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6화 〉#66 그 화가는 빌런을 걱정한다(1)
나는 지금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은 채 집중하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스스로의 내면에 집중한다.
“으으으음...!”
그렇다. 모든 것은 스스로를 믿는 것에서 시작한다.
믿자. 그리고 끌어내는 거다.
내 안에 잠재된――터무니 없는 변태욕구를!
“끄흐응...!”
가부좌를 틀고 두 손을 모은 자세에서, 나는 천천히 거기가 단단해지는 것을 느꼈다.
고요한 명경지수와 같은 마음 상태에서, 자신의 발기한 자지를 컨트롤한다!
“......뭐하고 있냥께, 육갑이.”
빠악!
집중하는 사이 뒤통수를 얻어맞고, 내 고개가 푹 꺾였다.
돌아보니 메이벨이 노기로 그 고운 뺨을 부들부들 떨며 내려보고 있었다. 지금 막 도착한 모양이었다.
그녀가 여기에 있는 건 이상할 게 아니다.
그도 그럴게, 지금 내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는 곳이 4번대 기지 행정실의 책상 위였으니까.
그것도 마침 자리에 없던 메이벨의 책상 위.
“이 멍청이가! 남의 기지 한복판에서 뭐하는 짓이랑께! 참말로! 그리고 내 책상 위에서...!”
“수련을 좀....”
변명을 하고자 했더니 눈을 부릅뜨고 죽일듯이 노려봐서, 나는 깨갱, 하고 고개를 숙였다.
주변을 둘러보면, 한창 서류작업 중인 4번대의 대원들이 거북한 눈으로 나를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다.
이미 엔데나 메이벨을 이용해 4번대 대원들은 전원 세뇌를 마친 상태다. 완전히 내 손 안에 있다고.
빌런인 내가 이런 곳에서 이런 짓을 해도, 일하는 한복판에서 브레이크 댄스를 추든 알몸 똥꼬쇼를 하든 아무도 나를 신고하지도 체포하지도 못해!
“수련이라니, 그딴 걸 왜 여기서, 이딴 식으로, 하냐고! 그보다 옷 좀 입으랑께! 변태 자식아!”
손으로 만지기도 싫다는 듯 언제나 차고 다니는 얇은 붓의 끝으로 책상 위에 앉아있는 내 가슴 언저리를 쿡쿡쿡쿡 찔러댄다.
참고로 지금의 나는 알몸이기 때문에.
붓의 솔이 맨살에 닿아서 간질간질하다. 이런 플레이도 나쁘지 않은걸. 당하는 쪽이 아니라 하는 쪽이라면.
내 가슴을 간질간질하던 메이벨이 그제서야 줄곧 피하고 있던 아래를 내려보고, 흠칫 놀랐다.
“흐, 흐잇?! 왜 여기서 혼자 이딴 식으로 세는데... 변태야... 변태야...!”
완전히 임전태세에 들어간 자지의 모습에 놀랐는지 멀어지려 하면서도 흘끔흘끔 시선을 돌리는 메이벨.
희고 고운 뺨이 벌써 발갛게 붉어져 간다.
“왜, 내 물건이 신경 쓰여?”
응. 솔직히 말하자면 놀리러 온 거다.
백설 선녀의 일도 그렇고 보스의 말도 그렇고, 이래저래 스트레스가 됐으니까.
놀려먹기 좋은 메이벨은 놀리러 왔을 뿐이다.
‘저번에 분위기 좋았지.’
메이벨은 세뇌약까지 이용해 내게 야한 짓을 강요했었다. 달라붙고, 자지를 빨고, 스스로 허리를 흔들면서 애원하기까지 하고, 전부 잊어버리도록 강요했다.
물론 가짜약이었으니 세뇌 같은 건 당하지 않았지만은.
잊어버리지도 않았다. 똑똑히 기억한다. 메이벨의 달콤한 목소리도, 쫀득하게 달라붙던 살과 질벽의 감촉도 전부.
여기까지 보면 그냥 명백하다.
‘그린라이트네.’
최근 실한테서 세뇌약을 몰래 받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메이벨은 분명 내게 반한 것이다.
지금도 발정이 나서 어쩔 수 없겠지. 내가 신경 쓰이고, 이 자리에서도 체면도 잊고 염치없이 달려들게 분명하다.
후, 후후후.
자, 메이벨. 언제든지 안겨들렴.
얼마든지 네 욕망을 발산해.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그렇게 내 마음을 치유해줘!
나는 온후한 느낌으로 두 팔을 벌렸다.
“자.”
언제든 받아들일 준비 오케이다. 자, 어서와 메이벨. 내 물건을 입에 물고 열심히 쪽쪽 빨아도 좋아. 아니면 내 품에 안겨서 뺨을 부비부비 문대고 내 땀을 핥아마시면서 나를 위로해주렴!
“......팔푼이 육갑이.”
그러나 메이벨은 한숨을 내쉬더니, 등에 언제나 짊어지고 다니던 붓을 손에 들었다.
딱 메이벨의 키만한 거대한 붓을 힘차게 빙글 돌리더니,
“꺼져어어어어어어~~~~~~!!!!!!”
“꺼헉?!”
가차 없이 내 몸을 후드려 패 날려버렸다.
꽈당탕 책상이며 의자를 잔뜩 넘어뜨리며 쓰러진 나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 * *
창문 바깥에서, 치적거리는 빗소리가 들려왔다.
최근 날이 더워지나 싶더니, 이제는 또 며칠이나 비가 내리고 있다. 시원한 건 좋지만, 습한 건 신경 쓰인다.
메이벨은 한숨과 함께 한지 위에 놀리던 붓을 내려놓았다. 비싸 보이는 한지에는 달필로 쓴 글자가 열과 오를 맞춰 늘어서 있다.
보기에는 예뻐 보여도, 메이벨은 영 만족할 수가 없었지만.
‘먹물도 붓도 한지도... 습하니까 이래저래 상태가 이상해.’
이건 이것대로의 느낌이 있지만, 역시 평소와의 괴리감 때문에 영 불편한 기분이다.
작품을 버릴 수도 없으므로 마를 때까지 기다렸다가 돌돌 말고 밝은 색의 끈으로 묶었다.
4번대의 행정실에는 현재, 다른 히어로는 없었다. 전부 퇴근했다.
“......으음.”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근처에 대충 눕혀놓았던 13호가 신음성을 냈다. 메이벨에게 얻어맞고 기절한 뒤로, 줄곧 잠들어 있었다.
“어라. 뭐야.... 우왓?! 이건 또 뭐야?!”
아직 잠이 덜 깼는지 13호가 당황하며 외쳤다.
지금 13호의 밑에는 메이벨이 임시로 만들어 놓은 『먹물침대』가 깔려있었다. 놀랄 만도 하다.
옷은 차마 먹물로 만들어내기 그래서, 마침 가지고 있던 현대풍 한복으로 입혀놨다.
정말 마침 가지고 있었을 뿐이다.
우연히 기지 행정실 캐비넷 안에 넣어놨을 뿐이다.
메이벨과 맞춘 듯한 디자인과 색깔이지만, 정말 우! 연! 이다.
“깼으면 소란피우지말고 내려와, 빙시야.”
메이벨이 내려놓았던 작은 붓을 마법지팡이처럼 흔들자, 곧바로 13호의 밑에 깔려있던 먹물침대가 스르르르 녹아들 듯 사라졌다.
쿵! 하고 13호의 몸이 바닥에 내팽개쳐진다.
끄어억... 허리가... 하고 13호가 죽을 듯이 꺽꺽댔다.
“아욱... 조, 좀만 살살... 아니, 그보다 나 얼마나 잔 거야?”
메이벨은 답해주기 보다는, 붓 끝으로 창가를 가리켰다.
창문 바깥에선 비가 내리고 있었으며, 이미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
“말도 안 돼....”
밤이다.
13호가 찾아온 건 한창 낮인 오후였는데, 밖이 이렇게 새카매지다니 정말 몇 시간이나 잠들었던 걸까.
하루를 통째로 날려버렸다.
그러니 13호의 항의도 부당한 건 아니었다.
“말도 안 돼, 벨. 몇시간이나 기절할 정도로 때려패는 게 말이 돼? 우리 그래도 힘을 합쳐 싸운, 추억을 공유한 동료잖아!”
“별 개소리를. 너는 빌런이고 내는 히어로. 근데 무슨 동료 타령이야, 동료는.”
“동료라고 생각한 건 나 뿐이었구나....”
“그래, 너 뿐이랑께.”
“나쁜 여자! 난 그냥 장난이었다는 거구나!”
“........”
메이벨이 지긋지긋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닥쳐봐 좀... 진짜 죽여버리고 싶으니께....”
진심으로 짜증이 담긴 살벌한 목소리에 무심코 입을 닫았다.
아니, 농담 좀 받아주라. 이 분위기 어쩔 건데. 가볍게 가볍게 좋게 좋게 넘어가고 싶은 내 마음을 알아채주길 바래.
“진짜, 정신 좀 똑띠 차리지 못하겄드나? 응?”
메이벨은 앉아있던 자리에서 벌컥 일어나, 여전히 꼴사납게 주저앉아있는 내게 다가왔다.
손에는 그녀의 무기인 붓이 들려있다.
어, 어, 어, 어?!
뭐하려고?! 무슨 짓을 하려고?!
나 메이벨에게 살상금지 암시 걸어놨던가? 「약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순종한다」 같은 암시는 걸어놨는데, 폭력금지 같은 건 안 걸어놨던 것 같기도 한....
쭉 뻗은 메이벨의 팔이, 그 손이 13호의 멱살을 콱 잡았다.
“너, 마지막으로 잔 게 언제야.”
“살려줘! 미안, 잘못했......응?”
“언제 잤냐고 묻잖어야, 팔푼아.”
13호의 멱살을 붙잡고 추궁하는 메이벨.
귀찮다는 듯이, 그러나 날카롭게 내려다보는 눈도, 그 거짓을 허용하지 않는 엄한 분위기도.
항상 호랑방탕한 그녀로서는 보기 드물게 진심으로 분노하고 있음이 절절히 느껴졌다.
단순히 빌런과 히어로로서 적대하는 따끔따끔한 분위기와도 전혀 달랐다.
“......언제 잤긴. 어젯밤에 잤어. 누가 들으면 철야로 일 하는 줄 알겠네.”
“그래? 그럼 질문을 바꿔 불까? 요 일주일, 다해서 몇 시간 잤지? 거짓 없이 대답해보랑께?”
13호가 칫, 하고 혀를 찼다.
그러고보니 이 여자는 감이 좋다. 별자리의 능력도 능력이지만, 그녀가 4번대의 대장대리까지 할 수 있는 건 그 『미래예지』에 가까운 직감 때문이다.
거짓말을 할까도 생각하지만, 포기하고 손을 들어 세보았다.
잠은 거르지 않고 잤지만, 잠을 잔 시간을 계산해보자면 두 손까지는 필요 없었다.
메이벨은 13호가 들어 올린 손가락을 확인하고, 다시 한번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상적인 수면시간이 아니다.
메이벨은 언짢은 표정으로 멱살을 놔주었다.
“그래서, 무슨 일인데?”
“.......”
“말 안하냐잉?”
“...안 해. 말 할 의무 없잖아.”
토라진 듯이 고개를 돌리는 13호.
――니가 무슨 얼라냐!
당장에라도 그렇게 외치면서 마구 화를 내고 싶었지만, 개인적인 일이라면 말하기 어려운 것도 이해못할 것도 아니다.
그래도 조금 전 맨 처음 봤을 때만큼 안색이 나쁘진 않았다.
‘...깜짝 놀라부렀지.’
대장대리로써 본부에서의 회의를 마치고 돌아왔더니, 알몸으로 책상 위에서 가부좌를 틀고 있는 13호를 발견하고.
그리고 이어서 당장 죽을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단 것도 깨닫고, 무심결에 단숨에 기절시켜버렸다.
기절시켜서 재웠는데도 내내 땀이며 신음을 흘리기도 하고....
“걱정시키지 마라.”
“......어?”
무심코 튀어나온 말에, 메이벨이 당황하고 13호도 의아한 듯 돌아봤다.
저번에 실 대장이 전해준 세뇌약으로 이런저런 짓을 했다곤 해도, 표면상으로는 계속해서 적대하는 척을 하던 메이벨이다.
그런 그녀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왔으니, 13호라도 당황해버리고 만다.
메이벨도 당황한 눈치였지만, 혀를 한 번 찰 뿐 정정하지는 않았다.
“내는 히어로고, 너는 빌런. 심지어 너는 우리 4번대 애들을 전원 세뇌한 나쁜 악질 범죄자랑께.”
“그렇지.”
“내는 너를 좋아할 수가 없당께. 좋아해선 안 되고. 미워해야한당께. 너는 악이고, 내는 정의니까.”
딸깍.
메이벨은 근처에 놓여져 있던 포트기의 스위치를 올렸다.
마찬가지로 근처에 놓인 도기 찻주전자에 찻잎을 넣는 사이, 뽀르르륵― 물이 끓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무 말 없이 물이 완전히 끓기를 기다려, 천천히 찻주전자에 부어 넣었다. 비치된 수저로 가볍게 젓고, 미리 데워 둔 도기 찻잔에 내용물을 따랐다.
붉은 기가 감도는, 맑은 빛깔의 차가 자그마한 찻잔 안에서 찰랑였다.
메이벨이 내용물이 흐르지 않게 조심히 들어, 13호에게 건넸다.
“그래도 걱정이 되는 걸 어쩌겠나.”
따뜻한 잔을 두 손으로 받아들고.
동시에 진심이 담긴 따뜻한 말이 스며들 듯 전해져왔다.
“히어로인 메이벨이라면 몰라도, 적어도 나... 인간 메이벨은 걱정하고 마는 것을.”
도대체 어찌하여야 좋을꼬.
메이벨이 고운 눈썹을 축 늘어뜨린 채 풀이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촉촉하게 젖은 그 눈에서, 그리고 분한 듯 오므린 입술에서.
히어로로서의 가면을 쓸 여유도 없이, 그녀가 진심으로 13호를 걱정하고 있음이 절절히 드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