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5화 〉#34 빌런도 히어로도 배신당했다고 합니다(2)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왜, 총을 쏜 거야?
왜... 엔데가 그런 눈으로 나를 보고 있는 거야?
“쿨럭....”
주저앉은 메이벨은 혼란스러운 머리로 떠오른 의문들을 물어보려 했지만, 입에서 나온 것은 의문의 말 대신 밀려 올라온 검붉은 핏덩어리였다.
머리가 어지럽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다.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아파, 아파, 아파, 아파, 아파, 아파, 아파, 아파, 아파, 아파, 아파, 아파아파아파아파아파아파아파아파아파아파아파아파아파아파아파아파아파아파아파아파아파아파아파아파아파아파아파아파아파아파아파아파아파아파아파아파아파아파아파아파아파아파아파아파아파아파아파――
“걱정 마세요, 벨. 제 예측연산으로 사상자가 생기지 않도록 계산해서 폭탄을 터뜨렸으니까요. 순찰을 위해 계속해서 이곳저곳 돌아다닌 덕에 느긋하게 폭탄을 설치할 수 있었어요.”
무슨 소리야....
그 말은 마치, 네가, 엔데가 이 테러를 일으켰다는 것처럼....
“하지만 벨은 예외입니다. ‘닥터’는 벨의 직감은 위험하다고 했어요. 그러니 죄송하고 슬프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엔데는 전혀 슬프지 않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희미하게 철컥,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흐릿해져 가는 시야 속에서, 엔데의 손가락 끝의 총구가 자신의 이마를 향하고 있었다.
“대장에게는 구조 작업 중 빌런의 습격을 받고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다...고 해드리겠습니다. 순직이라니, 명예롭네요.”
개소리, 라는 말을 꺼낼 여유는 없다.
이제 저 총구가 불을 뿜으면, 자신은 속절없이 죽어버리는 것이다.
‘붓...을......!’
피와 함께 빠져나갈 것 같은 의식을 붙잡으며, 메이벨은 붓을 꽉 쥐었다. 마지막 발악이라도 시도해보기 위해서다. 그러나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럼 벨, 수고하셨습니다.”
이렇게 죽는 거야? 이렇게 죽는 건 싫은데. 애초에 ‘닥터’는 뭔데. 아직 아무 것도 모르겠다고. 좀 더 가르쳐달라고.
‘아따. 이놈도 저놈도 마음에 안 드네 진짜. 다 쳐 죽여버리고 싶다....’
열이 받으니 피가 더 빨리 빠져나가는 기분이다.
어쨌든 몸에 힘이 들어가지도 않고, 필사적으로 팔을
메이벨은 분한 마음을 삭이며 이를 꽉 깨문 채 눈을 감았다.
탕-!
하는, 끝을 고하는 메마른 총소리가 들리고,
까-앙!
그리고 이어서 요란한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무리 기다려도 그녀의 끝을 고하는 통증은 찾아오지 않았다. 되려 힘을 잃고 쓰러지려던 그녀의 몸을, 든든한 팔이 꽉 붙들어주었다.
‘......어?’
“아따... 내 불안해서 재빨리 찾으러 온 게 정답이었고마... 이게 뭔일이랑가, 참말로.”
“야, 야! 정신차려봐! 히어로잖아! 배에 구멍 좀 뚫린 정도로 죽지 마!”
* * *
탕! 탕!
티잉! 카앙!
“아따... 잠깐 한눈팔 틈도 안 주나. 문디가.”
13호의 품에 안긴 메이벨을 향해 날아드는 총탄을, 체크가 휘두르는 철봉이 손쉽게 날려버렸다. 마하3의 속도로 날아드는 총탄을 눈으로 보고
“...이봐, 체크. 솔직히 지금 장면 나 완전 그림 같지 않았어? 위기일발의 순간 끼어들어서 지켜주는 거 완전 반할 거 같지 않아? 방금 전의 내가 너무 멋있어서 취할 것 같아.”
“저기, 애초에 총알 튕겨낸 건 나다 안카나....”
엔데와 메이벨의 사이에 급하게 끼어들었던 체크가, 손에 적당히 든 철봉의 끝으로 바닥을 따랑, 긁었다.
그게 신호라는 듯, 엔데의 팔에서 나온 새로운 무기가 체크를 향해 불을 뿜었다. 체크는 호전적인 미소를 지으며 그런 엔데를 향해 달려나갔다.
그 뒤에서 메이벨의 몸을 받아든 13호는, “체크 지지 마~!” 하고 꼴사납지만 열심히 응원하기로 했다.
아니, 그야 지금 제대로 싸울 힘도 없고... 이럴 때는 프로를 방해하지 않도록 뒤에 짜져있는 게 도움이 되니까...
“쯧, 그보다 이 여자인데....”
창백한 얼굴의 메이벨은 당장에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보였다. 배에서는 피가 꿀럭꿀럭 솟아나와 보기 힘들 지경이 되었고, 양 다리도 총알에 관통되어서....
“어이, 이봐. 정신차려. 빌런의 품에서 잠드는 히어로라니 로망이 있긴 한데 지금 기절하면 진짜 죽을 것 같다고. 어이, 이 봐. 일어나! 죽지 마~~~~~!”
“시, 시끄럽당께...! 죽어가는 사람 귀에 대고 소리치지 마...!”
‘일단 총알은 확실하게 관통되었어....’
남아있던 마력을 메이벨의 몸에 흘려 넣어, 상태를 확인했다. 간단한 진단 정도는 내릴 수 있다.
음. 으음. 이대로 둬도 좋으려나... 그치만 이만큼이나 피가 나면....
13호는 주머니를 뒤적여, 자그마한 병을 꺼냈다. 안에는 붉은 액체가 찰랑거렸다.
“......뭐시다냐, 그건.”
“도로시 특제 만능포션이야. 부작용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하긴 하는데, 죽는 것보단 나으니까.”
“부작용?! 저기, 잠깐만?!”
“가만히 있어봐 좀. 상처 벌어지잖아! 한번 꼴딱 삼키면 끝이야.”
“내 목숨도 꼴까닥 가버리겠다 이 빙시야! 싫어! 싫당께~~~~~! ...으아앗! 아파아아~~~~!”
“가만히 좀 있어...!”
이대로는 안되겠다 판단했는지 13호는 체념의 한숨을 내쉬고는, 병의 마개를 열었다.
뽕, 하는 시원한 소리와 함께 마개를 딴 병을 입에 대고 기울인다.
13호 본인의 입에.
“에...?”
가만히 있어.
13호는 눈짓으로 그렇게 말하고는, 메이벨의 입에 입을 맞췄다.
“웁......! 웁, 우웁...!”
입술을 비집어 열고 천천히 내용물을 흘려넣으니, 거절조차 하지 못하고 순순히 삼킬 수 밖에 없었다. 조금이라도 뱉으려고 하면 가차 없이 밀고 들어오는 혀가 그녀의 혀를 눌러버렸다.
통, 통, 힘이 들어가지 않는 팔로 13호의 가슴팍을 원망스럽다는 듯 두드렸지만, 13호는 개의치 않았다.
‘아, 아아아아... 처, 첫키스당께...! 우으으으...!’
“웁... 우우웁.....”
결국 눈물을 머금은 눈을 꼭 감고, 순순히 입을 대었다.
붉은 액체를 남김 없이 삼키고 나서도, 13호는 그냥 떠나가기 아쉽다는 듯 이어서 혀를 놀려, 메이벨의 잇몸을 핥고, 볼을 간지럽히고 타액을 흘려넣었다. 메이벨은 이미 피를 흘리고 총상의 아픔이고 뭐고, 민감한 입을 통해 전해지는 황홀한 자극에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푸후우....”
오랜 시간의 딥키스를 마치고, 13호가 입술을 떼었다.
메이벨은 울 것 같은 얼굴로,
“내, 내 첫키스... 흐극... 책임지랑께 나쁜 새끼야........”
훌쩍이며 중얼거렸다. 그녀의 배와 허벅지에 난 상처는 이미 말끔하게 사라진 뒤였다.
* * *
‘......대상, 메이벨의 상처 회복을 확인.’
“어딜 한눈을 파나, 문디가!”
“.......”
캉! 파킹! 까가가가가각...!
엔데가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견제용으로 쏘던 탄환을 체크는 손쉽게 남김없이 쳐내고, 단 한걸음에 엔데의 코앞으로 불쑥 이동했다. 유려하게 빙글 돌아 휘둘러지는 봉을, 엔데는 팔의 장갑으로 막았다.
중국의 무술과 기를 이용한 축지(縮地).
기는 마력과는 다른 힘으로, 별자리의 은혜를 받아 생겨나는 마력과는 달리 기는 그녀 스스로의 단련을 통해 사용하게 된 힘이다. 마력과는 사용하는 방법도 운용처도 다르다. 눈 앞에 날아드는 총알을 눈으로 보는 동체시력도, 그 총알을 쳐내고 몸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운동능력도 기를 운용한 기술이다.
단순한 신체강화만으로 보자면 스페이드가 화력은 높지만, 여기에 마력과 무기까지 이용하는 체크를 단순 근접전에서 이길 수 있는 히어로는 대장급을 제외하면 거의 없다.
까깡-! 깡! 까끼잉!
연격, 연격, 연격.
체크의 봉이 한 번 휘둘러질 때마다 오렌지 빛 불꽃이 튀었다.
‘계측연산 구축. 행동을 예측....’
이 거리에서는 엔데의 특기인 화력 공격이 제한된다. 쓸 수 있는 선택지가 좁고, 단순 육탄전에서는 이 여자를 이기기 어렵다고 판단한다.
그러나 적당히 거리를 벌리려고 하면 체크는 순식간에 벌어진 거리만큼을 따라 잡아버린다. 어디로 튀어 나가든 반드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핀볼 같았다.
엔데는 하늘을 날 수 있다. 즉, 2차원이 아닌 3차원의 이동이 자유롭다. 그렇기 때문에 거리 조절도, 긴급회피도, 원거리요격도 용이하리라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아니...! 당신, 인간입니까...!”
“인간 맞어.”
하늘을 날아 멀어지려는 엔데의 앞으로, 퉁, 퉁, 하는 공기를 차는 소리와 함께 체크가 순식간에 날아들었다. 정말 환장하게도, 체크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밟고 재차 뛰어오른 것이다!
결국 무겁게 내려쳐진 봉에 얻어맞고 고도가 급격하게 떨어졌다.
낑!
까앙! 까끼잉!
까가가가가가가가가가가가가가가가가가가강!
그 뒤로도 체크는 자유롭게 공중을 밟으며 종횡무진, 이쪽에서 저쪽으로 날아다니며 엔데를 유린했다.
“크... 아...!”
‘움직임이 너무 빠릅니다. 성능이 따라가지 못합니다.’
이미 몇 번이나 배며 허벅지에 철봉이 직격했다. 그럼에도 버티고 있는 건 【기계화】 능력으로 피부의 일부를 단단한 쇠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방어에만 집중 할 때, 그녀 한 명으로 이지스함급의 방어력을 보여줄 수도 있다.
깡-!
“아따, 단단하네, 패는 맛이 있구먼!”
그러나 그녀가 아직도 멀쩡한 것은, 분하지만 그녀 자체의 내구도 덕분이 아니었다.
단순히 체크가 그녀의 강도를 가늠하지 못해서, 천천히 힘을 더해가고 있을 뿐이다.
얼만큼의 힘으로 때려야 엔데가 망가지지 않을지 가늠하고 있는 것이다.
그 증거로 봉이 원을 그리며 휘둘러질 때마다, 봉에 실리는 힘이 더욱 강해지고 있었다.
‘목표를 변경, 무기 파괴를 시도... 실패.’
마력과 기로 강화한 무기는 아무리 총화기를 퍼부어도 흠집 하나 나지 않았다.
‘연산개시... 승리하는 한 수를 찾아야합니다. 연산, 연산, 연산, 연산...!’
“아따, 머리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난다잉? 싸우면서 무슨 생각을 그리해?”
“아......!”
연이어 휘둘러지던 봉격사이로, 불쑥 다가온 체크의 손이 엔데의 멱살을 거칠게 붙잡았다. 그리고는 그대로 거칠게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콰앙! 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엔데의 몸이 바닥을 몇 번이나 굴렀다.
‘예측연산... 모든 결과 실패. 해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쓰러뜨릴 수... 없습니다...!’
다급하게 든 시야 속에서, 그대로 끝장을 내주겠다는 듯 체크가 든 봉에 심상치 않은 마력이 모여들었다.
큭, 하고 엔데는 이를 꽉 깨물었다.
“잠깐 기다려주시겠습니까.”
“응?”
체크를 이겨내는 것도, 체크를 피해 메이벨의 숨통을 끊는 것도 불가능하다 판단한 엔데의 결단은 빨랐다.
한 손을 들고, 신나게 봉을 휘두르던 체크의 움직임을 저지한 것이다.
“이대로 계속한다면 대장님을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접촉한 통신기기는 아직 대장과 연결이 이어져 있거든요.”
“뭐...?”
“어쩌시겠습니까. 아무리 강한 당신이어도 실 대장의 【시간조작】이라면 어쩌지는 못하겠죠.”
“...장난하는기가? 그랬다간 배신자인 느그야말로 쫄릴 텐데?”
“저기 있는 13호는 빌런이 아닌가요. 대장님께선 무슨 일이 있어도 빌런의 숙청을 우선하시겠죠. 눈을 깜박일 틈도 없이 저 사람의 목을 뜯어버리실 겁니다.”
......정말 그렇다. 13호는 애초에 수배까지 된 빌런이고, 엔데가 증언하면 곧바로 실의 표적은 13호가 되어버릴 것이다.
지금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자면, 자신은 히어로를 습격한 빌런으로 밖에 보이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메이벨이 증언해준다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거기다 당신도 문제입니다. 체크, 본래 7번대의 히어로인 당신이 빌런인 13호에게 가담하고 있습니다. 세뇌 기술을 구사하는 애플이 현재 【어비스】에 있다는 것, 그리고 히어로임에도 빌런인 당신들에게 가담한 스페이드의 일로 당신네들은 히어로들을 세뇌하고 다닌다...는 의혹이 있습니다. 메이벨이 저를 적대시한다면, 분명 당신네들이 뭔가 했다고 여기시겠죠.”
그 말도 맞다.
빼도박도 못할 진실이다.
“...그런데 그럼 그냥 부르면 되진않나? 굳이 제안하는 이유는 뭐가?”
“만에 하나, 라는 경우가 있으니까요. 의심받기라도 하면 이후의 계획에 차질이 생깁니다. 그런 건 제가 바라는 바가 아니지요. 하물며 동귀어진이라니 말도 안 됩니다. ‘닥터’는 완벽한 계획을 바라십니다. ...그러니 제안합니다. 여기선 일단 서로 물러나는 게 어떻습니까. 지금 당장 이곳에서 떠나가 주신다면 저도 대장님을 부르지는 않겠습니다.”
“.......”
“제가 사랑하는 도넛님을 걸고 맹세하겠습니다. 이대로 가주신다면 저도 당신들을 추격하는 짓은 하지 않겠습니다.”
“도넛을 월매나 사랑하는겨... 마, 좋대이. 빨리 꺼져버리래이.”
체크가 봉을 든 손에서 힘을 뺐다. 따랑, 하는 소리와 함께 봉의 끝이 바닥에 닿았다.
그 모습을 확인하고, 엔데는 서둘러 하늘을 날아 체크에게서 멀어졌다. 저 멀리 날아가는 그녀의 모습은 금방 보이지 않게 되어버렸다.
* * *
“아마 대장은 지금쯤 마력이 부족해서 전투는 어려울 거랑께... 마, 무리하면 어케 될지 모르겠지만서도.... 일단 도망치랑께, 음냐음냐....”
메이벨은 격한 치료의 영향으로 피로가 몰려오는지 그 말을 끝으로 잠들어버렸다.
그 이상 남아있었다가 다른 히어로들에게 둘러싸이면 큰일이니, 일단은 메이벨을 데리고 도망치게 되었다.
도망이라고 해봐야 아지트에는 돌아갈 수 없었다.
애플의 말이 사실이라면, 지금 이미 아지트는 도로시의 수중에 떨어졌다는 뜻이고, 아지트에 돌아가는 순간 그대로 생선잡이하듯 꼼짝없이 붙잡혀버릴 것이다.
“그래서 이제부터 어쩔겨, 13호?”
“글쎄....”
그렇게 해서 국제거리에서 벗어나, 13호는 근처의 호텔에 오게 되었다. 당연하지만 체크와 기절하듯 잠들어버린 메이벨도 함께였다.
침대에 누워 색색 숨소리를 내며 잠든 메이벨의 얼굴을 내려다보고, 지금은 전혀 반응이 없는 통신용 단말기를 흘끔 쳐다보고, 13호는 얼굴을 가렸다.
“하아... 진짜 어떻게 한다.......”
지금까지는 일이 막히면 의지할 곳이 있었다. 든든한 참모도 도로시도 있었고, 적어도 보스가 한 마디 해주기만 해도 무슨 역경이든 뛰어넘을 수 있을 것은 의욕이 활활 타올랐다.
그러나 도로시가 배신하고 참모까지 붙잡힌 지금... 자신이 도대체 뭘 할 수 있을까.
의욕도 의지도 송두리째 빠져나가는 기분이다.
13호는 우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 * *
“그런가요... 메이벨과 13호는 놓쳤습니까....”
[죄송합니다, ‘닥터’.]
“됐습니다. 플랜은 그 밖에도 많이 있으니까요. 끊겠습니다.”
닥터는 대답도 듣지 않고 뚝 끊어버렸다.
이런 명령 하나 조차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거냐며 화낼까 싶은 마음도 들었지만, 금방 체념했다. 애초에 닥터는 그런 사사로운 일에 목매는 성격은 아니다.
닥터는 앞으로 어떻게 할지 가볍게 머리를 굴리면서 느물느물하게 웃었다.
닥터의 앞에는 도로시가 서있었다. 백의도, 짙은 다크서클도 서로 같아서, 딱 보기에도 혈연이라는 것이 눈에 보였다.
“이것 봐, 멍청한 부하가 실수해버렸어. 실망스럽네. 어쩌지, 누나?”
“......뭘 어쩌지, 야. 애초에 기대도 안 했잖아. 기대도 안 했는데 실망이고 자시고 있을 리가 없잖아.”
“여윽~시 우리 누나야! 동생의 마음을 쫙 꿰뚫고 있잖아! 과연 천재라는 거지! 응! 우리 누나가 최고야! 내가 믿을 사람은 천재인 누나 밖에 없다니까. 난 나 아니면 누나만 믿는다니까!”
“.......”
도로시가 찝찝한 표정으로 시선을 피했다.
그런 도로시의 고개를 닥터는 억지로 돌리고, 얼굴을 가까이 했다.
당장에라도 키스를 할 듯, 입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건 안 돼."
툭, 하고 도로시의 자그마한 손이 지척까지 다가온 닥터의 입을 덮고, 밀어냈다.
그 반응에 닥터가 상처입은 듯 눈썹을 축 늘어뜨렸다.
“어라... 누나, 혹시 내가 싫어? 아니면 화 났어?”
“......아니, 그럴 리가 없잖아.”
“그렇지? 설마 그럴까 싶었어. 깜짝 놀랐잖아. 심장이 떨어질 뻔 했어. 누나가 싫다면 안 할게. 나는 누나를 무지무지무지무지 좋아하는 동생이니까.”
내리깔았던 도로시의 시선이 다시 닥터를 향했다. 닥터의 탁한 눈이, 도로시의 그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럼 웃어주라, 누나. 그런 표정을 지으면, 나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어. 응? 부탁할게.”
“.......”
도로시는 애처롭게 말하는 동생의 말에 잠시 고민하는 듯 싶더니, 어색한 웃음을 지어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