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화 〉1부 5장 (2)
오전 9시. 여의도 국회의사당.
장후정은 깔끔하게 복구된 국회의사당을 보며 감회가 남달랐다. 그가 만년 괴수대책부의 차관으로 일하기 전까지, 서울의 지역구를 잃고 신서울로 도망쳐오기 전까지 일했던 곳이 바로 이곳 국회의사당이었다.
"......흠."
선의철 대통령은 굳이 비밀 접선의 장소로 국회의사당을 고집했다. 상대 또한 흔쾌히 수용했다. 무슨 이유인지 알지 모른다.
전직 국회의원이었던 장후정을 배려하는 장소일까, 아니면 모종의 이유라도 있는 걸까.
"이제 나랑은 관계없지."
중요한 것은 그가 대통령의 밀명을 받아 히어로 10명을 무사히 구출해 내는 것. 비록 상대가 빌런 연합이라고 해도 이전 대한민국의 국민이었던 만큼, 정부를 상대로 하는 협상에서 인질을 마구 죽이는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장후정은 지하철 역을 통해 자신을 이곳까지 호위한 이들을 보며 침을 삼켰다. 서울에서 만든 것으로 생각하기 힘든 검은 슈트, 불꽃무늬의 푸른 넥타이는 그들이 모두 한 조직의 일원임을 나타내고 있었다.
"다 도착한 겁니까?"
"......."
조직원들은 말이 없었다. 장후정을 이끌어 온 팀의 팀장만이 유일하게 말을 했지만, 그도 필요한 말 이외에는 전혀 하지 않았다.
"참 조용한 분들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훈련된 이들이란 말이기도 하죠."
장후정과 함께 따라온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두 눈에 스트레스가 한가득한 협회의 대표, 유영호.
부산에 출장-이라는 이름의 유배를 갔던 유영호는 납치된 히어로들을 구하기 위해 직접 서울에 발을 들이밀었다. 장후정은 조심스레 속삭였다.
"집정관. 아무리 그래도 여기부터는 저 혼자 가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집정관의 신변에 탈이라도 나면 어쩌려고요."
"이미 호위 히어로들을 광명에 두고 온 시점부터 저희 셋 다 위험해졌습니다. 상대도 저희를 인질로 잡으려고 하지는 않을 겁니다. 협상의 의지가 있다는 거죠."
유영호가 슥 주위를 살폈다. 조금 엉성하기는 하지만 그들을 호위 겸 감시로 붙은 이들은 하나같이 훈련된 티가 보였다. 괴수 소동 초기 시점에 민간인들이 자율적으로 순찰대를 구성했던 때의 모습과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
"그러고 보니 이곳...."
유영호는 주변을 훑었다. 곳곳이 전투의 흔적으로 역력했지만, 분명 건물들만큼은 새로 지어지기라도 한 듯 반듯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은재민님?"
유영호가 은재민에게 물었다. 유성 그룹의 회장. 그는 정부와 협회와는 전혀 관계없는 재계의 사람임에도 이곳 협상장에 올라왔다.
혹시나 협상에서 경제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놓일 경우, 정부는 기업들의 자금력을 이용할 계획이었다. 강압적인 정부의 행태에 재계의 총수들은 난색을 보였지만, 유독 은재민은 고분고분 그 의견에 따랐다.
"하하. 저야 서울이 안정되면 좋죠. 유성의 본사가 여기 있었지 않습니까? 아버님께서도 좋아하실 거고요."
은재민은 놀이공원에 온 어린아이처럼 기뻐했다. 그룹을 운영할 때는 냉혈한처럼 칼같이 대처하면서도, 간혹 그 나이대 청년의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 사회 정의를 위해 힘쓰는 열혈의 사나이. 사람들은 그를 호구 재벌이라 불렀다.
"하하. 그렇군요. 아무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정부도 지금 예산이 난항이라...."
"맘 편히 놓으십시오. 협상에 얼마가 들어도 좋습니다. 그저 무사히 살려서 신서울로 복귀하는 대신에...."
"유성의 스폰이라면 제게 맡기십시오. 그 정도는 힘은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집정관."
물론 아무리 호인이라도 그의 근본은 사업가. 협상의 자금을 대는 대신에 그에 따른 반대급부를 챙길 생각이 만만이었다. 정부 측에서야 입을 싹 닫아버리면 그만이지만, 협회 측은할 수 있는 최대한의 대가를 제시했다.
저벅, 저벅.
의사당 계단을 내려오는 남자의 등장에 호위들이 자세를 바로잡았다.
대기업 신입사원 같은 단정한 정장 차림. 햇빛에 민감한 듯 남자는 갈색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삑.
유영호는 특수 제작된 안경의 유리알에 시각 정보를 입혔다. 남자의 체격, 걸음걸이, 그리고 느껴지는 마력의 파장. 스마트워치에 저장된 유영호 전용 데이터베이스는 빠르게 남자의 정체를 밝혀냈다.
B급 이능력자. 빌런. 등대 김지화.
야밤을 훤히 밝히며 구로의 겁쟁이 왕으로 군림하고 있었을 그가, 태양 빛이 훤한 오전부터 쌩쌩하게 돌아다니고 있다.
유영호가 속으로 그에 대해 생각하는 사이, 등대는 고개 숙여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등대>라고 불러주시길."
"...그렇게 시원하게 정체를 밝혀도 되나?"
유영호는 볼을 긁적였다. 등대는 슬쩍 웃고는 안쪽을 가리켰다.
"이쪽으로 따라오시면 됩니다."
등대가 건물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셋은 그 뒤를 따라 의사당 안으로 들어갔다.
"흠."
장후정은 깔끔한 건물 내부의 모습에 생각에 잠겼다. 여의도는 인류와 괴수 간의 격전지로 그렇게 폐허가 되었다고 했는데, 눈으로 본 국회의사당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자신이 의원으로 있을 때보다 더 깨끗하다. 장후정은 본인의 상식으로는 이 건물의 상태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래서야 꼭 새로 지은 것 같지 않은가.
저벅. 등대의 걸음이 멈췄다. 명패도 없는 썰렁한 곳이지만, 테이프로 붙여둔 A4용지에는 분명히 '간담회의장'이라고 적혀있었다.
"......정말 종잡을 수 없군."
장후정이 혀를 내두르며 점점 의아함에 빠지는 사이, 등대가 안을 똑똑 두드렸다.
"들어가겠습니다."
끼이익. 문이 열린다. 황량한 회의장 가운데,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테이블이 특사들을 반겼다.
"어서 오시게. ...장후정?"
원형 테이블 가운데에 앉아있던 중절모의 신사가 목소리를 높였다. 장후정은 당연히 상대가 누구인지 깨달았다.
"류천성? 강남 갑 4선?"
하늘성, 류천성이 당황한듯 제 주변을 흘겼다.
하늘성의 왼쪽에는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여인이 놀랐다는 듯 손으로 입을 가렸다. 여인의 뒤에는 비서처럼 서 있는 푸른 머리칼의 소녀가 고개를 숙이고 서 있었다.
코트로 몸을 꽁꽁 가린 여인과 비서 차림의 소녀. 나머지 비어있는 한 자리에는 등대가 성큼성큼 걸어가 앉았다.
"일단 앉으시죠."
등대가 손짓하자 특사들은 제각각 자리를 잡았다. 원형의 테이블. 정부의 대표인 장후정은 가운데에서 하늘성과 마주 앉았고, 유영호는 장후정의 왼쪽-마스크의 여인과 마주 보는 위치에 앉았다. 은재민은 남은 자리에 앉아 등대와 마주 봤지만, 시선은 분명 여인을 향해 있었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장후정이 입을 열었다.
"...과연. 그래서 이 회의장입니까."
장후정은 갑자기 온몸이 긴장되기 시작했다. 상대는 4선이지만 자신은 초선. 까마득한 선배로서 이곳 회의장은 그의 본진이나 다름없었다.
"자네가 특사로 올 줄은 몰랐는데."
"서로 아는 사이야?"
가면의 여인은 저보다 배는 살았을 하늘성에게 편히 말했다. 장유유서를 중시하는 장후정이 까마득한 제 선배에게 막 대하는 여인에게 뭐라 하려고 했으나, 하늘성은 개의치 않다는 듯 여인에게 답했다.
"내 얘기했잖나. 의원이었다고. 저쪽은 서울 망하기 전에 마포에서 초선하던 친구야."
"흐응. 그런 사람이 대책부 차관으로 특사까지 온 거네."
여인은 아무렇지 않게 기밀을 읊었다. 특사의 존재와 정보에 대한 것은 오직 하늘성에게만 전달된 특급 기밀이었다.
그걸 여인이 말한다는 건 하늘성이 그 기밀을 공유할 정도로, 여인의 위치가 이 자리에서 상당히 높다는 걸 의미했다. 유영호는 안경의 장치를 움직여 여인의 마력을 스캔했다. 순간, 푸른 빛이 번쩍였다.
파직!
유영호의 안경알에 금이 갔다. 그는 저도 모르게 테이블 아래에서 주먹이 움켜쥐었다. 여인은 잠시 멀뚱거리다가 피식 웃었다.
"함부로 도촬하려고 하다니. 성범죄인 거 몰라? 집정관께서 그런 취미가 있는 줄 몰랐는데."
"세상에. 집정관이 관음증이 있었다고요?"
"등대야. 네가 할 말은 아니지 않니?"
여인의 지적에 등대가 침몰했다. 고개 꺾인 그는 여전히 실내에서도 선글라스를 벗지 않고 있었다.
"일단 자기소개부터 할게. <팬텀>."
자신을 팬텀이라 소개한 여인이 옆을 가리켰다.
"<하늘성>."
"<등대>입니다."
제각각 빌런들은 이명을 밝혔다. 장후정은 그들이 사실상 여의도를 점령한 빌런 연합의 수괴들임을 확신했다.
"특사, 정부 측 대표. 괴수대책부 차관 장후정이오."
"협회 측 대표. <집정관> 유영호입니다."
"......."
은재민의 차례. 그는 멍하니 팬텀을 바라보고 있었다. 팬텀이 그 시선을 느끼고 콧방귀를 뀌었다.
"저기? 뭘 그렇게 보는 거야? 그쪽 이름 없어?"
"아, 아. 죄송합니다. 다만...."
은재민이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제가 워낙 장거리를 움직이다 보니 아직 화장실을 가지 못했습니다. 괜찮다면 잠시 다녀와도 되겠습니까?"
"또? ...쯧."
장후정이 혀를 찼다. 은재민에 대한 암묵적인 비밀. 시도 때도 없이 화장실을 찾는다고 하여 그의 멸칭 중 하나가 '변비왕자'기도 했다.
등대가 난감한 얼굴로 이죽였다.
"화장실? 참.... 시작하자마자 무슨-"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팬텀의 뒤에 서 있던 소녀가 말을 끊으며 나섰다.
"뭐?"
"......."
"아, 아하하. 뭐, 사람이니까 이해해야죠. 그렇지 않습니까?"
빌런들이 당황하는 가운데, 비서는 빌런들을 훑고는 웃으며 말했다.
"손님께서 길을 잃으실 수 있으니, 제가 직.접. 안내하겠습니다."
비서의 손짓에 변비왕자는 반색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하, 죄송합니다. 제가 장이 진짜 안 좋다 보니.... 대신 차관님. 제가 늦게 돌아올 것 같으니 먼저 회의 시작하시지요."
"뭐? 자네가 빠지면 어쩌자는 말인가?"
은재민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말을 이었다. 꼭 무언가 급한 걸 참는 듯한 얼굴에 회의장 모두가 긴장했다.
"괜찮습니다. 얼마까지 올리든 마음 편히 협상에 임하십시오. 유성의 자금력은 충분하니까요."
"따라오십시오."
소녀의 안내에 은재민은 웃는 듯 얼굴을 찡그리며 다급히 회의장을 벗어났다.
"......뭐, 그러면 시작하지. 어차피 자네와 나 사이의 협상이 될 테니."
하늘성이 손을 들어 이목을 집중시켰다. 장후정은 테이블 아래에서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상대는 원래라면 6선을 하고도 남았을 정계의 노괴(老怪). 하지만 지금은 8년 동안 정계를 떠난 일개 빌런에 불과하다.
그에 비해 자신은 수년간 신서울의 주무 부처를 오다니며 능력을 인정받았고, 괴수대책부의 차관으로 사실상 장관급의 대우를 받으며 정치 경험을 쌓았다. 정계에서 은퇴한 거나 다름없는 이와 지금도 승승장구하며 정계에 발을 담그고 있는 자.
해볼한만 싸움이다. 장후정은 자세를 바로잡고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그러면 우선 정부의 입장에 대해...."
정부의 대표와 빌런의 대표. 두 전직 의원의 열띤 협상이 회의실을 가득 메웠다.
* * *
저벅, 저벅.
은재민은 눈앞의 소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검은 정장 치마와 재킷. 그리고 안에 받친 흰 와이셔츠. 말총처럼 묶은 푸른 머리칼이 유독 눈에 띄어 잘 눈치는 챌 수 없지만, 은재민은 보고 말았다.
"오피스룩에 운동화는 좀 아니지 않나?"
"허구한 날 재벌 회장을 화장실로 보내는 건 또 어떻고요?"
소녀, 피닉스가 이죽였다. 둘은 어느덧 화장실 앞에 멈춰 섰다. 은재민은 잠시 머뭇거렸다.
"뭐해요? 따라 들어와요."
소녀는 자연스럽게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남자 화장실. 은재민은 혀를 내두르며 그대로 따라 들어갔다.
화장실 안은 아무것도 없었다. 마치 공사 현장에서 그대로 들어온 듯, 인테리어는커녕 아무런 설비도 갖추어지지 않았다.
"우리 고객님 범상치 않은 건 알고 있었지만...."
"여기가 정말 조용한 곳이거든요."
딱. 피닉스가 손가락을 튕겼다. 피닉스와 은재민 사이에 불꽃의 의자가 생겨났다. 마력을 실체화하여 현실에 물리력을 갖추게 하는 S급들의 권능. 은재민은 그대로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은재민의 눈에 금색 별빛이 반짝였다. 푸른 불꽃의 의자에 앉아 대범하게 손잡이를 팡팡 치는 은재민의 행동에 피닉스가 오히려 더 긴장했다.
"히히. 역시. 하랑이랑 싸운 것도 그쪽이죠? 변신의 이능력? 어느 쪽이 본모습이에요? 이쪽인가?"
"...굳이 따지자면 어느 쪽도 본모습이 아니에요. 마치."
피닉스가 손가락을 들어 은재민을 가리켰다. 손가락 끝에서 흘러나온 마력이 은재민에게 흘러갔다.
순간, 들릴 리가 없는 여인의 비명이 울렸다.
[꺄악?!]
여인의 목소리는 몹시 높아져 있었다. 피닉스는 배를 잡고 꺄르르 웃으며 이어진 마력의 흐름을 끊었다.
위잉, 철컥.
은재민의 기계안구가 벌어지고 그곳에서 나온 빛에 스크린이 나타났다. 그곳에는 얼굴을 붉히며 씩씩거리는 금발의 소녀가 있었다. 소녀의 앞머리가 살짝 그을려있었다.
[무슨 짓을 하는 거예요?!]
"그래요. 그게 그쪽이 본 모습이죠. 다시 소개할까요, 우리?"
피닉스가 고개를 숙였다 들었다.
"유성 그룹의 개망나니 셋째 딸. 재벌가 희대의 악녀. 하지만 그 실체는 죽은 오빠들을 대신해서 홀로 그룹을 전부 이끄는 유성의 기둥이자 진짜 회장. 저와 처음 만났던 블랙 마켓의 회장도, 이곳에 특사로 온 은재민도 당신이 조종하는 기계 인형이잖아요? 푸흐흐. 아, 그거 말고도 다섯 개가 더 있던가?"
[.......]
"어쨌든 만나서 반갑습니다. A급 이능력자 <인형술사>. 아니...."
피닉스가 손가락으로 불꽃을 튕겼다.
"은유하 아가씨."
소녀의 옆으로 푸른 불꽃이 환하게 피어올랐다. 은유하(銀流河)는 방긋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이쪽도 만나서 반가워요. 사랑하는 우리 고객님.]
그 누구도 오지 않는 남자 화장실에서, 또다른 협상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