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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염의 피닉스-9화 (9/1,497)

〈 9화 〉1부 1장 (8)

인천국제공항.

과거 한국 최대 규모의 공항이었지만 지금은 괴수들의 소굴이 된 대규모 던전이 되고 말았다.

평양사태 이후 북쪽에서 내려오는 괴수들을 군과 협회에서는 어떻게든 막아내 보려고 했다.

하지만 그야말로 물밀 듯이 몰려오는 괴수들의 파도에 사람들은 지쳐갔고, 결국 수도 자체를 옮기면서 인천 외곽의 섬들과 경기 북부 일대는 그야말로 '버려졌다'.

인간의 손이 닿지 않게 된 옛 공항. 이곳은 이제 괴수들의 터전이다. S급 영웅도 쉽사리 발을 들이지 못하는 마경.

그곳이 지금 단 한 명의 포식자에게 유린당하고 있다.

캬오오오오!

독수리를 닮은 괴수가 발톱을 번뜩이며 달려든다. 먹이를 낚아채듯 벌어진 발톱은 상대의 머리를 움켜쥐었으나,

까아앙!

연록의 베일에 막혀 튕겨 나갔다. 소녀는 베일을 휘둘러 괴수의 발톱을 묶었고, 독수리 괴수는 베일을 찢지 못했다. 오히려 괴수는 소녀의 앙증맞은 손길에 발목을 잡혔다.

콰아앙!

"캬아아악?!"

독수리는 발목이 잡힌 채로 바닥에 패대기쳐졌다. 아스팔트를 움푹 팰 정도로 땅바닥에 처박힌 고통에 독수리 괴수는 순간 의식을 잃었다.

서걱.

그것이 독수리 괴수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상대는 날카롭게 자라난 검지의 손톱으로 독수리의 대가리를 날렸다.

"...끙."

괴수에게서 튄 보라색 피가 볼에 묻었다. 소녀, 피닉스는 베일을 쓱 당겨 피를 닦아냈다. 베일은 스펀지처럼 피를 머금었으나 원래의 색을 잃지 않았다.

푸욱!

피닉스가 독수리의 사체에 손톱을 박아넣었다. 손끝에서 피어오른 불꽃은 눈 깜짝할 사이 사후경직으로 꿈틀거리던 피와 살을 태워버리고 야구공만 한 코어만이 남았다.

"12개째."

피닉스는 바닥에 둔 스포츠용 크로스백에 구슬을 집어넣었다. 이미 그 안에는 바로 앞에 넣은 괴수의 코어와 엇비슷한 크기의 것들이 가득 담겨있었다.

'아직 모자란가?'

크로스백을 어깨에 걸친 피닉스는 깨진 유리를 밟으며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한국 7대 던전 중 하나. 국제공항을 중심으로 한 이 던전은 원작에서도 인천 소재 최고 난이도의 던전이었다.

"서해무기에게 영종도를 점령하라고 말했지만...."

피닉스는 깍지를 끼고는 손을 털었다. 이미 건물 안에는 피닉스가 흘리는 미약한 마력에 반응해 입맛을 다시는 괴수들이 하나둘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가는 길에 파밍 좀 하고 가도 문제 될 건 없잖아요?"

'내가 지 주인인데 뭘 어쩌겠어.'

속으로 말을 삼킨 피닉스는 두 손을 붙였다 떼었다.

우우웅-

손에서 피어오른 푸른 불꽃은 피닉스의 주먹을 감쌌다.

마치 불꽃이 피어오르는 건틀릿을 착용한듯한 형태.

키아아아악!

불꽃에서 심상찮은 마력을 느낀 듯 가장 가까이 있던 괴수가 번쩍 점프하며 달려들었다.

"흡!"

호랑이와 같은 외양의 괴수가 거대한 앞발을 휘두르기 직전. 자세를 숙이고 호랑이 괴수의 아래로 파고든 피닉스는 그대로 주먹을 하늘로 뻗으며 솟아올랐다.

앞발을 아슬아슬하게 피해내며 괴수의 가슴팍에 닿은 주먹은 괴수의 질긴 피부를 뚫고 내장에 닿았다.

끄어어어어엉?!

흉부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충격에 괴수는 허공에서 발버둥을 치지만, 피닉스는 손가락을 움직이며 갈비뼈 속에 숨어있던 코어를 낚아채었다.

"열셋."

피닉스는 코어를 꽉 쥐고 남은 주먹을 괴수에게 스트레이트로 꽂았다. 괴수는 코어가 뜯겨나간 그대로 날아가 유리창에 부딪혀 밖으로 떨어졌다.

"에이. 묻었네요."

괴수의 보라색 피가 옷에 튀었다. 피닉스가 베일을 잡아당겨 옷 위를 문지르자, 베일은 게걸스럽게 괴수의 피를 빨아당겼다.

"선물 받은 옷인데 그래도 더럽히면 안 되죠."

자존심을 꺾고 어떻게든 입기는 했지만, 서울에 들어가면 바로 옷부터 새로 살 계획이었다. 그전까지는 단벌로 버텨야 했다.

"그러니까 우리 신사적으로 싸우지 않겠어요?"

피닉스가 상큼한 미소로 웃었지만, 괴수들은 여전히 적의를 보인다. 그 모습에 피닉스는 기가 죽기는커녕 더 진한 미소를 띠었다.

'역시 이 정도 출력이면 딱 적당하네.'

너무 드러내면 전 세계에 비상이 걸릴 테고 또 너무 숨기면 서해무기에게 잡아먹히는 일이 생길 것이다.

그래서 딱 적당한 마력만 느낄 수 있도록 출력을 조정했다.

B급 요괴 피닉스. 이 세계에 요괴는 존재하지 않으니 B급 빌런 피닉스라고 불리게 될 것이다. 어차피 앞으로 할 행동들을 생각하면 히어로라고 하기에는 거리가 백만 광년 떨어져 있으니까.

'어차피 악의 조직 간부 중 한 명인데 뭘.'

대답은커녕 저마다 이빨과 손톱을 드러내며 달려드는 괴수를 상대로 피닉스는 주먹을 말아쥐었다.

"제가 오늘은 기분이 저기압이거든요?"

피닉스는 목도리처럼 걸어둔 베일을 벗어 던지며 소리쳤다.

"그래서 조금 스트레스를 풀고 싶은데..!"

솔직히 튜토리얼 보스 상대로는 제대로 힘을 가늠하지도 못했다. 그러므로 이 세계를 살아가면서 '적당히 힘을 조절할 수 있도록' 정도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피닉스는 끓어오르는 마력을 방출했다.

"와봐, 이 전투력 측정기들아! 너희들의 피와 살을 벗겨서 서울에 내 이름으로 된 건물 하나 세워보게!"

괴수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쿠우웅!

인천공항에 거대한 푸른 불꽃의 기둥이 피어올랐다.

* * *

인천이 괴수들에게 점령당했다고 하더라도 그 기반시설은 아직 제 역할을 하고 있다.

월미도에서 김포공항까지 이어지는 긴 전선. 과거 38선이 북한과의 최전선이었다면, 이제는 인천 북부가 괴수와의 최전선이 되었다.

그로 인해 인천을 비롯한 수도권에 살던 이들 대부분이 짐을 싸고 안전한 남쪽으로 피신했다. 그 피난의 행렬에 쐐기를 박은 것은 신서울로의 수도 이전.

결국 인천에 사는 이들은 아직 피난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이들과 인천에 출몰하는 괴수를 사냥하러 오는 사냥꾼들뿐이다.

"아줌마! 짐 내려요!"

"봐줘요! 저거 없으면 전 못 간다고요!"

"그럼 내리던가! 지금 다른 사람들 기다리고 있잖아요!"

터미널의 직원과 승객의 실랑이가 한창이다. 하루에 단 두 대뿐인, 신서울로 내려가는 버스.

28인승이라는 적은 크기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웃돈을 주고서라도 표를 구하려고 난리였다.

"정말 난리네요. 진짜."

"다 살려고 하는 건데 뭐라 할 수 있나."

매표소의 직원들은 씁쓸한 얼굴로 종이컵에 타 놓은 자판기 커피를 들이켰다. 한사코 보따리를 감싸 쥐고 있던 여인은 결국 직원이 부른 용역의 손에 이끌려 강제로 하차당했다.

"아, 안 돼! 딸이 기다리고 있어요! 오늘 꼭 내려가기로 했단 말이에요!"

"새로 번호표 뽑아요! 다음! 1925번 계십니까!"

"여기요!"

제 번호가 들리자마자 초췌한 낯빛의 남성이 티켓을 꺼내 들고 버스를 향해 달렸다. 초인적인 힘으로 용역을 제친 여인은 남자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졌다.

"제발! 짐 놔두고 갈게요! 그러니까 제발!"

"이거 놔요! 과적이라잖아! 아줌마가 제일 느린 번호니까 짐 놔두고 탔어야지!"

남자는 여성의 손을 발로 차대며 버스에 올라탔다. 붉어진 얼굴을 애써 가리며 다른 이들의 시선을 피했다.

"아, 안 돼! 안 돼!"

여성이 바닥을 구르던 짐보따리를 챙기는 사이 버스의 문은 닫혔다. 어떻게든 버스를 따라잡으려던 손길은 용역에게 가로막혔고, 여성은 허망하게 떠나가는 버스의 뒤를 응시하다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으허허, 으허어허허."

세상 서럽다는 듯 우는 여성을 두고 터미널 승강장에 모여있던 이들이 하나둘 흩어졌다. 그 누구도 여성을 위로하거나 하지 않았다.

이미 인정을 논하기에는 세상살이가 너무 흉흉했다. 매표소 직원은 다디단 설탕 커피의 씁쓸함에 혀를 찼다.

"세상이 이제 어떻게 돌아가려는지...."

"히어로분들을 믿어야죠. 덕분에 이 동네도 아직은 안전하잖아요?"

"영종도는 개털렸지만."

비록 군은 그 전선을 물렸지만, 히어로 협회는 끝까지 전선을 유지하고 있었다.

인천의 경우, 진즉에 김포 일대와 영종도를 포기하고 영종대교와 인천대교를 끊어버림으로써 수비 전선을 굳건히 세웠다.

"한강이 인간과 괴수의 국경이 될지 누가 알았겠어."

괴수와의 경계를 두고 국경이라는 표현을 쓰는 게 어불성설이었지만, 그만큼 현재 한국은 북에서 내려오는 괴수들과 '전쟁'을 하고 있다.

"하여튼 이게 다 북한놈들 때문이야. 그놈들이 핵만 멍청하게 안 터뜨렸어도...."

"선배는 정부 발표를 믿어요?"

후배 직원은 목소리를 낮췄다.

"북한에서 핵을 다루다 실수해서 터졌다? 그로 인해 괴수들이 방사능의 영향을 피해 도망쳐 내려오는 것이다? ...선배도 들은 게 있을 거 아녜요."

"야. 말조심해라. 너 나니까 넘어가는 거지 '소나무 부대'한테 걸리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 수 있어."

"저 자동차 없어요. 라면도 안 먹고."

능글맞게 입에 지퍼를 채우는 시늉을 하는 후배를 보며 선배 직원은 한숨을 내쉬었다.

"...야. 솔직히 히어로들을 북한 수뇌부 암살하러 보냈다가 김전일이 살려고 핵 터뜨린 썰을 나보고 믿으라고?"

"어. 선배는 암살설 지지해요? 저는 북한에서 괴수를 키우려다가 정부에서 특수부대 파견해서 그 괴수가 폭주했다고 생각하는데."

"이거나 그거나."

공식적으로 정부에서는 평양 사태의 원인을 '핵 관리에 실패한 북한의 자멸'로 보고 있지만, 그 진짜 원인에 대해서는 온갖 가십이 가득했다.

"아무튼 헛소리 말고 일이나 해. 괜히 이상한 소리 퍼져서 이동에 빠지지 말고. 너도 인천 떠야 할 거 아냐?"

"헤헤. 그렇긴 하죠."

두 직원은 창구로 다가오는 이용자를 보며 대화를 멈추었다.

"......."

청록색의 반투명한 목도리를 두른 푸른 머리칼의 소녀. 신비한 분위기마저 내뿜는 미형의 소녀는 아무 말 없이 팔짱을 끼고 버스 시간표를 노려보고 있었다.

"어, 음? 학생? 뭐 필요한 거 있어요?"

선배 직원의 말에 소녀는 조용히 시선을 돌렸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후배 직원의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소녀가 입고 있는 옷은 분명히 인천 외곽 고등학교의 교복이었다.

"...서울로 가려고 하는데요."

소녀의 말에 직원들은 올 게 왔다는 표정으로 터미널의 구석을 가리켰다.

"신서울로 가려면 저기서 번호표 뽑아야 해요."

직원이 가리킨 방향에는 조금 전 난리를 피우던 중년 여성이 세상을 잃은듯한 표정으로 털레털레 걸어가며 번호표를 받고 있었다.

대기 인원수 4930번.

"...신서울로 가는 버스가 하루에 여섯 대밖에 없는 거 학생도 알고 있죠? 그래서 나라에서 표를 순번제로 버스표를 팔도록 지시했어요."

하루 평균 200명가량이 인천을 떠나 신서울로 갈 수 있다는 것을 고려하면 터무니없는 대기 인원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1인당 들고 갈 수 있는 짐은 최대 15kg. 자기 차례 출발 시각 30분 전에 승차 안 하면 다음 사람에게 순번이 넘어가고.... 이 외에도 몇 가지 규정이 있긴 한데, 자세한 건 저기 번호표 뽑는 곳에 나와 있으니 가서 확인하세요."

이제는 일일이 규정을 말하기도 귀찮았다. 직원은 번호표 기계를 가리키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

"......선배, 선배!"

후배가 작은 소리로 부르자 선배 직원은 짜증 서린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

푸른 머리칼의 소녀는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직원은 지레짐작으로 이러한 경우의 대처 방안 다섯 가지 중 두 번째 대처를 꺼내 들었다.

"혹시나 인근 지방도시로 가는 버스 찾는 거라면 하나도 없어요. 시외버스건 고속버스건 다 파괴되는 바람에 지금 움직이는 버스도 히어로 탑승하에 겨우 움직여서……."

"아뇨."

소녀는 직원의 말을 끊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서울이요."

"그러니까 신서울로 가는 버스는...에?"

직원이 얼빠진 소리로 반문했다. 소녀는 창구 앞 지도에 있는 색바랜 지도의 한 곳을 두드리며 말했다.

"저 서울로 가려고 하는데요."

직원은 순간 말을 잃었다. 어디로 간다고? 서울? 노숙자보다 괴수가 더 많이 나타난다는, 인천보다 더 지옥 같은 곳으로?

선배 직원이 말을 잃자 후배 직원이 곁으로 다가와 곤란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손님. 죄송합니다만."

직원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서울로 가는 버스는 없습니다. 가다가 다 죽을 수 있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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