다가가 벌컥 문을 열어젖혔다.
그러자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는 면면이 보였다. 역시 훔쳐보고 있었구나!
“앗...!”
“Fuck...!”
“거기, 도망가지 마!”
아차 싶은 표정으로 뒤돌아서 도망치려는 인원들에게 외치자, 다들 우뚝 멈춰서주었다.
“클럽에다... 거기다 도로시까지? 허어?”
완전 의외인 멤버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오늘의 일을 아는 건 당사자인 나와 보스, 스페이드를 제외하면 도로시나 참모 밖에 없다. 그렇다면 클럽은 도로시가 데려왔다는 건데... 도로시가 이런 데에 관심을 가졌다는 게 의외였다. 발명과 자기자신에게 밖에는 관심 없는 여자인 줄 알았는데.
“왜. 내가 있으면 안 돼?”
“아니... 의외라서.”
“뭐, 귀중한 실험체의 사활이 걸린 문제니까. 나는 감기에 걸려 생사를 오갈 때도 모르모트들을 걱정해서 실험실에서 자거나 했거든.”
“아니, 그럴 때는 좀 쉬라고. 건강에 안 좋으니까 하지 마 그런 거. 그리고 간병은 내가 해줄 테니까. 옷 갈아입히기든 목욕시키기든 죽 떠먹여주기든 뭐든 다 해줄게!”
“변태자식. 그 때가 되면 나 말고 내 모르모트들이나 챙겨 줘. 솔직히 내 빈약한 몸 따윈 어찌되든 상관 없으니까.”
도로시는 퉁명스럽게 말하며, 슬쩍 내 몸 너머로 안을 들여다 봤다. 냐앙~하는 울음소리에 깜짝 놀랐다. 돌아보니, 지금껏 어디 숨어있었는지 고양이가 한 마리 토도독, 문 밖으로 나왔다.
고양이라고 한다면...
“클럽의 능력이구만.”
“Correct. 맞지만요.”
결국 처음부터 끝까지 다 봤다는 뜻이다. 생각해보니까 민망하네.
......보스를 세뇌한 걸 봤다고?! 엉덩이때리기가 체벌이니 뭐니 했던 그걸?!
도로시가 길게 한숨을 내쉬는 모습이, 흡사 못 말리는 어린아이를 보는 것 같아서 굉장히 거부했다.
“어, 저기, 그게 말이지....”
“너, 내가 한 말 기억해?”
도로시가 했던 말....
나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주제넘은 생각은 불필요. 생각 따윈 하지 마... 였지?”
“그래. 네 입장을 잘 생각해보라고, 넌 빌런일 뿐이지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고 했는데... 잘도 내 말을 어기네. 응? 네 목숨줄이 누구 손에 있는지 모르나 봐?”
“으음... 할 말이 없어.”
정말이지, 도로시를 볼 면목이 없다. 이 음침한 이과녀는 한 번 아니다 싶으면 그대로 손절 때리는 여자다. ‘이제부터 세뇌도구고 뭐고, 죽든지 말든지 알아서 해!’ 같은 말을 하면 곤란해진다.
그러나 이어진 도로시의 말은, 상당히 의외였다.
“뭐, 됐어.”
“어?”
“됐다고. 못 들었어? 어차피 무를 대로 무른데다 한심하기까지 한 네가 그 계집이 죽는 걸 순순히 두고 볼 너도 아니고. 그나마 보스를 세뇌할 배짱이 있다니 조금은 다시 봤다마는... 그니까 됐다고, 이 한심해 빠진 인간아!”
“진짜로?!”
나는 기쁨이 넘쳐흐를 기세로 외쳤다. 우와! 한심하다는 소릴 듣긴 했지만 그거야 당연한 거고, 그보다 도로시가 용서해준다니... 말 그대로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인걸!
“......안 되겠어. 역시 용서할 수 없어. 감히 내 말을 무시해? 감히 주제도 모르고 보스까지... 후....”
“아, 아아아아... 요, 용서해주세요 도로시니임...! 뭐, 뭐든지 하겠습니다...!”
“...흐음.”
뭐든지, 라.
도로시는 홀로 그렇게 되뇌이더니, 별안간 그녀의 굽이 낮은 구두를 벗었다. 그리고는 능숙하게 한 발로 선 채, 나를 향해 스타킹에 감싸인 한쪽 발을 슬쩍 내밀었다.
“핥아 봐. 그러면 조금 생각해 볼....”
“추르릅. 촵.”
“결단이 너무 빠른 거 아니냐?!”
시키는 대로 곧바로 무릎 꿇고 엎드려서 핥아 줬는데, 오히려 한소리를 들었다. 정말이지, 나도 싫은 거 참고하는 건데 반응이 그게 뭐야. 나는 도로시의 작은 발을 소중히 껴안은 채 그녀의 발가락 끝부터 복사뼈까지 정말 세심하게 핥고 빨아갔다.
“자, 자, 자, 잠깐만...! 야...! 흐아아아아아아아......!”
“Fuck... 변태들....”
클럽이 가까이 오기 싫다는 듯한 표정으로 등 뒤에서 도로시를 지탱해주었고, 도로시는 몸을 클럽에게 맡긴 채 내 혀의 움직임에 따라 움찔움찔 떨어댔다.
정말이지 괘씸한 다리잖아. 맛있다. 추릅.
“흐에에... 히이이이......”
결국 조금 후에는, 클럽의 품에서 축 늘어진 도로시가 하아하아 거칠게 숨을 내쉬고 있었다. 발을 조금 핥고 빨았을 뿐인데 오버하기는. 너무 좋은 광경이라 저도 모르게 찰칵, 사진을 찍어버렸다.
“후우. 도로시. 괜찮아? 아직 부족하지? 정강이까지 밖에 못 핥았고. 적어도 네가 만족할 수 있게 허벅지까지는 핥아 줄테니까 기다려!”
“자, 잠깐만... 잠깐! 그 이상 하면 죽인다?! 진짜로 죽인다?! ‘파수군’의 방위 기능 켜버릴 거야?!”
에이 뭐야. 나는 걱정되서 이러는 건데. 흥.
“차고 넘치니까 됐어... 알겠다고... 그리고, 결국 네 방법으로 보스가 진정한 것 같으니까 다행이고....”
“그렇게 말해주니 고마워, 도로시. 거기다 관대하게 나를 용서해주기까지 하다니... 이 은혜는 이제 네 허벅지를 핥아주는 것으로 밖에는 갚을 길이 없어!”
“닥쳐! 필요 없다고! 그보다 그렇게 해서 좋아지는 건 너뿐일 거 아냐?!”
“응? 도로시는 기분 안 좋았어?”
“.......”
“좋았구나~.”
“아, 아냐! 아니라고! 닥쳐 13호! 파수군! 파수구우우우우우운~~~~!”
벽에서 튀어나온 총의 총구가 나를 향하고 나니 더 이상 장난치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런 무시무시한 게 거주지 벽에 박혀있다니 어떻게 되어먹은 거냐, 이 생활권은.
어쨌든 조금 진정된 도로시가 구두를 도로 신고 새침하게 나를 올려다 봤다. 이제부터는 본론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래서, 이제 어쩔 거야, 13호? 보스는 진정시켰다지만, 아직 할 일은 남은 거지?”
역시 도로시다. 다 꿰뚫어보고 있는 걸까.
보스는 진정했지만, 조금 전의 다짐처럼 흑막을 처단하지 않고서는 끝낼 수가 없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세뇌도구를 조금 다루고, 히어로들에게서 나눠 받은 마력이 조금 있다는 것 빼고는 단순한 무능력자다. 도로시 같은 두뇌도, 애플의 꿀이 떨어질 것 같은 달콤한 화술도, 참모 같은 정교한 책략도, 마음에 안 드는 것을 심플하게 밀어버릴 스페이드나 체크 같은 화력도 없다.
나는 순순히 내 부족함을 인정하기로 했다.
나 혼자서는 아마도 힘들 것이다.
“......도와줄래?”
“도와줄 거 아니었으면 안 왔어, 멍청아.”
이 무슨 츤데레틱한 발언이란 말인가. 그만해, 반해버릴 것 같잖아. 도로시 주제에.
나는 도로시에게 간단한 경위를 설명해주고, 보스의 스마트폰 화면을 보여주었다. 화면에 띄워 놓은 것은 예의 그 사진. 스페이드가 쓰러진 여성 앞에 서 있는, 보스의 동생 살해 혐의를 의심하게 만드는 증거품이었다.
“그래서, 이제는 이 사진을 보낸 놈을 추적해보려고. 단서는 없지만 아리아나 애플이 도와주면 어렵지 않게 찾지 않을까? 참모한테도 조언을 구해봐야 할 테고....”
도로시는 흠흠, 하고 화면을 살펴보고는.
“뭐, 너치고는 나쁘지 않은 생각인데, 굳이 그럴 필요 없겠는걸.”
도로시는 그대로 내 손에서 휴대폰을 낚아챘다.
“이 사건에는 일반인들도 많이 휘말린 데다가, 미성년이었던 보스의 동생을 제압한 일까지... 여러모로 공개하기 어려운 일이 많아서 상세한 부분은 거의 은폐되고 밖에는 알려지지 않았어. 이 은폐를 주도한 건 당연히 히어로협회 측이고.”
오오... 뭔가 백의에 어울리는 이과다운 분석력이다.
“그 말은...!?”
“거기다 이런 정보를 열람할 수 있는 인원도, 알고 있는 사람도 한정되어 있겠지... 결론은 금방 나와.”
다크서클이 짙게 내려온 눈이 나를 똑바로 쳐다봤다. 알아서 깨달아, 머저리야, 같은 느낌이다.
“가능하면 대장급일 것. 이 사건이 있었을 당시도 히어로였을 것. 가능하면 그 자리에 있었던 히어로라고 한다면 훨씬 좋겠지만 이건 일단 알아봐야 알테고. 그리고... 어쩌면 보스와 면식이 있을 것... 거기에 스페이드에게 모종의 악감정을 가지고 있다던가....”
손가락까지 꼽아가며 하나하나 열거해나가기 시작하니, 어느 순간 나는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있어...! 딱 맞는 히어로가, 한 명.”
“......나도 생각나는 사람이 있어.”
대장이고, 라헤와 동기라면 이 사건이 있었을 당시도 히어로였을 테고, 그리고 최근 스페이드에게 격렬하게 분노의 모습을 보여줬던 히어로.
4번대 대장. ‘시계자리’의 은혜를 입고 <시간조작>의 능력을 사용하는 ᅟᅵᆾ트급 대장 중 한 사람.
“실...! 그 여자가...?!”
도로시가 정답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 *
‘......슬슬 괜찮을 것 같네요.’
또각, 또각... 구두굽이 울리는 소리가 복도에 조용히 울려퍼졌다. 딱히 귀에 거슬릴 정도의 소리도 아니고, 높은 굽의 구두에 비해 묘할 정도로 소리가 적었다.
어둠에 감싸인 복도에서, 라헤는 손에 든 검을 매만지며 신중하게 주변을 살폈다.
...아직까지 자신의 침입을 눈치 챈 낌새는 보이지 않았다.
13호와 약속한 일주일, 오늘은 그 마지막 날이다. 본래라면 일과와도 같은 고문 끝에는 7번대 기지로 돌아가 쉴 수 있게 해주고 있지만, 라헤는 한 번 기지에 돌아갔다가 새벽에 이르니 몰래 숨어든 것이다.
숨어들어올 수 있도록, 이 아지트를 떠나기 전에 잘 안 보이는 쪽 창문 중에 하나를 열어놓는 등 간단한 사전 공작을 마친 덕분에 정말이지 손쉽게 잠입할 수 있었다. 거기다 이 아지트의 핵심 방위 기구인 ‘파수군’에, 세뇌되어 있는 자신들은 13호의 동료라는 식으로 인식되고 있는 모양이다. ...즉, 이렇게 밤에 당당하게 돌아다녀도, 걸리지 않는다.
또각, 또각, 하는 발소리가 울린다.
차분하고 침착한 소리지만, 그 너머에는 그녀의 차가운 분노가 서리 안개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저를 능욕한 것... 그렇다 치겠습니다.’
그것도 용서할 수 없는 만행이었지만, 백보 양보해서 용서해 줄 수 있다.
‘저를 세뇌하려 한 것... 협박한 것도, 빌런으로서 살아남기 위해, 라고 한다면 어쩔 수 없죠.’
어쨌든 대장급인 그녀다. 지나치게 강대한 자신이니, 정면승부는 무리. 그러니 이런 쪼잔한 방식으로 무력화시키려 했겠지. 그렇겠지.
‘하지만 제 부하들에게 손을 댄 것은,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그녀의 눈에 분노의 불길이 타올랐다.
라헤는 13호의... 정확히는 중립에 속한 로아를 경유한 세뇌 암시로 인해 이것저것 제약을 받은 상태였다. ‘부하들을 인질로 잡혀 무슨 명령이든 어쩔 수 없이 따라야한다’...는 암시대로, 그녀는 이 일주일 동안 13호에게 반항조차 하지 못하고 그의 무도한 능욕과 고문을 줄곧 받아왔어야 했다.
그 치욕.
그 수치.
‘하지만 실수였어요, 13호.’
일주일이라는 시간동안 13호는 완전히 세뇌하지 못하는 자신을 굴복시키려 했겠지. 그러나 그게 우책이라는 것을, 13호는 알까.
시간이 주어진 덕분에, 자신은 세뇌에 의한 위화감을 느낄 수 있었고, 어렴풋하지만 암시를 받았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고, 무엇보다 시간을 들이며 세뇌의 허점을 찾은 결과, 여러 가지 제약을 뛰어넘고 이렇게 침입해 들어왔다.
이대로 잠들어 있는 13호의 목을 따버리기만 하면 된다. 능력을 제한하는 구속구도, 의미가 없다는 것은 실험에 실험을 거듭하는 것으로 확인했다.
세뇌란 건 결국 믿게하는 것... 능력을 쓸 수 없다고 믿게 했던 세뇌는, 라헤의 강한 정신력 앞에 결국 산산조각 깨어져버린 것이다.
“여기가 13호의 방....”
그렇게 복도를 홀로 천천히 걷던 라헤는, 어느 방문 앞에서 멈춰섰다. 무심코 똑똑 두드릴 뻔 했다. 이러면 안 되지, 안 돼. 자신은 상대를 암살하러 왔다.
‘......방문, 비밀번호는....’
라헤는 13호에게 당하면서도 모든 상황에 대처할 수 있도록 철저하게 준비를 끝마쳐 놓았다.
대장다운 일처리라 할 수 밖에 없다.
방의 도어락은 카드, 지문인식, 그리고 비밀번호 형식이었다. 다른 건 할 수 없다. 카드도 결국 구하지 못했지만, 13호를 계속 관찰한 결과 그가 자주 쓰는 숫자의 나열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삑- 삑-
터치패널을 누를 때마다 나는 기계음에 조바심이 날 것 같았지만, 행여나 안에 있는 13호가 깨지 않길 바라면서 라헤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삐-익. 철컥.
열렸다!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살금살금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어두웠지만 마력을 이용하면 못 볼 것도 없다.
......그리고 안을 확인하고, 라헤는 아연실색했다.
13호가, 없다.
‘어디갔지?!’
이 시간에 방에 없다니, 어딜 간 걸까.
라헤는 초조함에 입술을 뜯으며, 턱에 손가락을 올리고 생각에 잠겼다. 이 시간, 13호가 있을 법한 곳. 어디를 갔을까. 혹시 자신의 습격을 알아차린 건 아닐까. 아니, 아닐 것이다. 아니면 여기서 대기할까? 언젠가 올 때를 기다리는 것도....
“......거기, 려나.”
문득 떠오르는 장소가 있었다.
고문실, 혹은 조교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시간에 13호가 방에 없다면 거기 말고는 있을 곳이 없다고 생각이 들었다.
라헤는 서둘러, 그러나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재촉했다.
‘있어!’
조교실이 있는 지하로 내려오자, 라헤는 금방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희미하게 익숙한 신음소리가 새어나오고 있었으니까. 드문드문 거기에 섞여 남자의 말소리도 들려왔다. 틀림 없는 13호의 목소리다.
아마도 누군가를 범하고 있는 거겠지. 그 남자답다.
“쯧...!”
정말이지, 도움이 안 되는 남자 같으니.
자고 있었다면 편하게 죽일 수 있었겠지만, 이렇게 되면 조금 성가셔질 것 같은데.
아니, 아니다. 자신과 함께 부하들도 전부 기지로 돌려보냈으니, 이곳에 남아있는 부하는 없을 것이다. 지금 13호가 범하는 것도 다른 여자가 분명하다. 새로 잡은 여자일 수도 있고, 같은 빌런 동료일지도 모른다.
후우우우우....
라헤는 조교실의 문에 손을 댄 채,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슬쩍 문을 돌려보니, 정말이지 천운이 따라주는지 문이 열려있었다. 굳이 이 단단한 문을 부수고 들어가거나 하는 소모를 하지 않아서 천만 다행이었다.
‘이대로 돌입해서, 눈치채기 전에 목을 베면... 그러면 됩니다.’
들려오는 신음소리나 목소리, 부딪치는 소리... 하나하나 귀를 기울여가며 위치 관계를 파악해갔다.
13호의 위치는 금방 짐작할 수 있었다.
‘문을 열면, 곧바로 달려나가서, 반항 틈도 없이... 머릿속으로 몇 번 반복해봤고, 좋아요. 이대로만 하면 됩니다. 이대로면....’
라헤는 결심과 동시에, 문 손잡이를 붙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가볍게 심호흡 후, 눈빛에 힘을 주고,
“흡!”
벌컥-! 문을 열고, 단숨에 먹잇감을 노리는 짐승과도 같이 날렵하게 몸을 날렸다.
단숨에, 먹잇감을 향해 날아드는 매처럼 13호를 향해 육박해간다...!
“어......?”
13호의 얼빠진 목소리가 들렸다. 멍청한 빌런.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닫기도 전에, 그 목을 베어주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검을 든 손을 뒤로 당기는 순간,
“대, 장......?”
라헤는 눈 앞의 광경에 깜짝 놀라 경직했다.
13호의 품에 안겨, 자신을 바라보는 것은 체크였다. 그 옆에는 코코와 아리아도 꿈틀거리며 13호에게 달라붙어 있다. 모두가 전투복을 입은 채였다.
어째서 여기에, 부하들이...?
그저 그 사실을 목전에 뒀을 뿐인데, 라헤는 밀랍에 굳힌 인형처럼 몸이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검을 든 채로 우뚝 서있다.
“여어, 대장님. 왔구나, 기다리고 있었잖아.”
“무...슨.......”
“여기 네 부하들도 지금 너처럼 나를 죽이러 온 거거든. ‘그렇게 생각하도록’ 암시를 걸은 것 뿐이지만 말야. 그리고 보시다시피, 요렇게. 반항적인 히어로를 교육시킨다, 는 느낌은 언제라도 좋네. 응? 그렇지, 체크? 너도 좋지?”
“흐, 흐야아아아아......! 그만... 그만하래이....”
13호의 손이 체크의 가슴 끝의 돌기를 집히자, 체크는 녹아버릴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신음소리를 흘렸다. 다른 한손은 그녀의 스커트 아래에서 음부를 주무르거나 쑤시거나 했다. 음탕한 즙이 물총처럼 쏘아져나오는 게 눈에 보였다.
“아리아는 뭐... 똑같이 시켰는데, 오자마자 바로 ‘굴복합니다. 엉망진창으로 해주세요’ 같은 말을 하더라고. 이것도 좋은 느낌이었지만, 끝까지 반항적이던 체크니 코코를 녹여버리는 것도 즐거웠어.”
“..........................제 부하들에게서, 당장 떨어지세요!!!”
라헤는 고함을 지르며 손에 든 검을 13호를 향해 내밀었다. 부하들이 자리에 없었다면 몰라도, 인질로 붙잡힌 거나 다름 없는 지금은 다르다. 13호가 명령하는 순간, 자신은 분명 이 검을 놓고 마음껏 반격당하게 되겠지.
하지만 적어도, 마지막까지는 대장으로서의 허세를...!
그런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13호는 빙글빙글 웃으며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라헤. 이 새벽부터 뭐해, 그런 ‘장난감’을 들고?”
“당신은 이 검이 안 보이나요? 장난감이라니, 잘도 말하시네요.”
“검? 응? 어디있는데?”
13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소릴 하는 거람....
“어디있기는... 여기, 제 손에 있지 않습니까.”
“아니, 진짜로. 잘 봐줄래? 네가 손에 든 거, 장난감 아니야?”
“무슨 소리를.... 어......?”
13호의 말에, 라헤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자신이 늘 애용하던 칼을 들고 있을 손에는, 이제 보니 검대신 다른 것이 들려 있었다.
그녀가 쓰는 검 손잡이보다 굵고, 검신...이라고 할까, 길이도 짧았다. 약간 휜데다, 검은 재질의, 남자의 그것을 쓸데없이 리얼하게 빼닮은 도구가 그로테스크하게 빛났다.
손에 들린 것은 검이 아니라, 13호의 말대로 어른의 장난감, 전동 딜도라 부르는 그것이었다.
“어......? 어...?”
라헤는 혼란에 휩싸였다.
왜, 자신이 이런 걸 들고 있는 거지......? 검...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