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화 〉1부 2장 (17)
승형은 얼굴에 닿는 따사로운 햇살에 눈을 떴다.
"??"
아는 천장이다. 협회 본부에 부속된 히어로 전용 병원의 특별병동. A급 이상만 들어올 수 있는 이 병동은 이미 승형도 여러 차례 신세를 졌다.
승형은 몸을 일으키려다 전신을 짓누르는 압박감에 그대로 다시 쓰러졌다.
"마력탈진이래요."
맞은편에는 금발의 여인이 침대위에 앉은채 수척한 얼굴로 승형을 맞이했다. 여인의 팔에는 연녹빛 수액이 담긴 링거 주사가 꽂혀있었다.
승형은 몇 년 전의 기억 속에서 여인의 이름을 떠올렸다.
"스톰걸 양선우?"
"템페스트 레이디. 지휘관 때려눕히고 이름 바꿨어요."
"...아하."
한 번 정해진 이명이 바뀌는 경우는 S급이 되지 않는이상 잘 없다. A급에 불과한 양선우가 이름을 바꾼 이유를 짐작한 승형은 입을 다물었다.
양선우의 앞자리는 올해로 3-
"왠지 불쾌한 생각을 하는 것 같은데."
"그럴리가요."
간신히 몸을 일으킨 승형이 두 팔을 앞으로 내밀었다. 오른 팔에는 흰 붕대가 칭칭 감겨져있었다.
"어...."
"화상이래요. 나참. 파이로키네시스가 화상입은건 살다가 또 처음이네요. 얼마나 강하게 마력을 때려박은거에요?"
"아, 아하하."
승형은 왼 손으로 목을 쓸었다. 그저 괴수를 쓰러뜨려야한다는 생각에, 한계 이상으로 마력을 불어넣었다.
"아! 화마룡?!"
승형이 놀라 침대에서 일어서려했다. 하지만 곧 다리에서 오는 통증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았다.
선우는 그런 승형을 대견하면서도 한심하게 바라보다 침대 사이에 놓인 TV를 가리켰다. 여인이 틀어놓은 뉴스 채널에서는 익숙한 얼굴의 남자가 회견장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아."
"당신에게는 숙부님 되시죠?"
승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회견장의 마이크 앞에선 중장년의 남자. 전체적으로 날카로운 인상의 남자는 왼 쪽 눈 아래로 길게 칼자국이 나있었다.
[국민여러분, 반갑습니다. 대통령 선의철입니다.]
이승형은 왼 손으로 이불을 움켜쥐었다.
철혈의 통치자. 냉혈한. 국익이라는 명목하에 손에 피를 묻히는 것도 마다하지 않던 남자.
부친을 잃고 방황하던 아들을 그저 불행한 일을 겪은 신인 이능력자로 포장해 자신들의 지지율을 끌어올린 비정한 책략가.
숙부임에도 승형은 그에게 표를 주지 않았다. 하지만 신서울을 기반으로 막대한 세력을 만든 그는 신서울의 주민들의 힘을 바탕으로 대통령의 자리에 올랐다.
"능력은 좋지만 참 볼때마다 정떨어지는 상이에요. ...앗차."
"괜찮습니다."
승형은 이해한다는 웃음과 함께 TV에서 시선을 돌렸다. 벌써 시계는 오전 10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저 얼마나 잔 거에요?"
"한나절하고도 더요."
"그렇게나요?"
한창 괴수 퇴치 현장에 투입될 때도 하루에 세 시간만 자면 멀쩡했는데. 승형은 그 정도로 자신의 마력이 고갈되었나 놀라 왼 손을 가슴에 올렸다.
두근.
다행히 심장은 뜨겁게 두근거리고 있다. 정확히는 심장 안쪽에서 느껴지는 푸른 불꽃이 아직 꺼지지 않고 남아있다.
"휴우."
승형은 안도의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온 몸을 태워버릴듯한 푸른 불꽃의 흔적은 아직도 눈에 아른거릴 정도였다.
"어? 승형씨? 눈이?"
"네?"
선우가 승형의 눈동자를 가리켰다. 승형은 제 스마트워치 액정에 비친 눈동자를 보고 놀랐다.
흰 자위 가운데 박힌 홍채가 푸르게 물들어있었다.
"승형씨 각성은 진짜 특이하네요. 남들은 체모색도 바뀌거나 하는데 승형씨는 눈색깔이 변하고."
"......그러게요."
승형은 적당히 대답하며 말을 얼버무렸다. 선우는 몰랐지만 승형은 제 동공에서 타오르는 불꽃을 여실히 확인했다.
"아. 화마룡은요?!"
승형이 안절부절하며 어쩔줄 몰라하자 선우는 TV를 가리켰다. 대통령은 연설 도중에 옆 스크린을 보라며 영상을 틀었다.
흔들리는 시야. 검은 불꽃이 타오르고 매케한 연기가 피아오르는 저녁밤에 흰 불꽃이 달려갔다.
히어로들의 긴박한 외침과 악마종 화마룡의 포효는 보는 이로 하여금 금방이라도 긴장하게 만들었다.
그 검은 불꽃을 가르며 달려가는 남자는 화마룡의 머리를 향해 높이 뛰어올랐다. 화마룡은 머리를 들이밀며 남자를 삼켰다.
"다시봐도 무섭네요. 무슨 생각으로 저렇게 달려든거에요?"
"아, 아하하."
멋쩍게 웃은 승형이 오른 팔의 붕대에 손을 올렸다. 영상 속에서는 히어로들의 절망 가득한 절규가 울려퍼졌다.
그리고 잠시. 화마룡의 뒷목을 뚫고 흰 불꽃이 치솟았다. 영상은 시청자의 눈 보호를 위해 순간적으로 밝기가 어두워지기까지 했다.
"진짜 하얗네요. 커뮤니티에서 승형씨 팬닉네임에 죄다 흰색깔 붙은거 알아요? 백염제니, 화이트 플레임이니."
"...네?"
승형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물론 흰색이 강하다. 하지만 저 흰 불꽃 안에 피어오르는 연하늘색 불꽃이 더 눈에 띄지 않은가.
"아. 승형씨는 <화권>이라는 이름이 더 나은가? 멘토인 집정관께서 지어주신 이름이기도 하고."
"아, 네. 이름이야 그 쪽이 나은데...."
"그거 잘 됐군."
문 앞에 들려온 목소리에 승형이 자세를 바로잡으려다 다시 근육통에 침대로 쓰러졌다.
커피향을 풍기며 들어온 남자, 유영호는 다크서클이 짙게 내려앉은 눈으로 병실을 훑었다.
"다른 놈들은?"
"전투영상 복기하러 갔어요. 저는 짬당해서 남았고."
"다 나으면 하라니까."
선우가 제 스마트워치를 두드리다 턱으로 영호를 가리켰다. 승형은 그 의미를 대번에 알아들었다.
"제가 깨길 기다린건가요?"
"화마룡을 물리친 대영웅을 강제로 깨울수는 없지."
영호는 앉을 곳을 찾다가 TV 화면을 보고 눈쌀을 찌푸렸다. 영상이 끝나자 다시 대통령의 얼굴이 돌아왔다.
[안심하십시오! 대한민국은 안전합니다!]
뚝.
영호가 TV로 연결되는 마력선을 끊어버렸다.
"아침부터 기분 잡치게시리."
"여전히 정부 싫어하시네요. 집정관님은. 아참. 대책부 장관은 어떻게 됐어요?"
"이미 일본으로 튀었더라. 양심이 있으면 영원히 한국에 못돌아오겠지."
영호는 승형의 옆 침대에 대충 걸터앉았다. 홀짝이는 텀블러 사이로 비친 두 눈은 승형을 질책하고 있었다.
"이승형."
"죄송합니다...."
고개조차 돌릴 수 없을 정도로 지친 승형은 천장을 보며 답할 수 밖에 없었다.
"너도 네가 몇 번이나 죽을뻔한지 알지?"
"...네."
기적이라는 말로도 하기 힘들 정도의 구사일생이었다. 악마종과 직접 맞딱뜨리고, 그 악마종을 관악산에서 안양까지 유인해, 브레스를 정통으로 맞받아치고, 악마종의 입 안에서 마력을 폭발시켰다.
"마지막에는 오더까지 무시했지."
"시간 남은거 봤다가 마음이 급해서...."
한국에서 활동하는 히어로들이라면 누구나 그렇겠지만, 동서의 중국, 일본 히어로들이 한반도에 발을 디디는 것은 단순 여행이나 친선 관계로도 싫었다.
특히 그 중 한국을 버리고 그 두 나라로 귀화한 이들을 생각하면 승형은 이가 갈릴 지경이었다.
"반성합니다. 하지만 다음에도 그런 순간이 있다면 저는 또 그럴겁니다."
"뭣 때문에?"
승형이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이마 앞에는 흰 불꽃이 미약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제게 이 힘을 맡긴 이들을 위해서요."
"...뭐?"
영호의 표정이 굳었다. 선우는 승형을 귀신에 홀린 사람처럼 쳐다봤다.
승형이 의아한 눈빛으로 둘을 번갈아봤다.
"왜 그러세요? 다 아시잖아요. 저 관악산 정상에서 차원문 닫을 때 제게 힘을 준 분을."
"승형씨...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선우의 목소리가 떨렸다. 영호가 몸을 숙여 승형과 눈을 마주했다.
"인상착의는?"
"어, 그러니까."
승형은 기억을 더듬었다. 갑자기 머리가 띵하고 울려 인상을 찌푸렸다.
"아으...."
"무리하지말고 천천히 떠올려봐라."
영호가 다독이자 승형은 눈을 껌뻑이다가 떠오른 인상을 말했다.
"후드, 회색 후드를 입은 거구의 남자였어요. 얼굴은 가려서 안 보였고. 자기를...으윽."
갑작스러운 현기증에 승형의 몸이 순간적으로 발작을 일으켰다. 그것을 끝으로 승형은 관악산 정상에서 마주쳤던 이들의 이미지가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다.
"이승형. 이걸 봐라."
영호는 굳은 얼굴로 스마트워치를 두드려 스크린을 띄웠다. 승형이 누워서도 볼수있도록 스크린을 기울인 영호는 화상의 가운데을 가리켰다.
"차원문이 닫히고 악마종, 화마룡이 나타났던 순간의 관악산 정상이다."
첫 번째 위성사진. 차원문에서 생성된 마력의 파장 때문에 위성사진은 잔뜩 왜곡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건 당시의 마력파장을 스캔한 거고."
거대한 붉은 원과 아주 미약한 녹색의 점. 승형은 그 녹색의 점이 내는 마력패턴의 주인을 잘 알고 있었다.
"저네요?"
"재생한다."
멈춰있던 화상이 영상으로 재생되었다. 화마룡이 주변을 날뛰고, 승형의 신호는 제자리에 멈춰있었다. 그리고 잠시 뒤 승형이 신호가 더욱 강해졌고, 남쪽 안양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승형의 표정이 굳었다. 있어야할 것이 없었다.
"악마종과 너. 이 날 관악산 정상에는 마력 패턴이 단 둘 뿐이었어."
"하지만...분명히 그 남자는."
"사람마다 S급으로 각성하면서 겪는 현상이 다르기는 하지. 누구는 그냥 각성하고, 누구는 죽은 부모를 만나기도 하고, 누구는 제3의 인물이 힘을 주는 방식으로. 아무래도 너는 누군가로부터 힘을 건네받는 환상을 본 것 같군."
"아. 그런건가요?"
승형은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제게 힘을 건네주며 세계의 평화를 부탁하던 거한. 그는 그저 자신이 각성을 치르며 나타난 환상속의 인물이었다.
"그런데 이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요?"
"...승형씨. 잘 들어."
양선우가 울먹이며 말했다.
"승형씨 나오던 마지막 사랑. 촬영팀 대다수가 살아남았어."
"그럼 잘 됐, 대다수?"
승형이 불안함에 몸을 벌떡일으켰다. 온 몸이 비명을 지르고 있지만 승형은 제 가슴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불안감에 고통을 견뎌냈다.
"...세 명이 죽었다."
영호가 스크린을 넘겼다. 그곳에는 연예란에서 세 번째 순위에 오른 신문 기사가 있었다.
「배우 천가을, 28세의 나이로 사망.」
"아?"
승형은 고통마저 잊었다.
"농담이죠?"
승형은 떨리는 손으로 스크린을 눌렀다. 모자이크된 사진에는 괴수에게 습격당한 연예인용 차량이 보였다.
"S급 됐다고 뭐, 신고식으로 장난치는거죠? 그쵸?"
승형은 기사를 쭉 내렸다.
- ...이 날 새벽 합동조사반은 S대학 부지 주차장에서 두 명의 사체를 발견하였다. 각각 촬영스탭 권모씨, 배우 천가을의 매니저 신모씨는 싸늘한 주검으로...
"봐봐요. 가을씨가 아니잖."
- 한편 주차장 인근 강의동의 옥상에는 막대한 양의 혈흔이 발견되었다. 옥상 문에서부터 질질 끌려나간 흔적을 감식한 협회의 조사관 <파일러>는 마력감식 결과, 혈흔의 주인을 배우 '천가을씨'로 판단....
승형의 눈 앞이 깜깜해졌다.
하지만 영호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이게 천가을이 '살해'된 것으로 추정되는 옥상의 사진이다."
옥상 전체에 흩뿌려진 붉은 피. 철제문에서부터 질질 끌리듯 이어진 핏자국은 거대한 피웅덩이로 이어져 있었다.?
"...천가을은, 죽었다."
신은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
힘에 따른 대가를 원한다면, 그것은 인간을 감언이설로 속이는 악마.
악마는 승형에게서 인생의 마지막이 되었으면 했던 사랑을 앗아갔다.
승형은 의식을 잃었다.
* * *
<서해 해상.>
"공쳤네."
샤오린은 가면에 스치는 해풍 속 마력에 기수를 돌렸다.
"설마 S급으로 각성하는 이가 나타날 줄이야."
"히어로로서는 좋은 거 아닌가?"
적토가 수면을 걸으며 눈을 깜빡였다. 샤오린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긍정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런 것 같지 않지만."
샤오린은 갑판 위의 히어로들이 금방이라도 폭발하려는 것을 인지하고 속으로 혀를 찼다.
"아! 뭐 이딴 식이야!"
"우우우! 조선이 기만한 거다!"
앞으로 조금만 기다리면 반도에 상륙할 수 있었는데, 갑자기 각성한 S급 영웅 때문에 상륙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히어로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반드시 어떤 대책이 필요하기 마련일 것이다.
"......또 돌아가면 난리가 나겠어."
"그래도 돌아가야지."
"예. ......."
샤오린의 고개가 뒤로 돌아가, 저 멀리 육지를 흘겼다.
"......."
"왜 그러나?"
"아무것도 아니...."
순간, 등에 소름이 돋았다. 뜨거운 불길에 등이 다 타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
설마. 아닐 것이다. 바다에 빠진 이후에 반응은 소실되지 않았는가.
"무슨 일 있나?"
"...돌아가면 바로 수련. 이랴!"
적토가 수면을 달리기 시작했다. 운장은 당장에라도 훈련장에서 창을 휘두르고 싶었다.
공포를 떨쳐내기 위해.
그렇게 운장이 퇴각한 것으로 강습상륙함들은 모두 선미를 돌려 되돌아갔다.
* * *
"돌아갔네요."
"뜬금없이 무슨 얘기야?"
"아뇨, 좀 무서운 여자가 노려보고 있었거든요."
피닉스는 싱글벙글 웃으며 바닥에 쓰러진 천가을에게 마력을 불어넣었다. 정령의 정순한 마력은 천가을의 몸에 깃들어, 신체의 회복과 재생 능력을 비약적으로 끌어올렸다.
"그냥 치료하면 안 되냐? 뭐 힐 같은 거 쓰면 되잖아."
"저 극딜러라서 안 되네요."
"......그러니까 치료는 하나도 못한다는 말이지?"
"네."
피닉스는 두 손을 가을의 가슴에 올린 채 가을의 몸에 난 상처를 재생하고 있었다. 덕배는 피닉스의 명령에 의핸 눈을 감은 채 지적했다.
"그럼 지금 건?"
"그냥 과다출혈로 꾸미고 마력으로 때우는 거죠. 임시방편이라 두 번은 못 써요."
피닉스가 쓰게 웃었다.
"자, 이걸로 치료는 끝! 가을 씨 의식 차리는 동안 이동하죠."
피닉스가 가을을 안아들었다. 저보다 훨씬 체구가 큰 여성을 안아든 피닉스의 모습은 다소 우스꽝스러웠다.
"어디로 간다는 건데."
"당연히 원래 목적지 아녜요?"
피닉스가 턱으로 서쪽을 가리켰다.
"구로요."
"......원래 목적지 여의도 아니었어?"
"네. 구로 거쳐서 여의도. 푸흐흐."
피닉스의 입가에는 미소가 끊이질 않았다.
"꼭 죽여야 할 놈이 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