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7화 〉#31 빌런 × 히어로 × 로봇 = 트러블트러블(2)
“13호! 그럼 뭔가 계획은 있어?!”
“으음......! 없지는 않지만 일단은 한 없이 없는 것과 같다고 할까.”
쉽게 말하자면 없다고나 할까.
“정말이지~~~~~~~!”
휘말려들지 않으려는 듯 사람들이 우리를 피해 멀찍이 떨어졌다. 마치 모세의 기적을 연상케하는 광경이었다.
별안간 섬뜩한 기분이 들어서 고개를 푹 숙이자,
쉭-!
조금 전까지 내 머리가 있던 위치를, 번쩍이는 열선이 꿰뚫고 지나갔다. 열선이 사라지고 바닥에 남은 새카만 구멍을 보고 나니, 섬뜩해졌다.
“이런, 빗나갔습니다.”
“지, 진짜 죽일 생각만만이잖아...!”
“알았으면 좀 더 빨리 달려 멍청이!”
“지금 이게 전속력이야!”
지금까지 스페이드와 이렇고 저런짓을 해서 나눠 받은 마력을 전부 써가면서 뛰고 있는데, 공중을 자유자재로 날아다니는 엔데와의 거리는 도저히 벌어지지 않았다.
‘거기다 어쩐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도 그럴게 조사한 엔데의 화력이라면 나 정도는 순식간에 잿더미로 만들어버릴 수 있을 것 같은데, 공격도 중간중간 끊어지고, 거기다 좁은 골목길로 들어가려면 갑작스레 빔을 연사하기도 하고....
‘유도당하고 있다?!’
마치 어딘가로 가라는 듯, 노골적인 의도가 엿보인다.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앞뒤는 생각하지 않는 기계의 사고방식이기도 하다.
“저기, 13호... 유도 당하고 있는 거, 눈치챘어?”
“그건 그런데. 어떻게 피할 수 있겠어?”
“......아마, 힘들걸.”
“스페이드 너도 A급이고 저쪽도 A급이면 한 판 붙어서 승리할 가능성은?”
스페이드는 잠시 고민하나 싶더니, 뒤이어 투두두두두두- 하고 쏘아진 콩알탄을 가볍게 피하며 말했다. 열선을 쏘아대던 포구가 달린 오른팔이 아닌, 발칸포처럼 변해버린 왼팔로 쏜 것이다.
“제대로 싸운다면 몰라도... 일단 저쪽은 자유자재로 날아다니는걸. 거기다 싸우기 시작하면 금방 다른 4번대 멤버들한테 둘러싸일테고. 참모는? 그림자로 이탈할 수 있지 않아?”
‘흠....’
바닥을 튀어오른 탄알을 공중에서 휙, 붙잡아 살펴보니, 살상능력은 없는 고무탄이었다.
“.......”
참모에게 부탁해서 그림자를 통해 탈출...이라는 게 가장 속 편한 길이겠지만,
“저기... 전파가 안 터져.”
나는 손목의 통신 단말기를 스페이드에게 보여주었다. 빨간 불이 들어온 단말기는 아무리 눌러봐도 반응이 없다. 전파가 터지질 않는다. 도로시 특제 단말기인 만큼 일반적인 재밍이 먹히지 않을 텐데도 이 모양 이 꼴이다.
“과연 【안드로이드】. 도로시의 과학 기술도 압도당하는구나. 역시 미래형 로봇의 귀감이야~.”
“감탄할 때가 아니야!”
“어쨌든, 정시연락 때까지만 버티면 참모도 뭔가 이상한 걸 알아차려 주겠지. 차라리 잘 됐어. 적을 알아볼 시간도 생겼고. 틈이 생기면 '비장의 수'도 쓸 수 있을 테고... 스페이드, 저기로 숨자.”
“에?”
나는 스페이드의 팔을 이끌고, 엔데의 허를 찌르듯 바로 근처의 백화점을 향해 몸을 날렸다.
“음?!”
엔데가 당황하며 콩알탄을 쐈지만, 갑작스런 가속에 조준이 따라가지 못한 모양이다. 바로 뒤에 투두두두두두- 쏟아지는 총알들이 섬뜩한 기분을 주었다.
파악-!
“큭...!”
등짝에 한발 맞아버렸지만, 근성으로 버티기로 하고――단숨에 질주해, 백화점 문턱을 넘었다.
* * *
“.......”
엔데는 차가운 눈으로 백화점을 노려보다, 천천히 활강해 도로 위에 내려앉았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히어로의 모습에 의아해 하며 쳐다봤지만 딱히 신경은 쓰지 않았다.
그것보다는, 빌런을 어떻게 체포할지다.
사람이 없는 곳으로 유도해 전력으로 쳐부수려 했지만, 아마도 두 사람은 자신의 의도를 눈치채고 억지로 활로를 연 것이다.
의도가 간파당하다니, 기계로서의 사고방식은 너무 유연함이 없어서 한탄이 나올 지경이지만, 지금 상태의 자신은 데이터와 숫자로 연산의 보조를 받고 있는 상태니 어쩔 수가 없었다.
상대가 예측과는 다른 행동을 벌였다면, 이쪽은 그런 변수까지 포함해서 공식을 수정해 새로운 예측을 내놓으면 되는 것이다.
‘사람들을 대피시킨다...... 부정. 도망치는 인파에 섞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1차적인 목표는 시민들을 안전하게 지키는 것. 그러니 검토할 가치는 있는 생각이지만, 가능하면 이번 기회에 저 빌런을 잡아두는 것이 좋다. 나중에 생길 피해 규모를 산출하니, 무시할 수 없는 결과가 나왔으니까.
‘백화점을 봉쇄... 본 기(機)가 직접 들어가서 제압한다...’
마침 4번대 전용 단말(엔데의 재밍을 피하도록 특별 가공된)을 통해 근처에 있던 히어로 몇 명이 근처까지 왔다는 연락을 받았다.
‘긍정.’
결단은 빨랐다. 엔데는 근처의 멤버들에게 백화점을 봉쇄하도록 지시를 내렸다.
* * *
“괜찮아?! 맞았어?!”
“괜찮아... 아이고, 자비가 없구만 로봇님은.”
등이 부러질 것처럼 얼얼하지만, 어쨌든 살상능력이 없는 총알인 만큼 다행이었다. 애초에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면 이렇게 대담한 작전은 짜지 못했겠지만.
『어라, 전파가 안 터지는데?』
『나도 그래. 갑자기 왜 이러지...?』
아무래도 우리가 엔데의 시야를 벗어난 순간, 재밍의 범위가 백화점 전체로 넓어진 것 같았다.
맙소사. 고작해야 우리 둘 잡겠다고.... 벼룩 잡겠다고 초가삼간 태워먹는다는 말이 딱 어울리네.
놀랄 일은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전달드립니다. 현재 백화점 안에 빌런이 발견되었습니다. 백화점 내부의 고객 분들께서는 지시한 위치로 이동해주시기 바랍니다. 히어로가 여러분들을 지켜드릴 테니 안심해주시기 바랍니다.』
라는 안내 음성이 울린다 싶더니, 차르륵- 차르륵- 화재대비용 방화셔터가 하나 둘 내려오기 시작했다.
아마도 우리의 진로를 제한 해 도망치기 어렵고, 추격하기에는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인 것 같았다.
“이런...!”
서둘러 엘리베이터 쪽으로 달려갔지만, 당연히 작동하지 않았다. 계단 쪽도 셔터가 내려가 있어서 쓸 수 없다. 유일하게 드나들 수 있는 건 에스컬레이터와 방송에서 유도하는 위치로 가는 길 정도다. 그 외에 샛길 같은 건 이용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움직일 수 없으신 분들도 안심하고 대기해주십시오. 히어로가 직접 확인한 후 보호해드리겠습니다. 히어로가 지켜드릴 테니 걱정하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가만히 있을 수도 없겠네.”
“그대로 있다간 들켜버릴 거야. 이제 어쩔 거야, 13호?”
"글쎄, 좋은 생각은 안 나는데."
나는 잠시 고민하다, 스페이드를 진중하게 내려보았다.
"...왜 그렇게 봐?"
"스페이드, 진지하게 부탁할게."
"응?"
나는 스페이드의 양 어깨를 붙잡았다.
"네 배를 만지게 해 줘."
퍼억-! 상황파악 못 하냐며 주먹으로 얻어맞았다.
"아니! 별 다른 의미는 없다니까?! 왠지 그냥 너를 주물주물거리면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를 것 같아서! 진정도 될 것 같고! 아니, 그보다 너 매번 어떻게 암시를 뚫고 나를 때리는 거야?!"
"변태자식아! 상황 파악을 해! 지금 이 상황에 그게 말이 돼?!"
"진짜로! 진짜진짜 잠깐이면 돼!"
애원하는 나를 스페이드는 발갛게 된 얼굴로 노려보더니,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그거면 되는 거지?"
"응. 진짜로."
"배 말고 다른 데 만지면, 죽여버릴 거야."
스페이드는 근처의 가게 안으로 나를 끌고 가더니,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고 마지 못한 듯 천천히 상의를 들어올렸다.
드러난 새하얗고 탄력있는 배. 군살 하나 보이지 않는 잘록한 허리가 눈이 부셨다.
나는 천천히 스페이드의 배를 조물조물 만지기 시작했다. 응. 왠지 이러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지는 걸.... 조금 전까지 조급했던 마음이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스페이드, 배꼽이 귀여워."
".....읏... 이상한 데 만지지 마...."
스페이드의 배를 만지고, 배꼽에 손가락을 넣어 안을 긁어내듯 해보았다. 내 손이 움직이는 대로, 스페이드의 몸도 움찔움찔 떠는 게 느껴졌다.
흠......
"조, 좋은 생각은 났어?"
"네 배 말고는 아무 생각도 안 떠올라."
"장난해?!"
"......농담이야."
스페이드의 배를 만지는 한 편, 시야 끝에서 날개를 접은 엔데가 백화점 안으로 들어오는 게 보였다.
공중전이 어려운 지금 둘이 함께 덮쳐서 무력화 시킬까...? 아니, 백화점 중앙 부분은 여봐란 듯이 뻥 뚫려 있으니 날아서 도망칠 수 있다.
거기다 조금만 시간을 끌어도 다른 히어로들이 몰려들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패배다.
붙잡히거나 히어로들... 특히나 대장급이 와버리거나 하면 십중팔구 우리의 패배다.
하지만 시간을 끌어서 참모의 능력으로 탈출한다면 우리의 승리다.
나는 스페이드의 배에서 천천히 손을 뗐다.
“시간은 우리편이니까... 일단 숨을까. 마침 딱 괜찮은 작전이 생각났어.”
“진짜? 괜찮은 거 맞아?”
“물론이지. 나만 믿으라고. 10% 확률로 성공할 수 있을걸.”
“도대체 뭘 믿으라는 거야...?”
* * *
‘애시당초 어째서 히어로가 빌런과 함께 행동하고 있는 걸까요.’
엔데는 가지고 있는 데이터를 종합해 스페이드의 행동원리를 연산하고 예측하려 했다.
하지만 제대로 된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변수가 부족했다. 자신은 데이터베이스에 기반한 결과 밖에는 내지 못한다. 확실한 데이터가 없으면 안 된다. 이 상태의 자신은 상상력이 부족하다.
‘적인지 아군인지 판단할 재료가 부족합니다. 그러니 히어로는 생포, 빌런은 사살하는 쪽으로. ...긍정. 그럼, 다음으로는 적의 도주 범위 예측....’
그러나 데이터와 숫자의 보조를 받는 기계인간이 된 만큼, 근거와 데이터만 있다면 일반인들은 난색을 표할 계산도 쩜 몇 초 이내에 끝낼 수 있다.
‘예측연산 개시, 도주 경로 산출. 두 사람의 최고 속도를 염두에 두고, 방화셔터가 내려온 시간을 새로운 요소로 넣고, 범위를 축소... 산출, 산출, 산출.’
엔데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싶은 순간, 날개가 펼쳐지고 그녀의 몸이 고속으로 움직였다. 단숨에 바닥을 박차고 공중을 날아오른다.
그녀가 향한 곳은 5층의 한 옷 가게.
엔데는 그곳에 숨어있는 누군가의 열원을 포착하고, 언제든 열선과 제압용 고무탄을 발사할 수 있게 두 팔을 내밀었다.
“나오세요.”
언제든 쏠 준비를 하며 날카롭게 쳐다보는 시야 속에서, 테이블 밑의 열원은 천천히 움직여 모습을 드러냈다.
“그, 그게... 미처 도망치지 못해서....”
나타난 것은 일반인, 아마도 남성.
“......실례했습니다. 히어로입니다. 지켜드릴테니 안심하고 지정된 포인트로 이동해주시기 바랍니다.”
“예, 알겠습니다.”
그러나 남자는 의아한 듯이 고개를 기울였다.
“저기, 그런데 왜 총구를 계속 제게 향하고 계신지...?”
그 말대로, 엔데는 여전히 총구를 향하고 있었다.
눈 앞에 있는 인물은 아마도 남성. ‘아마도’라고 한 것은 목소리와 체격으로 구분 했을 뿐, 확신은 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전에, 그 멍청해보이는 인형탈을 벗어주시겠습니까?”
눈 앞의 남자는, 멍청해보이는 곰돌이 인형탈을 머리에 뒤집어 쓰고 있었으니까.
* * *
“【안드로이드】를 목표로 노린다면 은근 간단해. 기계는 아무리 고도화 된 기술이 들어가도 어쨌든 기계야. 결점은 어떻게 해도 메울 수가 없어.”
이번 정찰에 나서기 전, 도로시가 호언장담하듯이 했던 조언이 있었다. 4번대의 위험한 멤버 중 한 명인 【안드로이드】는 기계의 몸과 연산능력을 가지게 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기계라고 하면 도로시의 전문분야. 그 때문인지 도로시는 묘하게 즐거워하며 이것저것 조언이며 도구들을 준비해주었다.
“명심해. 기계의 결점은 ‘상상력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이야. 조금만 달라져도 상대를 알아보지 못하는 게 기계야. 실제로 그 【안드로이드】의 스펙을 보니, 능력 자체는 충분히 탈A급이라고 봐도 될 거야. 유용성이 문제가 되어서 평가는 스페이드보다도 낮지만.”
“가면만 써도 못 알아본다는 거야?”
“그래봐야 잠깐 주춤하는 정도일 걸. 자료대로면 완전한 기계가 아니라 2할은 사람의 사고방식도 있으니까. 학습하는 기계라고 할까... 조잡한 변장이면 잠깐 주춤하는 정도고, 외모는 한가지 요소에 불과하니까... 다른 요소를 종합해서 금방 다시 결론을 내리게 될 거야.”
그러니까 방심하지 말고, 무모한 생각도 하지 마.
그런 식으로, 도로시는 엄하게 경고했다.
* * *
‘미안하다 도로시, 또 말을 어겼다. 미안. 진짜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잘못했다구! 그니까 살려주라~~~~~!’
인형탈 너머로, 나는 온 몸을 뻣뻣이 경직시킨 채 나를 향하는 총구를 노려봤다.
지금의 나는 인형탈을 쓰고, 이곳 옷가게에서 멋대로 훔쳐 입은 펑퍼짐한 옷으로 신체의 라인까지 감춘 상태다. 도로시의 말을 믿고 솔직히 1할 정도의 확률로 ‘들키지 않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걸어봤지만 아니었던 모양이다.
“어서 벗지 않으면 적으로 간주하겠습니다.”
엔데가 재촉했다. 적으로 간주한 순간 양 팔의 총구와 포구가 단숨에 불을 뿜을 것임은 명백했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다행이다.
적어도 이렇게 분장하고 나니, 엔데가 잠깐 주춤한 것을 확인했으니까.
“이봐요, 히어로. 조금 전에 이 곰돌이가 멍청해보인다고 했는데.”
“쓸데없는 말은 하지 말아주시죠.”
“아이, 좀 들어봐. 이거 유명한 아동용 애니메이션의 캐릭터라고. 이름은 .”
“알고 있습니다. 매주 주말 아침에 시청하고 있습니다.”
“.......”
“왜 그러십니까. 제가 보면 안 될 이유라도 있습니까?”
“아, 아니, 잠깐 당황했어. 헤에~ 헤~ 마음도 강철이 아닐까 싶었던 히어로님도 그런 거 보는 구나~.”
“쓸데 없이 말 돌리지 말고 어서 탈을 벗어주십시오.”
“알겠어, 알겠어. 알겠다고. 그런데 이 애니메이션 안다면 그것도 생각해달라고. 약간 멍청하고 순수한 게 곰돌군의 장점이잖아. 너도 알겠지만.”
“어서, 벗어, 주십시오.”
총구에서 철컥, 하는 소리가 났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인형탈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런 멍청한 곰돌군에게는 항상 똑똑하고 엉뚱한 이 붙어다니지? 둘은 영원한 한 세트라고.”
인형탈에 내 손이 닿았다.
그게 신호다. 우리끼리 정한.
“!”
엔데가 눈치챈 듯 서둘러 뒤로 돌았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우리가 있는 쪽의 반대편, 뻥 뚫린 중앙을 넘어선 저쪽 플로에서, 이미 스페이드는 도움닫기를 마치고 무시무시한 기세로 도약하고 있었다.
공중에 뜬 엔데를 향해, 폭풍과도 같은 무시무시한 기세로 스페이드가 날아들었다.
“이 정도 기습, 어림 없습――”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사람보다도 냉철한 기계라면, 갑작스런 기습이라도 문제 없이 대처하지 않을까, 하고.
그러나 엔데는 한순간 주저했다.
한순간 공황에 빠진 듯 멈춰버렸다.
이미 확인했다. 사고의 대부분을 기계와 다름 없이 데이터와 숫자로 이행하는 엔데는, 외모의 급격한 변화에 바로 대응하지 못한다.
그리고 기계의 조건 또 하나.
기계는 유연한 사고방식이 불가능하다. 실수를 용납하지 못한다. 상대가 적이라고 확신하지 못하면, 분명 틈이 생길 거라 생각했다.
“이, 건......!”
엔데가 당황하는 게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를 향해 쇄도한 스페이드는, 지금 의 탈을 쓰고 있으니까.
스페이드가 도착하기 전에 총을 쏘는 것도, 총구로 내치거나 몸을 피하는 것도 가능했겠지만, 날아든 것이 적이라고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바람에 한 순간 대처가 늦어졌다.
“미안, 합니다아아아아아아아!”
경직된 엔데의 몸에, 스페이드의 손이 닿았다. 엔데의 목 뒤, 새카맣고 작은 무언가... 도로시가 우리에게 맡겨준, 엔데 공략을 위한 ‘비장의 수’를 부착했다.
“윽......!”
퍼억-!
“꺄악?!”
스페이드의 손이 닿자 그제야 엔데는 경직이 풀린 듯, 무거운 총신으로 스페이드의 몸을 세게 쳐냈다. 발판이 없고 무리하게 엔데의 목에 손을 뻗느라 자세가 무너진 스페이드의 몸이 날개를 잃은 새처럼 급격히 추락했다.
“스페이드!”
스페이드라면 신체를 강화할 수 있다. 5층이라지만 이 정도 높이라면 분명 어떻게 추락하더라도 괜찮겠지.
그렇게 생각했는데도, 반사적으로 움직여버렸다.
나는 바보다.
“13호?! 멍청이가?!”
난간 너머로 뛰어든 나는, 비명과도 같이 외치는 스페이드를 꼭 끌어안고, 그녀를 지키듯 내 몸을 아래로 향한 채 함께 추락했다. 나보다 센 여자를 지키겠다고 몸을 희생하다니, 떨어져내리면서도 바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추락하는 그 짧은 순간, 엔데의 오른팔――열선을 쏘아대던 빔포구가 우리를 향하는 게 보였다.
이대로 쏴버린다면 속수무책이다. 혹시나 추락의 충격에서 살아남더라도 깔끔하게 꿰뚫려 죽어버린다.
이제 어쩌지?! 하고 이를 악물었지만 엔데는 난처한 표정을 지을 뿐, 예상했던 빔포격은 날아오지 않았다.
‘스페이드는 히어로니까, 생포하려는 걸까...?’
급속도로 추락하는 상대를 제대로 조준해서 쏘기는 어렵겠지.
하지만 그래봤자 아주 잠깐의 유예가 생겼을 뿐이다. 지면에 도착하는 순간, 스페이드와 떨어지는 순간 무차별 포격이 내 심장이나 머리를 꿰뚫을 뿐이다.
‘생각, 생각해라...! 도망칠 방법...!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끌어야...!’
급속도로 지나쳐가는 풍경 속에서 나는 이를 악물고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좋은 방법... 좋은 방법... 제길! 생각나는 게 없어!
“13호...!”
이제 곧 지면이다. 유예 시간은 끝났다.
스페이드의 몸을 으스러뜨릴 기세로 꽉 붙들고, 이제 곧 이어질 충격에 대비해 지금껏 모아둔 마력을 전신에 두르고, 눈을 꼭 감았다.
"크으으으으으으으으.......!"
바닥에 몸이 닿는다.
그리고 어마어마한 격통이――
““응?!””
찾아오지 않았다.
격통대신 찾아온 것은, 그림자 속으로 쑤욱 빨려 들어가는 도저히 익숙해지기 어려운 묘한 느낌과, 멀미가 날 것 같은 무중력 상태였다.
이건......!
“참모다!”
스페이드가 기뻐하며 외쳤다.
슈욱-! 털썩!
한순간 깜깜해졌던 눈 앞이 마찬가지로 한순간에 밝아졌다.
눈을 몇 번 깜박이자 나타난 익숙한 아지트의 모습에, 나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그대로 주저앉았다.
나타난 나와 스페이드를 바라보며 참모가 생긋 웃었다.
“13호님의 목소리를 너무 듣고픈 나머지 정시 연락보다 좀 일찍 연락을 시도했습니다만, 연락이 안 되어서 말이죠. 혹시 몰라서 그림자를 연결했습니다만, 실례였을까요.”
“아니...... 진짜 잘했어, 참모. 덕분에 살았다.”
내용이야 어쨌든, 나쁘지 않은 페어플레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