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화 〉1부 5장 (21)
<서울, 청화단 아지트.>
[역시 팬텀님께서는 악인의 자질이 있으신 모양입니다.]
"너 지금 되게 좋아하는 것 같다?"
팬텀, 가을은 유독 기뻐하는 듯한 유이신의 행동에 질려버렸다. 목은 없지만 유이신은 몸으로 자신의 기쁨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었다.
유이신이 다시 가상키보드를 두드렸다.
[소나무 부대 출신 치고 청송 죽이고 싶지 않은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겁니다.]
"어차피 너희들 지금 별반 다를 게 없잖아."
가을은 유이신의 하복부를 가리켰다. 그 또한 가을이 복사한 문신사에 의해, 청화단의 심벌이 그려져 있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건....]
유이신은 제 하복부의 문장을 사랑스럽다는 듯 쓰다듬었다.
[성흔입니다. 신께서 제게 내려주신 은혜의 상징입니다.]
"......."
가을은 턱밑까지 차오르는 말을 애써 삼켰다.
협회에 의해 공식적으로 '듀라한'이라는 이름이 붙은 옛 소나무 부대 히어로들은 자신이 살해당했음에도 피닉스에게 충성을 바쳤다.
[신께서는 그 악독한 청송과 선의철의 주박에서 저희를 거두어주셨습니다. 자살하지 못하니 죽기를 바랐던 자들로서 그 소원을 들어주신 것도 감개무량인데, 다시 살려주시기까지 하셨잖습니까.]
"그게 좋아?"
[물론입니다. 그리고 솔직히 얘기하면....]
유이신이 손가락을 들어 가을의 등에 올렸다. 기록에 남지 않는 대화를 하고자 할 때, 그들은 이렇게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 애초에 저희는 빌런입니다. 약육강식. 이쪽이 더 적성에 맞지요.
"......진짜 이해를 할 수가 없다니까."
근본이 선량한 시민이었던 가을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사고방식이었다.
"강하기만 하면 인성이 개차반이라고 해도 따르는 거야?"
[지금 팬텀께서 신을 모독하시는 겁니까?]
"나 누구라고 따로 얘기 안 했는데?"
유이신이 잠시 행동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곧장 팬텀의 옆에 달라붙어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
-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자르지 말아주세요ㅠㅠ
"안 잘라. 너 말고는 다 남자들인데 내가 어떻게 데리고 다녀. 그러니까 이제 그만해."
목 없는 여인이 자꾸 치근대는 건 여러모로 그랬다. 가을은 유이신을 밀어내고는 스마트워치를 두드렸다.
"아아, 아저씨들. 끝났으면 놀지 말고 빨리 아지트로 돌아와."
동시다발적으로, 군데군데서 신호가 돌아왔다.
[이게 지 혼자 다 끝냈다고 여유 부리고 아주 그냥...!]
[가을 씨, 좀 여기 지원 와주시면 안 될까요? 나중에 코어 좀 드릴 테니까 지원 좀...ㅎㅎ]
[이제 곧 끝나네.]
마포, 종로, 성동.
세 군데에서 들어온 신호에 가을은 피식거리며 스크린을 싹 다 치워버렸다.
"각자 하나씩 제압하기로 한 건 잊으셨나 보네."
시청사의 뱀을 공략하고 벌써 일주일 째.
청화단은 본격적으로 한강 이북의 수복에 나섰다.
* * *
<서울, 남산타워.>
"다들 잘하네요."
타워 꼭대기 끝에 선 나는 사방을 둘러보며 전황을 확인했다.
S급 괴수 레이드에는 성공했지만, 아직 서울 북쪽에는 건물 안이나 지하에 숨어든 괴수들이 차고 넘쳤다.
아키택트를 제외한 간부들은 모두 지난 일주일 동안 용산과 종로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괴수를 퇴치했고, 이제 겨우 점점 그 너머로 영토를 확장해나갔다.
'역시 사람은 보상이 주어져야 열심히 하네.'
덕배, 등대, 하늘성, 팬텀. 네 명에게 각각 부대를 쥐여주고 저마다 행정구역을 제압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대신 그로 인해 얻는 괴수의 핵은 모두 그 간부 재량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보상을 걸었다.
덕배와 하늘성이 가장 열심히 움직였고, 등대는 전면에 나서지 않고 부하들만을 이용해 괴수를 퇴치했다.
팬텀은 빠른 휴식을 원했고, 상대적으로 잔존 괴수가 적은 용산을 택했다.
이미 용산은 청화단이 쑥대밭으로 만들고 지나온 곳이었다.
삑. 알람이 울렸다. 상대는 은유하였다.
[YU☆HA★ : V]
"...진짜로?"
믿을 수 없었다. 광검이 정말로 은유하와의 계약을 받아들였단 말인가. 나는 재빨리 은유하에게 전화를 걸었다. 스크린에 의기양양한 은유하의 얼굴이 떠올랐다.
"성공한 거예요?"
[물론이죠. 이걸로 광검님은 제가 지휘합니다. 아, 광검 님이 자기 괴인명은 <다크 로드>라고 해달라고 했어요.]
"그건 또 무슨 이명이에요?"
[광검님 본인이 희망하는 이명이에요. 이제는 어둠 속에 숨어 살아야 한다고 하시면서.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요?]
은유하는 은근슬쩍 내게 그 이유를 물었다.
내가 석하랑을 임신시켰다는 의혹이 불거진 이후, 은유하는 거의 내가 무한전생자인 걸로 확신을 내렸다.
클리어만 17회차고 중간에 무수한 게임오버를 생각하면 그다지 틀린 말은 아니어서, 나는 그냥 포기하고 알아서 생각하게끔 했다.
나는 광검의 연령대와 취향, 그리고 시대 배경을 생각해 가장 합리적인 답을 도출해냈다.
"○이더 경?"
[네?]
"아니에요. 저도 그런 이명을 들은 건 처음이라. 광검 본인의 명예를 위해서 저는 입을 꾹 닫고 있겠습니다."
아님 말고.
[알겠어요. 그런데....]
은유하가 능청스러운 얼굴로 웃는다.
[아내분 그냥 내버려 둬도 돼요? 임신까지 시켜놓고? 완전 나쁜 쓰레기네, 호갱님.]
"아니라니까."
[전생의 인연은 이제 쿨하게 잊고 새 사람 찾는다? 어? 근데 호갱님 품절이라면서요.]
"시끄러워요. 광검이나 바꿔줘요."
[후후후, 알겠어요. 그럼 그건 다음의 즐거움으로 남겨둘게요.]
은유하가 만족한 얼굴로 스크린을 돌렸다. 잠시 뒤, 금발 금안의 남자가 뚱한 얼굴로 튀어나왔다.
[뭐냐, 쓰레기.]
"왜 거래를 받아들인 거죠? 은유하 성격상 전부 다 설명하고 거래를 했을 텐데. 당신 다시 죽을 기회가 있었어요?"
[남의 딸 임신이나 시키는 처제랑은 대화하지 않는다.]
"아이 씨ㅂ.... 크흠! 아니라니까요. 제가 임신시킨 게 아니라...."
광검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다른 놈이군. 그래. 누구냐?]
"아니, 서로, 사랑을 나누다 보면 애도 생길 수 있지! 당신도 루살카한테 잡아먹혔잖아요! 이 페도필리아! 로리콘!"
[......크흠! 크흐흠!]
설마 이쪽이 모든 자초지종을 알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을 것이다. 잠시 얼굴을 붉힌 광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너는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느냐?]
"...얘기했잖아요? 루살카가 죽은 흔적을 쫓다가 알게 됐다고. 제가 괜히 무덤 얘기를 꺼낸 줄 알아요? 거기서 다 봤어요."
사실은 길을 잃고 헤매다가 한국으로 온 거지만, 다행히 다른 이들은 모두가 알아서 이해했다.
"이미 루살카는 죽었고, 석하랑을 온전히 정령으로 각성시키려면 당신 안에 있던 루살카의 힘을 소멸시키는 방법밖에 없었어요."
[그럼 당연히 나도 죽겠지. ...다른 방법을 찾아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게 괘씸하지만, 그래도 납득할 수밖에 없군.]
다행히 광검은 내 변명 가득한 설명을 이해했다.
"그쵸? 안 그랬으면 당신이 루살카의 힘에 먹히고 폭주하거나, 자살해도 하랑이가 폭주하거나-"
[하랑이?]
"......아니, 그래도 조카뻘인데 문제 되나요?"
[......됐다. 이대로 가다간 끝도 없겠어. 그런데 이제 어쩔 셈이냐. 하랑이는 너를 나를 죽인 원수로 생각할 텐데.]
아직 광검은 석하랑에게 진실을 밝히지 않았다. 석하랑은 자연히 광검을 죽인 범인으로 관악의 괴인, 그러니까 내 괴인형을 일 순위 범인으로 의심하고 있을 것이다.
"당장은 괜찮아요. 제가 이기니까. 문제는 정령으로 완전히 각성하고 나서인데...."
[혹시나 해서 묻는 말인데.]
광검의 목소리에 걱정이 가득했다.
[하랑이 몸에서 루살카가 깨어나거나 하는 그런 건 없겠지?]
"하랑이를 걱정하는 거예요, 아니면 루살카가 깨어나기를 바라는 거예요?"
광검이 대놓고 인상을 찡그렸다.
[당연히 하랑이지. ...솔직히 루살카를 다시 보고 싶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제 더는 만날 수 없지 않나.]
"그렇기는 하죠. 근데 괜찮아요. 그냥 봉인된 정령의 힘만 각성하는 거니까. 단순히 더 높은 경지에 오른다고 생각하면 돼요."
[그러면 다행이지만 말이다....]
광검이 머뭇거리며 뒷말을 삼켰다.
[왜 아직 각성하지 못하고 있는 거지?]
"......그러게요. 그건 저도 모르겠네요."
[네가 모르면 어쩌라고?]
"어쩌라고? 어쩌라고요. 나도 진짜 모르겠는데."
광검의 사망으로부터 벌써 2주의 시간이 지났다.
석하랑은 아직, 정령의 힘을 일깨우지 못하고 있다.
[이럴거면 나 왜 죽였냐.]
"아니, 나도 그냥 당신 죽으면 자연히 각성하는 줄 알았죠."
[.......]
화상이 픽 하고 꺼졌다. 곧 볼을 긁적이는 은유하가 연결되었다. 은유하는 이미 광검과의 대화를 대놓고 듣고 있었다. 은유하는 광검이 다른 술을 가지러 간 사이, 광검이 들리지 않을 정도로 아주 작게 속삭였다.
[사랑하는 호갱님. 거짓말이죠?]
"녜?"
[고객님은 거짓말하면 티가 다 나요. 그래서 어느 쪽이에요? 각성시키는 방법을 알고 있는 거예요, 아니면 설마 이미 각성한 건가요?]
"......아, 이런! 가을 씨에게서 연락이?!"
나는 호들갑을 떨며 은유하에게 손을 흔들었다.
"은유하 아가씨, 죄송하지만 다음에! 지금 A급 괴수가 튀어나온 것 같아요!"
[...흥, 알겠어요. 얘기하기 싫으면 그냥 싫다고 얘기해요. 내가 알아내지 뭐.]
삐친 은유하가 스크린을 내렸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고르고 고개를 하늘로 올렸다.
"이거 설명했다가 나 맞아 죽을지도 모르는데...."
이 세상의 근간은 미연시다.
세뇌된 간부를 각성시키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
사랑.
오직 진정한 사랑만이 간부의 세뇌를 풀 수 있다. 그건 다크 레기온 7 간부-폭주 석하랑을 포함해 모두에게 공통된 사항이었다.
'루살카가 세뇌가 풀렸는지는 본인만 알 테니 알 수 없는 노릇이고.'
사랑은 나누었지만 허윤환이 주인공처럼 지휘관의 재능이 없었기에 정령으로 각성하지 못했다는 설.
정령으로 각성했으나 허윤환과 자식을 위해 목숨을 버렸다는 설.
허윤환과는 사랑이 아니라 장난이었지만, 석하랑을 낳으면서 자식에 대한 사랑을 느껴 어머니로서 죽었다는 설.
허윤환을 위해 그가 원하는 대로 아이를 낳았지만, 제 괴인형을 보고 아이를 구하는 모습에 충격을 받고 자진했다는 설.
그 외에도 온갖 설이 있었지만 제대로 밝혀진 것은 없었다. 제작진도 일부러 그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어찌 됐든 정령으로 각성하는 건 사랑이야.'
그렇다. 그래서 문제다. 나는 부산에서 느껴지는 막대한 수속성 마력에 침음성을 삼켰다.
부산에서부터 서울까지 그 여파가 느껴질 정도로, 석하랑의 마력은 대한민국을 뒤덮고 있었다.
"어떻게 혼자서 각성하냐고요."
이미 석하랑은 정령으로서의 힘을 자각했다.
문제는 석하랑이 누구를 사랑했기에, 정령으로 각성했는가.
"진짜 누구지."
과거의 연인인가, 아니면 현재의 인연인가. 그도 아니면 나르시스트란 말인가.
누구든지 까딱 잘못했다가는 광검에게 세 갈래로 썰리게 될지도 모른다.
".....에이, 모르겠네요. 직접 물어봐야지."
나는 남산타워에서 날개를 펼쳐 날아올랐다.
* * *
<부산, 석하랑 자택.>
"휴우."
석하랑은 제 책상 위에 올려진 얼음 인형을 만지작거리며 놀고 있었다.
새하얀 검지가 사람 형태의 얼음 인형을 좌우로 흔들었다. 3D 프린터보다도 더욱 정교하게 복사해낸 얼음 인형은 여인의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하하하, 그러면 이승형 씨는 언제 마지막 사랑을 느껴보셨나요?]
조각을 하다가 아무렇게나 켜놓았던 TV에서 이승형이 나왔다. <마지막 사랑>의 완결을 기념하는 특집에서 그는 난감한 얼굴로 리포터의 질문에 대답했다.
[글쎄요....]
아련한 이승형의 눈빛에 방청객들이 탄식했다. 그 안에는 생각 없이 질문을 던진 리포터에 대한 분노와 이승형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섞여있었다.
[제가 가장 힘들었을 때 제게 힘이 되어준 사람입니다. 제게는 그게 마지막 사랑이었죠.]
"그렇제?"
석하랑이 피식거리며 책상에 엎드렸다. 얼음 인형을 만지던 엄지가 인형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근데 이거는 해서는 안 될 사랑 아이가."
석하랑의 눈에서 마력히 흘러내렸다.
[하하하, 그러면 마지막에 여주인공으로 투입된 그룹 NTL의 리더 나백합 양이 공개적으로 이승형 씨를 사랑한다고 밝힌 것에 대해서는-]
[우우우우우----]
리포터의 질문에 방청객들이 비방을 퍼부었다. 누군가는 욕설을 내뱉었다가 제지를 당하기도 했다.
이승형은 손을 들어 사람들을 진정시키고 마이크를 잡았다.
[괜찮습니다. 사람이 마음이 가는 걸 어떻게 제어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그 상대방이 그 사랑을 받아주지 않는데도 제 사랑을 강요한다면, 저는 그건 폭력이라고 생각합니다.]
"...흥."
석하랑은 텔레비전을 끄고 엎드린 채 잠에 빠져들었다. 손에 꼭 쥔 얼음 인형은 체온에도 녹지 않고 그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얼음 인형은 꼭, 은유하를 닮아있었다.
* * *
"푸엣취!"
은유하는 갑자기 기침했다. 책상에 마주 앉아 술을 들이켜던 광검이 와인잔을 내려놓았다.
"감기인가? 조심하시게. 자네는 인간이야."
"너무 빨리 괴인에 적응하신 거 아닌가요, 어르신?"
"나름 괜찮은 것 같네. 아무리 술을 마셔도 안 취하는 건 말일세. 자네에게는 정말 고마워. 덕분에 이렇게 비싼 술도 마음껏 마시고 말이야."
허윤환은 와인잔을 들어 맛을 음미했다. 한국 최고의 히어로였다고 해도 그의 소비 성향은 매우 검소했었다.
"그래도 적당히 드세요. 하랑이가 엄청나게 걱정했다고요."
"이제는 자네도 걱정하는 건가? 딸이 하나 더 늘어난 것 같군. ...흐음."
허윤환이 게슴츠레 한 눈으로 은유하를 바라봤다.
유성 그룹의 실질적 주인. 이능력도 A급. 외형도 어딘가에 빠지는 곳이 없음. 사실상 한국 최고의 자금력을 지닌 사람.
그리고 무엇보다도, 제 몸과 인생의 모든 것을 걸고 광검에게 석하랑과의 혼인 신고서를 내민 그 패기.
"나는 이 결혼 찬성일세."
"......예?"
광검은 와인병을 들어 올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홀로 집무실에 남은 은유하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만년필을 떨어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