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염의 피닉스-131화 (131/1,497)

〈 131화 〉외전1. 히어로 P양의 우울

# 히어로 P양의 우울.

<2020년 7월 17일. 신서울 C 중학교.>

다람쥐 쳇바퀴 굴러가는 일상의 반복이다. 학교, 학원, 집. 학교, 도서관, 집. 매일 똑같은 교복을 입고 매일 똑같은 길을 걷는 무료한 삶이 언제까지 계속될까.

"유나야. 괜찮아?"

단짝인 세윤이 의자를 끌고 와 조심스레 물었다. 평소의 활기는 온데간데없이, 눈 아래에는 기미가 잔뜩 서려 있었다.

"세상에. 너 밤새웠니?"

"<마지막 사랑> 보다가 조금...."

세윤이 반색하며 손뼉을 쳤다. 다 이해한다는 눈치였다.

"흐흐흐, 결국에는 봐버렸구나! 금단의 마지막 화를!"

"작가 죽여버릴 거야...."

이유나는 펼쳐놓은 유인물 위로 이마를 박았다. 갈색 단발이 귓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세윤은 다 이해한다는 얼굴로 유나의 등을 두드렸다.

"굳세거라. 남주 여주 둘 다 하차해서 완전 내용 바뀌어 버렸잖아. 원래 대본 유출된 거 봤어? 내상 입으니까 보지 마."

"차라리 원래 막장이었던 만큼 끝까지 막장으로 가는 게 낫지 않았을까?"

"글쎄. 그래도 승형 오빠 은퇴했잖아. 천가을한테 프러포즈 한다더라. 완전 봉 잡았잖아."

여중생들의 가십은 끊이지 않았다. 유나는 피곤을 애써 삼키며 대화를 이어나갔고, 곧 예정된 시각이 되었다.

딩동-

방송이 다 끝나기도 전에 학생들은 메고 있던 가방을 우르르 챙겨 교실을 빠져나갔다. 세윤도 유나에게 인사를 하고 빠르게 교실을 나섰고, 빈 교실에는 유나만 홀로 남게 되었다.

"집에가봐야 아무도 없는데."

조금 전까지 밝은 얼굴로 친구들을 대하던 사람은 온데간데없이, 유나는 우울해진 얼굴로 주섬주섬 유인물을 가방에 넣었다. 유나는 막 넣으려던 유인물을 집어 들고 피식 웃었다.

"요즘 누가 이런 숙제를 한다고...."

곧 있으면 다가올 여름방학을 앞두고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장래희망을 포트폴리오로 정리해오라. 일개 중학생에게 요구하는 것 치고는 제법 과한 과제가 아닐까 싶기도 했지만, 다행히 이것 하나만 하면 다른 귀찮은 것들은 전부 하지 않아도 되었다.

"장래희망...."

아무것도 없으니 백지상태로 내면 담임이 학부모 상담을 하려고 할까? 유나는 한숨을 내쉬며 유인물을 가방 안에 쑤셔 넣었다. 안 그래도 바쁜 부모를 불러냈다가는 무슨 소리를 들을지 몰랐다.

"대충 히어로나 스트리머 써서 내야지...."

가장 인기있는 장래희망으로 그 두 개 말고 무엇이 있을까 고민했지만 별 의미는 없었다. 어차피 남들도 다 비슷하게 써낼 테니 나도 그에 편승해서 대충 베껴야지. 유나는 털레털레 학교를 빠져나와 귀갓길을 걸었다.

딸랑딸랑. 유나는 유리문을 밀어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어차피 집에 가봐야 식어버린 밥만 있을 게 분명했다. 오늘도 삼김으로 때우자. 유나는 삼각김밥 하나와 곁들일 딸기 우유 하나를 집었다.

"아."

바로 옆에 있던 소녀가 허망한 소리를 내었다. 스냅백에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소녀가 뻗은 손가락이 딸기 우유를 집은 유나와 맞닿았다. 유나는 딸기우유를 소녀에게 건넸다.

"...드실래요?"

꾸벅. 소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딸기우유를 받았다. 유나는 꼭 원하는 선물을 받은 아이 같은 소녀의 모습에 기특한 웃음이 나왔다.

유나는 그 옆에 하나 남아있던 멜론 과즙 우유를 집어 들고 계산대 앞에 섰다. 유성의 편의점 유니폼을 입은 청년이 먼저 서 있던 소녀의 딸기우유를 찍었다.

"이천 원 입니다."

소녀가 손목을 들어 올리다 흠칫 놀랐다. 소녀의 손목에는 스마트워치가 아닌, 목욕탕에서나 볼법한 열쇠고리가 걸려있었다.

"아...."

소녀의 어깨가 축 처졌다. 유나는 제 물건과 손목을 슬쩍 내밀었다.

"같이 계산해주세요."

"네."

청년은 망설임 없이 유나의 물건을 찍고 스마트워치를 찍었다. 유나의 계좌에서 곧장 대금이 결제되고, 유나는 딸기 우유를 들어 소녀에게 건넸다.

"요 앞 사우나죠? 가시면서 드세요."

소녀는 딸기우유를 두 손으로 받으며 꾸벅 인사했다. 그 자리에서 우유팩의 위를 열자 달콤한 딸기향이 유나의 코를 간질였다.

"♪♬♩"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소녀가 제 마스크를 내리려던 그 순간, 유리창이 깨지며 웬 덩치 큰 남자가 진열대를 박살 내며 굴렀다. 진열대가 크게 넘어지며 소녀가 들고 있던 딸기우유를 땅에 내팽개쳤다.

"......."

"히, 히익?!"

점원이 놀라 긴급 호출 버튼을 누른 사이, 유나는 소녀를 감싸 안고 몸을 날렸다.

"???"

"위험해요! 일단 피해야-"

"오호호! 쓰레기 같은 히어로구나!"

죄수복을 입은 여인이 흙을 뿌려댔다. 흙가루는 허공을 날아가 폭발했다. 유나는 여인의 정체를 파악하고 곧 숨이 멎었다.

"선무당?! 분명 탈옥하다가 잡혔다고?!"

"오호호, 다 방법이 있지. 미안하구나, 아가들아. 이대로 체포되기는 억울하니 한 놈이라도 더 죽이고 들어가야겠다!"

유나는 광기 어린 선무당의 행동에 더욱 소녀를 감싸 안았다. 죽음의 위험에 벌벌 떨면서도 소녀가 다치지 않도록 꼭 감싸 안았다.

"...이 새끼 뒤처리도 제대로 못 하네?"

내가 잘 못 들었나? 품에서 들린 목소리에 유나가 잠시 당황한 사이, 소녀의 몸이 불꽃으로 변해 유나의 품을 빠져나갔다.

"어, 어?!"

앞으로 고꾸라지기 직전, 제 몸을 받쳐주는 손길에 유나는 아주 살포시 주저앉았다. 소녀는 진열대에 쓰러져 캑캑 기침을 하는 남자를 발로 툭툭 건드렸다.

"야. 뭐하냐. 일어나. 살려줬으면 밥값을 해야지."

"아.... 저, 저기...."

유나는 쓰러진 히어로를 막 대하는 소녀에게 손을 뻗었다가 화들짝 놀랐다. 진열대에 쓰러진 히어로는 유나가 밤새 정주행을 했던 드라마의 남주인공, 불곰 이승형이었다.

와장창! 선무당이 유리창을 발로 차며 편의점 안으로 뛰어들었다.

"죽고 싶어 안달이 났구나! 어디 한 번 같이 죽어라!"

"뭐래."

유나를 등지고 선 소녀는 선무당을 향해 주먹을 들어 올렸다. 선무당은 아무렇게나 흙을 뿌려대며 마구잡이로 주변을 터뜨리고 있었다.

"다 죽어버려라!"

선무당이 소녀를 향해 진흙을 집어 던졌다. 뭉쳐진 진흙 덩어리는 부글부글 끓으며 곧 폭탄이 되었다. 금방이라도 터질듯한 모양새에 유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화르륵. 눈꺼풀을 닫아 검게 변한 시야가 푸르게 물들었다. 감은 눈 사이로 들어오는 푸른 빛에 놀란 유나는 저도 모르게 눈을 떴다.

"예쁘다...."

푸른 불꽃의 날개를 흩날리는 히어로가 있었다.

* * *

다음 날.

"유나야! 너 괜찮아?! 어제 집에 가다가 편의점에서 습격당한 거 너였다며?!"

"으, 응. 괜찮아."

호들갑을 떠는 세윤을 진정시킨 유나는 애써 밝은 미소를 지었다. 세윤 뿐만 아니라 다른 친구들도 유나를 걱정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세상에. 한 번 잡힌 빌런이 호송차에서 탈출한다는 게 말이 돼?"

"내 말이! 맞다, 걔 화장 지워놓으니까 완전 못생겼던데?"

"이유나야, 너 구해준 히어로 말이야, 진짜 불곰 이승형이야? 어떻게 A급 빌런을 그렇게 떡이 되도록 두드려 팼대? 어쩌다 거기 있었어?"

"어? 으응.... 나도 자세한 건 몰라."

탕탕탕! 어느새 교실 앞문에 들어온 담임이 출석부로 교실문을 두드리며 학생들을 진정시켰다. 담임교사는 학생들에게 어제의 일을 간단히 설명한 뒤, 이유나를 따로 상담실로 데리고 가 상담을 했다.

"유나야. 미안하지만 말이다...."

담임교사는 무안한 얼굴로 상황을 설명했다. 유나를 구해준 히어로를 '불곰 이승형'으로 증언을 해달라는 말에, 유나는 역정을 냈다.

"그럼 저를 구해주신 분은요?! 그분은 억울하잖아요!"

"......유나야. 너를 구해주신 분은 이승형 씨다. ...그냥 그렇게 해주면 안 되겠니?"

담임교사는 애걸복걸하는 눈치였다. 눈치가 어느 정도 있는 유나는 곧 그 이유를 깨닫고 분함에 입술을 깨물었다.

"저를 구해주신 분이 C급이라서 그런 거죠? A급이 빌런에게 당하고 C급이 그걸 구해줬다는 걸 감추려고?"

"유, 유나야?!"

교사는 화들짝 놀라 주변을 훑었다. 다행히 듣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유나는 씩씩거리며 화를 삭이다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아니야. 이해해. 그럼 유나야, 그렇게 해주는 거로 하고...."

교사는 죄인처럼 유나에게 안내장을 내밀었다.

"협회에 가서 인터뷰를 좀 해줘야 할 것 같아."

유나는 눈앞이 깜깜해졌다.

* * *

결국 유나는 인터뷰를 수락했다. 주어진 각본대로 하하 호호 웃으며 이승형의 활약을 자랑했다. 이승형도 각본대로 제 활약을 멋들어지게 설명했지만, 단 한 번도 유나와 눈을 마주하지 못했다.

쉬는 시간. 유나는 보안요원의 도움을 받아 화장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마침 복도에는 그 푸른 소녀가 남자 화장실과 여자 화장실을 사이에 두고 고뇌에 빠져 있었다.

"저기요!"

"......? 아, 그 학생."

소녀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소녀는 손에 유성의 프렌차이즈 카페에서 테이크 아웃한 딸기 음료를 쥐고 있었다. 보안요원이 뒤에서 유나를 제지하려고 했지만, 질풍노도의 방황하는 사춘기-중학교 2학년 이유나는 거침이 없었다.

"억울하지도 않아요?!"

"뭐가요?"

"......알잖아요!"

유나는 보안요원의 눈치를 봤다. 소녀 또한 그걸 눈치채고는 손을 들어 올려 유나의 어깨를 두드렸다.

"억울할 게 뭐 있어요. 사람 살렸으면 됐지. 어디 아픈 건 아니죠? 학생 이름이...."

소녀가 멈칫했다. 유나가 잠시 의아해하는 사이, 소녀는 헛기침하며 말을 이었다.

"...이유나 학생을 구했으니까 그걸로 저는 만족해요. 히어로잖아요?"

"......."

소녀는 생긋 웃으며 유나를 지나쳐 복도 끝으로 걸어갔다. 유나는 멍하니 사라지는 소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넋을 잃었다. 소녀는 한 손을 어깨위로 들어 흔들고 있었다.

그날 저녁. 유나의 포트폴리오에 선정된 장래희망은 '히어로'가 되었다.

* * *

<2025년 2월 21일. 신서울 히어로 아카데미 여기숙사 101동 1011호.>

"제발.... 제발!"

유나는 두 손을 모아 간절히 기도하고 기도했다. 제 소원을 들어주는 이가 있다면 외계의 신에게라도 신앙을 바칠 정도로 유나는 간절했다.

"......아침부터 뭐 하는 거야?

룸메이트, 슈리는 누워있는 상태로 유나가 앉은 의자를 발로 쾅쾅 찼다. 슈리는 밤을 새우기라도 한 듯 눈에 핏발이 서 있었다. 유나는 속옷만 덜렁 입고 제 옆으로 다가온 슈리에게 츄리닝을 건넸다. 츄리닝에는 푸른 불사조 무늬가 가득했다.

"추워. 감기 걸리니까 입어."

"D급이 C급 걱정도 해주시네. 야, 그냥 포기해. 너 서류부터 광탈이야."

슈리는 주섬주섬 츄리닝을 챙겨입으며 유나를 자극했다. 유나는 그 비난을 한 귀로 흘려들으며 스크린을 수도 없이 새로 띄우고 끄고 하기를 반복했다. 슈리가 유나의 의 목에 팔을 감고 흔들었다.

"안된다니까~ 그러지 말고 나랑 우리 팀 가자~ 팀장님이 너 전적으로 지원해주신대~"

"싫어. 거기. 소나무 산하조직이잖아. 안 갈 거야."

"유나야. 우리 같은 애들한테 선택권이 있는 게 아니잖아. 그렇지? 적송 아저씨도 알고 보면 좋은 사람-"

"아. 떴다."

12시 정각. 유나는 재빨리 스크린을 새롭게 열었다. 곧 합격자 페이지로 넘어간 유나가 화상을 누르려다가 허공에 손가락을 멈췄다.

"무서워서 못 누르겠어."

"어디 보자."

삑. 슈리가 허락도 없이 결과 확인 버튼을 눌렀고, 유나가 숨을 삼켰다.

"...어, 음. 미안. ...미안."

"......예상은 했어."

유나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불합격. 우울해진 유나의 분위기에 오히려 슈리가 더 화를 냈다.

"아니, 그 양반 뭐 이래?! 너 어릴 때 불곰이랑 인터뷰도 했다며! 면접관으로 들어와서 인자하게 웃어주기도 했다며?!"

"그래서 떨어졌을지도 몰라. 그 사람, 나를 기억하는 눈치였거든. 지난번에 내가 얘기해줬지?"

"...야, 가자! 내가 오늘은 점심 산다. 내가 오늘 진짜 큰맘 먹고 내 카드 긁는다."

"치돈세트."

"......일반세트로."

둘은 제복으로 갈아입고 주섬주섬 방을 나섰다. 옆방에서는 환호성이 넘쳐 흐르고, 유나는 질끔 흐르려는 눈물을 애써 삼켰다.

* * *

<2025년 3월 3일, 히어로 아카데미 2-C 강의실.>

이유나는 책상에 고개를 숙여 엎드렸다. 그나마 친했던 슈리는 제 소속 팀의 사냥터로 떠났고, 강의실에는 유나만이 덜컥 남아있었다. 다른 학생들도 몇몇 강의실에 남아있었지만, 유나와는 사정이 크게 달랐다.

그 어떤 팀에도 합격하지 못한 낙오자. 주제도 모르는 D급 힐러. 그게 지난 2주 동안 유나가 뒤에서 숱하게 들어온 저에 대한 멸칭이었다. 유나는 애써 긍정적으로 웃으며 넘어갔지만, 속은 새까맣게 타들어 갔다.

"포션보다 못한 애가 무슨 팀에 들어간다고...."

"지도 성장하고 싶겠지. 아무 지휘관이나 잡아서 마력 올리고 싶어하지 않겠어?"

"불쌍하긴 하다. 겨우 각성했는데 고작 D급 힐러잖아. 친화율도 한 자릿수라며?"

"......흡."

울컥했지만 입술을 깨물며 눈물을 참았다. 기적처럼 이능력을 각성했지만, 제게 주어진 이능력은 다른 히어로들에 비해 너무나도 하찮고 보잘것없었다.

'아냐. 그래도 포기 못해.'

신서울 대학에 합격하고도 그걸 포기하면서까지 히어로의 길을 선택했는데, 지난 1년 동안 유나의 친화율은 고작 '11'에서 멈춰버렸다. 일곱 속성 전부.

- 띵동. 2-C의 요원들은 강당으로 이동하시길 바랍니다. 다음 강의는 1학년과의 합동 수업으로 외부 초청 강사에 의한....

드르륵. 유나는 의자를 끌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틀비틀 걸어가는 걸음걸이가 불안했지만, 어쨌든 수업은 들어야 했다.

웅성웅성. 아카데미에 갓 입학한 1학년 요원들의 표정은 명랑하기 그지없었다.

'작년에는 나도 저랬는데.'

유나는 우울함을 애써 감추며 강당 맨 뒤에 따로 마련된 별도의 의자에 앉았다. 같은 2학년 요원들은 유나의 곁으로 오지 않았다. 유나의 귀에는 웅성거리는 신입생들의 잡담이 들려왔다.

"오늘 누가 오신대? 집정관?"

"불곰 님이랑 같이 오실지도 몰라. 전설이잖아? 아카데미 강의에서 바로 픽업해가신 거."

"저 뒤에 있는 선배들은 뭐지? 특별수업 안 가나?"

곧 강의 시간이 되었다. 요원들의 웅성거림이 잦아들고, 곧 스포트라이트가 강단을 비췄다. 아무도 나타나지 않자 요원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유나는 슬쩍 스크린을 띄워 강의하기로 예정된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했다.

"......또 이승형이야."

왠지 모르게 짜증이 났다. 첫인상부터 지금까지 어느 하나 마음에 드는 게 없었다.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랬는데, 막상 이승형의 팀에 지원하고 떨어지고 나니 유나는 제대로 심통이 났다.

'...내가 못나서 그런 거야. 정신차리자, 이유나.'

정작 떨어진 원인이 누가 봐도 제 능력 부족이라는걸 알고 있는 자신이 자괴감이 들어 더 슬퍼졌다.

"아아, 마이크. 하나 둘 셋."

강의를 진행하는 보조 강사가 긴급히 올라와 마이크를 테스트했다. 그는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몹시 안도한 얼굴이었다. 은근한 흥분도 감돌았다. 흥분? 유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요원 여러분께 안내 말씀드립니다. 오늘 있을 '히어로의 마음가짐'은 특별히 외부 초청 강사, 불곰 이승형 히어로님이 맡아주시기로 하였으나, 급한 사정이 생겨 강의를 진행하지 못하게 된바-"

1학년 요원들의 불만이 순식간에 터져 나왔다. 보조 강사는 예상했다는 듯 곧장 목소리에 마력을 실었다.

"오늘 특별히 아카데미에 방문해주신 히어로분께서 강의를 해주시기로 했습니다. 박수로 맞아주시길 바랍니다."

보조 강사에게서 마이크를 건네받은 푸른 머리칼의 소녀는 쭈뼛대며 강단의 정중앙에 섰다.

"어...안녕하세요?"

박수는 없었다. 오히려 정적만 내려앉았다. 소녀는 잠시 울상을 지었다가, 긴장한 얼굴로 제 소개를 했다.

"놀러 왔는데 갑자기 그 새...그 사이에 강의가 펑크 나는 바람에 제가 마이크 잡게 됐네요. 하하.... 반갑습니다, 예비 히어로분들. 저는 히어로 협회 한국 소속 SS등급 히어로, <피닉스>라고 합니다."

강당에 우레같은 함성이 울렸다. 유나도 손뼉을 치며 그를 반겼다.

* * *

제법 강의는 길게 이어졌다. 중간부터 강의가 아니라 자신이 활약한 전투의 무용담으로 흘러갔지만, 새내기들은 그 무용담마저도 하나하나 반응하며 감탄했다. 피닉스가 텀블러를 들고 안에 든 음료를 홀짝였다.

"...그래서 최근에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내가 거기서 만약 엇나가버리면 어떻게 됐을까. 히어로가 아닌 악당의 길을 걸었다면.... 이제는 별 의미 없는 이야기죠."

농담이 농담 같지 않다. 굳어버린 청중들의 반응에 피닉스는 재빨리 제 할 말을 했다.

"아, 아무튼 아까 누가 물었죠? 오늘 아카데미에 왜 왔냐고. 별거 아니에요. 그냥 이번에 새로 팀을 꾸려보려고 하는데...."

피닉스가 음흉하게 웃었다. 그제야 청중들은 피닉스가 일부러 마이크를 잡은 목적을 깨달았다.

"한 자리가 비어서, 그 자리는 뉴페이스로 채워보려 해요. 재능은 넘쳐나는데 아직 빛을 보지 못한 새싹으로."

피닉스가 강단을 내려왔다. 예비 히어로들이 저마다 기대한 얼굴로 피닉스를 바라보지만, 피닉스가 스쳐 지나가는 순간 세상을 잃은 표정을 지었다.

저벅, 저벅.

예비 히어로들이 미어캣처럼 피닉스를 주시하는 가운데, 피닉스는 강당 한가운데를 성큼성큼 가로질러 벽을 향해 다가갔다.

저벅. 발걸음이 멈췄다. 피닉스는 눈앞의 예비 히어로에게 손을 건넸다.

"딸기우유값 갚으러 왔는데, 이자까지 쳐서 계산해도 되죠?"

"......네!"

3월 3일.

우중충했던 이유나의 인생에 햇볕이 들었다.

중학 학생들에게 알립니다. 금일 발효된 빌런 출몰 위험 경보는 현 시각을 기준으로 해제되었습니다. 학생 여러분들은 학부모님께 연락하여 안전할 귀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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