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화 〉1부 1장 (10)
"엇차. 늦어서 죄송합니다!"
문이 열리며 한 청년이 짐 상자를 들고 들어왔다. 뒤에는 금발 청년-석필이 창백한 얼굴로 들어오다 나를 노려보았다.
"......."
"......."
한기마저 느껴지는 시선에 나는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저, 그. 총각? 충분히 오해할 수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총각이 이해해줘."
김상아가 석필의 손을 쓰다듬고 어깨를 두드렸다. 석필은 구부정한 허리 그대로 방 안에 들어와 엉거주춤하게 섰다가, 방 안의 사람이 모두 듣도록 한숨을 푹 쉬었다.
"...신서울까지 50만 원."
"뭐? 잠깐. 아까는 15만 원이라며?"
김상아의 얼굴에 당황이 서렸다. 과연. 처음에는 낮게 불러놓고 간절함을 이용해 돈을 후려치는 건가.
석필의 옆에 있던 청년이 김상아를 막아서며 사람 좋은 미소로 웃었다.
"진정하세요, 누님. 이게 또 여러 가지로 뒷사정이 있는 사업인 건 아시죠? 아까 신서울 쪽 친구들한테 전화가 왔는데, 군이랑 경찰 쪽의 움직임이 조금 이상해졌다고 하더라고요. 꼭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뭐 살인범이라도 찾나 보지."
석필이 비꼬듯 말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차를 홀짝였다. 종이컵에 담긴 싸구려 티백이었다.
"...음."
한 모금.
"아니 그래도 갑자기 돈을 두 배 넘게 올리는 건. 저희도 땅 파서 장사하는 거 아니에요. 말씀드렸잖습니까. 저희도 먹고살 만큼만 딱 챙긴다고. 35만 원이 저희 남기려고 올리는 게 아니에요. 진짜 그만큼 경비가 더 필요하니까 올린 거에요. 신서울 뒷구멍으로 들어가려면 찔러줘야 할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고요."
"근데 저 꼬맹이는 돈 없잖아."
석필이 비꼬듯 말하자 옆에 있던 청년이 석필에게 주의를 주며 내게 손사래를 쳤다.
"아, 하하! 학생! 이 친구가 속이 좁아서 그러니까 이해해! 너 이 새끼, 네가 불쌍하다면서 영업 뛰어놓고는 지가 장사 초 치고 있어?"
"몰라. 남의 부랄이나 까대는 앤지 누가 알았나."
"야!"
석필과 청년이 실랑이를 벌인다. 그 사이 김상아는 무언가를 결심한 듯 보자기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순금이에요. 이걸로 어떻게 안 될까요?"
김상아의 손바닥 위에는 금색의 반지가 반짝이고 있었다. 흘깃 눈으로 살핀 크기는 딱 김상아의 약지에 맞춰진 크기였다.
"아니. 뭐 현물도 받기는 하는데...."
석필의 눈이 이채를 띄었다. 청년과 무언가 신호를 주고받고는 석필은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섰다.
"진짜인지 우리 같은 놈들은 몰라요. 근처에 아는 보석상한테 가죠. 사기 치려는 걸 수도 있으니까."
"사, 사기라뇨?! 제가 이래 봬도 사무실까지 있는 변호사-"
"갑니다."
석필이 자리를 뜨자 김상아가 우물쭈물하다가 보자기를 챙겨 석필의 뒤를 따라 나갔다.
"......하하. 미안. 쟤가 좀 쫌생이라서."
청년은 웃으며 내 맞은편에 앉았다. 나는 청년을 잠시 응시했다가 종이컵을 입에 대었다.
"......."
청년의 눈이 내 입술과 반쯤 줄어든 종이컵을 오갔다.
하긴, 피닉스가 좀 예쁜가. 어지간한 연예인 이상의 외모에 '여고생 교복'까지 입고 있으니 불끈불끈해지는 것도 이해가 갔다. 나도 그랬으니까.
"일단 너도 가격은 들었지. 50만 원. 지금 네가 가진 돈이...."
"2만원이요."
"그래. 2만 원. 자선사업이라고 해도 적자야. 저기 변호사 누님한테서 얻는 것 제하고도."
청년은 테이블에 놓인 박카스를 하나 꺼내 뚜껑을 열었다.
"학생이 무언가 돈으로 바꿀, 크으. 바꿀 게 있으면 모를까 그냥은 안 돼. 우리 사업이라는 게 무조건 선불로 100% 받는 일이라서 말이지."
"그러면 제가 어떻게 해야 하나요?"
내 물음에 청년은 기다렸다는 듯이 탁자에 흩뿌려져 있던 종이 하나를 뒤집었다.
"하아...."
나는 한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으며 종이를 빼앗아 들었다.
"'계약서'네요."
"뭐, 그래. 그냥 모자란 금액만큼 노동으로 갚는다는 거지."
청년은 손목시계를 흘끔거리고는 팔을 이리저리 흔들며 변명했다.
"아, 혹시 네가 생각하는 그런 이상한 일 아니야! 터미널 앞에 있는 패스트푸드점 알지? 거기가 석필이놈 가게인데 거기서 부족한 금액만큼 일해주는 거야."
청년은 목이 타는 듯 박카스를 다시 쭉 들이켰다.
"더는 못 주고 딱 최저시급. 하루에 여덟시간만 일하면 돼. 중간에 혹시나 마음 바뀌어서 그만두게 되더라도 그만큼 시급을 쳐줄게."
나는 의자에 몸을 푹 파묻었다. 목도리로 두른 베일이 코까지 가렸다.
"잠은요? 저 지금 잘 곳도 없는데."
"뭐? ...어, 그건 석필이한테 말해봐야 할 것 같은데. 걔랑 잘 이야기하면 가게에서 재워줄 거야."
"후우...."
나는 질끈 눈을 감았다.
"푸흐. 푸흐흐."
아, 더는 못 참겠다. 나는 실실 새어 나오는 웃음을 애써 참으며 베일을 더욱 단단히 끌어 올렸다.
"뭐, 좋아요. 돈이 없으면 일해서 벌어야죠. 그래서 얼마나 일하면 되나요?"
"어. 최저시급만큼 주니까...한 일주일 정도는 일해야 하지 않을까? 나도 계산은 서툴러서."
청년이 다시 시계를 힐끔거렸다. 나는 그 모습이 안쓰럽기까지 해서 계약서로 내 얼굴을 가렸다.
"저기요."
"응?"
나는 계약서를 콧잔등 정도까지 내리고 청년을 노려봤다.
"이걸로 넘어오는 멍청이가 여태까지 몇 명이나 있었어요?"
"...뭐?"
청년의 표정이 굳었다. 나는 두 손으로 계약서의 끝을 잡아 반대로 찢었다.
찍-
"아니.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몇이나 낚으셨냐구요. 애들도 요즘은 이렇게 하면 안 낚여요. 쌍 팔년대도 아니고."
"그러니까 무슨 소리를-"
"왜 자꾸 시계를 봐요?"
내 말에 청년의 행동이 순간적으로 멈췄다.
"이건, 그러니까, 비즈니스적으로-"
"왜. 약효가 돌 시간인데 아직 깨어있어서 이상해요?"
"그러니까 무슨 개소리를?!"
"물에다 약 탄 건가? 아니면 티백? 아, 종이컵에다 묻힌 거에요? 방법 좀 바꿔요. 물 한 모금도 입에 안 대면 어떻게 약 먹이려고 한 거예요 도대체가?"
* * *
김상아는 본능적으로 보따리를 끌어안으며 주변을 살폈다.
"저, 저기 정말로 이쪽 길이 맞아요?"
석필을 따라 사무실을 나와 걸으면 걸을수록 어두운 골목길로 들어갔다. 비명을 질러도 누구 하나 와주지 않을 것 같은 어두운 골목.
"다 왔어요."
석필이 흘깃 뒤를 돌아봤다가 낡은 철문을 열고 들어갔다.
'어쩌지?'
골목에 홀로 남겨진 상아는 고민에 빠졌다.
본능은 위험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이성은 말하고 있다.
이대로 저 청년의 뒤를 따라 들어가지 않는다면 딸이 있는 부산까지 갈 방법이 없다. 하릴없이 순번을 기다리느라 또 시간이 지체될 터.
"......그래. 아직 세상이 그렇게 각박하진 않잖아."
상아는 크게 숨을 고르고 보따리에서 호신용 전기충격기를 꺼내 석필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끼이이익-
회색의 육중한 철문이 열리며 작은 방이 나타났다. 석필의 맞은편에는 한껏 시계를 닦고 있던 중년의 사내가 있었다.
"또 뭐 하려고."
"반지 하나 확인하려고요."
상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중년 사내에게 고개를 숙였다.
"반지."
사내는 아무 말 없이 손을 내밀었다. 상아는 그 굵직한 손 위에 작은 반지를 올렸다.
"...결혼반지네?"
사내의 목소리가 올라갔다. 상아는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그저 푹 숙일 뿐이었다.
"뭐. 이 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나."
사내는 아무 말 없이 반지를 이리저리 살폈다. 빛에 이리저리 돌려보고 장치에 올려 확인한 그는 김상아의 결혼반지를 다시 집어 들었다.
"석필아. 진퉁이다."
"오, 진짜요?"
석필이 사내의 말을 반기며 자세를 바로 세웠다. 상아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사내에게 물었다.
"어, 얼마에요?"
"이 정도면 글쎄...30?"
아. 상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보따리에 있는 물건 중에는 마땅히 팔만한 물건이 이제 없었다.
사내는 그런 상아의 표정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너무 그렇게 실망하지 마라. 내가 오늘 몹시 기분이 좋아서 5만 원 더 쳐줄 테니."
사내는 싱글벙글 웃으며 금고에서 현금을 꺼냈다. 석필은 세종대왕 서른다섯 장을 침을 묻혀가며 헤아리며 씩 웃었다.
"매번 감사합니다. 이걸로 딱 채웠네요."
"네.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 딱-"
상아는 순간적으로 몸이 굳었다.
1여 년간 궂은일을 하며 둔감해지기는 했지만, 이 순간만큼은 일류 변호사의 감이 경종을 울리고 있었다.
35만이 모자랐는데 딱 35만 원만큼 채워졌다고? 그게 지금 우연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상아가 굳어진 표정으로 뒷주머니를 더듬는 사이, 사내가 반지를 들고 다가왔다.
역시. 사내의 두툼한 손이 저를 향해 다가오는 것을 보며 상아는 숨겨둔 전기충격기에 오른손을 올렸다.
사내가 혹시 허튼수작을 저지르면 당장 전기로 지질 수 있도록 하려던 찰나.
"뭘 그리 겁을 먹으시나."
사내는 상아의 왼손을 들어 올려 약지에 반지를 끼웠다.
"네?"
"뭘 그리 놀라? 결혼반지라며? 아무리 돈이 궁해도 결혼반지는 파는 거 아니야."
사내는 퉁명스럽게 말하며 돈을 세는데 집중하던 석필의 이마를 튕겼다.
"야 똥필이. 암만 돈독 올라도 유부녀 결혼반지를 털어먹는 건 아니다."
"아! 형님! 유부녀인지 누가 알았어요?!"
"시끄러워 인마."
투덕거리는 두 사내를 보며 상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세상이 더럽고 힘들더라도 마냥 절망하라는 법은 없었다.
"아 참. 이것도 인연인데 만나서 반갑다. 박호철이요."
사내, 박호철은 오른손을 내밀었다. 상아는 미소와 함께 손을 맞잡았다. 호철의 두꺼운 손은 열기로 가득했다.
"김상아에요."
"김상아. 상아라. 이름 참 예쁘네."
호철이 상아의 두 팔을 잡고 눈을 마주치며 씨익 웃었다.
* * *
청년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동시에 문이 쾅 열리며 어깨들이 슬금슬금 방으로 들어왔다.
"어떻게 된 거야?! 약이 전혀 듣지를 않잖아!"
"내가 말했잖아. 이 꼬맹이 눈치 존나 빠른 것 같다고."
"아니! 지금! 여기 안 보여?! 약 분명히 마셨다고!"
마지막으로 들어온 어깨가 문을 걸어 잠갔다.
나는 고개를 돌려 검게 선팅이 된 유리창 너머를 확인했다.
과연. 유리창을 깨도 밖으로 도망갈 수도 없도록 방범창이 설치되어 있다.
"대답 안 해줄 거에요? 이런 얄팍한 수법으로 몇 명이 몸 팔았는지 진짜 궁금해서 그런데."
"이 애새끼 말하는 것 보소."
어깨 중 머리를 밀어버린 이가 주먹을 쥐며 웃었다.
"야. 넌 지금 이 상황이 무슨 상황인지도 모르겠냐?"
"왜 몰라요. 대충 여자들 꼬셔서 수면제 태운 다음에 강간하려는 거잖아요."
내가 담담하게 말하는 것에 청년과 어깨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야, 꼬맹이."
"왜요."
대머리는 청년을 밀어내고 내 맞은편에 앉았다.
"내가 대답해주면 내 질문에 하나 대답해주리? 내가 지금 어이가 승천하려고 해서 그런다."
"마음 같아선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라도 괜찮은데요."
어깨가 코웃음을 치며 청년을 향해 손가락을 까닥였다.
"야. 이 꼬맹이까지 몇 명이나 걸렸지?"
"...전부 69명입니다. 형님."
"우와. 대박."
나는 진심으로 놀랐다.
"아니 이런 병신같은 수법에 68명이나 걸렸다고요?"
"애새끼가 말을 무슨...."
서로가 기가 막혀 하는 우스운 상황. 나는 바깥으로 향하는 문을 가리키며 어깨에 물었다.
"아까 그 변호사 아주머니도 한패에요?"
"아니. 그 아줌마는 지금 석필이랑 다른 애들이 따먹을...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야."
대머리는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탁자를 넘어왔다. 거의 숨결이 내게 닿을 정도였다.
"이제 하나 물어보자. 너 뭘 믿고 그렇게 깝치는 거냐?"
"......."
나는 조용히 손가락을 올려 어깨의 얼굴 위로 불꽃을 피워올렸다.
화르륵.
대머리는 화들짝 놀라 얼굴을 뒤로 쭉 뺐다.
"이거 믿고?"
손가락을 따라 화염구가 빙빙 돌았다. 내 불꽃을 본 어깨들은 하나같이 한 발짝 물러선 상태로 웃고 있었다.
"어라?"
"그래. 그게 네 밑천이라 이거지?"
눈썹이 불에 탈뻔한 어깨의 몸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거대한 떡때가 배로 불어나는 모습에 곁에 있던 깍두기들이 어깨를 호응하기 시작했다.
"형님! 살살하셔야 합니다!"
"지난번처럼 팔 분지르지 마세요! 나 여고생한테 핸드잡 받는 게 소원이었어!"
"우와아아아."
여과 없이 본성을 드러내는 청년을 향해 한 차례 경멸의 눈길을 보낸 나는 어느덧 천장과 머리가 닿은 대머리와 눈을 마주쳤다.
"어, 잠깐 타임? 저 생각할 시간 좀?"
"늦었어 이 년아."
대머리의 주먹이 나를 향해 쇄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