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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염의 피닉스-76화 (76/1,497)

〈 76화 〉1부 5장 (9)

강소연. 협회에 소속된 비 능력자 직원인 동시에 집정관 유영호를 옆에서 보좌하는 부관. 사회생활 경험이 부족한 집정관을 곁에서 잘 케어하는 강소연에 대한 평가는 꽤 좋은 편이었다.

"다 착한 사람 코스프레였다는 거죠. 협회가 각국을 컨트롤하기 쉽게."

"대체 왜?"

이기성이 물었다. 연구실 안에 있는 다른 히어로들도 의아한 눈초리였다.

피닉스는 이기성 이외에도 잡혀 온 히어로들을 구해 이곳으로 모았다. 그들이 납치당한 위치는 강소연이 순순히 불었다. 강소연의 손가락은 꺾여있었다.

"대한민국 대통령도 큐브의 존재를 알고 있는데, 설마 협회의 본부가 그걸 모르겠어요?"

피닉스가 어깨를 으쓱이며 강소연의 손가락을 짓밟았다. 강소연은 그들 몰래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읍, 읍읍!"

"이 아줌마가. 피로 문장 그리려 하네?"

손에서 흘러나온 피로 어떻게든 문장을 그려내려 했지만, 피닉스의 시선은 강소연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었다.

피닉스가 다시 강소연의 마력을 태워버리며 이기성에게 설명했다.

"협회가 국제기구라고 해도, 개중에는 각국에 영향을 미치려고 하는 자들이 있죠. 강소연은 협회 측에서 이 나라를 지배하기 위해 보낸 사람이고, 선의철을 대통령으로 내세워 꼭두각시로 만들려 했어요."

"결국 강소연 님이 청송이다?"

"네? 청송이 뭔데요?"

피닉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기성은 재빨리 강소연을 가리켰다.

"소나무 부대를 만들어내는 이능력자. 선의철의 심복입니다."

"아, 그래요? 옛날 이명인가? 아무튼, 이 여자가 협회에서 한국에 심은 첩자에요. 비선실세 노릇을 하게 했죠."

피닉스가 다시 강소연의 마력을 태우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협회랑 정부, 양쪽에 줄을 대고 줄타기를 하고 있었죠. 왜? 그 누구도 모르게 큐브를 주웠으니까. 안 그래요? 찾으라고 해서 진짜 찾아내기는 했는데, 막상 알리려하니까 아까워져서."

"......!"

강소연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협회 내에서도 극비인 큐브의 존재를 고작 빌런 따위가 알고 있다는 것이 충격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강소연이 협회도 정부도 모르는 별개의 큐브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피닉스가 인지하고 있다는 것에 더 충격을 받았다.

시선을 제대로 두지 못하는 강소연에 피닉스가 허리를 숙였다.

"왜요? 부산 차원문 공략 중에 당신이 빼돌렸던 거, 아무도 모를 줄 알았어요?"

어떻게 문신사, 아니 청송이 큐브를 가지게 되었는가.

피닉스는 강소연이 빼돌린 큐브의 위치는 모르지만, 빼돌린 정황에 대해서는 파악하고 있었다.

"2012년 2월 10일. 부산에서 차원문이 열리고 쉐ㄷ...악마종인 수마룡(水魔龍)이 등장했던 날. 알고 있죠?"

"어, 그날 혹시?"

이기성이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놀랐다. 피닉스는 손뼉을 치며 맞장구쳤다.

"그래요! 설화공주, 석하랑이 최초로 궁극기를 사용한 날! 수마룡의 파도 브레스를 모두 얼려버리며 화려하게 데뷔를 했죠. 그때 당신은 그 차원문 발생 여파를 수습했고요. 그쵸?"

"크읍."

강소연이 두 눈을 감았다. 재갈이 물려 말을 할 수는 없지만, 히어로들은 그것이 곧 긍정의 침묵임을 깨달았다. 히어로 하나가 질문했다.

"그, 그럼 그런 위험한 물건을 주웠으면 당연히 협회에 신고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피닉스가 코를 찡그렸다.

"당신네같이 정의감 넘치는 히어로라면 모를까, 이 여자처럼 딴 생각 있는 사람이 그런 생각이 들겠어요? 손에 어떤 기적도 실현해 줄 백지수표가 들어왔는데?"

"그럴수록 더 협회에 알렸어야죠! 그런 위험한 물건은 봉인해야 한다고!!"

히어로가 강변하고 강소연은 눈을 감아버렸다. 피닉스는 안쓰러운 눈빛으로 히어로에게 답했다.

"사고방식이 다른 걸 어쩌겠어요? 막말로 큐브를 주운 사람이 세계 평화를 위해 쓸 수도 있는 거고, 강소연처럼 제 사리사욕을 위해 쓸 수도 있죠. 아니면 누구처럼 세계를 멸망시키려고 하거나."

히어로들이 부정하려 한다. 하지만 정황은 모두 피닉스의 말이 진실로 드러나고 있다. 이기성이 강소연에게 호소했다.

"팀장님! 답해주십시오! 대체 왜 그런 짓을 저지르셨습니까?!"

이기성은 비통한 심정을 토해냈다. 그는 이미 수차례 전장에서 강소연의 지원을 받아 수많은 일반인을 구했다.

히스테리는 좀 부리기는 하지만 항상 얼굴에 미소가 끊이지 않던 사람.

집정관 바라기만 아니었으면 뭇 많은 남성 히어로들에게 구애를 받았을 해바라기 같은 여자.

"이건 집정관님에 대한 배신입니다!!"

"으읍!!"

강소연이 크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재갈을 타고 침이 죽 흐름에도 강소연은 격하게 부정했다.

순간, 히어로들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다. 피닉스는 혀를 차며 검지를 좌우로 움직였다.

"사랑? 그럴 일 없어요. 이 여자, '지휘관'을 상대로 문신을 찍어도 소용없어요. 그래서 마음을 공략하려고 했죠. 본인이 S급이 되어 큐브를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을 때까지, 선의철과 유영호라는 방파제가 필요했던 거예요."

"읍, 으읍!"

"아, 자꾸 꿈틀거리네."

강소연이 다시 격하게 몸부림을 쳤지만, 피닉스는 등 위에 올린 발을 크게 내려찍어 강소연을 제압했다. 갈비뼈를 으스러뜨릴 강한 충격에 강소연은 의식을 잃었다.

"어?"

피닉스가 발로 강소연을 흔들었다. 강소연은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

피닉스는 잠시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다가, 살포시 발을 떼어 옆으로 비켜섰다. 피닉스가 다른 히어로들에게 손짓했다.

"...일단 당신들의 처우부터 정하기로 하죠. 이제 어떻게 하실래요?"

"지금 상황에서 뭘 어쩌라는 겁니까?"

이기성이 이를 갈며 피닉스를 노려봤다.

"협회의 사람이 사실 정부와 편을 먹고 히어로들을 정신 지배하려고 드는 와중에, 우리보고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이대로 소나무 부대 들어가기 싫으면 어디 도망쳐서 평생 숨어 살라고요?"

"좋은 방법 있잖아요?"

피닉스가 제 목을 손으로 그었다. 동시에 히어로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들의 시선은 기절한 강소연에게 닿았다.

일부러 외면하고 있던 가정을 피닉스가 끄집어냈다.

"입을 막아버리는 거예요. 영원히. 살인 멸구."

"지금 강소연 팀장님을 죽이라는 겁니까?!"

"안 그러면 당신들이 소나무 부대가 될 텐데요?"

히어로들이 침묵을 지킨다. 어느 쪽도 쉽사리 선택하기 힘든 상황.

"아니면 모두 서울로-"

"전."

이기성이 가장 먼저 손을 들었다.

"...전 이대로 도망치겠습니다."

이기성의 말에 다른 히어로들이 놀랐다. 피닉스는 연구실 책상에 걸터앉아 느긋한 얼굴로 여유를 부렸다.

"이유를 물어봐도?"

"...소나무 부대가 되어 무고한 사람들 죽이기는 싫습니다. 그렇다고 강소연 팀장님을 죽일 수 없어요."

"빌런으로 들어오는 건? 저희 조직 경력직은 상시채용인데."

"빌런으로 살 바에는 해외로 망명하겠습니다."

강력한 이기성의 의지에 피닉스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주변을 슥 살피니, 다른 히어로들도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호구처럼 떠나주겠다. 평생을 쫓기더라도? 협회와 정부에서 다 쫓을 텐데?"

"예. 각오는 됐습니다. ...이미 헬하운드에게 납치당하는 순간부터 죽은 목숨이었으니까요."

"아니, 그건.... 하아."

피닉스가 한숨을 내쉬며 스마트워치를 두드렸다.

"좋아요. 당신들 덕분에 여기까지 왔으니까, 그에 대해 보답을 해줄게요. 정부도 협회도 건드릴 수 없지만, 히어로로 계속 지낼 수 있게."

* * *

30분 .

피닉스는 으슥한 등산로에 있는 쉼터에서 정자세로 앉아있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듯한 경건한 태도는 신의 부름을 기다리는 성직자와도 같았다.

덜컹, 덜컹.

군용 트럭 하나가 산길을 올라왔다. 새벽의 외길을 라이트도 켜지 않고 올라온 트럭의 운전석에서 거구의 남자가 내려와 피닉스에게 다가왔다.

"야심한 시각에 대전까지 무슨 일이실까, 우리 사랑하는 호갱님!"

두 팔을 벌리며 피닉스를 환대하는 남자는 블랙마켓의 회장. 그의 눈에는 금색 별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피닉스는 살포시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취업청탁을 좀 하려고 왔어요."

"응? 우리 호갱님 어디 유성에 자리 필요해?"

회장의 눈이 주변을 훑었다. 회장은 산길 아래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인적을 느끼고 팔짱을 꼈다.

"그쪽 빌런들 신분 세탁해서 우리 쪽에 넣을 생각이면 오산이야. 데이터베이스에 마력 패턴 등록되어있는 이상 얄짤없이 다 검문에서 걸려. 요 한 달 사이에 새로 각성한 사람이면 모를까."

"그런 거 필요 없어요. 이 사람들, 그쪽한테 선물로 주는 거니까."

피닉스가 웃으며 손짓을 했다. 쭈뼛쭈뼛 서 있던 이들이 하나둘 쉼터로 모습을 드러냈다.

"......호오."

회장이 손으로 턱을 쓸며 웃었다. 기계안이 반짝이며 빠르게 11명의 히어로들의 신상을 파악하고는, 야수같이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이거 완전 정부랑 협회 쌍으로 엿 먹이라는 건가?"

"정부도 협회도 절대 뭐라고 못 해요. 왜요? 자신 없어요? PMC 만들고 싶다며?"

회장의 입꼬리가 찢어질 듯 귀에 걸렸다. 회장은 곧장 히어로들을 향해 트럭의 뒤를 가리켰다.

"야. 타."

"누구신데 갑자기...."

이기성이 불만 어린 눈빛으로 따지듯이 묻다가, 회장이 손으로 그린 수신호에 입을 막았다. 손가락으로 그리는 별의 모양. 그것만으로 히어로들이 회장의 배경을 가늠하기에는 충분했다.

히어로들이 트럭 뒤로 올라탔다. 피닉스는 쉼터에 눕혀놓은 여인을 들쳐멨다.

부릉.

마력 엔진이 거세게 진동하며 시동이 걸렸다. 운전석에 탄 회장은 창문을 빼꼼히 내리고 피닉스에게 제안했다.

"사랑하는 호갱님. 이대로 타고 가지? 내가 이렇게까지 큰 선물 받았는데, 아침이라도 한 끼 대접해야 하지 않겠어? 내가 살게."

"밥은 됐고, 시간 되면 언제 차나 한잔 하죠."

회장이 왼쪽 눈을 찡긋 감으며 윙크했다. 피닉스는 깔끔히 그걸 무시하고 트럭 뒤로 가서 등에 멘 여인을 트럭 안으로 집어던졌다.

"감시 잊지 마요."

"예."

여인, 강소연을 노려보는 히어로들의 눈빛이 흉흉했다. 이기성은 제 손바닥 위에 올려진 미니피닉스를 강소연에게 날렸다. 미니피닉스는 강소연의 손바닥 위로 살포시 내려앉고는,

콕.

손가락 마디 끝을 부리로 찍었다. 피는 나지 않지만, 부리를 타고 흐른 창염이 강소연의 체내 마력을 다시 불태웠다.

인간의 불을 훔친 프로메테우스가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 먹히듯, 큐브를 꿍친 미니피닉스에게 마력을 평생 갉아 먹힐 것이다.

"저기요?"

피닉스가 운전석으로 다가와 창문을 두드렸다. 창문 사이로 얼핏 보인 회장의 얼굴이 어째선지 뚱해 보였다.

"무슨 일이십니까, 고객님."

회장의 목소리가 쌀쌀하기 그지없었다. 피닉스는 웃으며 창문을 노크하듯 두드렸다.

"저는 사람이랑만 차 마셔요. 기계가 아니라."

싱긋. 피닉스가 불꽃으로 변하며 모습을 감췄다. 회장은 떫은 얼굴로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어디 두고 봐."

* * *

"그러면...."

나는 연구실로 돌아와 숨을 골랐다. 실수로 강소연을 기절시켜 큐브의 위치는 찾지 못했지만, 가까이에 있는 큐브가 어디 있는지 알아낼 방법은 있다.

'꼭 보스방 문 여는 기분인데.'

굳이 따지자면 보스가 직접 찾아와주겠지만, 그 긴장감과 두근거림은 크게 다르지 않다.

"슬슬 본래 목적으로 돌아가야겠죠?"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파아아아앙!

반나절 가까이 억제하고 있던 마력이 급격히 팽창하며 건물 전체로 퍼져나갔다. 범람하는 홍수를 막고 있던 둑을 터트리듯, 마력이 전신을 흐르며 요동친다.

고오오오---

끓어 넘치는 마력이 초음파탐지를 하듯 지하의 온 연구실을 훑었다.

"어디에 있으려나?"

픽. 마력이 순간적으로 끊긴 곳이 느껴졌다.

"그럼!"

나는 오른손을 그대로 움켜쥐고 아래로 찍었다.

콰-앙! 타일이 박살 난다. 연구동 전체가 지진이 난 듯 흔들린다. 내가 서 있던 바닥이 크게 갈라지며 아래로 주저앉는다.

1층, 2층. 하나둘 층이 내려앉으며, 지하 깊숙한 곳까지 내려왔다. 흙먼지가 입을 간지럽힌다.

"콜록, 콜록!"

지하 5층의 비밀공간. 강소연이 몰래 큐브를 숨겨놓은 비밀 연구동. 원작에서 챕터 최종 전투를 벌였던 바로 그곳. 놀랍게도 강소연의 연구실에서 바로 아래쪽으로 이어졌다.

'다른 데 숨겨둔 줄 알았는데 계속 여기에 숨겨뒀다니.'

원래라면 강소연을 깨워 온갖 비밀번호를 풀어야 하겠지만, 굳이 고생할 필요는 없다.

"이럴 줄 알았으면 바로 여기부터 찾아보는 거였는데."

나는 땅에 묻힌 거대한 두께의 콘크리트공에 손가락을 푹 찔러넣었다.

'그래도 보물 발견.'

손끝에서 흘러나간 마력이 공의 중심에 닿았다. 반지름만 2m 가까이 될 구체의 정중앙에 불쾌한 감각의 마력이 느껴졌다.

'공들일 시간은 없으니까.'

나는 그대로 손을 집어넣어 불꽃을 터뜨렸다. 균열 사이로 터지는 폭발에 구체가 조각나고, 나는 더욱 폭발을 일으키며 안으로 팔을 집어넣었다.

움찔.

'찾았다.'

손가락의 끝에 걸리는 혐오스러운 마력에 나는 그대로 힘을 주고 물건을 낚아챘다. 각설탕만큼 작은 크기의 정육면체.

이세계에 오고 나서 두번째로 얻은 큐브다. 나는 그 큐브를 주섬주섬 주머니 안으로 쑤셔 넣었다.

"자, 그럼 이제 슬슬 보스 등장 신호가 뜰 때 됐는데."

전신의 마력을 끌어올리며 천장으로 고개를 들었다.

구구구궁.

역시. 양반은 못 되는 사람이다. 내가 지하를 부수고 내려온 것보다 더 큰 진동에 지축이 흔들린다.

그리고,

□□□□□□!!!

거대한 빛의 검이, 지하를 뚫고 내 정수리를 향해 내리꽂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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