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화 〉1부 2장 (5)
"어?"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감각이 피부를 찌른다. 나는 차를 급하게 세우고 저 멀리서 느껴지는 기운에 집중했다.
"악! 운전 똑바로 못 해?!"
안전벨트를 메지 않고 있던 덕배가 크게 목이 꺾였다. 내가 그걸 지적하려는 순간, 스마트워치가 격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에에에에엥----
"괴수 경보네. 어디, 관악산? 차원문? 허이구. 난리 났겠다."
덕배가 창밖을 바라보며 콧방귀를 뀌었다.
"관악산이라...."
그다지 먼 곳은 아니다. 여의도에 잠들어있는 신의 파편은 하루 늦어진다고 어디로 도망치는 녀석은 아니다. 그리고 관악산에 생긴 차원문이면 괴수 수백 마리는 뛰쳐나올 터.
나는 덕배 발 위에 올려진 크로스백을 슬쩍 쳐다봤다가, 엑셀을 꾹 밟았다.
"야! 타이어 터져! 밟지 마!"
"마력으로 강화하면 되거든요! 한 번 달려보자고요, 우리!"
속도계가 빠른 속도로 100을 넘어가는 것을 본 덕배가 빠르게 안전벨트를 착용했다.
* * *
혼란.
그 어떤 상황에서도 냉철하게 이성적으로 판단해야 할 승형은 혼란스러운 마음속을 어찌할 줄 모르며 촬영장의 스태프들에게 소리쳤다.
"모두! 서쪽으로 도망치세요!"
A급 히어로가 마력까지 실어서 내지른 소리에 모두가 진정하기 시작했다. 승형은 목을 가다듬고 다시 소리쳤다.
"차원문은 제가 막겠습니다! 곧 협회에서 지원이 나올 겁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든 도망쳐서 광명시로 도망가주세요!"
아직 광명시는 무너지지 않았다. 인원수가 얼마 되지 않는 만큼 차를 타고 왔던 길 그대로 광명시로 달리면 당장 위기는 극복할 수 있다.
"스, 승형 씨는 어쩌고?!"
감독은 우물쭈물하며 승형의 의사를 물었다. S대까지 온 이유가 제 탓인 것도 있어서 그런지 잔뜩 기죽어있었지만, 히어로의 날카로운 감각은 그의 본심이 무엇인지 명백히 알려주고 있었다.
"죄송하지만 저는 지금 당장은 여러분들을 도와드릴 수 없습니다."
화륵.
승형의 상체 뒤편에 붉은 불꽃이 타올랐다. 마치 벗겨낸 곰 가죽을 착용한듯한 불꽃의 형태는 그가 왜 히어로 명이 '불곰'인지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저는 지금부터 바로 차원문을 닫으러 갈 겁니다."
"아, 알겠어. 살아서 보자고!"
감독이 부리나케 도망가는 것을 시작으로 촬영장 스태프들이 모두 제 차량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승형은 그들 사이에서 창백한 얼굴로 굳어버린 천가을에게 다가가 두 손을 꼭 감싸 쥐었다.
"가을 씨, 괜찮아요. 말씀드렸죠? 제가 지켜드릴게요."
멍하니 승형을 바라보던 가을의 두 눈에 총기가 돌아왔다. 가을은 승형의 시선을 피하며 손을 뺐다.
"...네."
가을의 시선이 자신의 하이힐에 닿았다. 키 차이를 보정하기 위해 신은 킬힐은 내리막길을 뛰어내려가는 건 큰 무리가 있었다. 승형은 호들갑을 떨며 가을의 하이힐을 벗기려 했다.
"제가 밴까지 모셔드릴게요. 아니다. 역까지 먼저 모셔다드릴게요. 잠시-"
"아니. 아니에요."
가을의 작은 손이 승형의 어깨를 밀어냈다. 제 손의 절반 가까이 되는 그 작은 손은 마치 태산처럼 승형을 일으켜 세웠다.
"승형 씨는 차원문을 막으러 가줘요. 그게 히어로가 할 일이잖아요?"
"그렇지만."
"저도 다리 있어요. 힘들면 벗으면 돼요. 저 달리기 잘해요. 제가 승형 씨보다 두 살 위인 거 알죠?"
두 주먹을 불끈 쥐며 화이팅 포즈를 하는 모습에 승형은 저도 모르게 헤실거리며 웃어버렸다.
가을은 볼을 부풀리며 손을 내렸다가 시선을 맞추는 승형의 모습에 흠칫했다.
"가을씨."
"?!"
아역배우 시절부터 십수 년을 연기와 함께 살아온 가을은 인간의 감정에 대해 천부적인 감각이 있었다. 그 재능과 노력의 산물은 지금 눈앞의 남자가 100% 진심만을 담고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차원문 진짜 바로 닫고 올게요. 살아서 닫고 오면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들어주실 거죠?"
"흥, 들어는 줄게요."
"후후."
승형은 어린아이처럼 방긋 웃으며 몸을 일으킨 다음, 산 정상을 향해 곰처럼 달려갔다. 가을은 승형이 남기고 간 진한 감정에 저도 모르게 볼을 붉히며 주차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가을의 목덜미는 붉어져 있었다.
* * *
차원문.
성주가 테라에서 지구로 열어놓은 수많은 이차원의 게이트. 성주가 회복에 들어가면서 제어가 풀려 아무렇게나 열리는 괴수 웨이브 현상.
우후죽순으로 발생하는 차원문은 발생 지점에 이질적인 마력 반응을 흘리며 그 전조를 알린다.
인류는 그 정체불명의 마력-이계신에 의해 오염된 테라의 마력-을 감지하는 방법을 알게 되었고, 스마트폰이나 워치에 필수적으로 깔린 알림 어플을 통해 사람들에게 위험을 알렸다.
'그리고 근처에 있던 히어로들과 사냥꾼들이 나서지.'
차원문은 시간과의 싸움이다. 몰려나오는 괴수들을 사냥하고 재빨리 문을 파괴하지 않으면 문에서는 더 강한 등급의 괴수가 나타난다.
히어로는 인류를 지키기 위해 차원문을 막으려 나서고, 사냥꾼들은 코어를 얻기 위해 차원문을 넘어오는 괴수를 사냥한다.
'그러니까 괜히 S급 뜨기 전에 빨리 치워야 해.'
차원문이 발생한 이상 아무리 엉덩이가 무거운 정부라고 하더라도 광검을 파견하지 않고는 못 베길 것이다.
'벌써 광검이랑 시비 트는 건 조금.'
모종의 이유로 힘을 숨긴 영웅. 괜히 그에게 정체가 탄로 나 죽자 살자 덤비면 목숨을 장담할 수 없다.
그가 죽거나, 내가 죽어주거나. 당장 죽어주거나 죽여줄 생각은 요만큼도 없다.
"그래서 관악산 가서 날뛸 거냐? 여의도 일 처리하고 당분간 숨어서 세력을 늘린다더니?"
"차원문이잖아요. 서울에 S급 괴수 같은 거 나오면 곤란해지는 건 저예요."
"그냥 다 태워죽일 것 같은데."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트럭은 범퍼에 푸른 불꽃을 머금고 도로 위로 뛰쳐나온 괴수를 그대로 들이받았다.
콰앙!
"마음만 먹으면 그럴 수 있죠. 하지만 그러면 전 세계를 자극하는 꼴이 돼요. 정체가 드러나겠죠. 괜히 청화단을 만든 줄 알아요?"
끼이이익--!
트럭을 사거리에서 빠르게 우회전시키며 트럭 옆에 달라붙은 괴수를 떨어뜨렸다. 괴수는 바닥을 구르다 가드레일에 영 좋지 않은 곳을 들이박았다.
"파편은 빨리 다 모아야 하는데 적들이 제가 파편을 모으는 걸 알게 되잖아요? 그럼 각국에서 어떻게 나올지 몰라요. 찾으러 가기 힘들게 마리아나 해구 바닥에 숨겨둔다거나, 아예 못 찾도록 로켓에 실어서 우주 공간 너머로 쏴버릴 수도 있어요. 사람 빡치게."
"그건 너무 과대망상 아니냐?"
"실환데요."
제작사가 미쳤는지 각국의 실질적 지배자들을 하나같이 또라이로 유명한 작자들을 모티프로 만들어두었다. 당장 독일의 총리가 아돌프 빌헬름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으니 다른 나라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터.
"청화단은 최소한 국가 전체와 싸워서 이길만한 전력은 가져야 해요. 5년 안에."
트럭이 크게 덜컹거렸다. 맨홀 뚜껑을 열어젖히며 튀어 오르려던 괴수가 그대로 강화된 타이어에 안면이 갈렸다.
"어쩌면 그게 미국이나 러시아가 될 수도 있고."
"...생각보다 더 막장인 조직이구먼, 그 청화단이라는 거."
"당신도 그 조직 일원이에요."
나는 트럭을 꺾어 가드레일을 부쉈다. 고가도로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트럭은 그대로 아스팔트 위로 미끄러지며 앞으로 나아갔다.
끼이이이익!!
덕배가 차체를 꽉 잡고 있다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소리쳤다.
"야!!!"
"귀 안 먹었어요. 내비게이션대로 가면 돌아가니까 빠른 길로 가는 거예요."
내비게이션은 잠시 데이터가 끊긴 듯 머뭇거리다 경로를 재탐색했다.
"응? 아. 산을 찍으니까 이쪽으로 돌아가라고 하는 거구나."
정직한 국도를 알려주는 내비게이션의 안내에 나는 어플을 종료하고 감각을 활짝 열었다.
우우웅--
형언할 수 없는 불쾌감이 느껴지는 방향. 나는 마지막으로 내비게이션에서 찍힌 지도를 떠올리며 안전벨트를 풀었다.
"자, 그럼 이제 준비하세요, 조덕배 씨."
"무슨 준비?"
덕배는 잔뜩 인상을 찡그리면서도 나를 따라 안전벨트를 풀었다. 나는 트럭을 그대로 직진시키며 창문을 내렸다.
크갸야아아악!
뒤에서는 괴수들이 좀비처럼 도로를 달려오고 있다. B급 괴수 정도의 내 기운을 느꼈음에도 이렇게까지 쫓아오는 것은 분명 덕배가 든 가방 속 A급 괴수의 코어 때문일 터.
"...흠."
나는 핸들을 두드려 마력을 거둔 뒤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차체가 관성에 미끄러지며 둑 앞에서 멈춰 섰다.
덕배는 마치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온몸에 힘을 주고 관성을 버티고 있었다. 어딘가 의기양양한 눈빛으로 보는 게 살짝 아니꼬웠다.
"조덕배 씨. 가방 좀 주실래요?"
나는 덕배가 건넨 가방을 건네받아 지퍼를 열었다. 편의점에서 샀던 잡화를 옆으로 치우고 필요한 물건들을 꺼내 손에 쥐었다.
"자요."
"...응?"
내가 베일을 목에 두르자 덕배는 가방을 건네받고 가방 안을 뒤적거렸다. 잠시 뒤 덕배의 손에는 빨갛게 물든 괴수의 핵이 들려있었다.
"이거 뭐냐?"
"뭐긴요. 못 팔고 개털 된 A급 괴수의 코어죠."
나는 등 뒤로 불의 날개를 펼쳐 트럭을 뛰어넘고 달려드는 괴수를 쳐 날렸다.
캬아아악!
갑작스레 발산된 내 마력에 겁을 먹은듯한 괴수들이 섣불리 다가서지는 못하고 거리를 벌리며 으르렁거린다. A급 괴수의 코어에 눈이 멀었어도, 일단 저보다 강한 포식자의 힘은 본능적으로 느낀 것 같았다.
"조덕배 씨. 보시다시피 이 작은 구슬들은 괴수들을 홀리는 마법의 물건입니다. 그렇죠?"
"한 눈으로 봐도 알겠네. 그런데?"
나와 덕배를 둘러싼 괴수들은 하나같이 침을 흘리며 정상이 아닌 듯 보였다. 그들은 이미 A급 코어에서 풍기는 마약 같은 냄새에 취해있었다.
"저는 관악산의 차원문을 닫으러 갑니다. 그런데 어머? 귀찮은 히어로들이 차원문 쪽으로 달려오네요. 벌써 정체가 드러나면 피곤해지거든요? 근데 그냥 히어로들한테 맡기기에는 아직 한국 히어로들이 미덥지 못하죠? 이런, 제가 갈 수밖에 없네요! 그러니까 덕배가 시선을 좀 끌어줘야겠어요. 속전속결로 닫고 올 테니까."
"한 마디로 어그로 끌라는 거잖아. 좀 짧게 말 못 하냐?"
"네."
나는 내가 손에 쥔 두 개의 구슬을 꽉 쥐었다. 마력까지 곁들인 악력에 핵은 점차 표면에 금이 가더니 이윽고,
파사삭!
풍선처럼 터졌다. 덕배가 입을 떡 벌리며 놀랐다.
"너...그.... 지금...."
"흐흐. 잘 봐둬요. 이게 당신 주인의 또 다른 힘이니까."
내 손 위로 떠오른 코어의 파편이 바람을 일으키며 내 머리 위로 치솟았다. 원래의 색은 사라지고 피닉스 고유의 성질인 푸른 불꽃을 머금기 시작한 파편은 정순한 마력이 흐르는 불꽃의 보석이 되었다.
"정령석. 내가 만들었지만 예쁘네요. 괜히 아깝게시리."
덕배의 시선이 보석에 박혀 떠날 줄 몰랐다. 나는 터질듯한 웃음을 간신히 머금고 보석을 쥐어 덕배에게 향했다.
"그러면 부하 2호군. 오늘도 제 모르모트가 되어주어야겠습니다."
"...모르모트? 야, 너 설마 나를-"
나는 웃음으로 대답했다.
푸른 보석이 막대한 창염을 내뿜으며 덕배를 집어삼켰다.
"커어어억?!"
덕배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친다. 하지만 보석에서 뿜어져 나온 창염은 덕배의 비명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덕배의 온몸을 휘감으며 점점 그 크기를 키웠다.
"아픈 건 잠시에요. 곧 정신을 차리면 세상을 바라보는 눈높이가 달라져 있을 테니까. 흐흐. 그러면 귀찮은 것들을 잘 부탁드립니다."
덕배를 감싼 창염이 거대한 인간의 모습을 갖추는 것을 확인한 나는 빠르게 관악산 방향으로 달렸다.
"캬아악!"
"...흠."
전방을 가로막고 있는 괴수 무리가 보인다. 서울의 아스팔트 정글 곳곳에 숨어있던 괴물들이 저보다 훨씬 강한 괴수들의 등장에 동요하여 허겁지겁 도망치기 시작했다.
"D급 코어 모아서 백상우한테 팔아야 하기는 하는데…."
깨갱!
발톱을 세우고 달려든 표범형 괴수의 대가리를 손으로 낚아 챘다. 괴수는 이도저도 못하고 허공에서 네 발을 휘저었고, 나는 괴수를 전방으로 집어던졌다.
키에엑!
"귀찮게…."
대부분 D급. 중간중간 C급도 눈에 보이기는 하지만, 전부 영 마음에 들지 않는 잔챙이 뿐이었다.
'그래도 쓰레기는 치워야 하니까.'
어차피 나중에 서울 전역을 대청소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사람이든 괴수든, 한 번 망조가 든 서울에 내려앉은 재액은 깔끔히 치워버려야 했다.
캬아앙?!
태우고, 대가리를 걷어차고, 발톱을 뽑아 눈깔에 집어던진다. 피가 튀어 옷에 묻기 전에 불꽃을 피워 태워버리고, 조금씩 앞으로 나아간다.
'적당히 출력 높일까?'
S급 까지는 무리더라도 B급 정도면 위험부담이 적을 것이다. 나는 살짝 마력을 끌어올려 달려드는 괴수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딸칵.
라이터를 키듯 엄지로 허공을 눌렀다. 그리고 동시에 괴수들의 몸에 푸른 불꽃이 붙었다.
캬아악!
괴로움에 미쳐 괴수들이 바닥을 구른다. 나는 괴수들의 시체를 밟고 건물 옥상으로 뛰어올라, 관악산을 향해 직진으로 달렸다.
끄어엉!!
감히 피닉스에게 달려드는 괴수를 모조리 불태우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