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화 〉1부 1장 (2)
악의 조직 다크 레기온의 우두머리이자 이 세계 만악의 근원, '성주(星主)'.
파괴신의 사제인 그는 본인의 고향별에 파괴신을 불러 세계를 멸망시켰고, 여러 행성을 오다니며 행성을 부수고 다녔다.
그가 지구에 오기 직전에 부순 세계는 테라(Tera).
과학 대신 마력이 발달한 세계에 파괴신을 소환해 멸망시킨 성주는 테라의 일곱 정령을 사로잡아 세뇌하였고, 테라와 미세하게 연결되어 있던 흔적을 추적해 지구를 발견했다.
성주는 파괴신을 위해 곧장 지구로 날아갔으나, '예언'에 따라 그를 기다리고 있던 열두 명의 영웅들과 전투에서 큰 부상을 입고 패퇴하게 된다.
이능력자.
마력을 각성해 초인적인 능력을 얻게 된 인류의 영웅들.
그 영웅들 중에서도 가장 강한 12인과 맞서 싸워, 성주는 간신히 12명을 쓰러뜨리지만 불의의 일격을 받아 후퇴하게 된다.
수십 년을 캡슐에 처박힌 채 오로지 회복에만 전념해야 하는 깊은 상처.
결국 스스로 나서지 못하게 된 상황에 이르자, 성주는 테라에서 세뇌한 일곱 정령을 간부로 둔갑시켜 지구에 파견한다. 첫 간부부터 마지막 간부-피닉스 까지 파견을 마친 성주는 치료를 위해 깊은 잠에 빠졌다.
'그러니까 지금 내 움직임이 성주에게 들킬 리는 없다.'
이미 피닉스가 마그마 속에 있다는 것이 이를 증명하고 있었다. 피닉스는 성주가 다른 정령들에 비해 심혈을 기울여 최후의 최후까지 세뇌한 끝에 지상에 내려보낸 최종병기.
만약 성주가 눈을 뜨고 있었다면, 이미 진즉에 내 이상행동을 파악했을 터.
'그럼 무리해서라도 내려와서 다시 세뇌하겠지.'
전투력과는 별개로, 눈만 마주쳐도 '흐아앙 성주님 갱장해여엇!'의 상태가 되어버릴 것이다. 그건 절대로 사양이다.
'성주가 치료 마치는 게 원작 후반부니까.'
성주가 의식을 되찾는 시기는 아이러니하게도 주인공과 창염의 피닉스가 대결하던 순간이었다.
'사실 피닉스 각성한 거 성주 책임도 있고.'
성주는 의식을 차리고 지상에 파견한 최종병기의 상태를 점검하기 위해 자신의 세뇌빔을 발사한다.
하필이면 그게 한창 주인공과의 전투에서 세뇌빔을 다시 맞는 바람에 큰 반발이 일어나고, 이로 인해 피닉스는 폭주하여 괴수이자 간부가 아닌 '정령'으로서의 자신을 되찾는다.
주인공과 피닉스가 붙는 것은 작중 후반부. 그러므로 내가 가장 먼저 할 일은 딱 하나다.
'시점 확인.'
왜 시간 여행을 하는 캐릭터들이 으레 그러하지 않은가. 지나가던 사람을 붙잡고 몇 년이냐고 묻는 거. 내게는 지금 그런 순간이 필요했다.
'근데 아무도 없네.'
화산을 뚫고 밖으로 나온 지 벌써 10분째. 한 방향으로 계속 날아가고 있음에도 보이는 것은 오로지 바다, 바다, 바다뿐이었다.
'그냥 처음 있던 무인도에서 찾을 걸 그랬나.'
최초로 밖을 나왔을 때 훑었던 섬은 인간의 흔적이 없는 무인도였다.
인근에 다른 섬도 있었지만 멀리 보였지만 시야에는 사람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고, 결국 날아서 어딘가 도시나 사람을 찾기로 마음먹었다.
'거리로 봐선 꽤 멀리 날아온 것 같은데.'
정확한 거리는 모르지만 분명 수백 km는 날아왔을 것이다.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광경. 제 스스로 느끼는 날갯짓의 속도.
체감상 아무리 못해도 어지간한 스포츠카 이상의 속력이었다.
"방향을 바꿀...어라?"
수평선 너머에 바다가 아닌 색이 보인다.
눈에 마력을 불어넣어 시력을 강화하자 보이는 것은 현대의 항구도시. 공장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매캐한 연기와 아스팔트의 숲은 현실 속 도시를 그대로 복사한 것 같은 광경이었다.
'오픈 월드로 각 도시 구현은 진짜 쩔었지. 근데.'
도시 곳곳에 흩날리는 붉은 국기만 아니었어도 그냥 그러려니 했을 것이다.
'중국?'
날갯짓을 급하게 멈췄다. 방향감각도 없이 한 쪽으로만 날아왔는데 중국의 해안 도시에 도착해버렸다.
'어디서부터 날아온 거야 그러면?'
원래 있던 장소라도 알았다면 모를까, 그냥 무작정 뛰쳐나와서 아무 곳이나 도시를 찾겠다는 생각에 나섰다.
'스타트 도시로 중국은 좀 많이 그런데.'
중국이라는 나라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중국에 있을 그 '미친년'이 혹시나 나를 눈치 챌 까봐 걱정될 뿐이다. 딱히 마력을 숨기며 움직인 게 아니니까.
스으윽--
체외로 방출되는 잔여 마력을 거두고 날개를 접었다. 이대로 도시에 들어가면 분명 '대괴수레이더'에 잡히고 말 터.
'일단 방향을 바꿀까?'
눈앞의 도시가 중국의 도시가 맞는다는 가정하에, 해안선을 따라 날아가다 보면 언젠가 한국에 닿을 것이다. 가다가 문제의 '그 지역'을 보고 가도 좋고.
'괴수 레이더가 없는 쪽으로 밀입국하면 되겠다.'
마력을 완전히 숨기기 전까지는 섣불리 인간의 영역에 들어갈 수 없다. 그렇다면 레이더에 걸리지 않는 루트는 하나.
'옛 북한에서 내려가는 [괴수의 길]. 그거밖에는 없지.'
게임 내의 설정이기는 하지만 이 세상에서 북한은 붕괴되었다. 체제나 전쟁이 아니라 '괴수의 폭주' 때문에.
핵에서 태어난 괴수, '뉴클리언'.
'최종 보스보다 더 어려운 히든보스'라고 악명이 자자한 괴수 하나가 평양을 지도에서 지워버리고 북한 어딘가에 잠들어있다.
물론 그래 봐야 피닉스가 열 배는 더 강하고 백 배는 더 귀엽...
'정신 차리자. 이제 그 피닉스가 너다.'
게임의 이런저런 요소들을 생각할 때마다 게임-을 빙자한 또 다른 세계에 들어왔다는 것을 까먹을 때가 종종 있다.
나는 고개를 세차게 젓고 해안선을 따라 조용히 날았다.
'쭉 타고 올라가다가 튀어나온 곳에서 적당히 날아가면 되겠지?'
역사 시간에 자주 졸아서 자세히는 모르지만, 대항해시대는 자주 했다.
덕분에 다른 건 몰라도 중국에서 서해를 향해 튀어나온 부분-나중에 검색해보니 산둥반도라고 불리는 그곳-에서 동쪽으로 날라가면 한국이 나올 거라는 건 알고 있다.
따끔, 따끔.
피부 바깥에 두른 마력의 장벽이 따끔거린다. 괴인 중에서도 유독 마력에 대한 반응이 민감한 피닉스다.
'걸렸나? ...걸렸네.'
바람을 타고 흐르는 거센 마력에는 명백한 적의가 섞여 있었다. 적은 분명 나를 눈치챘다.
'조심할 걸'
다행히 이 위치는 구름 한 점 없다.
피시이이이-
마력을 방출해 주변 환경과 동화했다. 태양 빛이 닿는 곳이라면 얼마든지 몸을 숨길 수 있는 피닉스 고유의 은폐기술. 적은 이쪽이 흘린 마력의 잔재는 느껴도, 그 실체를 쉽게 찾지는 못할 것이다.
'도망칠까?'
아직 '적'이 누구인지는 모른다. 그런데 만약 바람을 타고 오는 저 적의 가득한 마력의 주인이 피닉스에 위협을 넣을 수 있는 영웅-최악의 경우 주인공이거나 12 영웅 중 한 명이라면?
'아니야.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이건 기회야.'
머릿속으로는 수많은 시뮬레이션을 거쳤지만, 마그마 속에서 갈무리한 피닉스의 힘이 얼마나 되는지 알아야 했다.
게임과 달리 이 세계에서 죽으면 그대로 생을 마감할지 모르니까.
"후우, 후."
크게 심호흡을 하며 손가락을 까닥였다.
피닉스는 분명 최강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지만, 지금 그 피닉스의 육체를 움직이는 사람은 '나'다.
슈퍼카를 모는 장롱면허 드라이버. 비유하자면 딱 그 꼴일까.
'온다.'
이제는 피부에 직접 와닿을 만큼 거센 바람이 다가온다. 청각에 집중할수록 바람 소리와 함께 점점 가까워지는 말발굽 소리-
"...응?"
말발굽 소리? 내가 잘 못 들었나? 의아함에 저 멀리서 보이는 점을 향해 눈을 부릅떴다.
다그닥, 다그닥!
허공을 황야처럼 달리는 붉은 말.
그리고 그 위에 올라탄 녹색 전포. 흑색의 긴 수염이 달린 붉은 가면 아래의 두 눈동자는 명백히 나를 찾고 있었다.
"아, 미친."
튜토리얼 보스로 너무 센 놈-아니 년-이 나타났다. 알고는 있었지만 진짜로 마력 감응력이 이 정도로 뛰어날 줄이야.
다그닥, 다그닥!
언월도를 움켜쥐며 달리는-날아오는?-적토마에 오른 무인.
히어로명, '운장(雲長)'.
중국 최강의 무장이자 성주의 최초 침략을 막아낸 12 영웅 중 한 명. 후에는 또 다른 이명, '군신'이라고도 불리게 될 영웅.
그 괴물이 지금 태양 빛 속에 숨어든 내 실체를 느끼고는 언월도를 휘두르려 하고 있다. 나를 향해.
"튜토리얼 보스가 너무 강하잖아?!"
나는 그야말로 새된 비명을 지르며, 온몸에 푸른 불꽃을 둘렀다.
* * *
히어로 협회, 항저우 지부는 때아닌 혼란에 빠졌다.
"레이더에 괴수 반응! 해안선을 따라 북상 중!"
'대괴수레이더'를 관측하던 직원의 보고에 상황실 모두가 침묵했다.
"젠장! 어떤 괴수인지는 몰라?!"
"처음 보는 패턴입니다!"
"위성 영상 관측 중! 아무 괴수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럴 리가 없잖아! S급 이상의 괴수다! 못해도 20m는 넘을 거야!"
공황에 빠진 부하의 대답에 지부장, 류 요호는 손톱을 물어뜯었다.
처음 보는 타입의 괴수. 최초로 사냥하는 데 성공한다면 당에 크게 기여할 수 있겠지만, 레이더에 띄워진 그 크기에 겁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위성은?! 아직도 못 찾았나?!"
"죄, 죄송합니다! 황해를 다 훑었는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저렇게 반응이 큰데 안 보일 리가 없잖아! 다시 찾아!"
지부장의 호통에 위성 화면을 보던 이들이 다시 영상을 훑기 시작했다.
말로는 S급이라고 부하들을 윽박질렀지만, 레이더 위에 찍힌 구체의 크기는 기존의 위험도 'S급'보다도 더 컸다.
'...젠장.'
지부장은 떠올렸다.
신입 시절에 지부 전체를, 아니 중국 전역을 공포에 떨게 했던 S급 괴수 '흑전갈'. 백만에 달하는 사람을 먹어치우고 도시를 파괴한 그 재앙의 화신도 저 정도 마력을 가지지는 않았다.
'이게 괴수라고?'
그야말로 걸어 다니는 성. 일반적으로 마력과 그 크기가 비례하는 괴수의 특성을 생각해보면 절대 위성에 보이지 않을 리가 없었다.
'만약 눈에 보이지 않는다면-'
퍼뜩 스쳐 간 생각에 지부장은 황급히 부하들에게 소리쳤다.
"바다! 수면 아래는?!"
상황실에 있던 이들 중 몇몇 이들이 감탄했다. 분명 마력 반응이 있음에도 눈에 보이지 않는다면, 당연히 눈에 보이지 않을 위치에 괴수가 있지 않겠는가.
마력 반응으로 예상해보면 거대한 섬 정도의 크기일 것이다.
"당장 해저 열원 반응 점검해! 해군에 연락하고!"
"예!"
지부장은 다시 손톱을 뜯으며 고민에 빠졌다.
'그래서 확인한 뒤에는 뭐 어찌할 거냐?'
육지에 있는 S급 괴수도 상대하기 어려운데, 하물며 바다에 있는 S급-혹은 그 이상-을 상대하라니.
'지금 여기 전력으로 감당이 되나?'
불가능하다.
전 세계에서 히어로가 가장 많고 각 지부에 등록된 히어로가 타국 전체의 히어로보다 더 많다고 자부하는 중국인 만큼, 현재 이곳 지부에 등록된 히어로만 해도 차고 넘친다.
하지만 해상 전투라는 특수한 전장 상황을 고려하면 전력이 더 필요하다.
그리고 지부의 주요 전력은 현재 내륙으로 차출되어있다.
'군에 연락해?'
히어로 협회가 생기며 군-정확히는 당과 알력이 크게 생겼지만, 일단 이 지역의 수천만 인구를 살리려면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했다.
만약 괴수가 저 속도로 해안선을 따라 움직이는 게 아니라 도시를 습격한다면-
'예전 계획대로 한반도 방향으로 유도를....'
삐비비빅!!
갑작스러운 호출음에 지부장이 화들짝 놀랐다.
[이쪽은 . 응답하라, 항저우 지부.]
중후한 목소리가 상황실을 가득 메웠다. 붉은 가면 아래에 수염을 쓸어내리는 이의 등장에, 지부장은 환한 미소로 그를 맞았다.
"아, '미염공'님!"
[...그 호칭은 싫다고 말했을 텐데.]
과연 12 영웅-에 소속된 영웅 중 한 명. S급 이상의 괴수를 앞에 두고도 여유가 가득해보였다. 지부장은 재빨리 호칭을 고치며 상황을 설명했다.
"...이런 상황입니다. 운장님, 지금 어디에?"
[항저우 상공. 와 함께 왔으니, 곧 목표지점에 도착할 터.]
지부장은 감탄했다. 과연 적토의 주인. 비록 지금 적토에 탄 이는 무신이 아닌 군신이지만, 그 일신의 무력은 현재 중국 최강이라 자부할 수 있었다.
"레이더에 다시 반응! 목표의 마력 반응이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합니다!"
"무엇?!"
레이더의 구체는 그 크기가 점점 줄어들더니, 금세 C급 이하로 떨어지더니 자취를 감췄다.
"레이더 반응 소실...?!"
"미친!"
레이더에 문제가 있을 리는 없다. 수 초도 되지 않는 순간에 반응이 소멸했다는 것은 단 두 가지 상황만을 의미했다.
퇴치되었거나-
"지성체?!"
[곤란하게 됐군.]
S급 이상의 그 거대한 마력을 갑자기 숨겼다. 다른 멍청한 괴수들과는 달리 자신의 마력 반응을 숨길 '지능'이 있다는 방증이었다.
왜 상하이에 나타난 순간부터 마력을 드러냈으면서 이제야 마력을 숨긴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중요한 건 레이더 반응에서 사라졌다는 거다.
"위성은?!"
"여, 여전히 아무것도 안 보입니다!"
"하다못해 바닷속 그림자라도 있을 거 아냐?! 찾아!"
"찾아보겠습니다!"
지부장의 호통에 부하들이 다시 위성 화면으로 눈을 돌렸지만, 가면의 무장은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먼저 요격하겠다.]
"네?! 예?!"
[걱정마라.]
나긋하게 말하는 운장의 목소리는 분명 여유가 흘러넘쳤다.
[금방 적의 수급을 취해올테니.]
파직. 일방적으로 끊어진 교신에 지부장은 허망히 검은 화면만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