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1화 〉1부 9장 25
한국의 히어로들을 위시한 후방의 히어로들이 흑전갈의 첫번째 공격을 무난히 막아냈다. 잠시 여유가 생긴 사람들은 호수를 가로질러 히어로들의 방어선을 무시해버린 흑전갈 떼에 대처를 해야했다.
"일단 전등 싹다 후방으로 돌려요! 후방을 중심으로 전열을 재편성합니다!"
유황숙은 물가로 튀어오른 흑전갈의 공격에 쌍검을 휘둘러 막아냈다. 횡으로 가른 검격은 흑전갈의 꼬리를 잘라내고 몸통에 깊은 상처를 내어 갈라버렸다.
"갑자기 여기가 최전선이 되다니...!"
유황숙은 자신의 실책에 탄식했다. 호수의 좌우로 넓게 구축한 방어선은 무용지물이 되었고, 히어로들의 지탄은 방어진을 구축한 자신에게로 돌아가고 있었다.
'누가 전갈 놈들이 수영을 저렇게 잘 할 줄 알았냐고!!'
유황숙은 울분을 담아 쌍검을 휘둘렀다. 이능력의 부작용으로 머리 위에 생긴 토끼귀를 나풀거리며, 그는 열심히 튀어오르는 흑전갈들을 베고 또 베었다.
"황숙 공! 너무 어두워서 보이지 않는답니다! 빨리 조치를!"
"지금 여기서 더 어떻게, 크윽! 전체에 연락을 넣으세요! 화염술사나 광술사들, 전부다 호수를 향해 불을 피우라고!"
유황숙은 임시방편으로 어둠을 밝힐 수 있는 존재들을 찾았다. 누군가가 유황숙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내가 하겠습니다."
천자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일국의 1인자가 앞에 나서겠다는 말에 유황숙은 몹시 걱정되었으나, 당장은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면 저기에-"
콰----앙!
저 멀리서 하얀 불기둥이 하늘로 치솟았다. 물가에 상륙한 흑전갈 무리들을 일소하는듯한 마력의 폭발에 유황숙은 해당 위치에 배치된 이들을 살폈다.
"<화권>...! 죽은 S급 이후로 새로이 이명을 이어받았다는 그 남자!"
"......청화 양과 스캔들이 있다던 그 연예인 말이군요."
천자의 눈이 반쯤 감겼다. 그는 수 킬로미터 가량을 밝히는 불기둥에 주먹을 불끈 쥐었다.
"S급이라고 했습니까? 저 자가?"
"예. 서울의 차원문을 막은 화마룡 살해자입니다."
"......질 수 없습니다."
천자가 마력을 일으켰다. 그를 중심으로 회색빛의 불꽃이 서서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저도 이제는 이능력자! 더이상 앉아서 눈치만 보는 유약한 자가 아닙니다!"
키에엑!
흑전갈 하나가 수면에서 튀어올랐다. 1m 가까이 되는 몸으로 하늘을 높이 뛰어오른 흑전갈의 꼬리는 천자를 향해 있었다.
"흡!"
천자가 손에든 검을 높이 치켜올렸다. 흑전갈을 향해 겨눠진 검날에 회색 불꽃이 타올랐고, 곧 흑전갈을 향해 사선으로 방사되었다.
캬아아악!
흑전갈은 회색 화염을 그대로 뒤집어쓰며 공중에서 절명했다. B급은 되어보이는 흑전갈을 일격에 태워버린 천자의 힘은 주변에 있던 중국 히어로들의 사기를 크게 고무시켰다.
"와아아아아아!!"
고작 B급을 쓰러뜨렸음에도 환호는 하늘을 찔렀다. 천자는 그들의 환호성을 즐기며 앞으로 조금씩 나섰다.
"황숙 공! 저자의 불꽃을 두고 사람들이 뭐라고 하덥니까?!"
"...세상에서 오직 한 명밖에 없어, '백염(白炎)'이라고 부릅니다."
천자는 저 멀리 흑전갈들의 사체에서 타오르는 흰 불꽃을 보며, 자신이 불태운 흑전갈의 사체에 검을 찔러넣었다.
"백염이라...."
화륵.
천자의 회색 불꽃이 흑전갈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백염의 화톳불보다는 그 크기가 작았지만, 회색 불꽃은 그 크기를 점점 키워가며 주변 어둠을 밝혔다.
"그렇다면 저는 제 불꽃을 '환염(煥炎)'이라 칭하겠습니다!"
스스로의 불꽃에 대해 직접 이름을 붙이는 행위는 누가 들었다면 '광오하다'고 평할만한 일이었지만 천자는 자부심이 넘쳤다.
"황숙 공! 이 불꽃을-"
"예, 예. ...과연!"
유황숙은 스크린 속 누군가와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그는 스크린을 내리고 급히 천자에게 주고받은 내용을 보고했다.
"흑전갈들을 불태우면 된답니다! 흑전갈들의 사체에 불을 질러, 그걸 횃불 삼아 어둠을 밝히면 될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천자는 기가 죽었다. 동시에 누가 그런 말을 했는지 궁금했지만, 지금은 그 아이디어에 따라 어둠을 밝히는 게 급선무였다.
"황숙 공! 영웅협객들에게 지시를! 각 위치마다 흑전갈의 사체 하나씩 배치를 하도록 명령을 내리십시오!"
"알겠습니다!"
유황숙은 즉각 워치에 대고 소리를 지르며 명령을 수행했다. 천자는 반대편에서 하나 둘 피어오르는 흰 불꽃을 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질 수 없습니다...!"
천자의 자존심과 혈기가 서서히 끓어넘치기 시작했다.
* * *
콰-앙!
폭음이 인다. 어둠속에 스며들어 인간을 노리던 독침이 하얀 불꽃을 머금은 주먹과 맞닿았다.
키기긱!
점과 면의 대결임에도 주먹은 한치의 물러섬도 없이 독침을 막아냈고, 오히려 서서히 꼬리를 밀어버렸다.
주먹 끝자락에서 크게 피어오른 하얀 불꽃은 주변 어둠을 환하게 밝혔고, 권사를 위협한 괴수의 모습을 낱낱이 드러냈다.
"A급...!"
이승형은 자신을 공격한 흑전갈의 등급을 대번에 파악해냈다.
흑전갈들은 A급나 S급이나 똑같이 A급 수준의 공격력을 가지고 있어, 이렇게 가까이에서 그 크기를 가늠해야만 구분이 가능했다.
카앙! 카앙!
흑전갈은 집게발을 휘두르며 상륙을 시도했다. 하지만 이승형은 집게발을 걷어차고 팔꿈치로 찍어 흑전갈의 공격을 막았다.
"하압!"
다시금 주먹에 불이 붙는다. 다리를 앞으로 뻗고, 허리를 옆으로 비틀어, 주먹을 크게 뒤로 뻗는다.
그리고 흑전갈이 꼬리를 다시 찌르기 전, 빛처럼 빠른 속도로 주먹을 휘둘러 흑전갈의 대가리를 찍었다.
쿠--웅!
흑전갈의 몸이 움푹 패였다.
단단한 외피를 부수고 속살까지 뭉개버린 이승형의 화권은 흑전갈을 바닥에 매다꽂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흑전갈의 몸 안에서 불꽃을 피워 마무리 일격을 넣었다.
화르륵!
흑전갈의 몸이 흰 불꽃에 타오르기 시작했다. 흰 불꽃은 흑전갈을 집어삼키며 어둠을 밝히는 화톳불이 되었고, 자연히 주변을 밝히는 봉화로 불씨가 커졌다.
"모두 불꽃 근처에서 싸우세요! 야습에 주의를!"
이승형이 마력까지 실어 주변에 외쳤다. 그의 목소리에 실린 마력을 읽어낸 실력자들은 재빨리 그가 만든 횃불 근처로 모여들었고, 실력이 부족한 이들은 번역기의 힘으로 뒤쫓아 들어갔다.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금발벽안의 히어로 한 명이 이승형에게 엄지를 들어올렸다. 이승형은 강변을 따라 튀어오는 흑전갈들을 때려잡으며 봉화를 이어나갔다.
[얌마! 몸 조심해!]
워치에서 스크린이 튀어올랐다. 얼굴이 벌겋게 익은 우사가 스크린 우하단에 작은 지도를 펼쳤다.
[어디까지 갈 거야?! 호수 전체를 밝힐 셈이냐?!]
"선배님들은 중앙에서 계속 요격해주세요! 저는 계속 어둠을 밝히겠습니다!"
[아오, 저 미친 놈 진짜!]
이승형은 스크린을 내렸다. 우사에게 욕을 들어먹는 건 나중의 일이라고 하더라도, 당장은 호수 전체의 어둠을 밝히는 게 급선무였다.
키에엑!
조그만 흑전갈이 물위에서 튀어오르며 이승형의 얼굴을 덮쳤다. 승형은 허공에 튄 흑전갈의 집게발을 손으로 낚아채 바닥에 패대기쳤다.
쾅!
30cm 정도의 작은 크기였지만 불이 붙지 않는 건 아니다. 승형은 흑전갈로 모닥불을 피웠고, 인근에서 손전등 불빛에 의지하고 있던 히어로들이 반색하며 그를 반겼다.
"화권!"
"백염 근처로 흑전갈들이 몰려들겁니다! 준비하세요!"
사각, 사각!
승형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헤엄쳐온 흑전갈들이 광분하기 시작했다. 당장 형제의 시신을 욕보인다는 분노 어린 본능에 더불어, 백염이 자신들의 모습을 명명백백 밝히고 있으니 당장 꺼뜨려야 한다는 차가운 이성이 흑전갈들을 자극하고 있었다.
[화권!]
스크린에 다시 얼굴 하나가 떠올랐다. 이번에는 우사가 아닌 지휘권자, 집행관이었다.
"집행관! 죄송합니다만 아직 더 밝혀야-]
[계속가세요! 우측의 어둠을 밝히는 건 당신에게 맡기겠습니다!]
"......예!"
승형은 죽어라 강변을 따라 달리며 화톳불을 만들어냈다.그가 만들어낸 모닥불은 흑전갈들을 꼬이게 만드는 덫이 되었다.
"조심하세요! 흑전갈들의 독에 당하면 안 됩니다!"
코어를 버는 것도 중요했지만, 그는 누군가가 괴수에 의해 다치는 걸 바라지 않았다. 이승형은 수면 위로 독침을 빼꼼히 내민 흑전갈의 꼬리를 잡고 물밖으로 집어던졌다.
화륵.
백염이 흑전갈을 불태운다. 그 불꽃은 새로운 등불이 되어 흑전갈들을 꾀내었다.
강의 서쪽은 이승형이 밝히고 있다. 그리고 맞은편에는 그보다는 조금 느린 속도지만 회색의 불꽃이 마찬가지로 흑전갈들을 태워 불빛을 뿌리고 있었다.
"하하."
멀리서봐도 누군지 느낄 수 있었다. 분명히 천자의 불꽃일게 확실했다. 이승형의 감각은 그렇게 확신하고 있었다.
화륵.
백염 사이사이에서 다른 불꽃이 피어올랐다.
이승형이나 천자처럼 별개의 색을 가진 불꽃이 아닌 평범한 붉은 빛깔의 불꽃이었지만, 그 작은 불꽃도 주변을 밝히기에는 충분했다.
앞으로 조금, 조금만 더 하면 호수 전체가 밝아지리라. 그리하면 모두가 더 편하게 흑전갈들을 사냥할 수 있을 것이다.
"흐아아아!"
화권이 다시 자리를 박차고 뛰어올랐다.
백염과 환염.
색이 다른 두 불꽃은 호수의 강변을 밝히는 가로등이 되었다.
* * *
그 시각.
얼음 성벽 위에서 전장을 내려다보고 있는 SS급의 이능력자, 설화령 석하랑은 지금 절찬리 딴생각을 하고 있었다.
"흐흐, 흐흐흐흐."
석하랑은 나사 풀린 로봇마냥 흐느끼듯 웃었다. 도저히 웃음을 그칠 자신이 없어보였다. 남들이 쉽게 다가오지 못하는 높이까지 성벽을 쌓아올린 것도 사실은 헤퍼보이기까지 한 자신을 숨기기 위한게 아닐까 싶었다.
"오빠야, 하니까 당황하는 꼬라지...푸흐흡!"
석하랑은 배를 잡으며 깔깔 웃어댔다. 말로는 '미친 년'이라며 쌍욕을 퍼부었지만, 그 한 마디에 마력이 급격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피닉스는 흔들린 것이다. 석하랑의 '오빠야' 발언에.
"하여튼 좋단다, 어이구."
당황하는 모습이 너무 재미있어서 더 놀리고 싶어 자신답지 않게 성적인 농담까지 하고 말았다. 석하랑은 생각만으로도 열이 올라,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열기를 식혔다.
"낮이밤져.... 밤에 한 번 붙어 보자고 한 거 완전.... 히익?"
자신이 무슨 발언을 했는지 곰곰이 곱씹던 석하랑은 귓불까지 벌게졌다.
"이, 이 미친 가시나가!"
석하랑은 자신의 입술을 손바닥으로 때렸다. 아프지는 않지만 부끄러워졌다. 혹시나 오해했으면 어쩌지? 진짜로 그런 쪽으로 붙어보자고 하면 어쩌지?
"그, 금마 선수 같던데...."
농담으로라도 그런 얘기를 할 것만 같았다.
- 나는 침대에서도 절대로 지지 않아.
"......흐, 흐아앙?! 도, 도란나 진짜! 꺄아악?!"
석하랑은 고개를 쥐어뜯으며 도리질을 쳤다. 망상을 시작하니 끝이 없었고, 성적 지식이 모자란 21살 처녀의 상상은 폭주하기 시작했다.
빈백 위에 누워, 서로 마주보며 몸을 겹치고, 겨드랑이 사이로 서로 팔을 뻗어 끌어안아 키스하며 나지막하게 그 이름을 속삭인다.
[석하랑.]
그래. 지금처럼. 석하랑은 저도 모르게 게슴츠레 웃었다.
"...왜?"
[석하랑?]
"......어?"
진짜 부른 건가? 석하랑은 머리핀에서 느껴지는 마력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고 했던가. 참 공교롭게도 피닉스가 석하랑을 호출하고 있었다.
[흐, 흠흠. 무슨 일이야?]
[아니. 너 지금 뭐하냐고.]
"......설마?"
석하랑은 주변을 휙휙 눈으로 훑었다. 카메라, 드론, 혹시나 싶은 푸른 카나리아까지. 석하랑을 촬영하고 있는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혹시 도촬하는 건가?
[너, 너 혹시 나 지금 몰래 보고있는 거야?]
[무슨 개소리냐. 멍 때리지 말고 지원 안 해? 지금 밑에 히어로들 개고생하는 거 안 보여?]
분령을 통해 전해진 피닉스이 마력은 살짝 노기(怒氣)까지 서려있었다. 자신이 뭘 그리 잘못했나 괜시리 서운해진 석하랑이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고생은 무슨. 흑전갈들 그냥 잡으면 되는 거 아냐?]
[지금 집행관이 세 번이나 죽을 뻔 했잖나!]
"어? 뭐라고?"
석하랑의 눈이 대번에 아래로 돌아갔다. 땅바닥에 주저앉은 집행관의 옆에는 검은 독액이 튀어 흙바닥을 녹이고 있었다.
[집행관 뿐만이 아니다! 운사도, 다른 놈들도 지금 흑전갈들 상대하기 힘들어 해!]
"자, 잠깐만! 아니, [잠깐만!]"
석하랑은 전장을 훑었다. 자신이 멍때리는 사이 흑전갈들의 웨이브는 벌써 몇 차례 히어로들을 덮쳤고, 전장은 어느덧 호수 전역으로 확장되기 시작했다.
"어, 언제 이렇게까지?!"
[잠깐이고 뭐고 당장 지원해!]
[아, 알겠어!]
석하랑은 급히 허공에 얼음창을 만들어냈다. 마침 아래에는 주저앉은 집행관의 바로 뒤, 흙바닥을 뚫고 후방에서 기습을 하는 흑전갈이 눈에 띄었다.
"어딜!"
파앙-!
얼음창이 빛처럼 쏘아져 흑전갈의 꼬리를 꿰뚫었다. 흑전갈의 독침은 집행관의 관자놀이에 닿기 직전에 멈췄고, 집행관은 어깨에 새어나온 독액이 떨어지기 전에 운사에게 잡아당겨졌다.
"어, 뭐, 뭐야?! 갑자기 왜 이렇게 됐어?!"
집행관 뿐만 아니었다. 전장 곳곳에는 광분하여 날뛰는 흑전갈들에 중상을 입을 뻔한 이들이 눈에 훤히 들어왔다. 석하랑은 그들이 다치지 않게 얼음창을 날리며 견제했다.
[죽이지는 마라. 죽이면 그거 네 킬카운트로 적용 돼. SS급이면 다른 이들에게 양보하는 미덕을-]
"아, 드럽게 쫑알대네."
석하랑은 머리핀을 빼어 바지 뒷주머니에 쑤셔넣었다.
"내가 누구 생각한다고 멍때리고 있었는데...!"
자신이 잘못한 게 맞지만 괜히 억울해졌다. 석하랑은 분노를 풀기 위해, 하늘을 향해 손을 높이 치켜들었다.
"서울 돌아가면 진짜 한 판 뜰 거다, 이 새개끼야아아!!"
파바바바박!
석하랑이 쏜 얼음비가 전장을 뒤덮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