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염의 피닉스-203화 (203/1,497)

〈 203화 〉1부 10장 6

<사흘 전, 청화단 아지트.>

한 개인이 S급 코어 두 개를 가지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

그것도 자기 스스로를 보호할 능력을 가지고 있는 자라면 모를까, 겉으로는 가녀린 소녀에 불과한 청화를 노리는 자들은 많았다.

- 흑염룡이고 뭐고 사람만 노려서 빼앗으면 되는 거 아니냐?

서울의 실상을 모르는 지방의 빌런들은 사람들의 틈바구니에 뒤섞여 서울로의 상경을 원했고, 몇몇 성질 급한 이들은 망가진 도로나 산길을 넘나들며 서울로 올라갔다.

협회로서도 나름 골치가 아팠다.

히어로들이 벌어온 코어는 협회에서 모두 처분하여 일부 금액을 히어로들에게 정산한다고 하더라도, 청화가 가진 두 개의 코어는 협회를 통하지 않고 청화가 가져버렸다.

그래서 협회는 청화와 협상을 원했다.

그 어떤 공식적인 잡음도 나오지 않게 할테니, 부탁을 하나 들어달라고.

"그래서 공문으로 날아온 게 CF 촬영이란 말이죠."

청화단의 바지 단장, <등대> 김지화는 안경을 치켜올려 라운지에 모인 간부들의 면면을 살폈다.

바위괴인, 팬텀, 하늘성, 아키택트, 궁성, 그리고 피닉스.

"우선 단장님의 의견은?"

"싫다."

피닉스는 딱 잘라 거부의사를 밝혔다.

"공익광고에 돈도 나오는데? 그냥 가서 영상만 찍고 오면 1억 준다고 하잖아."

"그 시간에 괴수나 잡으러 가지 무슨 광고를."

"저는 찍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궁성> 유이신이 가장 먼저 의사를 밝혔다. 피닉스가 거부 의사를 내비쳤음에도 그에 반하는 의견을 꺼낸 유이신에 간부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자고로 광고라는 건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부가 가치가 있지 않습니까. 단장님이 원하시는 이미지를 위해서도 충분히 좋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래. 사람들한테도 아주 인상 깊을 걸? 청화의 옆에는 항상 누군가가 지키고 있으니 안심하라고 말이야."

"뭍에 내놓은 자식같아서 사람들이 불안해하죠. 실제로 비행기가 터지기도 했고."

청화에 대한 대중의 인식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뉘었다.

그 첫번째. 석하랑의 뒤를 이은 아이돌.

"세상 사람들이 알아야 해. 뭐? 인형같은 외모? 60억분의 1? 속에 어떤 살인마가 들어있는지 알아야한다고."

"그걸 아는 건 여기 있는 사람들밖에 없으니 상관없잖아? 지금 팬클럽도 벌써 백만을 넘겼다더라."

"미친. 아니, 당연한가. 음. 이 몸의 아름다움에 벌써 백만이나 빠지다니. 역시 대단하군."

피닉스는 자신의 어깨를 손으로 두드리며 자화자찬했다. 간부들의 입꼬리가 살짝 꿈틀거렸지만, 피닉스는 눈치채지 못했다.

두 번째, 정의감은 넘치지만 불안한 아이.

"2박3일만에 S급 괴수 둘을 처리하고 왔잖나. 심지어 회담장 뛰쳐 나갈때도 말했지. '괴수들이 날뛰는 걸 볼 수 없다!'였던가. 끙, 미안하네 단장. 구체적으로 기억은 안 나."

"당연히 기억안나지. 그거 영상 별명이 뭔지 아냐? 창염개진-"

덕배는 죽었다.

"그래서 보스가 또 어디 괴수있다고 하면 날뛸까봐 사람들 엄청 조심하고 있다고. 지금 서울에 돌아다니는 외국인들, 다 청화 아가씨한테 제발 우리나라 와주십사 간청하러 온 놈들인 거 알아?"

"더군다나 잡은 괴수는 기르는게 가능하지 않습니까. 그 전문용어로...'사역마'였던 가요? '패밀리어'인지. 아무튼 흑염룡처럼 운용할 수도 있으니, 단장님을 부르는 러브콜에 협회도 죽어나갈 겁니다."

"음. 역시. 이능을 화염술사로 등록 안하고 괴수 조종으로 하기를 잘 했군. 괴수 한 마리씩 분양받고 싶어서 아주 난리구나, 난리야."

피닉스는 자신의 간부로서의 능력에 자화자찬했다. 괴인들은 그 능력 덕분에 되살아났으니 고마움을 느꼈지만, 넷 중 셋은 피닉스에 의해 사망해 괴인이 된 자들이었다.

마지막 세 번째.

아키택트 왈, "난 이승형 파야. 보스가 광고 찍기 싫다고 하는 것도 이승형한테 반할 까봐 그러는 거 아니야?"

궁성 왈, "저는 천자를 지지합니다. 회담장에서 보이던 그 관심, 분명 첫 눈에 반한 겁니다. 예, 확실해요. 천자가 강아지였으면 분명 꼬리가 쉬지도 않고 흔들렸을 겁니다."

하늘성 왈, "나도 천자 쪽일세. 환룡께서 옆에서 보좌하고 있으니 앞으로 종신 집권을 하지 않겠나? 배경도 좋고 얼굴도 반반하니 그림이 좋구만. 허허."

등대 왈, "아무래도 화권쪽이 아닐지. 구로에서부터 시작해서 단장님이 이승형에 대한 과민반응을 생각해보건데, 이건 분명 소위 말하는 츤데레...."

"입 좀 닥치지."

참다 참다 못한 피닉스가 짜증을 부렸다. 다시 부활한 조덕배가 책상에 다리를 턱 올리며 껄렁거렸다.

"이야, 좋으시겠어. 미남들한테 인기 폭발이구만! 야, 어차피 한 번 사는 인생 뭐하러 둘 중에 하나 고르냐. 그냥 둘 다 가져버려. 아니다, 셋인가?"

"셋? 또 있는가?"

"어. 환룡단 밑에 얼굴 반반하게 생긴 놈이 있는데, 환룡보다 더 많이 이야기를 나누더라? '우효'였던가?"

"<봉효>. 전 동창 제독, 현 환룡단 부단주야. 야 조덕배, 다른 사람들 오해하게 하지마."

"이것들이 사람 놀린다고 아주 신났군."

...그 세번째.

러브 스캔들의 주역.

창염의 피닉스 특유의 미형(美形)은 많은 이들의 마음에 불을 지폈으며, 그 미형에 홀린 남자들과 엮으려는 사람들은 차고 넘쳤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나라에 더 신경을 써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웃기지도 않아. 질리는 군."

"하지만 그렇게 말해도 진짜 사랑하게 되면 그럴 거 아냐?"

"...부정은 하지 않으마. 하지만 둘 다, 아니 셋 다 아니다. 나는 더러운 남정네들에게는 이성으로서 관심이 없어."

피닉스가 드디어 커밍아웃을 선언했다. 하지만 딱히 간부들은 신경쓰지 않았다.

"애초에 천가을이나 은 회장님한테 하는 거 보면 누가 모르겠냐?"

"그래도 또 모르잖아요? 어쩌다보니 취향인 남자한테 반해서 홀려버릴지도."

"그만하지. 아무튼 나는 CF 안 찍는다."

피닉스는 한사코 CF를 거부했다. 김지화가 안경을 치켜올리며 피닉스를 추궁했다.

"CF의 상대 배역 때문입니까?"

"당연하지."

"이승형이 상대 배역이라서 그런거죠?"

"물론. 난 죽어도 안 해. 내가 왜 이승형이랑 CF를 찍어야 하나? 그것도."

피닉스가 시안으로 보내진 콘티를 손등으로 툭툭 건드렸다.

"괴수의 위협으로부터 청화를 지키는 히어로, 화권의 등장? 뭐 이리 진부해? 장난하나?"

"진부해도 비주얼로 절반 이상은 먹고 들어가니 충분할 거라고 생각하네만."

"괴수도 흑염룡 아닙니까. 광고 촬영에 아무런 문제도 없죠?"

"단장. 이건 좋은 기회입니다."

김지화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피닉스를 내려다봤다. 말빨 하나로 대기업 면접을 통과한 전설을 가진 김지화의 현혹술이 시작되었다.

"단장님이 약 한 시간만 참으면 정말 모든게 편해집니다. 협회에서는 더이상 S급 코어 문제로 시비를 걸지 않을테며, 광고를 본 사람들은 청화의 가녀린 이미지가 눈에 각인되겠죠. 어디 한국 뿐이겠습니까? U튜브에 올라가면 전세계 사람들이 보게 될 겁니다. 그러면 한국의 국격도 올라갈 뿐더러, 전세계 사람들이 단장님의 존안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한 번? 그럴리 있겠습니까. 하루에도 열 번씩 돌려보며 단장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공익 광고니 페이가 적을 거라고요? 천만의 말씀! 광고 최대의 스폰서가 누가 되겠습니까. 은 회장님이죠? 그럼 은 회장님도 광고 수익을 얻으셔서 단장님에게 고마워할 겁니다. 단장님, 이건 천재일우의 기회입니다!"

김지화의 열변에 간부들이 박수를 쳤다. 피닉스마저도 고개를 끄덕일 정도였다.

"하지만 상대가 이승형이니 하기 싫다."

"단장니이이임?!"

등대는 무너졌다. 좌절한 김지화를 유이신이 등을 두드려 위로했다.

"단장. 광고 한 편으로 얻게 될 이익에 대해서는 그 누구보다도 단장이 알고 있지않나."

"그래 보스. 더이상 협회 놈들도 짜증나게 굴지 않을 거라니까? 아 글쎄, 미친 놈들이 단장이 힘들게 얻어 온 코어 두 개를 나라에 귀속해야 한다며 지랄, 크흠. 생때를 부리잖아. 단장은 계속 그 소리 듣고 싶어?"

"뒤에서 욕하는 놈들이야 유성의 회장님이 처리해주시겠죠. 단장님, 부디 재가해주십시오. 어차피 구체적인 일처리는 등대 님이 하지 않습니까?"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피닉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더더욱 하기 싫다. 조금 귀찮고 말지 뭐. 이승형이랑 얼굴 마주 보는 것보다 그게 더 나아."

피닉스는 심통을 부리며 끝까지 거부 의사를 보였다.

"음.... 아, 그럼 이렇게 하자."

홀로 고뇌에 빠져있던 천가을이 손뼉을 치며 활짝 웃었다.

"어쨌든 '청화'가 광고에 나가면 되는 거잖아?"

"......가을?"

"그럼 내가 변신하면 되겠네."

천가을은 청화로 변신했다. 피닉스의 인간형-청화는 S급의 카테고리 안이었기에, 동급의 경지인 가을은 아주 수월하게 피닉스의 겉모습으로 변하는 데 성공했다.

"어때? 똑같아?"

"마력에서 느껴지는 위화감말고는 거의 비슷하네. 대단하다, 천가을."

"보스는 조금 더 인상 찌푸려야하지 않아? 세상만사 하찮다는 얼굴. 어어, 그래. 딱 그표정이다. 역시 막장 전문 배우라서 그런지 연기 잘 하네. 음."

간부들이 활짝 웃으며 박수를 쳤고, 이제는 피닉스가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가을? 설마 나 대신 광고를 찍을 생각은 아니겠지?"

"그럴 생각인데? 너 하기 싫다며. 그럼 내가 찍을게."

천가을은 청화의 얼굴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라운지에 도플갱어처럼 서로를 마주보는 두 명의 푸른 여인은 눈동자 색만 달랐다.

"나 배우야. 너 나보다 CF 잘 찍을 자신 있어?"

"......."

피닉스는 말리고 싶었지만 말릴 수 없었다. 자신이 하기 싫다고 생때를 부렸지만, 자기 대신 나선 가을을 이제와서 말리면 꼭-

"저거 저거 이승형이랑 찍기 싫다더니, 천가을이 찍는다고 하니까 이승형이랑 혹시 어떻게 잘 될까봐 긴장하는 거 봐라. 어휴, 하여튼 누가 쓰레기 아니랄까봐-"

덕배는 한 마디를 참지 못했다.

피닉스는 덕배를 창문으로 집어던지는 것으로 분을 풀었고, 덕배는 날아가면서도 피닉스를 향해 비웃었다.

그것이 사흘 뒤, 인간형인 청화와 괴인형인 피닉스가 동시에 서울에 나타난 이유.

청화-로 변신한 가을은 집행관 백희아와 함께 협회로 향했고, 피닉스는 코어로 만든 조덕배만 대동한 채 가을이 타고 가는 버스의 뒤를 밟았다.

* * *

협회로 가는 리무진 버스.

백희아는 맞은 편에 앉아 인형처럼 미동도 하지 않는 청화를 보며 조심스레 운을 떼었다.

"어떻게 호위도 없이 여기까지 오실 생각을...?"

"신서울 오는데 호위가 필요하나요?"

청화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눈을 깜빡였다. 그 순진무구한 태도는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 아이 같았고, 백희아는 자신보다 나이가 몇 살 더 많은 언니 뻘 되는 사람이 보이는 태도에 입이 근질거렸다.

"그 군신 님은 어디에?"

"위험하다싶으면 나타날테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아. 이해했습니다."

백희아는 설화령의 활약을 직접 보고난 뒤, SS급 이능력자들에 대한 판단을 상식의 선에서 하기를 그만두었다. 서울에서 북경을 고작 10분만에 주파하는 괴물들이니, 상식인인 백희아의 사고로는 그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여자화장실에 쳐들어온 무뢰배 또한.

까득.

백희아가 이를 깨물었고, 청화는 커피 박스에 든 음료 중에서 캬라멜마끼아토를 들고 한 모금 마셨다.

"어. 그거 제가 마시던...."

"......? 새 거 아니었어요?"

"입만 살짝 댔...크흠."

졸지에 간접 키스를 하게된 백희아가 얼굴을 붉혔다. 그런 쪽으로는 전혀 생각도 없었지만, 순진무구한 소녀를 더럽히는 것 같은 생각에 가슴이 자꾸만 두근거렸다.

"죄송해요."

"아닙니다. 표시 안 해둔 제 잘못이죠."

백희아는 딸기스무디를 들어올렸다. 청화는 마시던 음료를 내려놓고 한참 딸기스무디가 담긴 컵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 참. 딸기 좋아하신다고 들었는데. 죄송합니다."

"아녜요. 가끔은 다른 것도 마시고 그러는 거죠. ...서울에서는 마실 기회가 많이 없었거든요."

"저런."

백희아의 눈이 슬퍼졌다. 그의 머릿속에는 동굴 속에서 힘들게 지하수와 괴수의 피를 받아 마시는 청화의 고충이 훤히 그려졌다.

"서울에서의 삶은 힘들지 않으셨습니까?"

"힘들기는 했는데 적응하면 괜찮아요."

"......최대한 빨리 서울에 많은 지원이 이루어 질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지원이라. ......후우."

청화가 한숨을 내쉬자 백희아는 괜히 신경쓰여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방금 전의 말은 서울의 주민들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일까? 청화가 내 말을 듣고 상처를 입은 건 아닐까? 백희아가 잔 걱정으로 본격적인 삽질을 하기 전, 청화가 화제를 바꾸었다.

"CF 말이에요."

"예."

"정말로 이 콘티대로 촬영하는 건가요?"

청화는 좌석 사이에 놓인 인쇄물을 들어올렸다. 협회의 인장이 찍힌 인쇄물은 청화와 화권이 페어로 찍을 CF의 각본이 자세하게 적혀있었다.

"예. 화권 님의 부탁으로 <마지막 사랑>의 원작자께서 직접 검수하긴 내용입니다."

"......."

청화는 복잡한 얼굴로 인쇄물을 노려봤다. 백희아가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서울에 계셔서 잘 모르셨을텐데...."

"아녜요. 괜찮아요."

청화는 인쇄물의 표지를 넘기며 천천히 대본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집중하는 그의 모습에 백희아는 청화에게 물어보고 싶었던 것들을 쉬이 물어볼 수 없었다.

청화의 이름을 딴 청화단, 그곳의 SS급 빌런 피닉스. 여자화장실에 들어와 백희아를 희롱하며 자신과 야합을 하라고 종용하던 쓰레기같은 악당.

"당신은 그와 무슨 관계인지...?"

"그가 누구예요?"

"...헙."

백희아는 자신도 모르게 제 생각을 입밖으로 내뱉은 걸 깨달았다. 청화는 대본을 잠시 내려놓았다.

"이승형이요?"

"...아뇨, 청화 양께서 알고 계실지 모르겠지만. SS급 빌런 <피닉스>라고 하는 자인데-"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에요."

"......."

백희아는 할 말을 잃었다. 대본을 넘기던 청화가 천장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이려나?"

갑자기 왜 이렇게 버스가 후끈해지는 걸까. 백희아는 손부채로 얼굴을 부치며 열기를 식혔다.

"진짜 히터 틀었나...?"

버스는 이상하리만큼 더웠다. 다시 대본에 집중하기 시작한 청화는 시선조차 돌리지 않았고, 백희아는 어색하고 후덥지근한 분위기를 해소하지 못하고 버스가 협회에 도착할 때 까지 땀을 뻘뻘 흘려야 했다.

청화로 변신한 가을이 협회 건물에 도착한 뒤.

버스 천장 위에 몰래 올라있던 검은 갑주의 괴인이 서울로 날아가는 걸 본 이는 아무도 없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