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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염의 피닉스-78화 (78/1,497)

〈 78화 〉1부 5장 (11)

대전 연구 단지의 연구동 하나가 괴멸된 아찔한 5월 2일의 새벽.

토요일 아침부터 신서울은 난리가 났다. 긴급 재난 문자는 시도 때도 없이 울리고, 싸움의 여파로 모든 마도구들이 일시적으로 먹통이 되기도 했다.

그 혼란은 모든 열쇠를 쥐고 있던 광검이 아무 답도 내놓지 않고 칩거에 빠지면서 더욱 심화되었다.

오죽하면 선의철 대통령이 협회에 방문해 광검과 독대를 요청했다는 루머가 돌 정도였다.

광검이 술에 취해서 건물을 날려버릴 사람인가? 아니다. 그러나 협회에서도 정부에서도 광검의 입을 열게 할 방법이 없었다.

협회는 협회대로 난리. 서울에서 살아 돌아온 히어로 10명은 곧바로 협회에서 탈퇴를 선언했다. 거기에 비능력자 지원가였던 강소연이 행방불명되는 일도 발생했다.

대혼란. 최소한 정체불명의 적과 싸워 쫓아냈다고 하기라도 한다면 안심이 될 텐데, 광검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 이거, 이제 신서울도 불안한 거 아닌가?

광검이 칩거에 들어간 지 벌써 닷새, 5월 6일.

선의철은 신서울 주민들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대대적으로 서울 주민들의 만남을 홍보했다. 정부와 협회에서 인원을 파견하여, 6만 서울 주민들의 생존을 파악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5월 7일 오전 09시 00분. 드디어 서울의 대표와 신서울의 대표가 S대에서 접선했다.

하늘성, 아니 죽은 것으로 알려졌지만 사실 서울에 남아 지하에서 사람을 모은 류천성.

괴수대책부 만년 차관에서 드디어 장관으로 승진한 장후정.

두 사람이 관악에서 악수하는 장면으로 7일 아침이 시작되었다.

* * *

<5월 7일 오전 10시, 청화단 아지트.>

- 예. 저는 미국계 한국인, 제임스 리의 도움을 받아 서울 주민 여러분이 지하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지하도시를 만들었습니다. 비록 그 삶의 질은 이전만 못 했으나, 저희는 언제든지 정부에서 저희를 구해주리라는 믿음과 ....

"저 아저씨, 역시 정치인 맞는 거 같아. 어떻게 카메라 앞에서 저렇게 거짓말을 술술 내뱉는 거지?"

가을이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덕배가 가만히 있다가 지적했다.

"너도 카메라 앞에서 잘만 연기하잖아."

"이봐요, 조덕배 씨. 나는 직업으로 연기를 하는 거고, 저 아저씨는 국민들한테 진실을 말해야 할 사람이잖아?"

"듣는 사람이 기분 좋으면 그만이지."

"그럼 선의철 하는 말도 다 좋으면 좋은 거네?"

가을이 히스테리를 부렸다. 제 생명을 앗아간 사람은 유이신이지만, 그 명령을 내린 장본인은 선의철이었다. 덕배가 손으로 의자 손잡이를 두드렸다.

"지금 그 말 하는 게 아니잖아."

"뭐가 아니야. 나 선의철 때문에 죽었다고. 아, 진짜. 왜 그런 사람한테 투표해서."

"그래도 선의철이 여러모로 잘한 건 있잖아요?"

지화가 끼어들었다. 선의철이 대통령이 된 이후의 행보에 대해서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제게 꽂히는 둘의 모호한 시선에 지화가 손사래를 쳤다.

"아, 선의철을 옹호하는 게 아닙니다! 그냥...평양 사태 터지고 그 때 대통령이 한강 다리 폭파하면서, 실제로 수습은 잘했잖습니까. 안 그러면 진짜 나라 망할 뻔했어요."

"...아냐. 선의철이 아니었어도 누군가는 분명 수습했을 거야."

"어찌됐든 이제 선의철은 우리 적이지. 안 그래?"

가을과 덕배의 반문에 지화가 다시 우울해졌다. 어딘가 어깨가 축 처진 느낌에 덕배가 볼을 긁적였다.

"근데 너 선의철 좋아하냐?"

"아뇨. 이제는 관심 없어요. 그냥 예전에는 좀 믿었는데 지금은...."

"투표권도 없는 사람들이 정치 이야기는 뭐하러 해요? 괴인은 주민 등록도 못하는데."

피닉스가 슬리퍼를 질질 끌며 나타났다. 가을의 눈이 가늘어졌다.

"뭐야. 아키택트는 어디 갔어?"

"인터뷰 딴다고 보냈어요. 걱정마요. 오늘은 어디 안 가니까."

피닉스가 대전에 몰래 다녀온 이후, 세 명이 번갈아 가며 피닉스를 옆에 데리고 다녔다.

낮에는 하늘성과 함께 서울의 이런저런 민원을 처리하고, 오후에는 아키택트와 함께 건물들을 재건했다.

저녁에는 다 함께 서울 남부에 남은 괴수들의 잔당을 퇴치하고, 밤에는 천가을의 촉수에 김밥말이 당하듯 침대에서 잤다.

또 혼자서 어디 가는 일이 없게 감시를 붙이자.

명령에 제약당하는 덕배나 지화는 열외되고, 인간인 하늘성과 아키택트가 낮을 지켰다.

그리고 밤이 되면 천가을이 옆을 지켰다. 괴인임에도 피닉스가 그에게 가진 심적 부채감을 이용해, 함께 있지 않으면 추하게 울어버리겠다고 협박한 통에 피닉스는 천가을과 동침했다.

오늘은 외부에서 사람이 오는 날이기에 모두가 바빴다. 천가을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물었다.

"진짜지?"

"네. 만나기로 한 사람도 있고."

"누구?"

촉수 첨단이 날카롭게 벼려진다. 금방이라도 찌를듯한 기세에 피닉스는 느긋하게 스크린을 가리켰다.

"저기 있네요."

스크린 속에는 정부와 협회 측에서 방문한 이들이 죽 나와 있었다. 이전 협상을 통해 30명 정원으로 온 사람들.

장후정을 비롯한 정부 측 인사들은 10명 가까이는 행정업무를 위해 따라온 사람들이다. 그 외에 몇 명이 더 있는 모양이지만, 가을은 그보다 뒤에 있는 히어로들에 더 눈이 갔다.

"아."

A급 13명과 S급 2명으로 이루어진 소수 정예 부대. 가을의 눈에는 안색이 핼쑥한 이승형이 들어왔다.

덕배가 감탄했다.

"아주 핵폭탄을 끌고 오셨네. 명단 미리 안 받았냐? 하늘성 혼자 저것들 감당할 수 있어?"

"빌런이 아니라 전직 국회의원으로 마주하는 거니까 괜찮아요. 저들도 어차피 싸우는 건 원치 않을 테고."

"만약에 싸우자고 하면?"

"그때는 인질이 늘어나는 거죠."

피닉스의 태연한 말에 덕배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지화는 전전긍긍하며 적의 전력을 계산하고, 가을은 침묵했다.

피닉스가 그런 가을의 상태를 살폈다.

"인사하고 와도 돼요."

"...진짜로?"

"예. 가을 씨도 심적으로 정리가 필요한 상대일 테니까. 같이 가드릴까요?"

"...아니야, 안 갈게."

가을은 이승형과의 만남을 포기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무엇보다 피닉스가 마음에 걸렸다.

쿨한 척하고 있지만, 분명 속으로는 가지 않기를 바라고 있으리라. 가을은 마음을 다잡았다.

삑. 피닉스의 스마트워치에 알람이 울렸다.

"아, 왔다."

피닉스가 손가락을 튕기며 의복을 바꾸었다. 가장 자주 입고 다니는 사제복으로 분장한 피닉스는 셋에게 아지트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무튼 괴인들, 잘 들어요. 괜히 나와서 S급들한테 걸려서 곤란한 일 생기지 않도록, 이 결계에서 절대로 나오지 않는 겁니다. 알겠죠?"

"오냐."

"알겠습니다."

덕배와 지화의 눈이 가을에게로 쏠린다. 피닉스 또한 대답을 재촉하듯 시선을 고정했다. 가을은 떫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피닉스가 그에 웃으며 호텔을 나섰다. 셋은 조용히 라운지에서 스크린 속 중계 영상으로 눈을 돌렸다.

"...설마 싸움 붙으러 가는 건 아니겠죠?"

"당연하지. 사람들 다 보고 있을 텐데 그런 미친 짓은 이제 안 할 거야. ...아마도."

덕배는 불안함에 다리를 떨었다. 하나는 손가락 하나로도 제압할 수 있고, 다른 하나는 이미 패배를 겪었다.

하지만 피닉스라면 저질러버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가을은 덕배의 의심을 부정했다.

"...아냐. 싸울 거면 진작에 싸웠어."

"하긴, 동작 한복판에서 S급 둘이랑 개싸움 벌일 수는 없을 테니. 구로 봐봐. 완전 박살 났잖아."

"그러면 아키택트 진짜로 자살해버리지 않을까요?"

"절대 못 할 걸? 그러면 괴인으로 되살릴 거야. 분명히."

지화와 덕배가 말을 주고받았다. 가을은 초조한 낯빛으로 사색에 빠졌다.

"그래서 만나기로 한 사람은 누군데?"

괴인들은 침묵에 빠졌다.

"...이승형?"

덕배가 먼저 의견을 제시했다. 지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요? 설화공주랑 붙으셨으니 설화공주를 신경 쓰지 않을까요?"

"...그런가?"

덕배는 십년감수한 속내를 애써 숨겼다. 이승형의 심장에 박힌 폭탄은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이었다.

"...둘 다 보려는 거 아닐까?"

가을이 조심스레 제 의견을 말했다.

"광검이랑도 시비 트고 왔겠다, 나머지 S급 두 명에 대해서도 어떻게 할지 생각하는 거야."

"그럴 수도 있겠네요. ...어?"

지화가 스크린 속 일행을 보며 놀랐다.

"유성가 개망나니?"

"그게 누군데?"

덕배가 묻자, 지화가 스크린을 하나 더 띄우고 다른 중계 영상을 재생시켰다. 경제 전문 채널에서 패널들이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유성가의 은유하 이사가 특사단에 들어갔다는 건 어떤 의미로 생각하십니까?]

[사회 경험이죠. 오빠들이 그렇게 열심히 일하는데, 매일 집에서 놀지 말라는 구박을 받고 나온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막말하셔도 돼요?]

[무슨 문제 있겠습니까? 은유하 이사가 망나니인지 온 세상이 다 아는데. 이거 보세요.]

TV 속 패널이 은유하가 든 음료 상자를 가리킨다. 유성계열사의 카페에서 테이크아웃으로 들고 온, 네 종류의 음료였다.

[지금 이게 피크닉 간 겁니까? 놀러 갔어요? 저는 유성이 참 안타깝다는 생각이....]

"밀짚모자에, 원피스에, 아주 그냥...."

지화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유성가의 망나니인 은유하의 기행은 이미 잘 알고 있었지만, 저렇게까지 철이 없을 줄은 몰랐다. 덕배가 은유하를 가리키며 물었다.

"쟤 몇 살이냐? 어려?"

"99년생이에요. 저주받은 세대."

최초로 일곱 개의 차원문이 발생했던 1999년 12월 25일. 전세계적으로 수많은 사람이 쏟아지는 괴수들에게 목숨을 잃었다.

결국 그다음 해, 2000년은 출생률이 그 직전 해와 비해 30% 수준에 이를 정도로 태어난 아이가 적었다.

그나마도 사망하는 경우도 있었고.

세간은 그들을 두고 저주받은 세대라 불렀다.

태어나자마자 나이를 먹기도 전에 재앙을 맞이한 아이들. 99년생 신생아들의 사망률은 하늘을 찔렀고, 00년생 신생아들의 출생률은 바닥을 기었다.

덕배가 스쳐 지나가는 영상을 보며 혀를 찼다.

"설화공주보다 한 살 많은데 저런다고? 나 참. 누구는 벌써 나라의 기둥인데, 누구는 개차반이고. ...뭘 그렇게 유심히 봐?"

"아.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덕배가 묻자 가을이 팔짱을 꼈다. 손으로 팔뚝을 두드리는 게 몹시 초조해 보였다.

"에이. 아니겠지."

은유하의 손에 들린 커피 상자. 네 개의 음료 중에 유독 분홍색으로 반짝이는 딸기 쉐이크가 눈에 띄었다.

* * *

동작구의 시청. 아키택트가 다시 세운 건물에서 정부 측 인사와 히어로들이 서울 주민들을 맞이하는 사이, 석하랑은 난감함에 어쩔 줄 몰랐다.

"언니야, 진짜 이런 데서 혼자 막 나가면 안 된다니까?"

"괜찮아. 누가 나 신경 쓰겠니?"

은유하가 두 팔을 벌리며 웃었다. 그 말대로 서울에 있는 그 누구도 은유하를 신경 쓰지 않는다. 오히려 수군거리는 소리가 석하랑의 귀에 들렸다.

- 저 개망나니 확 죽어버렸으면....

- 신은 왜 저런 걸 유성 막내딸로 만드셔서....

"저것들이...!"

석하랑이 소매를 걷으며 달려들려 하지만, 은유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됐어. 가만히 냅둬. 사람들 진실을 알면 충격만 받을걸? 오빠들 다 죽었고 유성 핏줄 나 혼자밖에 없는 거."

"...언제까지 숨길 건데?"

석하랑의 물음에 은유하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글쎄. 당장은 괜찮은데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 얘. 재민 오빠 나이가 이제 35 넘어가니까 자꾸 소개장 들어와서 안달이야. 안 그래도 정부랑 협회에서도 재민 오빠한테 자꾸 압박을 넣더라."

"무슨?"

은유하가 석하랑을 가리켰다.

"너랑 결혼시키려고."

"빙시같은 소리네. ...흠흠! 그럴 일 없네요! 그건 언니랑 결혼하라는 말이잖아!"

열을 내는 석하랑에 은유하는 어깨를 으쓱였다.

"우리 오빠 성격 괜찮았는데? 재산도 많고. 지금은 죽었지만."

"...아니, 은재민 씨가 싫다는 게 아니라. 같은 성별끼리 결혼하는 게 어딨어? 언니는 그럼 사랑하는 사람이 여자다, 그러면 결혼할 거야?"

"......."

은유하가 입을 다물었다. 그답지 않게 인상을 쓰는 모습에 석하랑이 흠칫 놀랐다.

"호, 혹시 진짜로?"

"하랑아."

"응."

석하랑은 침을 꿀꺽 삼켰다. 대로를 지나 골목 사이로 들어가는 은유하의 걸음이 어째선지 비장하기까지 하다.

"어디 가서 절대 이야기하지 마. 알겠지?"

은유하가 눈을 찡긋하며 검지를 입술에 붙인다. 석하랑이 큰 충격을 받고 제자리에서 굳었다.

"......와, 개소름."

석하랑은 조심스레 제 몸을 감싸 안았다.

골목의 안, 은유하는 굳게 닫힌 문을 열어젖혔다.

"안녕하세...."

은유하를 맞이하던 푸른 머리칼의 소녀, 피닉스가 얼굴을 굳혔다. 은유하는 제 손에 들린 음료들을 들어 올리며 상쾌하게 웃었다.

"일단 뭘 좋아할지 몰라서 제일 잘팔리는 거 베스트 4 준비했는데, 뭐 좋아해요?"

은유하. 유성의 자택에서 두문불출하던 망나니가, 인형이 아닌 본체로 직접 서울에 발을 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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