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1화 〉1부 10장 24
절풍의 펜릴.
주인공 일행에게 가장 먼저 공략당하는 간부로서, 활동이 뜸한 간부 설야의 루살카를 찾아 한국에 왔다가 사고를 당해 힘을 잃고 주인공 일행의 동료가 된다.
스스로를 고양이라고 생각하며, 민트초코라면 사족을 못쓰는 데다가, 말투까지 이상한 펜릴은 여러모로 인상이 강렬한 존재였다.
하지만 그 무엇도 펜릴이 방금 말했던 말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만큼 신경쓰였다.
20년.
분명 펜릴은 20년이라고 했다. 나는 평정을 가장하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래요. 20년만에 보는 군요. 다크 레기온 간부로서 활동은 잘 하고 있나요?"
"설마 그거 확인하려고 여기까지 온 거냥? 이 몸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까지 불태워서 냄새를 풍기면서까지?"
"어디있는지 몰라서. 푸흐흐."
"......."
펜릴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무언가 나를 파헤치려는 눈빛이었다.
"네 담당구역은? 아하. 막상 일어나보니 아메리카를 혼자 점령하기 힘들어서 이 몸의 지원을 받으려고 온 거냥?"
각 간부들은 지구에 떨어지기 전에 각자 맡은 구역이 있었다. 창염의 피닉스는 아메리카를 단독으로 맡았고, 절풍의 펜릴은 유럽을 맡았다.
"아뇨. 당신 뭐하나 싶어서 왔죠."
"이 몸이야 알아서 잘하고 있지. 음, 잘 하고 있고 말고."
"호오. 한 번 노하우를 들어볼까요?"
나는 간부인 척 이야기를 이끌어나갔다. 내가 저자세로 나오자, 펜릴은 미심쩍은 얼굴로 나를 찬찬히 살폈다.
"너한테서 이상한 냄새가 난다냥."
"별 거 아녜요. 인간들 틈바구니에 섞이려다보니 다른 냄새를 덮었을 뿐이에요."
"한 둘이 아닌 것 같은데. 킁킁. 불 냄새도 나고, 물 냄새도 나고, 뭔가 이상한 냄새도 나고. "
역시 늑대가 원형인 괴인인 만큼 후각 하나는 기가 막히다.
"정체를 숨기기 위한 수단이에요. 깨어난 지 얼마 안 돼서."
나는 여기서 더 이야기를 나누었다가는 내 정령으로서의 흔적이 들킬 것 같아, 펜릴의 행보만 우선적으로 확인하고자 했다.
"그래서 지금 당신은 어디서 뭘하고 있죠? 나는 이렇게 이상한 냄새까지 뒤집어쓰고 있는데."
"별 거 없고 20년 동안 고양이인 상태로 살았다냥."
"예?"
이건 무슨 뜬금포없는 말이란 말인가. 내가 당황해서 되묻자, 펜릴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뭘 그렇게 놀라냥. 애초에 우리들보고 잠들지 말고 인간들 틈바구니 속에서 섞여살라고 한 건 너 아니냥."
"......."
분명히 말하지만 나는 그런 기억이 없다. 동시에 이런 상황은 내가 기억하고 있는 원작의 상황과 정확히 배치되는 상황이었다.
"...그랬나요? 미안해요. 정신을 차린지 얼마 안 돼서."
"흐흐, 그럴 것 같았다냥. 다들 자기 직전에 불러모아서 일장연설을 할 때도 횡설수설하던게 미친 년 같았다냥."
"......."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하지만 냉정히 대화를 이어나가야했다. 지금 이 순간 만큼은 다크 레기온의 간부로서 말을 해야했다.
"......미친 년이라니, 말이 너무 심하네요. 타 죽고 싶어요?"
"오호, 역시 피닉스 성깔 안 죽었다냥. 그 지랄맞게 불같은 성정은 여전하네. 끙. 알았다냥. 잠깐 기다려보라냥."
펜릴은 목을 만지작거리며 헛기침을 몇 차례 했다.
"흠흠. ......그래서 이 몸을 찾아온 목적은 무엇이냐."
"갑자기 말투가 왜 그따위에요?"
"영국 왕실묘로 20년을 살다보니."
"영국 왕실묘?"
펜릴은 북유럽 어딘가에서 잠들어있던게 아니라 영국에서 살고 있었던 건가? 이야기를 할 수록 점점 더 그의 배경에 대해서 미궁에 빠지는 느낌이었다.
"그러하외다. 이 몸은 잉글랜드의 왕실 일원으로서, 기사 작위까지 받은 고양이 <캐트시 경>이라 불리우고 있다냥. 20년 고양이 짓을 하다보니 이제는 이 말투가 더 편해졌으니까 이렇게 말하겠다냥."
"......자세히 설명 좀 해주실래요?"
나는 펜릴에게 그가 지금까지 지내온 행적을 요구했다. 하지만 펜릴은 씨익 웃더니 나를 향해 검지를 좌우로 까딱거렸다.
"부탁하는 사람의 태도가 아니다냥. 그리고 설명해주기 싫다냥."
"제가 민트초코를 불태워서요?"
"그것도 한 10%있고, 나머지 90%의 이유가 있다냥."
펜릴의 몸이 바람에 휩싸였다. 펜릴은 괴인이 되어 나를 향해 날카로운 손톱을 겨눴다. 내가 불사조의 형상을 하듯, 펜릴의 검은 갑주는 늑대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네 년에게서 정령의 기운이 느껴지는구나. 그래. 우리 다크 레기온의 간부들이 꼭 죽여야할 정령의 기운이.]
"......착각이겠죠."
[착각? 아둔한 것. 네가 정녕 <창염의 피닉스>라면 이 몸에게 설명을 부탁했을 리가 없잖느냐.]
"그럼요?"
[다짜고짜 멱살부터 잡고 설명하라고 명령했겠지. 뭐? '설명 좀 해주실래요?' 연기를 할 거면 똑바로 하라!]
펜릴이 결계를 해제했다. 나는 재빨리 괴인형으로 몸을 바꾸었다.
[무슨 수로 창염의 피닉스를 흉내낸 건지는 모르겠으나, 감히 위대한 그 분의 아래에 있는 간부의 필두-창염의 피닉스를 사칭한 죄는 매우 크다.]
[과연.]
내가 펜릴을 떠보며 정체를 파악하려고 했듯이, 펜릴 또한 나와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내가 진짜인지 아닌지 가늠한 듯 했다.
[테라의 정령은 다 죽인 줄 알았는데, 어떻게 살았고 또 어떻게 피닉스의 몸을 강탈했는지 모르겠군. 허나, 이 몸의 앞에 나선게 네 년의 패착이다! 이름 모를 정령이여!]
그리고 먼저 약점을 보인 건 나. 나는 원본이 도대체 정령들에게 무슨 짓을 하고 다녔는지 정말로 궁금해졌다.
[예상은 했지만 창염의 피닉스가 그 정도로 개차반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하하하! 본색을 드러내는 구나! 자, 빨리 이 몸의 동료를 돌려주실까!]
[호오.]
같은 간부이자 정령이라 그럴까, 아니면 짐승에 가까운 육감 때문일까. 펜릴은 이 세계에서 만난 그 어떤 히로인들보다 가장 정답에 가까워졌다.
내가 창염의 피닉스의 육체에 깃들었다는 사실을.
[안타까워. 네가 내 정체를 안 이상.]
절대로 다른 이들에게 떠들게 내버려둘 수 없다. 나는 서서히 마력을 끌어올렸다.
[어차피 싸울 각오를 하고 왔으니. 덤벼라, 똥개.]
[건방진 것! 이 몸은!]
펜릴의 결계가 완전히 사라졌다. 어느새 해는 지평선 너머로 사라져 있었고, 밤의 어둠이 서서히 깔리기 시작했다.
[고양이로소이다!]
펜릴이 손톱을 날카롭게 세우며 허공을 달렸다. 나는 펜릴을 향해 손을 펼쳤다.
[넌 늑대야, 멍청아.]
내 손에서 터져나온 푸른 불꽃이 하늘을 덮었다.
* * *
피닉스와 펜릴이 영국 상공에서 권격을 나누는 그 시각.
중국 북경의 정원에 불청객 한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원탁이 갑자기 여기에는 무슨 일이신지."
봉효는 예고도 없이 찾아온 백금발의 여인, 블라디미르 '루살카' 아나스타샤의 방문에 당혹감을 금치 못했다.
"내가 가지 못하는 곳은 없단다."
모택평의 장원은 그 누구도 모르는 곳에 있었고, 그 장소는 원탁이 순간이동하듯 올만한 곳은 아니었다.
"아가, 잔말말고 네 주인을 부르렴. 이미 다 알고 왔단다."
"......주군께서는 지금 주무시고 계십니다만. <운디네> 님. 아무리 원탁이라도 이런-"
"오랜만이야, 루 언니."
장원의 복도 끝에서 회색 머리 소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모택평의 몸에서 빠져나와 실체를 갖춘 환속성 정령, <환룡>은 선녀와도 같은 복색으로 운디네를 맞이했다.
"......."
루살카는 복잡한 얼굴로 환룡을 맞이했다. 환룡 또한 아나스타샤에 깃든 루살카를 보자마자 눈물을 글썽거렸다.
"이름을 그렇게 불러주는 구나."
"돌려 부르는 거지. 그렇잖아? 우리의 이름은.... ...봉효. 단 둘이서 얘기할 게 있어. 잠깐 자리 좀 비켜줄래?"
"......알겠습니다."
봉효는 주변을 물렸다. 소쩍새 우는 소리만이 장원을 가득 메웠고, 두 정령은 탁자를 두고 마주 앉았다.
"보자마자 알 수 있었어. 루 언니가 루 언니인 걸."
"역시 영혼 다루는 만큼 잘 아는 구나. 그래. 나야. ■■. 만나서 반가워, ■■."
"......루 언니도 마찬가지구나. 음. 그래. 그렇구나. 다들 그래서 그렇게 된 거였어. 이제 좀 알겠다."
환룡은 이제서야 이해가간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루살카는 눈을 찌푸리며 환룡을 추궁했다.
"또 혼자서만 알겠다고 그러지 말고. 내가 뭐 때문에 온 건지는 당연히 알고 있겠지?"
"응. 피닉스 때문이잖아. 정확히는 그…."
환룡은 말을 잇기를 머뭇거렸다. 루살카는 자리에서 일어나 환룡의 얼굴을 붙잡으며 눈을 부라렸다.
"당장 말하렴. 아니면 내가 묻는 말에 대답하던가."
루살카는 숨을 고르며 말을 이었다.
"창염의 피닉스, 걔 정말 본인 맞는 거니?"
루살카는 단둥의 평원에서 피닉스와 처음 만났을 때 느꼈던 기시감, 그리고 계속해서 그와의 관계를 통해 느낀 위화감에 따라 생긴 가정을 설명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본인이 아닌 것 같아. 인간과 사랑에 빠져? 아무리 내 딸이 사랑스러워도 걔가 인간을 사랑할 위인은 결코 아니잖아. 그치?"
"그건 공감해. 하지만. 그런데...."
환룡은 귀기어린 루살카의 행동에도 침을 꿀꺽 삼키며 주저하는 모습을 보였다.
"......나 이거 사실대로 말하면 죽을 텐데."
"누구한테?"
환룡은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대답했다.
"......■, 아니 창염한테."
"......???"
"...모르겠다, 에이. 어차피 죽은 목숨인데 설마 죽이기야 하겠어. 설명해줄게."
루살카가 환룡의 말을 이해하기까지는 제법 긴 시간이 필요했다.
* * *
런던 상공에서 시작된 전투의 장소는 점점 남동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도망칠 생각이냐?]
나는 펜릴이 날리는 칼바람을 피하며 뒤를 쫓았다. 나는 날고 펜릴은 달림에도 불구하고, 그 속도는 아주 근소하게 뒤를 쫓을 정도였다.
[이 몸을 잡지도 못하면서 허세는!]
펜릴은 틈만나면 등 뒤로 마력을 방출해 칼바람을 쏘아냈다. 나는 전력을 보존하기 위해 속도를 늦추지 않는 선에서 아슬아슬하게 피해냈다.
카강!
보이지 않는 사각에서 날아온 칼바람이 내 어깨를 스쳤다. 베지는 못하고 튕겨져나갔지만, 갑주에 아주 얇은 흠집을 냈다.
화륵.
불꽃이 피어올르며 갑주의 흠이 메워졌다. 펜릴은 속도는 빨라도 파워는 약한 만큼, 내게 특별한 데미지를 입히지 못하고 그저 남동쪽으로 도망칠 뿐이었다.
[분명 유인인데.]
유인을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생각나는 것은 둘 중 하나.
런던에 피해가 갈까봐 다른 어딘가에서 전투를 하고싶어하거나, 아니면 자신이 마음껏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전장으로 나를 초대하거나. 혹은 둘 다거나.
어느쪽이든 문제는 없다.
[속성에서 카운터를 맞으면서 발악은.]
우리는 어느덧 북해를 지나 유럽 대륙 정중앙을 돌파하고 있었다. 중간중간에 펜릴의 뒤를 쫓아 거의 뒷덜미를 낚아챌 뻔 했지만, 펜릴은 절대 내게는 잡히지 않겠다는 듯 회피기동만큼은 철저히 했다.
[쥐새끼처럼 도망다니는군.]
[도망이 아니라 전략적 철퇴이니라!]
[그럼 어디까지 가는지 보자.]
나는 지구끝까지 쫓아갈 수 있다. 지구를 수십바퀴 돌며 술래잡기를 하려는 게 아니면 어디선가는 분명 멈추게 될 터.
[역시 전장을 바꾸려는 의도였어.]
펜릴은 내리막을 달리듯 아래를 향해 달렸다. 나는 날개를 쭉 펼쳐 활강하듯 그 뒤를 쫓았다. 넓은 물가-바다라고 생각될 호수 한 가운데, 펜릴은 작은 섬에 착지해 괴인형의 몸체까지 풀었다.
[음?]
어째서 괴인형을 해제한 걸까. 펜릴은 의기양양한 얼굴로 팔짱을 낀 채 섬에 착지하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영국 왕실묘가 영국 땅에서 싸우면 안 될 일!"
[어차피 상공에서 싸워서 상관없을 텐데....]
나는 갑주 속에 들어간 마도기어를 조작해 위치를 살폈다. 어찌나 멀리 날아왔는지 무려 4천 km 넘게 날아 도착한 곳은 카스피 해의 한 가운데 섬이었다.
"흐흐, 흐흐흐."
펜릴은 웃으며 나를 도발하고 있었다. 일부러 괴인형을 풀었다는 건 싸우기 전에 뭔가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말이기도 했다.
[......좋아.]
나는 날개를 접고 변신을 해제했다. 펜릴은 활짝 웃으며 손뼉을 쳤다.
"남의 몸을 훔친 녀석 치고 제법 잘 쓰고 있다냥!"
"어떻게 눈치챘는지 얘기해줄 생각은 없죠?"
"그럴 생각이 있으니까 이렇게 몸을 바꾼 거 아니냥."
"......."
허튼 생각을 하고 있으면 그냥 때려눕힌 다음에 정령으로 각성시키면 되리라. 나는 삿된 소리를 하면 바로 펜릴의 뱃속에 창염을 때려박을 각오를 한 뒤, 그의 말을 기다렸다.
"뭐.... 별 건 아니고. 혼돈환룡이랑 설야의 루살카 빼고는 들은 게 있다냥."
"뭘 들었죠?"
"예언."
"예언...?"
오라클의 이능을 말하는 건가 싶었다. 하지만 여기서 더 지체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다.
"좋아요. 딱 그것만 듣고 어디까지 팰 지 고민할게요. 말해봐요."
"[내가 언제 눈을 뜰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내가 아닐 수 있는 것이에요]."
"......."
펜릴은 나를 가리키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누가 말했는 지는 굳이 말할 필요는 없지?"
"......하아. 진작 불러서 얘기할 걸."
언제나 후회는 늦다. 하지만 지금도 늦지는 않다.
"좋아요. 일단 당신 때려눕히고 나중에 취조하러 가야겠네요."
"과연 그럴 수 있으려나? 우리를 상대로."
"......아, 진짜."
나는 괴인형으로 변신해 날개를 펼쳐 상공으로 날아올랐다.
그러나.
역시 함정이었다.
"오호호호호호! 꼴좋다, 멍청한 닭대가리!"
"...땅에 발을 붙이는 게 좋을 거야. 죽고 싶지 않으면."
"자, 내려 오라냥!"
위로는 어둠.
아래로는 땅.
그 사이에는 바람.
[1:3이라.]
아무래도 먼저 깨어난 간부는 나 뿐만이 아닌 모양이다.
[이거 개천광까지 깨어난 거 아닐까 몰라.]
아.
정말로.
'창염 만나면 가만 안 놔둔다. 정말로.'
백희아의 심정이 순간적으로 이해가 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