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8화 〉1부 9장 12
피닉스가 새로운 목표를 위해 날아오르던 그 시각, 봉효를 위시한 10인의 환룡단 결사대는 흑사갈이 잠들어있을 신강으로 달렸다.
"정말로 괜찮습니까? 역시 괜히 그를 자극하는 건…."
경공술로 숲을 주파하던 사재가 우려를 표했다. 속도전을 중시하여 신강까지 달려오기는 했지만, 역시 이 전력으로 흑사갈에게 덤비는 건 무리가 있었다.
"굳이 따지자면 나로서는 패륜을 하는 셈인가."
황제는 자신의 갑각을 만지작거리며 쓰게 웃었다. 그는 흑사갈의 자식인 흑전갈의 코어로부터 태어난 괴인이기에, 자신의 꼬리 독침이 흑사갈을 찌른다는 것에 마음이 살짝이나마 흔들렸다.
"굳이 따지자면 그렇죠. 그래도 황제께서 도와주신 덕분에 하나는 얻었잖습니까."
봉효는 선명한 황색으로 반짝이는 코어를 꺼내들었다. 환룡단 전원, 황제, 500의 환염령을 총동원하여 간신히 제압한 지파룡의 코어는 환룡단의 것이 되었다.
"사재. 당신은 이걸 북경으로 들고 가세요."
"예?"
"가서 주군께 진상하는 겁니다."
"하지만 저까지 빠지면 전력이…."
피닉스의 시야를 혼란시키기 위해 지파룡의 시체에 환염령 전체를 두고왔다. 패를 둘로 나누어 물지기를 잡는데 또 절반을 보냈다. 사실상 흑사갈을 잡으러 가는 전력은 봉효를 포함해 10명이 전부였다.
"만약 그가 우리를 따라잡는데 성공하면 나도 전력외가 된다. 오히려 적이 될텐데."
황제는 자신에 대한 절대명령권이 피닉스에게 있음을 전했다. 하지만 봉효는 그럼에도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샤오린이 도와준다면 금상천화겠으나, 유감스럽게도 주군께서는 샤오린에게 자유를 부여하셨지요."
"그러니까 제독. 흑사갈까지 공략하는 건 무리-"
"사실."
봉효는 우선으로 입을 가리며 낮게 웃었다.
"지파룡을 공략함으로써 이 작전의 목표는 십할을 달성했습니다. 그 뒤의 괴수들은 추가 목표일 뿐이죠."
"예? 그럼 저희가 흑사갈에게 가는 이유는 뭡니까?"
"시선을 돌리는 겁니다. 바로 사재 당신을 위해."
봉효는 지파룡의 코어를 사재에게 던졌다. 사재는 얼떨결에 코어를 잡고 몸을 떨었다.
"조심히 다루세요. 후후."
"아, 아니 제독! 아무리 그래도 이런 막중한 임무는…."
"당신이니까 맡기는 겁니다. 사재. 이런 막중한 임무는 당신말고는 맡길 사람이 없어요."
"제독…!"
사재는 코를 찡그렸다. 드디어 자신을 인정해주는가 싶어 눈물이 다 났고,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이 이 임무를 수행할 수 있을까 덜컥 겁이났다. 뭣보다 혹시라도 임무를 실패해 책임을 지게 될까봐 두려웠다.
"괜찮습니다. 사재."
봉효는 사재의 팔뚝을 두드리며 두둔했다.
"위험한 임무라는 건 잘 압니다. 그러니 적절한 보상이 있어야겠죠. 사재, 청화단의 <팬텀>을 기억하십니까?"
"예. 그야 당연히 알죠."
사재는 팬텀 천가을을 두 번 만났다. 한 번은 압록강의 다리 위에서 촉수로 샤오린을 구속했던 A급 천가을이었고, 다른 한 번은 어젯밤 환룡단의 비밀 기지에 하룻밤을 자러 온 S급의 천가을이었다.
"그리고 괴인 여성들…. 상당히 좋았지요?"
"크, 크흠!"
사재는 헛기침을 하며 얼굴을 붉혔다. 어젯밤 유령들끼리 벌인 광란의 축제는 잊지못할 기억이었으나, 다시 입에 담기에는 상당히 민망한 얘기였다.
"그, 좋기야 했습니다만, 그게 지금 이 임무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제가 주군께 간청하겠습니다. 이 S급 코어를 이용해, 그대의 짝이 될 연인을 위해 사용해달라고."
"......! 제독! 그건 아닙니다!"
사재가 성을 내며 봉효에게 반기를 들었다.
"지금 이 코어는 주군께서 괴수로 만들어야 할 코어 아닙니까?! 그런데 어찌 그런 코어를 사사로이 사용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괴인으로 만들어서 히어로인 척 쓰면 되는 거 아닙니까."
봉효가 황제를 가리켰다.
"운장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똑같이 하면 됩니다. 오히려 재미있겠군요. S급까지는 무장으로 변장을 하고, 그 윗단계에 오르면 정체를 드러내는 문화를 만드는 겁니다. 혹시나 들키면 이능력으로 인해 변했다고 하면 됩니다. 당장 유황숙도 토끼인간 아닙니까?"
"제독. 혹시 샤오린 양을 신경쓰셔서 그런 생각을?"
"후후. 글쎄요."
봉효는 알듯 모를듯 미소를 지었다. 그는 피닉스를 엿먹이는 것으로 수많은 이점을 계산해 움직이고 있었다.
"제독. 만약에 말입니다."
사재는 침을 꿀꺽 삼키며 질문했다.
"만약에 피닉스 님이 진노하시어, 전부다 죽이려고 들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주군마저도 능욕을 하신다면 말입니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제가 있는 겁니다. 걱정마십시오."
봉표는 음흉하게 웃었다.
"저에게는 비장의 수가 있으니까요. 그러니 걱정말고 다녀오십시오. 저는 당신을 믿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결국 사재는 등을 떠밀리듯 임무를 받았다. 두 손으로 받은 유리구슬은 무게로 따지면 자두보다 가벼웠지만 천근만근처럼 무거웠다.
"그런데 왜 하필 접니까?"
"......이야기가 끝이 나지 않습니다."
봉효는 표정을 굳히며 북경으로 향하는 길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깎아지른 산과 산과 산이 있었다.
"당신이 제일 산을 잘 타니까요."
"......예?"
"이름값하셔야지요. 사재. 후후.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저희는 흑사갈을 잡으러 가야하기에 이만!"
봉효와 흑전갈, 그리고 나머지 환룡단 단원들이 자리를 떠났다. 사재는 숲속에 덩그러니 홀로 남아 코어를 움켜쥐어야 했다.
"하긴 하는데…."
여기서 북경까지 거리가 얼마더라. 아무리 적게 잡아도 600km는 족히 넘을텐데.
"......."
사재는 꼼수를 부리기 위해 영체가 되었다. 유령이 되어 날아가면 몸은 편안-
툭. 데구르르.
"으아악?!"
사재가 영체가 되기 무섭게 코어가 손에서 떨어져 바닥을 굴렀다. 사재는 황급히 실체를 갖추어 코어를 쥔 채 눈을 질끈 감았다.
"아오…! 제독 진짜!"
왜 다른 단원들을 두고 하필이면 나를 선택한 걸까.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막중한 임무라기보다는 엿이나 먹으라는 벌처럼 느껴졌다.
"내가 답답이처럼 행새하는게 들켜서? 나 여자랑 떡치고 와놓고 제독 놀려서? 환염령들 100명 상대로 이겨먹어서? 으으악! 진짜 모르겠다!!"
정말로 자신의 능력을 믿어서 믿고 맡기는 거라면 다음부터는 정중히 사양이다. 사재는 눈물을 머금고 동쪽으로 달려야했다.
동쪽으로, 또 동쪽으로.
"그래서 왜 하필 저 친구에게 이런 임무를 맡겼나?"
"예? 이명이 <사재>아닙니까. 아, 황제님은 잘 모르시겠군요. 저 이명의 주인이 등애라고 하는 자인데, 그가 적을 쓰러뜨린 방법이…."
설마 이명 때문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한 사재였다.
***
<그 시각, 북경 중앙당 당사.>
흑염룡이 울부짖었다. 지파룡이 동정호에 가라앉았다.
흑염룡이 울부짖었다. 물지기의 심장이 갈라지고 폭주하기 시작했다.
손 짓 한 번으로 나는 새를 떨어뜨린 다는 속설이야 있기는 하지만, 설마 날개짓 한번으로 S급 괴수 지파룡을 수장시키는 자가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걸 흑염룡이 해냈다. 흑염룡은 동정호에 들러 보이지 않는 광탄같은 것을 쏨과 동시에 지파룡의 등껍질을 움푹 꺼지게 만들었다. 그와 동시에 지파룡의 몸은 물속으로 잠겨버렸다.
'그럼 코어는?'
라는 의문이 생기기도 잠시. 흑염룡은 바로 기수를 동북쪽으로 돌려 날개를 펼쳤고, 마침 잠에서 깨어나 난리를 피우던 물지기와 일전을 벌였다.
지파룡 때와는 달리 상당히 고전하거나 시간을 끄는 모습에 사람들은 당황했다.
'??? 왜 또 쟤는 쉽게 못 건드리지? 뭐임? 도대체 뭐임?'
"또 미쳐 날뛰기 시작하네. 어휴. 영상으로 보니까 영체들이 안 보이는 거지."
석하랑은 피닉스가 저지른 흔적과 이동 경로를 보며 혀를 찼다. 피닉스는 흑염룡을 움직이며 마구잡이로 날뛰었고, S급 괴수 지파룡은 흑염룡이 닿자마자 즉사했다.
"일격인지 아니면 마무리만 한 건지는 모르지만…. 이거 뭐 알 방법이 없네."
영상 장비로는 영체들의 움직임을 파악할 수 없다. 하필이면 햇빛이 반짝이는 맑은 날이다보니 피닉스도 몸을 숨길 수 있다. 덕분에 유령들의 움직임은 그 누구도 알지 못한 채, 실체가 드러난 괴수들만 억측의 대상이 되었다.
"아, 심심타. 그냥 한국 돌아가삘까."
사실상 회담이 중단된 시점에서 석하랑은 굳이 혼자 남아서 이야기를 나눌 필요는 없었고, 컨디션 불량을 핑계로 홀로 대기실로 돌아왔다.
"내는 개입하면 월권인데…."
석하랑은 몸이 근질근질했다. 피닉스가 S급 괴수들을 때려잡고 다니는 걸 보니, 자신도 괴수들을 때려잡으며 힘을 과시하고 싶었다.
"근디 그 협상 전문가라고 하는 사람은 언제 오나?"
똑똑똑.
대기실에 노크가 울렸다. 석하랑은 소파에 대자로 누워있던 자세를 잽싸게 바로 잡아 헛기침을 했다.
"들어오셔요."
"실례합니다. 설화령 님. 청화 양의 관계자인 협상 전문가라고 주장하시는 분이 오셨는 데요…."
협회의 직원은 상당히 난감한 기색이 역력했다. 신원을 확인할만한 이는 청화밖에 없었는데, 정작 그 청화가 지금 자리를 비워버렸다.
"그러면 이 방으로 보내주세요."
"예? 하지만…. 남자분인데 괜찮으시겠습니까?"
"킥. 저 이길 수 있는 남자는 세상에서 한 사람 밖에 없으니까 괜찮아요."
석하랑은 들어올린 검지에 얼음조각을 만들었다. 여차하면 찔러버리겠다는 의사표시에 직원은 한시름을 놓았다.
"그럼 일단은 불러오겠습니다."
직원이 사라진 뒤, 석하랑은 손으로 무릎을 두드리며 협상 전문가를 기다렸다. 과연 누가올까. 남자라고 하면 청화단에서는 대머리, 선글라스, 전직 국회의원 류천성, 그리고 이름이….뭔지 모를 외국인 하나가 있는데.
저벅. 저벅.
육중한 발소리와 함께 거구의 남자가 들어왔다.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는 누가봐도 일수가방에서 보험 설명서를 들이밀 것만 같은 샐러리맨 그 자체였다.
"누구세요?"
석하랑은 처음보는 남자였다. 청화단에 내가 모르는 빌런이 있던가? 석하랑이 고개를 갸웃거리던 순간, 남자가 석하랑에게 악수를 건넸다. 남자에게서는 진한 아라비카 원두의 향이 풍겼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하유준이라고 합니다."
"아, 예. 저도 만나서 반갑…."
석하랑은 하유준과 악수하며 이상을 느꼈다. 익숙한 마력과 동시에 어딘가 살아있지 않은 듯한 느낌. 이건 과거 부산 정부 초청 행사에서 만난 은재민과 악수했던 느낌과 비슷했다.
"어…?"
"저, 정말 아는 사람 맞으신가요?"
석하랑이 하유준에 대해 모르는 눈치를 보이자, 협회 직원은 전투 자세를 취하며 남자를 구속하려 들었다.
"아, 아녜요! 이 사람이 올 지는 몰랐거든요. 오랜만이에요, 유준 씨."
"그러게말입니다. 부산에서 뵌 이후로 여기서 또 뵙는군요. 아, 저는 이런 사람입니다."
하유준은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공손히 건넸다. 휘황찬란한 명함에는 '과장 하유준'이라는 직책과 이름이 박혀있었다.
"…?"
"하하. 글로벌 시대에 맞추어 언제나 변화하는 기업, 저희 유성그룹이 이번에 새로이 코어 사업을 재편하면서…."
"아, 알겠어요. 석하랑 님이 보증하신 분이니 확실하겠죠. 하지만…."
직원은 하유준에게서 멀찍이 떨어지며 거리를 벌렸다. 하유준은 허리를 70도 가까이 숙인 채 명함을 건네는 자세로 굳었으나, 직원은 부리나케 도망갈 뿐이었다.
"사, 삼십분 뒤에 회담이 이루어질 예정입니다. 청화 님께서 전권을 일임하신 분이라고는 해도, 역시 본인의 확인이 없다면 애로사항이…."
"제가 책임질게요."
석하랑이 직원의 말을 끊었다.
"일단 둘이서 이야기를 좀 나눠봐야하니까 밖에서 기다려주시겠어요?"
"아, 네."
직원은 황급히 밖으로 나가 문을 닫았다. 석하랑은 마력을 흘려 결계를 형성한 뒤, 소파에 주저앉았다.
"......내 살다살다 참. 언니야, 이건 또 먼데?"
[내 첫 인형이야. 어때? 제법 감쪽같지?]
하유준의 입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석하랑에게는 너무나도 친숙한, 그리고 피닉스가 '돈 관련되는 모든 협상'을 일임한 진짜 협상 전문가의 목소리가.
"커피 냄새 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SS급이면 마력만 보고도 알아채야지.]
하유준, <인형술사>은유하의 첫번째 인형이 어깨를 으쓱였다. 은재민이나 블랙 마켓의 사장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자연스러움이었다.
[후후, 그럼 회담 어떻게 진행됐는지 과정이라도 간략히 얘기해줄래? 비행기 터트린 거, 아무래도 내가 직접 뽑아먹어야 울분이 풀릴 것 같거든.]
하유준.
거꾸로 뒤집으면 준유하.
준 유하.
피닉스가 믿어 의심치 않는 최고의 협상 전문가가 회담의 배턴을 이어받았다.
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