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9화 〉#42 그리고 빌런은 과거의 영광을 되찾는다고 합니다(임시)(3)
그 위험성을 감지하고, 가장 먼저 반응한 건 체크였다.
“탈출한데이!!!!”
쨍-그랑!!
체크의 고함소리와 함께, 이어지는 파쇄음.
라헤의 주먹이 닿기 직전, 엘리베이터의 벽을 부수고 전원 밖으로 뛰쳐나왔다. 도로시며 참모, 닥터는 7번대의 히어로들이 각자 한 명씩 안아든 상태다.
그들이 도망친 것과 다른 측면, 라헤의 주먹이 꿰뚫은 엘리베이터는 벽이며 안쪽까지 순식간에 얼어붙어 그대로 멈춰섰다. 그대로 있었으면 전원 한 번에 얼음과자가 되어버렸을 것이다.
“우,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
“에에잇, 빚이랑께!”
신체강화를 할 수 있는 체크며 스페이드와는 달리, 13호를 포함해 무방비하게 추락하는 인원들을 향해 메이벨은 혀를 차며 붓을 휘둘렀다.
공중에 남은 먹물은 순식간에 퍼져나가, 새 같은 형상이 되어 그들의 몸을 받아주고, 그대로 자연스럽게 활강했다.
그러나 라헤의 맹추격은 끝나지 않았다.
“라, 라헤 대장, 정신을... 꺄아악?!”
“스페이드! 가시나야, 괜찮나?!”
숨을 고를 틈도 없이. 공중에 있어도 아랑곳 않다는 듯 덮쳐든 라헤의 손에 의해, 스페이드는 변변한 저항도 못하고 그 손에 붙잡혀 떨어져내렸다.
우둑! 뚜둑!
쿠우웅!
바로 밑에 있던 나무의 가지가 두 사람의 무게에 깔려 무너져 내리고, 풀붙에 거칠게 내던져진 스페이드의 몸을 라헤가 덮치듯 콱 깔고 앉았다.
“으윽...아......”
“닥터의 적... 죽여야....”
“라헤... 대... 장...!”
라헤가 은빛 검광을 흩뿌리는 그녀의 애도를 높이 들어올렸다. 그대로 내리치면 스페이드의 목숨이 사라진다.
“흐읍!”
그러나 그런 일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체크가 덤벼들었다. 눈에보이지도 않을 정도의 찌르기가, 라헤를 향해 뻗어 나갔지만――라헤의 한 손에 봉 끝이 붙잡혀 막혀버렸다.
다만 그것으로 라헤의 표적이 바뀌었다. 무력화되어 이 이상 움직일 수 없다고 판단한 스페이드를 내버려두고, 라헤는 체크를 향해 달빛 아래의 짐승처럼 달려들었다.
“7번대! 전원 이 짝으로! 내 지시대로 움직이래이! 잠깐이라도 시간을 벌어어어!!!!!”
그녀를 노리고 날아드는 라헤의 공격은 무시무시한 속도였지만, 스페이드며 다른 히어로들과는 경험치가 다른 체크는 아슬아슬하게 그것들을 피하고, 견제하며, 거리를 지켰다. 그런 그녀를 돕고자 새의 등에서 뛰어 내려온 아리아며 클럽이 끼어들고, 닥터의 시스템을 장악한 애플이 엄호하기 위한 파수용 로봇을 불러모았다.
같은 7번대. 대장과 그 부하들이 다대일이라는 구도로 싸우고 있었지만, 승산은 명백했다.
거칠게 날뛰는 짐승처럼, 라헤의 검이 번뜩일 때마다, 라헤의 몸이 쏘아져나갈 때마다 주변이 터져나가고 얼음기둥이 솟아났다. 모두가 간신히 치명상을 피하는 데에 급급했다.
* * *
전투가 벌어진 다른 한쪽 구석. 무사히 착지한 새는 먹물로 변해 녹아내리듯 사라져버렸다. 임시로 만든 골렘은 아주 잠깐 밖에 유지할 수가 없다.
메이벨은 손에 든 커다란 붓으로, 바닥에 철퍽철퍽 탈출용 골렘을 만들어내기 위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도로시! 넌 메이벨이랑 같이 참모랑 네 동생 데리고 도망쳐! 실도 좀 챙겨주고!"
"뭐...?! 13호 넌 어쩌려고?!"
"아니, 쟤네들만 두고 갈 수는...."
"네가 제일 약골이거든?! 멍청한 소리 하지 말고 너도 도망쳐! 어차피 쟤네들은 히어로야! 우린 빌런이고!"
멍청하다는 듯이 비난하는 도로시의 말. 확실히, 히어로인 저들이 시간을 끌어주는 사이에 도망치는 게 최선이긴 하다. 힐끔 쳐다보니, 메이벨도 실 대장을 도망시키기는 찬성이라는 듯 도망치기 위한 골렘을 준비하고 있다.
"그치만...."
"닥쳐!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알겠어?! 넌 어비스의 선봉장이야! 빌런임을 자각하라고 멍청이!"
도로시의 눈이 거절을 허용하지 않았다. 놓치지 않겠다는 듯 나를 꽉 붙들고 사납게 외치고 있다.
"도망칠거면 빨리 타랑께! 그래봐야 얼마나 튈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떻게 해야하나 고민하며 갈팡질팡하는 나를 메이벨이 재촉했다.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뜨고, 도로시의 몸을 밀어냈다.
"나는 걱정 말고 빨리 가, 도로시! 생각하는 게 있어서 그래! 잘만 되면 라헤를 어떻게 할 수 있을지도 몰라! 이쪽은 어떻게든 할 테니까, 혹시 모르니까 넌 도망가라고. 참모 데리고."
"아니... 혹시고 만약에고 없어! 도망칠 거면 같이!"
"정말... 말 좀 들어!"
"너야 말로 말 좀 들어 멍청――!"
짜악!
도로시의 코앞에서, 나는 요란하게 손뼉을 마주쳤다.
그게 스위치가 된 듯, 도로시의 눈에서 빛이 사라지고 마치 인형처럼, 그대로 굳어버렸다.
"도로시, 이건 명령이야. 나를 두고 도망쳐.”
"예, 알겠습니다...."
도로시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비척비척 걸어가 메이벨이 그리는 커다란 그림 위에 섰다. 닥터와 참모는 이미 그 위에 뉘여놓은 채다.
“니네 보스 때도 느꼈는데, 참말로 매정한 남자랑께, 정말.”
메이벨이 투덜거리듯 중얼거렸지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메이벨은 작은 붓을 들고 바닥에 그리는 그림에 색을 입히거나 끝부분을 손을 보거나 하면서 세심하게 조정했다. 그림이 정교하면 정교할수록, 성능과 내구성이 올라간다는 모양이다.
“자, 실 대장도 내려놓으래이.”
드디어 작업이 끝난 듯, 메이벨이 재촉했다.
“......13호 넌, 도망 안가?”
등에 업혀 있던 실을 그림 위에 내려놓자, 실이 힘없이 물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빌런 주제에, 진짜 무르구나 당신은.”
“무른 건 알아. 안다고. 빌런은 좋아하지만, 빌런에는 안 맞는 것도 알아.”
실은 쿡쿡 웃었다.
“괜찮아. 그래서 좋아하니까, 당신을.”
“......프러포즈로 받아도 될까.”
“어머나. 받아주면 고맙지.”
농담인지 아닌지 모르겠는 미소를 짓는다. 정말이지, 이런 절체절명의 상황에 무슨 농담이람.
“그러면 죽기 전에 맹세의 키스를....”
“시끄럽당께, 문디야. 닥치고 빨랑 대장한테서 떨어졋!”
메이벨에게 발로 차였다. 그 모습을 옆에서 본 실이 쿡쿡 웃는다. 저쪽에선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는데 이 쪽에선 콩트를 벌이고 있다니, 마음이 불편하다.
도망칠 인원을 서둘러 대피시키고자 그림에서 떨어지려는 데, 실이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 13호.”
“응? 진짜? 괜찮아? 맹세의 키스 해도 된다는 거지? 지금 바로 해버린다?”
쪽.
농담으로 한 말이었는데, 별안간 옷깃을 끌어 당겨져 강제로 키스 당했다. 혀를 얽은 것도 아닌 단순한 키스였지만, 갑작스런 사태에 그만 얼떨떨 해졌다.
분명 바보 같은 표정을 짓고 있을 나를, 실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바라봤다.
“어, 오....”
“내가 말한 ‘괜찮아’는, 네가 죽지 않을 거라는 뜻. 조금 전에 말했잖아. 방법이 있다고.”
그렇게 말하며 실은 내 손을 두 손으로 맞잡았다.
“맡길게, 13호.”
맞잡은 손 위로, 푸른 시곗바늘이 떠올랐다.
째깍, 째깍, 하는 소리가 귓가에 울려퍼졌다.
* * *
혼란. 당황. 경악.
라헤의 머릿속에서는 다양한 감정이 소용돌이치고 있었고, 어떤게 자신의 감정인지, 자신이 누구였는지도 지금은 모호하게만 느껴졌다.
머리가 어지럽다. 닥터, 라는 단어는 떠오르는 데 그게 뭐였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원래는 일주일은 더 걸려야 했을 세뇌작업을 어거지로 단축한 것, 그리고 세뇌장치를 억지로 벗겨낸 반동으로, 지금 라헤의 머릿속은 완전히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
“―――――――――――!”
짐승 같은 포효. 혹은 한탄 어린 중얼거림. 자신의 것 같지 않은 목소리가 자신의 목에서 흘러나왔다.
무엇을 위해 여기 있는지 모르겠다.
여기가 어디인지 모르겠다.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겠다.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머릿속에 뿌리 깊이 박힌, ‘침입자를, 적을 배제한다’라는 명령만은 남아서, 오로지 그 명령을 이루기 위해 라헤는 이성을 잃은 짐승처럼 날뛰고 있다.
“꺄악?!”
“아악!”
어느샌가 곁에 얼음기둥이 생겨있었다. 어느샌가 바닥이 터져나가 있었다.
아는 얼굴을 한 누군가가 자신의 발에 걷어차여 공중에 떠오르고, 역시 아는 얼굴의 누군가가 그녀의 검에 옆구리를 길게 베여 고운 얼굴을 찡그렸다. 마찬가지로 아는 얼굴의 누군가는 얼음 기둥에 배를 꿰뚫렸다.
쓰러지고, 쓰러지고, 신음하고, 아파한다.
이건 옳지 않아.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몸은 멋대로 움직였다. 모든 것은 오로지 적을 배제하라는, 명령을 이루기 위해서다.
이제는 누구를 위해서인지도 잊어버렸다. 적이 누군지도 잊어버렸다.
그저 보이는 전부를 배제하고 사살하기 위해 라헤는 끼긱끼긱 몸을 움직이고 있다.
적도 아군도 구분이 없는 그녀는, 어쩌면 지구상의 모든 인간을 배제하고 나서야 그 움직임을 멈출지도 몰랐다.
‘......?’
더 이상 덤벼오는 사람들이 없는 그녀의 시야 속에, 하늘로 날아오르는 무언가가 보였다. 거대한 새처럼 보이는 그것의 위에는 사람이 몇 명 올라타있었다.
그게 누구인지는 알 필요 없었다. 고민할 것도 없이, 라헤는 저들도 적으로 인식하고 놓치지 않고 배제하고자 도약하려 했다.
“――그림 속에 갇혀보랑께! 【송도팔경도(松都八景圖)】!!”
그러나 그 순간, 필사적인 외침소리와 함께 바닥에 빛이 났다.
언제부터였는지, 어둑어둑해 잘 보이지 않던 바닥은 커다란 그림으로 가득차 있었다.
산과 들과 호수와 냇물, 폭포며 나무 숲을 본따 그린 여덟가지 그림. 그대로 쳐다보고 있으면 넋을 잃고 빠져버릴 것 같은 그 그림에, 라헤는 마치 늪에 붙잡히듯 풍덩, 빠져버렸다.
잠깐의 부유감. 잠깐의 어지러움.
그리고 다음 순간 나타난 것은 콘크리트 투성이인 현실과는 전혀 다른, 옛 시골을 연상케 하는 이계의 풍경.
‘......여긴?’
아름다운 산수(山水), 그리고 드넓게 이어진 쓸쓸한 소나무 숲 사이에 있는 자신.
초목의 내음을 품은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서, 저도 모르게 마음이 풀어질 뻔 했다.
그림 속의 세상에 빠져버린 것이라고,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머리로도 충분히 깨달을 수 있었다.
메이벨의 능력 중 하나.
아름다운 그림에 사람들이 환상을 보고 그에 빠져들 듯, 메이벨의 능력은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그 그림 속에 이계를 만들고, 그 안에 사람들을 가둬버린다.
이 그림에 갇힌 사람은 메이벨이 지정한 올바른 수순을 밟거나, 혹은 메이벨이 직접 꺼내주지 않으며 나올 수 없다.
‘그래도, 나를 가둘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라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말이다. ‘정의’에 반하는 ‘악’을 상대하는 그녀는, 시간의 틈새조차도 억지로 비집어 연다.
라헤의 몸 안에서 마력이 부풀어올랐다. 당장에라도 이 이계를 갈기갈기 찢어버릴만한 억지스런 힘이 그녀의 안에 소용돌이쳤다.
촤르르르르르륵-!
꽈아아악...!
“...?!”
그러나 한껏 부풀어오른 마력을 해방시키기도 전에, 어디선가 날아든 사슬이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이건.
본 적이 있는 사슬이다.
분명, 【시궁쥐】 습격 작전 때....
“라헤. 정신 좀 차려봐. 내 목소리 기억해? 네 주인님의 목소리야. 떠올려보라고, 내가 만져줄 때마다 기분 좋아서 신음을 흘리던 암캐 시절의 너를.”
들어본 적 있는 목소리.
드넓게 펼쳐진 쓸쓸한 소나무 숲 사이에서 나타난 것은, 역시 본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13호.
닥터의 적이자, 배제해야할 대상이다.
‘아.’
마음이 술렁였다. 이건 무슨 기분일까.
조금 전, 매우 잘 아는 얼굴――7번대의 부하들――을 상대할 때와는 또 다른 기분이다.
“라헤. 기억 안 나? 네 주인님의 얼굴도, 목소리도 다 까먹어버린 거야? 그렇게 다른 남자가 좋았어?”
깐죽깐죽 느글느글하게 웃는 그 목소리를 듣고 있자면, 마음속이 계속해서 술렁였다. 거역해선 안 된다. 거역할 수 없다... 안쪽 깊은 곳에서 그렇게 속삭이는 기분이다.
‘아냐, 아니야!’
라헤는 안 쪽에서 들려오는 영문모를 속삭임을, 족쇄를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떨쳐버렸다.
상대는 적일 뿐이다.
배제해야 할 대상이다.
‘정의’에 반하는 ‘악’이다.
그저 그 뿐이다.
“......악은, 배제...하겠습니다.”
라헤는 스스로에게 들려주듯 작게 중얼거리고, 몸을 낮췄다.
그리고는 한줄기 탄환처럼, 보통의 인간은 반응조차 할 수 없이 민첩하게, 소나무 사이를 지나 13호를 향해 달려나갔다.
13호는 능력을 잃고 몰락한 인간이다. 교접을 통해 어느 정도 마력을 받아들인다 해도, 결국엔 순수한 각성자들에게는 미칠 수 없는 어중간한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나운 짐승처럼 덮쳐드는 라헤의 돌진을 13호가 막아낼 수 있을리 만무하다.
만무할텐데.
퍼-억!
콰직! 우드득! 우득! 콰지지지지직!
“커....헉...?!”
포탄처럼 날아간 라헤의 몸이 몇 그루나 되는 소나무를 부러뜨리고, 저 멀리 있던 커다란 바위에 깊이 파고들었다.
달려들었던 기세 그대로, 묵직한 카운터를 맞고 날아갔다는 사실을, 핑글핑글 도는 시야 속에 깨달았다.
“아...우...?”
“이 느낌도 정말 오랜만이네... 진짜로.”
콜록콜록 기침을 하며, 라헤는 바위 틈새에서 힘겹게 몸을 빼냈다.
라헤는 흔들리는 시야 너머로 13호를 쳐다봤다.
평범해야 했을 13호. 무능하고 몰락한 빌런일 13호.
"미안하지만 라헤, 폭력은 쓰지 않는다는 촌스런 말은 안 할게. 남녀평등 시대는 둘째치고... 너, 무섭거든."
그런 13호가, 눈을 가늘게 뜬 채 조금 전 라헤를 날려버린 손을 팔락팔락 휘젓는 13호가, 어쩐지 무슨 짓을 해도 꿈쩍도 하지 않을 산처럼 거대하게 느껴져서... 라헤는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