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5화 〉1부 10장 28
화력은 충분했다.
나는 내가 죽기 직전까지 마력을 긁어모아 작은 태양에 집적시켰고, 그걸 비틀어 폭파시켰다.
세 간부들이 펼친 삼중결계는 부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 덕분에 내가 터뜨린 창염의 태양은 온전히 그 파괴력을 머금고 결계 안에서 세 괴수를 덮쳤다.
펜릴도, 아지다하카도, 히드라도 제 앞에 보호막을 구축해 내 기술을 막으려 했지만, 그저 각자 제 몸을 보호하는데 급급했다.
당연히 내 혼신의 힘을 다한 궁극기는 세 괴수를 쓰러뜨리는데 성공했다.
히드라는 본체의 머리 하나만 남아 벌겋게 익었으며,
펜릴은 대가리만 남은채 재가 된 히드라의 머리 위에 떨어졌고,
아지다하카는 어깨부터 다리까지 파괴되어 바닥에 곧두박질쳤다.
우우웅.
세 괴수를 뒤덮던 테라의 광기가 사그라들었다. 몸에 붙은 푸른 불꽃이 마력을 전부 불태움과 동시에, 세 괴수는 다시 인간형으로 강제로 변했다.
"흐하아아...."
괴수일 때 처럼 몸이 절반 이상 괴사한 상태로 인간형이 되지는 않았으나, 그들은 분명 엄청난 상처를 입고 전신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흐아, 하아, 미친...."
"말할 기력은, 하아, 남아있나보네요."
나 또한 인간형으로 바꾸어 그들을 비웃었다. 너무 많은 마력을 소모해 회복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사람을, 흐냐앙, 이렇게 만신창이로 만들어놓고, 흐억."
"다들 멀쩡, 하잖아요."
우리 넷은 전부 외견상으로는 멀쩡해보였다. 하지만 몸 군데군데가 불투명해져있거나, 의복 아래에 아직 복구가 덜 됐다.
"하아, 하아."
나같은 경우에도 과부하된 코어가 좀처럼 식을 줄을 몰랐다. 숨만 헐떡였을 뿐인데 주변 대기가 데워져 아지랑이가 피어오를 정도였다.
"그러면 마무리를 할까요...."
"자, 잠깐."
히드라가 손을 들어 나를 불러세웠다.
"하나만 물어볼게 있어."
"원래는 물어보기 전에 죽이는데, 같은 간부인 거 생각해서 들어드릴게요. 뭐죠?"
"......도대체 무슨 방법으로 우리를 쓰러뜨린 거지?"
"풋."
나를 이기기위해 냅다 괴수로 폭주해놓고 정작 기억은 없다니. 한순간에 터진 궁극기에 나에 대한 정보를 캐내는게 아닐까 싶었지만, 모처럼 히드라가 궁금해하는 것이니 대답해줬다.
"아무렴 대륙 하나는 통째로 구워버리는 기술인데, 그걸 이 작은 섬 안에서 터뜨렸으니 당연히 파괴력도 강하겠죠?"
퍼져나가야 할 폭발이 결계 안에서만 돌고 돌았으니, 아무리 SS급 괴수들이라고 해도 버틸 수는 없었을 것이다.
내 궁극기를 정면으로 맞설 수 있는 간부는 오직 둘. 설야의 루살카 개천광 카르나.
"미안하지만 너희는 못 막아요. 특히 펜릴까지 끼어있으면."
"하아, 하아. 자꾸 자존심을 건드리는데, 어디 한 번 끝까지 해보자냥."
펜릴이 비틀거리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아지다하카나 히드라 또한 거리를 벌리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또 뭘 하려고요?"
"뭘 하기는. 한 번 더 우리의 본체를 꺼내려는 거지."
"오호호호! 멍청한 년! 당연히 시간벌기라는 걸 몰랐나봐! 아하하하!"
"......."
역시 바로 모가지를 뽑아버렸어야 했나 싶었다. 아지다하카는 툭하면 사람을 빈정 상하게 만드니, 이번에는 머리카락 뿐만 아니라 몸통을 반으로 갈라버려야겠다.
"아무래도 다 죽어봐야 정신을 차릴 모양이네요."
"글쎄. 죽는 건 누가 될까?"
히드라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아지다하카나 펜릴도 품에서 작은 무언가를 꺼냈다. 각자의 마력 색깔로 코팅된 작은 구체였다.
"코어?"
"그럴리가. 역시 너는 가짜구나? 이거의 정체도 모르고."
탓.
세 간부가 내게서 거리를 벌렸다. 나는 직감적으로 무언가 큰일이나겠다 싶어 전방으로 달렸다.
"또 나야?!"
"하나 못 뽑은 게 있어서!"
나는 히드라를 향해 날개를 펼치며 날았다. 땅에서 치솟는 기둥들을 좌우로 피하며 히드라의 지척에 이르렀다. 히드라는 코어를 입에 집어넣었다.
"큭!"
궁극기를 사용하느라 마력이 너무 많이 소모됐다. 아마도 코어를 통해 마력을 회복하려는 건 아닐까. 나는 사지를 묶으려고 달려드는 땅뱀들을 돌파해 히드라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어딜 얄팍한 수를!"
"흐흐흐."
히드라는 웃으며 입을 쩍 벌렸다. 뱀처럼 긴 혀가 턱 아래까지 흘러나왔고, 혀 한가운데에는 코어가 아니라 작고 각진 육방면체가 놓여있었다.
"뭐-"
꿀꺽.
히드라는 그걸 삼켰다.
코어가 아닌.
"2라운드야."
큐브를.
파사사삭!
내 아래에 태풍이 치솟아 나를 하늘 높이 띄웠다. 나는 남은 마력을 짜내 괴인형으로 바꾸어 내구도를 올렸다.
서걱! 서걱!
이전보다 더 강력한 칼바람이 내 갑주를 베어내기 시작했다. 다시 괴수가 펜릴은 허공을 달리며 나를 향해 입을 쩍 벌렸다.
[큭!]
손을 뻗어 불꽃을 방사했지만, 펜릴은 나를 불꽃째 삼켜 물어뜯었다. 어깨와 허벅지에 펜릴의 이빨이 박혔다.
[이런...!]
펜릴은 고개를 도리질치며 아래턱을 좌우로 움직였다. 질긴 고기의 힘줄이라도 끊는 것 처럼, 이빨이 위아래로 부딪히며 그 안에 끼인 것을 잘라내려했다.
나를.
[이것들이!]
나는 내 몸에서 피처럼 새어나오는 불꽃을 매개체삼아 폭발시켰다. 펜릴의 입안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고, 펜릴은 화들짝 놀라 나를 하늘 높이 집어던졌다.
[역시 아직은...!]
마력이 아직 완전히 복구되지 않았다. 잠깐이라도 회복할 시간이 있다면 모를까, 적들은 그 잠깐도 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큐브로 마력을 전부 회복하다니...!]
큐브를 이용할 거라는 건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지만, 설마 괴수형으로 한 번 패배를 하고도 큐브를 이용해 다시 괴수가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부끄럽지도 않느냐?!]
"뭐래! 죽이고 죽는 싸움에서 부끄러울 게 뭐 있어!"
[그건 공감한다!]
아직 변신하지 않은 히드라가 그 말을 끝으로 땅속으로 숨어들었다. 나는 히드라가 땅속에 숨어들기 전에 머리채라도 잡고 끄집어내려 했지만, 내 앞에는 흑요석의 검들이 빼곡히 자리잡고 있었다.
캬아아아아악!!
아지다하카가 다시 본체를 드러내며 검을 뿌렸다. 펜릴도 나를 향해 다시 달려들며 발톱을 할퀴었다.
두 괴수는 히드라가 변신과 회복을 할 때 까지 시간을 벌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칼바람과 흑요석의 검을 피하는데 급급했던 나는 결국 히드라의 변신을 막지 못했다.
[젠장!]
절로 욕지기가 튀어나왔다. 남은 마력을 모두 긁어모아 임시로 보호막을 주변에 두르고, 코어에서 모든 마력을 쥐어짜내 다시 가슴 앞에 집약시켰다.
쿵쿵쿵쿵쿵쿵!!
그 어느때보다도 코어가 박동하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안 그래도 과부하되어있던 코어가 억지로 궁극기를 다시 사용하려고 하니, 과열이 되다 못해 마력이 폭주하기 시작했다.
크아아아아!
땅속에서 숨어있던 히드라가 거대한 머리를 드러내며 입을 쩍 벌렸다. 다시금 나를 집어삼켜 독액에 녹여버릴 요량같았으나, 문제는 지금 나도 내 상태를 가늠할 수 없었다.
"흐, 흐으윽?!"
나는 강제로 괴인형을 해제하여 끓어넘치는 마력을 방출했다. 막대한 열기가 내 몸에서 뿜어져나와 사방을 덮쳤다.
"흐으, 하아, 흐아, 폭주는, 안 ㄷ-"
캬아아악!
내 머리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수직으로 나를 내리찍었다. 칼바람을 한껏 머금은 펜릴의 꼬리가 나를 찍었고, 나는 급히 위로 가드를 올렸다.
서걱, 서걱!
내 팔은 걸레짝처럼 너덜너덜해졌다. 피와 살점이 난자했으나, 펜릴의 공격은 멈출 기미가 없었다.
쿵-!
펜릴은 나를 허공에서 수직으로 내리꽂았다. 나는 두 팔이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너덜너덜해졌지만, 마력의 잔재를 긁어모아 마지막 날개를 펼쳤다.
파바박.
날개를 펼치기를 기다렸다는 듯, 흑요석의 검들이 내 날개를 찔렀다. 날개 사이사이에 박힌 검들은 날개를 잇던 마력의 흐름을 끊었고, 나는 날개를 잃어 그대로 추락했다.
"아 시발."
그 아래는 히드라의 아가리가 있었다. 낙하하기 직전, 나는 깊은 동굴 아래에 늪처럼 끓는 독액의 무덤에 눈을 질끈 감았다.
첨벙.
그 이후로 나는 의식을 잃었다.
* * *
"어머, 얘 진짜 독한 것 좀 봐. 그 상황에서도 안 녹고 버텼네?"
히드라는 바닥에 눕힌 피닉스를 발로 툭툭 건드리며 비웃었다. 괴수 히드라의 몸 속에 빠져 극독으로 들끓는 늪에 빠졌음에도, 피닉스의 몸은 여전히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어, 주, 죽은 건 아니지? 완전히 죽일 생각은 없었다고!"
"살아는 있는데 팔은 완전 병신이 됐다냥."
"흐, 흥! 그러길래 누가 무식하게 팔로 막으래?! 애초에 뭐야!"
아지다하카는 얼굴을 붉히며 빽 소리질렀다.
"진짜보다 더 잘 싸우잖아! 그것도 무대포로!"
"가짜가 진짜보다 잘 싸워서 좋냥? 언제는 뒤에서 불만 깔짝거린다고 싫어하더니."
"누가 싫대?! 나, 나는 그냥 저거 자체가 마음에 안들 뿐이라고!"
"예, 예. 알았으니까 일단 '봉인'부터 하자."
히드라가 중재에 나서자, 아지다하카는 호흡을 고르며 또다른 큐브를 꺼냈다.
"씨이. 큐브 두 개나 날려먹었어. 미친 년 아니야?"
"회복하고 한 번, 변신 풀 때 한 번.... 끙, 성주님은 왜 본체를 꺼내면 강제로 변신이 풀리게 만드셨는지 모르겠다냥."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거지. 성주님께서 직접 내려오셔서 세계를 멸망시키려는 거잖아? 아랫것들이 메인 디쉬를 먹으면 안 돼."
히드라는 나긋나긋하게 말하면서도 발로 피닉스의 가슴을 짓밟고 있었다. 괴인형으로 싸우면서 등의 머리들이 뽑혀나갔던 고통에 대한 소소한 복수를 하는 중이었다.
아지다하카는 쪼그려 앉아 히드라가 뭉겐 옆가슴을 손톱으로 콕콕 찔렀다.
"얘 근데 진짜 강하기는 하네. 어떻게 본체도 안 꺼내고 우리 셋의 본체를 쓰러뜨린 거지?"
"그것도 변신까지 강제로 해제시키고. 뭔가 우리 관리하는 특별한 힘 같은게 있는 거 아니냥?"
"모르지. 그래도 큐브 여섯 개 값이면 싸게 먹힌 거야. 얘 잡는데."
히드라는 발을 떼며 한숨을 내쉬었다. 미리미리 큐브를 모으라고 하지 않았다면, 분명 가짜의 공격에 진짜로 살해당했을지도 몰랐다.
"피닉스 덕분에 살았다냥."
"누가 쟤 덕분에 살았대?! 나는 그저 조금 일찍 일어나서 일을 한 것 뿐이야! 절대 쟤가 그런 말을 해서 먼저 시작한 게 아니라고!"
"그래. 착하지. 응, 아지다하카 열심히 하네."
히드라는 아지다하카를 품에 끌어안고 머리칼을 쓸었다. 큐브를 이용해 신체를 복구하면서 잘려나간 머리칼도 원형을 되찾았다.
"씨이, 내가 이거 기르느라 십몇년을 걸렸는데...."
"그래, 그래. 그러니까 얘 혼내는 건 성주님한테 맡기자. 그럼 됐지?"
"어, 그, 그런데 말이야...."
아지다하카는 다른 두 간부의 눈치를 봤다.
"서, 성주님이 피닉스 몸을 가지고 이상한 짓은 하시지 않으시겠지...?"
"이상한 짓? 뭐가 이상한 짓인데?"
"......몰라! 씨이, 됐어! 그냥 봉인이나 해!"
아지다하카는 씩씩대며 마력을 긁어모았다. 돔처럼 그들을 뒤덮고 있던 어둠의 결계가 줄어들었다. 세 간부의 몸을 스쳐지나간 어둠은 피닉스의 몸을 중심으로 미라처럼 휘감겼다.
"그럼 다음은 나야."
히드라가 땅에 발을 굴러 파괴된 섬의 잔해를 끌어모았다. 카스피 해의 물이 형태를 잃고 흐트러지는 섬의 안으로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럼 가둘게."
끼이이익.
히드라는 땅에서 뽑아낸 진흙을 하나로 뭉쳐 피닉스의 몸에 얇게 펴발랐다. 삽시간에 피닉스는 토기 인형이 되었고, 히드라는 그 위에 시멘트같은 점토를 부어 원기둥을 만들었다.
"봉인을 무슨 이런 스타일로 하냥."
"우리 동네에선 이렇게 수장시키거든? 빨리 하기나 해. 나 집에가서 밥 해야해."
"......하긴, 나도 아침 민초 먹어야한다냥."
펜릴은 히드라가 만든 콘크리트의 원기둥을 중심으로 바람을 일으켰다.
자연풍의 수십, 수백배에 이르는 바람에 의해, 피닉스를 감싼 석관은 오랜 세월 풍화된 폐허의 기둥처럼 변해버렸다.
"엿차."
히드라는 발로 툭 밀어, 석관을 물속으로 밀어버렸다. 석관은 서서히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카스피 해의 깊은 바닥에 이르렀다.
"나중에 꺼낼 때는...."
"내가 운하를 뚫던지, 아니면 루살카 언니를 찾아서 이 호수를 하늘로 들어달라고 하던지."
"미인은 잠꾸러기라고 하지만 너무 오랫동안 자고있다냥."
펜릴, 아지다하카, 히드라.
세 간부는 아직까지 다른 간부들의 행방을 찾고 있었다.
"그럼 성주님 오실 때 까지 얘는 여기다가 가두는 거로 하자."
"감시는?"
"누가 이런 곳에 오겠니? 설령 찾아도 그냥 콘크리트 덩어리일 뿐일텐데. 흐아암. 나는 이제 갈래. 펜릴, 유인하느라 고생했어."
히드라는 허리를 손으로 두드렸다. 펜릴은 볼을 긁적이며 몸을 일으켰다.
"나야말로 갑자기 불러내서 미안했다냥. 혼자서는 도저히 안 될 것 같아서 불러낸 게 역시 답이었다냥."
"흐, 흥! 내가 너 불러낸다고 쫄래쫄래 뛰쳐나오는 한량인 줄 알아? 그냥 가까우니까 나온 거야! 착각하지마!"
아지다하카는 펜릴을 향해 삿대질하며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히드라는 어깨를 으쓱였고, 펜릴도 실실거리며 손을 흔들었다.
"그럼 다음에 봐. 혹시 카르나 찾으면 이야기 해주고."
"알았다냥. 몸 조심해라냥."
"그래. 쉴 거야. 누구 때문에 머리가 다 뽑혀나가서. 정말, 나 탈모 오는 건 아니겠지?"
히드라는 농담까지 하며 여유를 부렸다. 하지만 펜릴은 쓰게 웃으며 인사만 하고 사라졌다.
"......에이, 설마."
히드라는 몸서리를 쳤다.
* * *
설화령, 군신, 가웨인, 운디네, 환룡.
내노라하는 이들이 하나둘 카스피 해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위성사진에는 그 무엇도 보이지 않고, 레이더에는 그 어떤 이능력자나 괴수도 나타나지 않았지만, 그들은 빌런 피닉스의 반응이 사라진 세계 최대의 호수를 향해 날아올랐다.
"사람 걱정하게 하고 있어…!"
샤오린을 제치고 카스피 해에 가장 먼저 도착한 석하랑은 손에 꽉 붙잡고 있던 푸른 카나리아 머리핀을 들어올렸다.
"얌마! 어딨는데?!"
지금까지 아무리 연락을 하려고 해도, 마치 다른 세계로 들어간 듯 연락은 전혀 닿지 않았다. 석하랑은 상공에서 강 전체를 눈으로 훑었으나, 그 무엇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순간.
콰직.
머리핀이 반으로 쪼개졌다.
"어……?"
창염의 피닉스.
그의 반응이 소실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