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염의 피닉스-198화 (198/1,497)

〈 198화 〉1부 10장 1

피닉스가 한국에 돌아온지도 무려 열흘이 지났다.

사람들은 빛처럼 중국을 갔다가 백나로 호를 타고 귀국하는 청화의 모습을 기대했으나, 청화는 또 빛처럼 어딘가로 사라졌다.

도대체 그는 어디로 사라졌다는 말인가.

백나로 호에 타고있던 한 히어로의 증언에 따르면, 서해 상공에 들어서자마자 <흑염룡>을 소환하여 서울로 사라졌다고 한다.

흑염룡이 청화에게 보이는 충성심과 능력, 그리고 안전성에 대해 사람들은 의심의 눈초리를 돌렸다.

그리고 석하랑이 부산 뿐만 아니라 신서울-한반도 전체를 홀로 담당할 수 있다는 확신이 생기게되면서, 한반도 전역은 서서히 안정을 되찾아갔다.

이제 슬슬 서울로 올라가도 되는 거 아닌가...?

신서울의 여론이 바뀌기 시작했다.

* * *

<2020년 6월 26일 새벽 3시, 청화단 아지트.>

"예. 그러면 그 날 나오는 건 확실한 거죠? 알겠어요. 알아봐줘서 감사해요."

[그래. 내가 여기 있으면서 확인한 거니까 틀림없다. 거 참, 특이한 아가씨일세.]

"...아무튼 감사합니다, 집정관. 높으신 분들 상대로 고생하셨어요."

[어휴. 너랑 진짜 왜 이렇게 말이 잘 통하는지 모르겠다니까. 어? 무슨 이명 하나 정하는데 사흘 밤낮을 릴레이로 토론을-]

삑.

용건을 마친 나는 <집정관> 유영호와의 전화를 끊어버렸다.

'국제전화인데 돈 아껴야지.'

유영호가 있는 곳은 현재 영국. 그간의 공적을 인정받은 유영호는 한국 지부를 넘어 히어로 협회의 본부가 있는 런던으로 소속을 옮기게 되었다. 원탁의 스폰서이자 히어로들 이명 지어주는게 삶의 낙인 '높으신 분들' 중 한 명이 된 것이다.

"축하한다. <군신(軍神)>."

"과분한 이명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운장의 껍질을 벗어던진 괴인, <군신> 샤오린은 긴 머리칼을 베베 꼬며 부끄러워했다. 내 호위를 자처하며 서울에 남게된 그는 언제나 나를 지킨다는 이유로 내 곁에서 한사코 떨어지지를 않았다.

"언제까지 따라다닐 셈이냐?"

"제가 당신을 이길 때 까지요?"

"네 승리다. 이제 좀 꺼져."

"장난치지 마시고요."

나는 손을 휘휘 저으며 샤오린을 쫓아냈지만, 샤오린은 의자에 벌러덩 누워버리며 내게 대놓고 시위를 벌였다. 나시티와 돌핀 팬츠만 입고 소파에서 미적대는게 무슨 호위일까 싶었지만, 적어도 이 펜트 하우스에 발을 들일 수 있는 존재는 극히 드물었다.

"속옷 보인다."

"저 속옷 없는데요?"

"정정하마. 안에 다 보인다."

"보셔도 괜찮은데요?"

말이 통하지 않았다. 샤오린은 군신이 되면서 수치심이라는 걸 내던져버린 건지, 이 방에서는 거의 알몸에 가깝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래도 저 밖에 나갈 때는 정장입고 다니는데요."

"속옷은 안 입고 말이지."

"어차피 다들 눈치채지 못하잖아요?"

샤오린은 마력을 조정해 의복을 변환시켰다. 타이트한 검은 정장에 푸른 넥타이를 한 샤오린은 첩보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보디가드로 금방 변했다.

"이렇게 옷이 마력으로 되어 있는 거."

"그래. 마음대로 해라."

옷의 디자인에 관해서는 내가 기억 속의 스킨을 더듬어 알려줬지만, 샤오린은 어떤 옷을 입든 자꾸만 속옷을 입지 않았다. 밖에 나갈 때면 온몸을 가리는 보디가드 스타일을 고집하지만, 내 아지트에 있을 때면 노출이 심한 복장으로 돌아다녀 내 인내심을 자극하고 있다.

그래서 그냥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살다보면 익숙해지리라 믿으며.

"샤오린."

"예."

"오늘 날 밝으면 적토를 타고 본가에 다녀와라."

"윽."

샤오린은 노골적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꼭 다녀와야 하나요?"

"사흘 지났으니까 코어 하나 나왔겠지. ...과연, 역시 직접 보기 껄끄러운가?"

"그건 아닌데.... 본가 다녀오기 귀찮으니까 그러죠."

환룡의 괴인이라서 그런지 샤오린은 내 부탁을 상당히 귀찮아했다. 내 괴인이 아닌 이상 강제로 명령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지만, 그렇다고 다른 이에게는 맡길 수 없는 극비 임무였다.

"네가 아니면 네 집에 누가 가겠나."

"가도 오라버니는 바빠서 못 볼테고, 주군은 더 바쁘게 움직이시잖아요. 그럼 저 결국에는 아버지...."

샤오린은 눈썹을 찌푸렸다.

"...'그 걸' 이제는 아버지라고 해야하나요?"

샤오린은 영 탐탁찮은 얼굴이었다.

모택평.

난세의 간웅, 조맹덕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중국의 2인자는 나와 환룡에 의해 모든 걸 빼앗기는 몰락을 겪었다. 나는 미래의 그에게서 환룡과 큐브를 빼앗았고, 환룡은 그의 몸과 휘하 조직인 동창을 빼앗았다.

"하긴 아버지라고도 부르기 힘들겠어."

내가 그를 철저히 파멸시킨 이유는 그가 원작이라는 미래에서 저지른 악행을 미연에 차단하고자 한 것도 있지만, 자신의 친딸인 샤오린을 죽였기 때문이었다.

"친딸의 심장에 벌레를 넣은 것도 그렇고, 한 번 졌다고 심장을 터뜨리다니. 정말 상종 못할 놈이었지."

"그 패배를 주신 분은 당신이신데요. 그래서 죽었잖아요."

"죽기 싫었으면 이겼어야지."

"그래서 이길 때까지 도전하고 있는 거잖아요?"

어떻게 말 한 마디를 질 생각을 안한다. 나는 샤오린의 약점을 훤히 알고 있어 그것을 공략하는 걸로 손쉽게 우세를 점하고 있지만, 샤오린도 점점 성장하고 있는 만큼 언젠가 내 경지를 따라잡을지도 모른다.

"현재 인류 중에서는 네가 가장 나와 가깝겠어."

"어떤 의미로요?"

"당연히 이능력의 수준이지. 그래. 히카리 적으로 표현하면."

나는 벽에 걸어둔 스크린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프로페서> 히메지 히카리 식으로 표현된 청화단의 랭킹이 위에서부터 쭉 나열되어 있었다.

"레벨 96. 그게 네 지금 수준이다."

"뭔가 게임같네요?"

"...히카리에게 따져라."

원작이나 정령적으로는 '마력친화율'이라는 단어가 더 적절했으나, 히카리는 그걸 평범한 사람들에게 더 직관적인 단어로 바꿔버렸다. 샤오린은 위에서 세번째에 걸린 자신의 이명을 보자마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왜 제가 3등이에요?!"

"네가 3번째니까."

"저 <설화령>이랑 붙으면 무승부인데요!"

"그래도 레벨은 96이라고 하잖나. 히카리에게 따져라."

"윽...."

샤오린은 랭킹에 상당히 불만이 많아보였지만 그걸 히카리에게 따질 용기는 없어보였다. 샤오린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그래도 단 넷 뿐인 SS급 아닌가."

나는 랭킹의 위에서부터 찬찬히 읽어내려갔다.

"99, 피닉스. 97, 석하랑. 96, 샤오린. 96, 광검. 축하한다. 이제 진짜로 광검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으니."

"그 분이랑 동실력이 된 건 영광스러운 일이긴 하지만...."

샤오린은 또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는 지 눈썹을 찌푸렸다.

"또 왜?"

"그 분, 괴인으로 부활하시고 너무 단련을 게을리 하시는 거 아닙니까?"

샤오린은 환룡의 괴인 답지 않게 광검을 게으르다며 질타했다. 광검이 사실 죽지 않고 나에 의해 괴인으로 부활했다는 것에 상당히 놀라기는 했지만, 당시에 봤던 모습과 540도 다른 지금의 모습에 샤오린은 크게 실망했다.

"왜? 열심히 검을 휘두르고 있잖나. 허리로."

"그 검은 그 검이 아니잖습니까!"

평소에 무(武)를 중요시하는 자 답게, 샤오린은 검술을 연마하지 않는 광검의 작태에 대해 격분했다.

"혹시 이성으로 좋아했다거나?"

"무인으로서 존경심은 가지고 있던 분이라고요! 으으, 그런 분이 아나스타샤에게 깔려서 헉헉대는 모습을 봐버리다니.... 어린 시절부터 동경하던 분의 치태를 봐서 너무나도 슬픕니다."

"그러길래 영체로 아무 곳이나 드나들지 말았어야지."

"<운디네>가 서울로 올라왔다기에 반가워서 그만."

샤오린이 내 호위로 서울에 온 것과는 별개로, 같은 원탁의 일원인 <운디네> 아나스타샤도 현재 잠시 서울에 머무르고 있다. 원래 신혼집인 부산 인근을 돌아다니다가 어쩔 수 없이 서울로 올라와야했고, 당연히 목줄을 잡고 있는 개 한 마리도 함께 서울로 데리고 왔다.

나는 바로 아래층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반가우면 보러가지 그러나. 여기 밑에 있을텐데."

"......지금 혹시 하고 있나요?"

"샤오린."

나는 샤오린의 생각을 바꿔야했다.

"그 부부사이에서 안 하고 있는 순간은 없어. 명심해라."

"......정말 대단하군요. 그게 사랑의 힘입니까?"

"그래. 사랑이 너무 넘쳐서 주민신고 당할 정도지."

그들은 사실상 부산에서 쫓겨났다. 금발의 외국인 커플이 부산 일대 야외에서 시도 때도 없이 사랑을 나눈다는 신고가 줄을 이었고, 결국 그들은 남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을 찾다 못해 결국 청화단의 아지트로 올라와야 했다.

"방음 하나는 철저히 되거든. 사람도 없고. 전망도 좋고. 야외 플레이를 하지 않는 조건으로 방 하나를 내어줬다. 궁금하면 다녀와."

"보고싶지 않습니다. 어쨌든 이 랭킹, 조만간 뒤바뀔 겁니다. 제가 2등으로 올라가고, 언젠가 당신의 옆에 나란히 서게 되는 순간이 올 것입니다."

샤오린은 랭킹에 오른 자신의 이명 <군신>을 내 옆으로 들어올렸다.

"기대하지. 그러면 다녀와라. 적토와 함께."

"저 혼자 다녀오는게 더 빠른데요."

"...타고가."

"알겠습니다."

샤오린은 입술을 삐죽 내밀며 옷을 바꿨다. 청색을 기조로 한 전포는 샤오린이 공식적인 대외 활동에 나설 때 입는 의복이었다.

"그러면 다녀오겠습니다. 아버.... 아니죠, 이제는 어머님이 낳은 코어 챙겨오도록 하죠."

"아. 간 김에 봉효에게도 가라."

"오라버니에게도요?"

"그래. 봉효가 장원에서 너를 직접 기다리고 있을 거다. 내가 받기로 한 물건이 하나 있거든. 이거 선물로 주고 여기다 담아오면 돼."

나는 서랍에서 상자 하나를 꺼내 샤오린에게 던졌다. 마력의 막으로 밀봉된 작은 박스는 그 누구도 열지 못하는 자물쇠가 걸려있었고, 그건 오직 인간이 아닌 정령만이 열 수 있었다.

"이 안에 뭐가 들어있는 거죠?"

"장신구."

"...혹시 오라버니한테 주는 건가요?"

샤오린이 눈을 반쯤 감으며 나를 추궁했다. 봉효의 이름을 알게된 이후, 샤오린은 어째선지 나와 봉효를 떨어뜨려놓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나도 그렇고 봉효도 그렇고 서로 이성적인 관계는 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샤오린. 나는 백청영 그 놈을 좋아하지 않아."

"하지만 오라버니는 당신을 좋아할 수도 있잖아요."

"그 놈이? 너는 네 오빠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 군. 그 놈이 얼마나 외도인지 모르나? 모택평을 그렇게 만든 게 누구 아이디어라고 생각하나?"

"......."

샤오린은 입을 떡 벌리며 경악했다.

"저 지금까지 당신이 그런 줄 알고 있었는데...."

"직접 물어봐라. 그 놈 짓이다."

"지금 바로 다녀오겠습니다."

샤오린은 믿기지 않는 다는 얼굴로 내 방을 떠났다. 영체로 창문을 통과해 내려가는 방향은 적토를 위해 새로이 마련된 여의도 공원의 작은 마굿간이었다.

"빠르네."

밤하늘에 붉은 궤적이 서쪽으로 솟구쳤다. 북경을 향해 달리는 적토의 발걸음은 주인의 심정을 이해했는지 그 어느때보다도 신속했다.

"S급 코어 하나랑 USB 하나 가져오는 택배 기사 치고는 너무 고급 인력이긴 하지만."

방 안에 마구잡이로 드나들던 노출증 환자를 쫓아냈으니 이제 이 방에는 오롯이 나만 있게 되었다. 나는 의자를 뒤로 젖히며 눈을 감았다.

"10분만 쉴까."

삐걱, 삐걱, 삐걱!

"......그냥 일이나 해야겠군."

나는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백색소음 삼아 다시 일에 집중해야했다. 샤오린이 중국에서 가져올 '흑사갈이 낳은 S급 코어'의 사용처를 어디에 쓸 것인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정기적으로 공급받는 S급 코어도 참 문제군."

청화단의 간부들을 비롯해서 수많은 이들이 내가 가진 S급 코어를 노리고 있다.

공식적으로 알려진 것은 둘. 그리고 내가 흑전갈을 잡으며 얻은 것 둘. 내게는 네 개의 S급 코어가 있다.

간부들은 마력의 향상을, 은유하는 판매할 물건으로, 히카리는 연구할 물건으로, 그리고 협회에서는 S급 코어로 부활시켜 부릴 괴수를 원하고 있다. 앞으로든 뒤로든 나의 S급 코어들을 노리는 마수들은 셀 수 없을 만큼 많았고, 나는 코어들을 적재적소에 활용해야만 했다.

"항상 하나씩 보험으로 챙겨놓고."

천가을 사태가 또 벌어질지 모르니 하나는 상시 가지고 다녀야 할 것 같았다. 나는 책상위에 올려둔 세 가지 색의 코어를 주머니에 넣었고, 남은 하나의 흑색 코어를 허공에 던졌다 잡으며 용처를 생각했다.

괴수화, 괴인의 강화, 시설 정비, 자금 확보, 연구 투자, 친선교류, 기타 등등....

"누가 가장 급하게 필요할까...."

결국 내가 정해야 하는 문제였다. 고민은 계속 깊어져만 갔고, 나는 태양이 떠오르는 시각까지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래. 정했다."

아주 간단한 답이 하나 나왔다.

"다 만나서 제일 필요로 하는 사람한테 투자하면 되겠군."

명쾌한 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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