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화 〉1부 5장 (13)
늦은 시각. 6만에 달하는 서울 시민들은 주민 등록을 끝마쳤다. 정부에서는 이 명단을 정리하여 익일 오전 9시, 정부 부처의 사이트를 통해 공개하기로 정했다.
신서울은 좋은 의미로 난리가 났다. 혹시나 죽었을지도 모르는 내 가족, 친구, 연인이 서울에서 살아남지 않았을까.
인구 천만 중 고작 6만이라는 0.6%의 가능성이지만 혹시 하는 마음에 사람들은 한시라도 빨리 명단을 얻기를 바랐다.
날 것 그대로라도 좋으니 확인이라도 먼저 하자.
결국 서울에 갔던 이들은 작업이 끝난 오후 8시, 곧장 신서울로 돌아갈 채비를 마쳤다. 서울에 주민 등록을 마친 6만 인구의 명단과 함께 그들은 서울을 떠났다.
그들 중 주민등록을 거부한 이는 불과 천여 명. 극히 일부만이 대한민국 국적을 복구하는 것을 포기했다.
그리고 그와는 별개로 그저 200여 명의 인간은 아예 주민등록을 하는 곳에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그들 모두는 지하 난민과는 다른, 푸른색을 중심으로 한 제복을 입고 다니며 범법자가 되기를 자처했다.
청화단.
설화공주를 쓰러뜨렸다고 하는 정체불명의 이능력자를 모티프로 삼아, 타오르는 푸른 불꽃을 심벌로 하는 범죄 조직.
정부는 그들을 A급 위험 조직으로 분류해 특별관리대상으로 분류했다.
그리고 그 조직의 우두머리는....
* * *
<5월 7일 오후 10시, 청화단 아지트.>
"바지단장이 된 걸 축하해요, 김지화 씨."
김지화가 분노에 치를 떤다. 대상을 잃은 분노가 솟구치지만, 여기 그 누구도 지화의 울분을 받아 줄 수 없다.
조덕배 왈, "난 간부도 아닌데 나를 대장으로 생각하겠냐?"
천가을 왈, "너랑 나랑 하늘성이 특사단 맞이했잖아. 내가 이인자라고 생각한 거 아닐까?"
류천성 왈, "앞으로 서울의 괴수 퇴치를 잘 부탁하네. 대장 나으리. 껄껄껄!!"
제임스 리 왈, "밖에 알려진 사람이 나랑 너, 하늘성 뿐인데, 나랑 하늘성은 면죄부 받았잖아. 너 이제 현상금 걸리겠다. 등대야."
"으아아아아아아아!!"
지화가 발광한다. 나름 평범한 대기업 신입사원에 불과했던 그가, 어느새 범죄조직의 수괴가 되어 있었다. 나는 은유하가 몰래 보내준 범죄인 명부를 다시 띄웠다.
- <등대> 김지화. 빌런. 현상금 200,000,000원. 범죄조직 <청화단>의 우두머리로 추정.
"축하해요. 앞으로 열심히 일해주세요."
"다, 단장! 이건 말도 안 됩니다. 어떻게 저 같은 사람을 보스로 오해한단 말입니까?!"
"그럴 만 하지."
덕배가 끼어들었다.
"나는 논외. 천가을은 사망자고, 팬텀은 정체가 모호하지. 저거는 지금 신서울에서 언급하는 게 금기일걸? 설화공주 이긴 빌런이 청화단 대장이라고 해봐."
"...난리가 나겠죠."
곧 국가전복세력으로 판명되어 전 세계의 공적이 될 것이다.
은유하는 제안 했다. 사람들의 착각을 이용하자고.
"등대와 하늘성이 합작을 한 거죠. 등대는 구로를 포기하는 대신에 뒷세계를 정복하고, 하늘성은 양지로 나가는 대신 청화단의 뒷배가 되어주는 거로."
"왜 저를 그런 무시무시한 존재로 만드신 겁니까?!?!"
나는 지화의 두 눈을 가리키며 웃었다.
"대장님 거울 좀 보시죠? 누가 봐도 중간계 마왕인데요?"
"단장님까지 이러 시깁니까? 이 눈은 단장님께서 이렇게 만드신 거잖아요!"
"너 지난번에 간지난다고 좋다고 했잖아."
덕배의 딴죽에 지화가 격침됐다. 정처없이 떠도는 주먹이 허공을 가른다. 나는 지화의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했다.
"걱정마요. 김지화 씨, 지금은 경험이 없어서 그렇지 자질은 충분하니까. 조금만 가다듬으면 협회 지휘관이랑 맞붙어도 이길 수 있을 거예요."
"...저, 정말입니까?"
등대의 눈이 흔들린다. 나는 어깨에 힘을 주며 다른 손을 들어 엄지를 치켜올렸다.
"지난번 서울 수복 작전 때 보여준 게 있잖아요? 요 3주 사이에 빌런이나 잔존 괴수들도 퇴치하고. 만약에 김지화 씨가 이대로 잘만 해준다면...."
"해준다면...?"
지화가 침을 꿀꺽 삼킨다.
"시청사의 뱀을 공략하는 전투에서 등대에게 지휘를 맡길게요."
"여, 열심히 하겠습니다!"
김지화. 소심하고 우유부단하며 은근히 뒷담화를 잘하지만, 칭찬에 약한 남자다. 거기에 나름 대기업 합격자라 그런지 머리 회전도 상당히 유연하다.
"좋아요. 그러면 이제 슬슬 본론으로 넘어갈까요?"
아직 제 목에 걸린 현상금에 대해 자각하기 전에 본제로 넘어가야 했다. 다행히 지화는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
"...5월 9일 새벽 00시. 작전의 이름은 <듀라한 나이트>입니다."
"...이름부터 좀 그런데?"
가을이 목을 만지작거렸다. 괴인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가을의 뒤에 서 있던 유이신에게로 넘어갔다.
유이신이 재빨리 타자를 쳤다. 스마트워치의 AI가 전자음으로 낭독했다.
[저는 푸른 깃털 나이트가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지금!"
가을이 머리를 쥐어뜯었다. 소나무 부대 출신인 히어로들이 특히 그렇지만, 유이신은 그중에서도 독보적으로 감수성이 어긋나있다.
"너, 혹시 너희 부대 대장 어떻게 생각하냐?"
[좋은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저희와는 다르게 신께 직접 간택을 받은 분이니까요.]
"와. 그 남자가 그러면 피닉스교 교황이라도 되냐?"
"어, 저도 그건 좀."
내가 손을 흔들자 유이신이 큰 충격을 받은 것처럼 몸이 굳었다. 솔직히 말해서 푸른 깃털, 다른 건 몰라도 대장이라는 놈 언행이 제일 쪽팔린다.
내가 왜 괴인 제작 때 영창을 아무도 없는 곳에서 하려고 하는데. 테라의 감수성은 현대인에게는 너무 치명적이다.
"크흠. 아무튼 이번 작전의 주축은 옛 소나무 부대, 현 <푸른 깃털>입니다. '카운트다운'이 끝나는 즉시, 모습을 드러내서 난동을 부리세요."
"혹시나 죽으면 내가 몰래 코어 회수하면 되는 거지?"
가을이 손을 들며 묻자 나는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괴인은 죽어도 죽지 않는다. 코어만 살아서 내게 돌아온다면 다시 되살릴 수 있다.
덕배처럼 쌓은 마력은 잃겠지만, 푸른 깃털 같은 소모성 부대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애초에 사람을 학살하고 범죄를 저질러 이 꼴이 된 자들. 괴인으로 되살려 써먹어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히 생각해야 할 것이다.
"선전 포고는? 그건 어떻게 할 거야?"
"제가 알람 걸어두고 갈게요."
나는 손가락을 튕겨 불꽃을 만들어냈다.
5.9.
"5월 9일이네요."
"네. 다른 날로 하려고 하다가 9일로 잡았어요. 원래는 내일 당장이라도 하고 싶었는데...."
은유하가 반대했다. 7일인 오늘은 서울 주민들에 대해 관심이 쏠려 그다지 큰 반향을 얻지 못하리라 예상했고, 8일은 날이 날인지라 넘기기로 했다.
어버이날. 은유하는 부모님의 가슴에 카네이션을 달아드려야 할 날, 석하랑에게 평생 빈소에 흰 국화꽃을 헌화하게 할 수 없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수긍했다. 어차피 하루 차이지만 은유하에게는 그게 양보할 수 없는 마지노선이었나보다.
"다행히 설화공주는 알아서 제압해준다고 하니, 저는 부산만 신경 쓰면 되겠네요."
"진짜로 보스 혼자 가?"
아키택트의 목소리에 걱정이 서려 있다. 나는 한쪽 어깨를 으쓱였다.
"관악에서 어그로를 끌고 저는 부산에서 광검과 1:1. 그게 이번 작전의 주요 계획이잖아요?"
"푸른 깃털들이 차원문의 영향을 받은 좀비들처럼 안양을 습격하고 퇴치당한다. 그리고 히어로들의 이목이 서울에 집중된 사이, 단장님이 광검을 죽인다."
지화의 정리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은유하가 제안했다. 모든 것을 화마룡이 나타난 차원문의 여파로 돌리자고. 아직 제대로 연구가 되지 않은 만큼, 창염을 이용한 모든 여파는 당분간 차원문과 화마룡 탓이다.
"이미 헬하운드를 좀비로 부활시킨 덕분에, 이제 서울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할 거예요. 쉐도우, 화마룡의 영향이 아직도 남아있구나, 하고 말이에요."
"연구 기관에서 올 가능성도 있지만 그건 나중 일이니까."
"그럼 남은 문제는 하나인데...."
"걱정마요. 깔끔하게 죽이고 올 테니까."
나는 주먹을 불끈 쥐며 파이팅 포즈를 취했다. 괴인들이 하나같이 한숨을 내쉰다.
"대한민국의 영웅을 이렇게 보내야 한다니...."
"...단장님, 하나 여쭤봐도 됩니까?"
"네. 얼마든지요."
지화가 우물쭈물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 정령, 설야의 루살카라는 분. 얼마나 강하십니까?"
"어. 나도 궁금한데. 너 같은 것들 여섯 명, 다 너만큼 강하냐?"
정령의 서열인가. 별로 생각 안 해봤다.
"제 밑으로는 다 고만고만하긴 한데...."
정령들은 본질적으로 근원이 '마력'인 만큼, 상성 상의 우열은 있어도 그 힘의 차이는 없다.
차이가 발생한다고 하면 상성의 차이.
지 > 수 > 화 > 풍 > 지
광 > 암 > 광
의 법칙으로 마력은 서로 간의 상관관계을 가지게 된다. 환속성이야 별개니까 논외.
그래도 원작 기준으로 따지자면....
"저 다음?"
"...전투력으로 두번째라는 말씀이시죠? 그러면 안심이 되네요."
지화가 가슴을 쓸어내린다. 덕배가 혀를 차며 지화의 말에 동의를 표했다.
"광검 죽고 나면 우리는 서울도 공략하고, 중국군도 다 퇴치해야 할 텐데, 그 정도면 크게 도움이 될만하지."
"그렇죠. 개인 전투력으로 따지면 SS급은 될 거예요."
"...그건 또 무슨 단위야?"
가을이 의뭉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간단히 불꽃을 피워 수식을 그렸다.
"속성 친화율 90 이상이 S급이라고 치면, 그 안에서도 99까지 단계가 있어요. 90~95가 일반 S, 96~99가 SS. 원탁이 현재 대부분 S와 SS 라인에 걸쳐있을 거예요."
"그러니까 새 전투원이 원탁 수준이라는 거지? 그럼 됐네."
괴인들이 안심한다. 난 애써 뒷말을 삼켰다.
'그 수속성 힘이랑 싸워야 할지도 모르지만.'
과연 정령으로 각성할까, 아니면 다크 레기온의 간부로 각성할까.
전자든 후자든 나는 싸워야 할지도 모른다. 수속성의 힘을 상대로.
'그걸 말했다가는 또 막으려 들겠지.'
특히 천가을이 노파심을 부릴 것이다. 괴인이 된 이후 유독 천가을은 나에 대해 걱정이 심하다. 나는 천가을에게 다가가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뭐하는 거야?"
가을이 촉수로 내 손목을 잡는다. 나는 그대로 웃으며 머리칼을 쓸어내렸다.
"그냥요. 기특해서."
"......."
어딘가 불만있어보이는 눈초리지만 가을은 딱히 거부감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두 손으로 가을의 살짝 얽힌 머리칼을 정돈하며 간부들에게 명령했다.
"자, 그러면 모두 결행의 날까지 맡은 역할을 다 합시다. 작전 시작 시각은 5월 8일 23시 00분. 그때까지 만발의 준비를 하도록 하세요. 알겠죠?"
앞으로 24시간 뒤.
대한민국, 나아가 세계 역사의 특이점을 가져올 대사건, <광검 죽이기>의 시작을 알리는 촛불이 타들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