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화 〉1부 2장 (8)
"예비 히어로분들 반갑습니다. 저는 '집정관'이라고 불리는 히어로, 유영호입니다."
남자가 고개를 꾸벅이며 인사하자 강당이 박수 소리로 가득 찼다. 좌석을 가득 메우는 청년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존경과 신뢰가 담겨있었다.
"하하. 오늘도 특강에 많이들 오셔서 고맙습니다. 그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요?"
유영호는 스마트워치를 두드려 화면을 넘겼다. 벽을 가득 채운 화상에는 '차원문 발생 시 대처 방안'이라는 문구가 큼지막하게 적혀있었다.
"차원문. 1999년 이후로 전 세계 어디를 가도 나타나는 현상이죠. 이것을 자연현상이다, 아니면 인위적인 현상이다 많은 학자들이 갑론을박하며 아직 명확히 밝혀진 것은 없지만."
유영호가 화면을 넘기자 여러 사진이 나타났다. 산, 바다, 도시, 심지어는 학교 운동장까지. 허공에 원형의 구멍이 생긴 듯 기괴한 마력을 내뿜는 차원문은 뒤 사진으로 갈수록 점점 더 그 크기가 커지고 있었다.
"평균적으로 한 달에 한두 번. 그야말로 전 세계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 차원문은 히어로 협회에서도 가장 촉각을 곤두세우고 관리하는 인류의 위협입니다."
딸칵. 다음 슬라이드가 나오자 좌중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위성에서 찍은 차원문의 크기는 바로 옆의 야구장 면적과 비슷했다.
"2년 전 미국 LA에서 발생한 '다저스 게이트' 사건을 기억하십니까? S급 괴수가 무려 셋이나 나왔던 그 사건. 원탁의 기사들이 자그마치 여섯이나 급히 미국으로 달려왔을 정도로 엄청난 사상자를 냈던 인류의 비극입니다."
유영호가 성호를 그리며 희생자들의 넋을 기렸고 청중은 묵례했다. 유영호는 잠긴 목을 가다듬고 강의를 이어나갔다.
"왜 이렇게까지 차원문이 커졌는가? 차원문이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 크기가 커지고, 그러면서 넓어진 만큼 더욱 강하고 더욱더 많은 괴수를 우리 세계로 뱉어낸다는 것은 여러분도 익히 알고 계신 내용일 겁니다."
유영호는 짧은 영상을 재생했다. 당시 출몰한 S급 괴수들과 6명의 원탁 히어로들이 펼치는 집단 난전. 도시 전체를 부수며 날뛰는 괴수들을 상대로 히어로들은 체계적인 움직임으로 괴수를 제압하고 차원문을 닫는 데 성공했다.
"원탁의 영웅들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LA는 아마존처럼 괴수의 땅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물을 한 모금 마신 유영호는 화면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슬라이드에 담긴 사진에는 아주 작은 크기의 차원문이 찍힌 CCTV 화면이 있었다.
"이 차원문이 사실은 최초에 나타났을 때는 D급 정도만 나올 최소 크기였다고 합니다. 그게 최초 발견자였던 히어로가...."
유영호는 물을 마셨는데도 타들어 가는 목에 침을 삼켰다. 이 주제는 말할 때마다 말하는 것이 쓰라렸다.
"마침 가족과 함께 야구장의 경기를 관람하던 중이었죠. 히어로가 차원문을 닫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사이, 미처 잡지 못한 괴수 하나가 히어로의 아들을 습격했습니다."
청중이 모두 침음성을 흘렸다. 그것은 차원문을 눈앞에 둔 히어로들 모두가 겪는 딜레마였다.
"네. 히어로는 차원문을 완전히 파괴하기 직전에 가족을 구하러 갔습니다. 하지만 불완전하게 닫힌 차원문은 폭주하기 시작해 기하급수적으로 그 크기를 늘렸죠. 아들을 구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수백 명의 사상자를 낸 히어로는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차원문이 파괴된 자리 위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유영호는 가라앉은 분위기를 그대로 이어갔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고민을 해야 합니다. 나에게도 혹시나 이런 상황이 닥치게 되지 않을까. 내 가족과 인류의 미래를 두고 저울질할 때가 온다면 어찌해야 하나. 예비 히어로인 요원 여러분들일수록 더 이런 일에 대해서 깊게 고민하고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 머릿속에 잘 기억해야 하는 겁니다."
유영호는 맨 앞줄에 앉아 눈을 초롱초롱 빛내고 있는 청년을 가리켰다.
"거기 가운뎃줄의 요원? 38번인가요? 일어서보십시오. 요원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38번 요원에게 마이크가 건네졌다.
"요원이 있는 곳에 차원문이 열렸다고 가정해봅시다. 마침 당신의 옆에는 짝사랑하는 여인이 있군요. 내 모든 것을 바쳐도 모자랄 것만 같은 사랑스러운 여인이. 그렇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겁니까? 여자를 먼저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킬 건가요? 아니면 차원문을 닫으러 갈 건가요?"
38번 요원은 잠시 머뭇거리다 결의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일단 망설임 없이 차원문을 닫으러 갈 겁니다!"
"오호. 단호하군요. 왜죠?"
유영호의 빈정거림이 섞인 질문에도 38번 요원의 눈은 올곧게 빛나고 있었다.
"그것이, 인류의 평화를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사이에 당신의 사랑이 괴수에게 습격을 받으면?"
"차원문을 닫고 재빨리 그녀를 구하러 갈 것입니다!"
"......말은 참 번지르르하군요."
유영호가 굳은 표정으로 38번 요원을 내려다봤다. 온 청중의 시선이 굳어버린 38번 요원에게 꽂혔다.
꿀꺽.
긴장에 침을 삼키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유영호는 속으로 피식 웃으며 물었다.
"이름이 어떻게 됩니까?"
웅성웅성.
강당이 갑자기 술렁이기 시작했다. 형평성을 위해 모두가 'XX번 요원'과 같은 형식으로 불리는 아카데미에서 특별강사가 요원의 이름을 묻는 행위는 명백한 규칙 위반이었다.
"괜찮습니다. 여러분들 어차피 곧 졸업하잖아요? 저도 올해까지만 하고 때려치울 겁니다. 현장 나갈 거거든요."
유영호의 폭탄 발언에 38번 요원을 바라보던 이들의 시선에 선망과 질투가 섞였다. 집정관이 이름을 물어봤다는 것은 졸업을 앞두고 있을 '원서 지원'에서 대놓고 너를 뽑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청년은 그 기회를 놓칠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배에 꽉 힘을 주고 크게 소리쳤다.
"38번 요원! 이승형이라고 합니다!!"
"좋아요. 그러면 이승형 예비 요원이 이걸 읽어보시겠습니까?"
유영호의 인도에 이승형은 화면에 띄워진 문구를 크게 소리쳤다.
- 차원문 발생 시, 모든 히어로들의 최우선순위는 차원문을 파괴하는 것이다.
[히어로 규범백서 5장, 위기상황대처설명서 중.]
* * *
역시 안 되겠다. 산길을 타고 오르던 승형은 발걸음을 멈추고 뒤돌아섰다.
"후우. 승형아. 정신 차려. 영호 형님 말씀 잊었냐."
두 뺨을 손으로 치며 유영호의 말을 상기하며 정신을 차렸다. 차원문을 앞에 둔 히어로의 사명. 다저스 게이트 같은 비극의 재발은 앞으로 더는 있어선 안 된다.
'하지만...!'
승형의 기척을 눈치챈 괴수들은 영악하게도 승형을 피해 산 아래로 도망쳤다. 차원문이 막힌다는 것과 관계없이 산 아래 사람들을 습격하러 간 것이다.
죽을 수 있다. 승형의 머릿속에 피를 흘리며 쓰러진 천가을의 시체가 스쳐 지나갔다.
승형은 제 몸의 마력을 갈무리하며 잔여 마력을 확인했다. 올라오면서 맞부딪힌 괴수들 때문에 몇 차례 전투를 치르며 약간의 고갈은 있었지만, 아직 몸 안을 흐르는 마력은 열댓 번은 산을 전력으로 왕복할 만큼 여유가 있었다.
저벅.
승형이 저도 모르게 산 아래로 한 발자국 디뎠다.
동시에 승형은 강의에서 있었던 유영호가 자랑스럽다는 얼굴이 떠올랐다.
멈칫.
승형의 몸이 반쯤 돌아가며 산 정상을 향했다. 피부를 따끔거리게까지 하는 불길한 마력은 앞으로 1분 정도만 달려가면 될 위치에 있는듯했다.
가야 하나? 괴수의 습격을 받는다면 어쩌지?
하지만 괴수의 습격에서 무사히 도망친다면? 혹시 운 좋게 금방 도착한 히어로나 사냥꾼의 도움을 받는다면?
하지만 내가 내려간 사이 차원문이 배로 늘어난다면? 최악의 경우 가을을 향해 달려갔는데 가을은 이미 죽어있고 그사이 차원문은 손쓸 방법도 없이 확대된다면?
머릿속을 헤집어놓는 갈등의 연속.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던 승형의 얼굴에 소속사 사장의 얼굴이 떠올랐다.
과거 모델 출신이었던 연예 기획사의 사장. 그는 다른 모종의 이유로 갈등하던 승형에게 이렇게 답했다.
- 어차피 후회할 것 같으면 마음 편한 쪽으로 해라.
승형이 딱 눈을 감고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 등산로를 향해 내려앉은 소나무가 제 눈을 찔렀다.
"아악?!"
마력으로 강화해도 따가운 건 따가운 거다. 승형은 따가움에 고통스러워하다 소나무를 노려봤다.
"아."
- 승형씨는 차원 문을 막으러 가줘요. 그게 히어로가 할 일이잖아요.
히어로의 사명을 억누르고 사욕을 챙기려는 자신에게 내리는 따끔한 벌이라도 되는 걸까. 하필이면 어두운 욕망에 휩싸인 순간에 제 눈을 찌른 소나무에서 천가을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래."
승형은 온몸의 마력을 다시 회전시키며 정상으로 눈을 돌렸다.
"차원 문을 닫는다."
천가을은 괜찮을 것이다. 험난한 연예계에서도 아역배우로 버텨온 만큼 정신력이 강한 여자다.
그래서 반했다. 스크린 너머에서 보던 순간부터 함께 호흡을 맞추며 연기하던 그 모든 순간순간이 사랑스러웠다.
"돌아가면-"
반드시 고백할 것이다. 등산로조차 무시하며 일직선으로 산을 달리는 승형의 발걸음은 더욱더 빨라졌다.
* * *
눈을 떴다.
껌뻑껌뻑.
'뭐야 여긴.'
세상이 달라 보였다. 서울의 전경이 꽤 멀리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꼭 높은 등대에서 지켜보는 것처럼.
'분명 마지막에-'
차라리 죽여달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의 고통이 끝나고 의식을 잠깐 잃었다. 덕배는 피닉스를 찾기 위해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발을 움직였다.
쿠웅-!
'...?'
내 발소리가 이렇게 컸나? 덕배의 시선은 자연스레 바닥을 향했고,
' '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그의 다리-로 추정되는-는 푸른 불꽃에 휩싸여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 보는 눈높이가 달라질 거에요.
덕배는 피닉스가 남기고 갔던 말이 떠올랐다. 지금까지 피닉스가 보여준 기행과 비상식적 행동, 그리고 제 모습을 보건대 결론은 하나뿐이었다.
'걸리버냐.'
특수촬영물 촬영 현장이 아니라면 눈앞의 이 땅은 분명히 서울이고, 자신은 온몸이 불꽃으로 타들어 가는 거인이 되었다. 덕배는 피식거리며 한 발자국 더 크게 움직였다.
쿠웅--!
'어그로가 안 끌릴 수 없겠네.'
허름한 주택 하나가 통째로 밟히며 부서졌다. 덕배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 반복하며 북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우와오.'
건물 유리창에 비치는 제 모습이 눈에 보였다.
그야말로 푸른 화염의 거인. 명치 부근에 회색 암석의 구체가 박혀있는 게 보였다.
'저거 분명 나겠네.'
높은 확률-아니 100% 자신의 원래 육체가 있을 곳이 틀림없었다. 어차피 주인이라는 작자도 처음 시도해보는 것일 테니 덕배 스스로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짜증 나네. 진짜.'
서울 한복판에 이런 거인으로 변해버리면 이제 어떻게 하라는 건가. 전력 질주로 달리기라도 해야 하나?
빡--!
덕배의 뒤통수를 무언가가 강타했다.
오른발을 앞으로 내디뎌 겨우 넘어지는 걸 면한 덕배는 제 뒤통수를 치고 간 것을 확인했다.
"하하하! 덩치만 크지 별거 없네!"
비행 장비를 착용한 사냥꾼이 마력으로 만든 밧줄을 빙빙 돌리며 덕배에게 날렸다.
화르르륵!
덕배의 팔에서 푸른 불꽃이 피어오르며 마력의 밧줄을 태워버렸다. 사냥꾼의 눈이 당황으로 물들며 물러났다.
부우웅---!
덕배가 파리를 쫓듯 손을 휘저었다. 사냥꾼은 간신히 추진기를 움직여 도망쳤다.
"히히히! 멍청한 놈! 이래서 괴수 놈들은 놀리는 재미가 있다니까!"
'사람 짜증 나게 만드네, 진짜.'
파리처럼 날아다니며 쫑알쫑알 떠드는 게 꼭 제 주인 같았다.
"오우, 사냥할 시간이다! 핵은 내가 먹는다!"
"약점을 찾아! 마력을 실어야만 타격할 수 있다!"
트럭에서 내린 사냥꾼들이 저마다 제 장비를 풀어놓으며 덕배를 향해 입맛을 다셨다.
덕배는 자신이 꼭 사냥당하는 멧돼지 같다는 생각에 울컥했다.
'어그로 끌어보라, 이거지?'
그럼 어디 말씀대로 해주겠다. 철저하게.
덕배가 무릎을 굽혀 하늘 높이 뛰어올랐다.
"어, 어어어?!"
어지간한 빌딩만 한 크기의 거인이 공중에서 두 팔을 머리 위로 쭉 펼쳤다. 막 추진기의 마력을 채워 넣은 사냥꾼이 그 모습을 보고 말했다.
"다이빙 바디 프레스?"
쿠-----웅!
독산역에 거대한 먼지가 피어올랐다.
* * *
천가을.
악역 빌런이면서 초반 스토리의 챕터 보스이기도 한 이 여자의 별명은 "뉴비 슬레이어", "통곡의 벽" 등으로 불리었다.
상대의 외형, 목소리, 기억, 그리고 이능력의 일부까지 복사해내는 환속성 최상위 이능력 .
안 그래도 보스전 필드가 불빛 하나 없는 건물 안이라 시야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데, 동료인 척 위장하며 아군 히어로들을 기습해댄다.
나는 그 여자를 딱 두 번 동료로 맞이한 적이 있었다. 나도 초반에는 하도 많이 당해서 아예 모든 패턴을 분석했고, 아주 수월하게 제압해서 감옥에 가두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때가 전 커뮤니티에 "빌런의 동료화" 붐이 한창 이슈가 되었을 때였다.
- 님 저 살인귀 동료로 맞아들였어요ㅋㅋㅋ 삐져가지고 더 놀렸는데 살해당해서 게임오벜ㅋㅋㅋ
- 풍마는 "진짜"다.
- 제이슨쟝 전기톱 안에 썬다!
역시 세상에 변태들은 많았고 빌런으로만 동료를 꾸려 게임을 클리어하는 자들도 나타났다. 애초에 간부들도 원래 악역인데 빌런들도 동료로 들이는 걸 막을 이유가 없지 않으냐는 이유.
심지어 제작사에서도 인정했다.
'빌런도 동료로 들이는 게 가능합니다! 그러니 플레이어 여러분들은 안심하고 게임을 즐겨주십시오.'
원작에서는 "재사회화"라는 명목으로 능력이 너프된 상태로 영입되고 평판도 좋지 않지만, 어차피 성능적으로는 다른 동료들과 비슷한 수준이라 난이도에 큰 문제는 없었다.
단지 가상현실게임이라도 인면수심의 범죄자들을 동료로 들이는 데 거부감을 느끼는가의 문제.
그리고 그 가운데 천가을은 악당으로서 악함이 세 손가락 안에 꼽을만한 악녀 중의 악녀였다.
"그런데 네가 왜 여기 있냐고요."
나는 강의동의 휴게실에 기절한 천가을을 데려와 소파에 눕혔다. 목에 감아둔 창염의 베일이 얇은 담요처럼 천가을의 몸을 덮었다.
"이거 가짜는 아니겠지."
나는 천가을의 스마트폰 케이스 속에 숨겨진 신분증을 찾아냈었다. 운전면허증이나 이능력자등록증과는 전혀 다른 '신서울주민증'. 그 안에는 천가을의 프로필과 주소가 나와 있었고, 그 프로필은 내 기억과 정확히 일치했다.
"......."
나는 복도 쪽 자판기에서 음료 하나를 꺼냈다.
정확히는 결제 따위는 없이 그냥 손을 자판기 안에 쑤셔 넣어 안쪽에 보관된 음료수를 아무거나 하나 꺼내 손에 쥐었다.
까앙-
캔뚜껑 따지는 맑은소리가 복도를 채웠다. 목을 타고 흐르는 청량감은 청명했지만 내 머릿속은 더욱 복잡해져 갔다.
'지금이라도 밖에 던져놓고 올까? 이능력자로 각성하도록? 아니야. 이미 늦었다. 더군다나 나를 봐버렸다. 그럼 죽여야 하나? 창염을 쓰는 이능력자가 나를 구해줬어요 하는 증언을 못 하게? 주인공이 메인 히로인이랑 겪는 이벤트가 얘 덕분에 생기는데? 그전에 얘 메인히로인이잖아.'
그냥 어중이떠중이 빌런이라면 마음 편히 태워버릴 수 있다. 하지만 천가을이 그냥 빌런이 아니라 개별 루트가 있는 메인 히로인이라는게 상당히 마음에 걸렸다.
나는 천가을이 메인 히로인으로 알려지기 전에 사람들이 논하던 평을 떠올렸다.
악명은 꽤 높지만, 성능은 좋더라.
화장 지운 민낯은 봐줄 만 하다.
몸매 하나만큼은 한국계 히로인 중 원탑.
얻고 싶은 동료나 적 못 얻었을 때 바로 투입하는 대체재.
'설마 개별엔딩을 가진 메인 히로인이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
끽해봐야 C급 정도의 능력을 갖춘 이능력자였다. 공개된 히로인들의 최소 커트라인이 1.5티어-심지어는 원탁 소속도 있었던 만큼, 조연 악역에 불과한 캐릭터가 메인 히로인이었다는 것은 나조차도 충격을 받고 다음 회차에서 바로 공략을 시도했을 정도였다.
'그 전에 지금 이 아가씨가 내가 알던 그 악녀가 맞나?'
햇병아리처럼 베일을 꼭 끌어안고 잠든 천가을은 세상모르고 편안히 자고 있었다.
답답하다. 깨기라도 한다면 물어보기라도 할 텐데.
"왜 하필 오늘 여기서 이러고 있냐고요."
나는 휴게실의 소파를 차지해 잠들어있는 천가을을 보다가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편안하냐? 지금 잠이 와?'
물론 괴수들에게 죽을뻔한 걸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는 것에 안도할 수 있겠지만, 앞으로의 전개를 알고 있는 나로서는 속이 타들어 갈 수밖에 없었다.
'네가 각성을 해야 뭘 지지고 볶고 할 거 아냐.'
미국에서 온 주인공이 한국 히어로 협회의 신뢰를 받게 되는 계기가 천가을을 잡아들이는 공적 덕분이었다.
초반 동료들과의 호감 플래그도 생기는 온갖 이벤트들이 천가을과 엮여있었다.
"구해주지 말 걸 그랬나?"
후회되지만 어쩔 수 없다. 행여나 이능력을 각성하지 못하고 죽어버렸다면 그땐 사람 하나 죽는 거로 끝이 아니라 진엔딩 자체가 막혀버린다.
"원작만으로는 부족해서 이젠 5년 전부터 사망 플래그들 죄다 틀어막으라고? 나 참."
너무 하드하지 않은가. 본인의 루트를 탔을 때도 과거를 그저 덮기를 바랐던 여자다. 그래서 내가 아무 생각 없이 구한 이 여자가 하필이면 천 가을이었다는 게, 너무나도 무섭고 소름 끼쳤다.
만약, 차원문 경보를 무시했으면?
만약, 여의도로 바로 직행했으면?
만약, 괴수의 습격을 무시하고 살려주지 않았다면?
"세상 너무 나한테 가혹한 거 아니냐."
돌아가고 싶다. 그런데 돌아갈 방법을 모른다.
행여나 게임을 클리어하면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혹시나 영원히 이 세계에 갇히게 된 거라면, 내가 살아남는 유일한 길을 찾아야 했다.
"진엔딩에 생존 플래그에...후우."
머리가 터질 것 같은 복잡한 생각은 그만.
나는 천가을이 깨지 않도록 조용히 건물 옥상으로 올라갔다. 대학 부지를 이리저리 오가는 괴수들은 내 기운을 눈치채고 강의동을 슬금슬금 피해갔다.
"사냥꾼들은 덕배가 알아서 시선을 끌고 있을 테고."
속으로 나를 얼마나 욕하고 있을지야 안봐도 비디오다. 언제 또 A급의 힘을 써보겠는가. 이 모든 게 덕배의 살이 되고 피가 되는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
"그럼 천가을은...이걸로 지키자."
나는 마력의 불꽃을 찰흙 다루듯 오밀조밀 만져 사탕 크기의 작은 구슬처럼 동그랗게 굴렸다.
다크 레기온 간부들의 아이덴디티라고 할 수 있는 괴수 생산. 하지만 이미 정령으로 각성한 나는 괴수가 아닌 하위 정령을 만들어낼 수 있다. 인간들 눈에는 다 똑같은 괴수처럼 보이겠지만.
"밤길을 밝혀라, 태양의 아이야."
화르륵. 건물 옥상이 거센 열기로 가득 메우며 구슬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쩌적, 우드득!
구슬이 깨지며 피어오른 불꽃은 작은 새의 형상을 갖추었다.
♩♬
"응. 그래. 착하죠."
내 검지에 앉은 작은 새. 카나리아 비슷한 크기지만 그 이름이 '미니 피닉스'인 만큼 파수꾼의 역할은 톡톡히 해낼 것이다.
"여기 이 건물 안에 있는 인간을 지켜줘요. 알겠죠?"
- 알겠다는 거시야
일반인에게는 새가 지저귀는 소리지만 정령인 내 귀에는 그 말이 여실 없이 들렸다. 잘 못 들었나?
"그리고 혹시나 괴수가 건물을 습격하려고 하면 쫓아내도 좋아요."
- 잡아먹어도 되는 거시야?
하위 정령은 주인 닮는다고 하던데 얘는 왜 이럴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미니 피닉스를 하늘로 날렸다.
"후우, 그럼."
나는 감각을 끌어올려 관악산 일대의 마력을 훑었다. 화수분처럼 쏟아지는 괴수들을 상대로 방어선을 펼친 히어로들. 그 효율적인 배치에 나는 히어로들의 지휘자가 있음을 직감했다.
'방어선을 펼친다고? 무슨 생각으로?'
있는 자원 없는 자원을 다 끌어모아 산을 에워싼다는 목적에는 최적의 배치다. 덕배에게 난동을 피우라고 하는 바람에 사냥꾼들이 빠진 공백이 듬성듬성 있었지만, 수천 번의 전투를 지휘했던 나로서도 꽤 칭찬할법한 전술이었다.
하지만 이래서야 꼭 차원문을 그대로 내버려 두겠다는 것 아닌가.
'둘 중 하나겠네.'
차원문을 일부러 늦게 닫아서 쏟아지는 괴수의 핵을 긁어모으거나, 강력한 히어로를 빠르게 파견하여 차원문을 닫게 하고 나머지는 민가를 지키거나.
배치에서 느껴지는 의도는 전자가 아니었다.
'그럼 단신으로 괴수들을 돌파해서 차원문을 막으러 갔다는 얘기인데?'
불길한 마력 속에서 산 정상을 향해 달려가는 이질적 기운에 나는 귀를 쫑긋 세웠다. 마력량 자체도 풍부했지만, 무엇보다 그 속성이 더 신경 쓰였다.
"화속성?"
이런 곳에서 화속성 마력을 가진 히어로가 있을 줄이야. 나는 건물 위에 원을 그리며 도는 미니 피닉스에게 마력을 좀 더 부여하고 건물에서 뛰어내렸다.
'누군지 봐야겠다.'
원작 주인공의 속성임과 동시에 원작 기준으로 전 세계에 1000명도 되지 않는 희소한 속성.
'설마 주인공은 아니겠지.'
그럴 리는 없다. 걔는 지금 미국에 있으니까.
'근데 천가을도 여기서 이러고 있잖아.'
나는 긴가민가하며 마력의 주인이 달려간 그 흔적을 좇아 등산로를 달렸다.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는 모든 게 불확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