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7화 〉1부 11장 7
7월 19일.
결전의 날이 밝았다.
관악산에 난 길을 통해 여의도로 들어온 협회의 대표단은 단 한 명.
집행관 백희아.
호위도 없이 관악산을 넘어 온 그는 나를 단독으로 만나기를 원했고, 나 또한 백희아의 대담함을 인정하고 1:1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백희아가 가져온 조건은 내 예상을 뛰어넘는, 상당히 아뜩한 계획이었다.
* * *
"특별사면?"
"예. 일단 당신들은 범죄를 저지른 죄인이니까요."
백희아는 내게 엄청난 양의 리스트를 워치에서 뽑아 건넸다.
"먼저 살인죄."
"광검 님과 소나무 부대 히어로들을 죽였죠. 이유를 막론하고, 일단 사람을 죽인 건 죽인 거예요."
그거야 처음부터 감안했던 일이다. 광검이야 애초에 각오했던 바 였으며, 소나무 부대는 이른바 '쳐죽일 놈들'이라고 욕을 먹고 있는 자들이다.
"좋아요."
나는 내게 씌워진 첫 번째 죄를 달게 받아들였다.
"다음은 재물손괴죄. ......?"
"구로 일대를 전부 부숴버렸잖아요."
"그거 아키택트가 다 복구했는데?"
"그렇다고 부쉈던 일이 사라지는 건 아니죠?"
멀쩡한 건물들을 폭파하여 히어로들의 발목을 잡는 함정으로 썼으니, 당연히 건물주들이 노발대발 하는 건 당연지사.
"우리 구로 복구하는 데 S급 코어 두 개나 들어갔는데요."
"저런. 안타깝네요. 그러길래 왜 구로를 그렇게 때려부셔서."
"......좋아요, 인정."
이미 시작부터 죄질이 불량하니, 여기서 더 늘어나봐야 얼마나 늘어나겠는가. 나는 다음 스크린을 넘겼다.
"......납치감금죄?"
"당신이 납치한 것으로 확실시 되는, 그리고 납치한 것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의 목록이에요."
아래에 작게 딸린 리스트에는 족히 수십 명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서울 수복 작전에서 헬하운드들을 이용해 납치한 히어로들, 여배우 천가을, 협회의 대외홍보팀...으로 위장한 청송 강소연 등."
"유성의 길드원으로 들어간 이능력자들을 말하는 거면 내가 다 풀어줬고, 천가을은 내가 서울에서 지켜주려고 한 거고, 강소연은 당신도 익히 잘 알고 있는 중범죄자잖아요?"
"하지만 본인의 의사를 무시했잖아요? 이미 증언은 확보했어요. 특히 강소연 씨."
영상이 넘어갔다. 백희아는 청송 강소연을 유리벽 앞에 두고 취조를 하고 있었다.
- 서울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소상히 말해보세요.
- ......서울에서, 저는, 흐, 흐윽, 흐아아아앙!!
강소연은 나이에 맞지 않게 대성통곡했다. 화장기가 없으니 제법 순한 얼굴이었지만, 감옥에서 지내면서 수척해졌는지 얼굴에 혈색이 없었다.
"지금 독방 신세에요."
"왜요? 중범죄자라서?"
"아뇨. 자꾸 수감자들이 강소연 아랫배 만지고 도망치는 놀이...가 유행하고 있어서. 본인 희망하에, 관리차 따로 독방에서 식사를 전부 해결하고 있어요."
"아...."
생각해보니 가을이 청송에게 박아둔 문신은 아직 사라지지 않고 있다.
"그거 만질 때마다 절정에 가버리는 문신이었던가...?"
"죄목추가. 성희롱."
"잠깐만요."
나는 스크린을 휙휙 넘겨 뒷쪽에 있던 죄를 찾아냈다.
"이미 성희롱이 있는데요? 이건 어떻게 된 일이죠?"
"......그건 제가 피해자입니다."
백희아는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인상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당신, 자꾸 저를 유혹하려고 들었잖아요! 신서울 여자화장실에서! 그리고 신서울 협회 VIP 숙소에서!"
"......지금도 별반 다르지는 않은데."
나는 주변을 가리켰다. 우리 둘의 1:1 회담은 나의 펜트하우스에서 진행되었다. 우리는 테이블을 놓고 소파에 앉아,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1:1 독대를 원한 건 당신이에요?"
"회의실이 아니라 당신의 방으로 데려온 건 당신이고요."
"여기만큼 방음이 철저한 곳이 없거든요. 그건 제가 확실히 보장합니다."
"그러니까 안에서 있는 일이 밖으로 새어나갈 일이 없다는 거잖아요. 예를 들어."
백희아는 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들었다. 무릎 위에 가지런히 놓은 주먹을 불끈 쥐는게 상당한 부끄러움을 무릎쓰는 듯 했다.
"제, 제가 여기서 강간당해도 아무도 모르는...."
"강간할 생각도 없어요. 발랑까졌네, 완전히."
"예시가 그렇다는 거예요! 그래, 당신 확실히 말하세요!"
탕!
백희아가 플라스틱 컵을 거칠게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안에는 진한 갈색의 보리차가 반 정도 담겨있었다.
"당신이 남자이냐 여자이냐에 따라서 당신에게 죄 하나가 추가 될 테니까!"
"무슨 죄요?"
"여자화장실에 침입한 죄! 여자라면 넘어가지만, 남자라면 당신은 중범죄자에요!"
"당신은 이 얼굴이 남자로 보여요?"
내 시선이 백희아의 가슴에 닿았다. 백희아의 시선도 내 가슴에 닿았다. 백희아는 그게 조금 불편한 지 보리차를 연거푸 들이키며 나를 향해 따졌다.
"당신의 괴인형은 남자같잖아요!"
"아. 그랬죠. ......청화는 주민번호 뒷자리 2인데, 그냥 편하게 생각하시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청화는 여자, 피닉스는 남자라 이거에요?
"애초에 둘 다 선택할 수 있는 입장이니까, 별로 그런 건 신경쓰지 말라는 말이에요."
"......그럼 일단 불분명한 부분은 넘어가도록 하고. 다음."
백희아는 더 추궁하고 싶었지만, 아직 불량한 죄질이 수 없이 남아있었다.
"공공기물 파손죄? 이건 아까 구로 얘기 아니에요?"
"대전 연구 단지를 박살내셨잖아요. 광검 님이랑 싸우면서."
"아, 이거 나는 억울해요. 나는 불법으로 확장된 곳만 뚫었다고요. 연구 단지 반으로 쪼개버린 건 광검이라니까요?"
"죽은 분을 법정에 세울 수는 없는 법이죠."
괴인도 법정에 증인으로 설 수 있을까 묻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광검이 살아있다는 걸 알려주고 또 백희아의 정신을 피폐하게 만드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면 다음. 주거침입, 점유물 이탈 횡령, 무허가 출국, 국가 재산 손괴.... 뭐 이리 많아?"
"다 빌런 피닉스의 행적에 따라서 정리한 거예요. 아마도 알려지지 않은 죄도 상당하신 것 같은데, 그나마 '확실한 것'만 추렸죠."
백희아는 리스트를 하나로 모아 내게로 건넸다. 하지만 내게 아닌 다른 리스트도 한참 남아있었다.
"이건 또 누구 거?"
"당신 밑에 있는 청화단 간부들과 부하들의 것이죠. 당신은 빌런들을 부하로 들이며 힘으로 찍어눌렀지만, 애초에 빌런들은 하나같이 다 전과가 있어서 악당이 된 자들이에요."
등대는 살인. 이건 그가 자신을 감금시켰던 선배에게 직접 복수한 거라고 알고 있다.
하늘성은 내란 선동. 사실상 빌런 연합의 수괴나 마찬가지였으니, 서울에서 신서울을 상대로 하는 내란의 주범이나 마찬가지였다.
아키택트는 문화재 훼손.
"이건 뭐예요? 기물 파손이나 불법증축이라면 모를까."
"서울 무너지기 전부터 제법 유명했던 빌런이에요. 문화재 강제 복구자. 그...건축사가 문화재 터를 신고하지 않고 밀어버리곳에 가서, 자기 능력으로 건물을 무너뜨리고 문화재를 복원시키는 빌런이었죠."
"......그게 빌런인가?"
"여러모로 엮여있었던 사람들이 많으니까요. 그래서 하늘성이랑 아키택트는 공로를 인정받아서 정상참작으로 면죄부를 받았잖아요?"
"그건 그렇죠."
그 다음 흑염룡, 방화.
"얘는 어디다 불질렀대?"
"담배 꽁초 아무렇게나 버렸다가 코어 정유소를 태워버렸어요. 다행히 조기에 진화는 됐지만, 불행히 2천억에 달하는 재산 피해가 발생했죠."
"......음, 사람은 누구나 다 실수를 할 수 있는 법이죠."
"네. 실수라도 죄는 죄니까 벌을 받아야 하지 않겠어요?"
탁.
백희아는 보리차를 전부 마시고 리스트를 모두 치워버렸다.
"당장 간부들이 이렇고, 그 밑에 딸린 당신 조직원들도 하나같이 자잘한 범죄를 저지를 죄인들이에요. 그래서 정부와 협회에서는 이런 빌런들이 활개치는 걸 가만히 내버려 둘 수 없습니다."
"범죄와의 전쟁이라도 치르려고 하시나? 선전포고? 푸흐흐, 그런데 어쩌려고요. 서울 수복 작전 2차 가시나요?"
"아뇨. 굳이 불필요한 소모전을 벌일 이유는 없죠. 그렇죠?"
"......그렇긴 한데, 승부라면서요? 무슨 생각이에요?"
나는 갑자기 불안해졌다. 모처럼 밤을 새가며 계획한 플랜들이 사상누각처럼 무너질까봐 두려워졌다.
"승부는 승부죠. 그것도 전투니까요."
백희아는 그 어느때보다 환하게 웃고 있었다.
"법정 공방으로 싸워봅시다."
"으엑."
이능력이 판을 치는 현대에서 법의 잣대를 들이미는 백희아의 승부는 여러모로 곤란하고 난감했다.
"그럼 지금부터 간략히 제 생각을 말씀드릴게요."
* * *
잠시 뒤.
백희아로부터 '승부'의 전말에 대해 들은 나는 생각에 잠길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소나무 부대의 재림이네요?"
"다르죠. 정부에서는 범죄인에 대해 정당한 형을 집행하고, 협회에서는 빌런을 계도해서 인류 평화를 위해 힘쓸 이능력자로 만들려고 할 뿐이에요."
백희아의 계획은 아주 단순하면서도 복잡했다.
"청화단의 교화…."
"예?"
"아뇨, 그냥 혼잣말이에요. 그나저나 용케도 이런 생각을 하셨네요? 저는 당신이라면 무조건 들이받을 줄 알았는데."
"......명백한 전력차를 두고 싸울 바보는 아녜요."
전력차는 확실히 이쪽이 압도적이다. 조커카드인 광검을 제외하고서라도, '창염의 피닉스'라는 존재 하나 만으로 모든 히어로들의 전력이 꺾일 것이다.
"그러니까 법대로 하자? 법정에 안 나가면?"
"당신만 손해죠."
"......그렇긴 하네요. 굳이 머리를 숙이고 들어오는데 아량을 베풀어볼까요? 푸흐흐."
"......."
내 싸구려 도발에 흥분할 법도 하건만, 백희아는 담담히 입을 닫아버렸다.
결국 백기를 든 사람은 나였다.
"좋아요. 일단 생각은 해볼게요. 생각은."
"생각하실 시간이 있으실까요?"
"무슨 소리에요?"
백희아는 체크메이트를 놓은 체스 기사처럼 확신에 찬 미소를 짓고 있었다.
"청화단의 뒷배-라고 하기는 좀 그런가? 동맹관계에 있는 '그 분'. 여러모로 당신을 돕기 위해 위법한 행위를 하신 적이 많으시더라고요."
"......."
백희아는 본색을 드러내려는 모양이었다. 나 뿐만 아니라, 나와 협업을 하고 있는 이를 대상까지 묶어서 협박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은유하를 걸고.
"유성의 회장님.... 은하수 회장님을 직접 만나고 오는 길이에요."
"......아, 음, 그래, 그렇죠."
하긴 은유하가 그렇게까지 약점을 보일 사람은 아니지. 나는 행여나 은유하가 자신의 정체를 백희아에게까지 드러낼까봐 순간적으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래서 유성의 회장님과 아아아주 이야기가 잘 되었답니다."
"......?"
"어머, 아직 얘기 못 들으셨나봐요?"
백희아는 다리까지 꼬며 여유를 부렸다.
"'고객님'이라고 아주 각별히 부르시던데. 흠흠, 그 분의 전언이에요."
백희아는 헛기침을 하며 노인의 성대모사를 내었다.
"'이제 고객님의 조직은 제 겁니다.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겁니다.'"
백희아는 내게 한 가지 서류를 내밀었다. 은하수 회장-인 척 하는 은유하가 내게 보내는 스타일의 계획서였으며, 언제나 그렇듯 결론부터 세 줄로 요약해서 보내주는 아주 간결한 방식이었다.
"1. <청화단>은 정부의 사법 판결에 의해 5년 5개월 간의 집행유예 기간을 거친다."
"2. <청화단>은 한국 협회에 정식으로 등록된 사냥꾼 조직, 통칭 '헌터 길드'로서 활동한다."
"3. <청화단>으로부터 발생한 금전적 손해는 전부 유성에서 대신 해결하며, 그 대신 유성은 청화단의 벌어들이는 코어에 대한 우선 협상권을 지닌다...?"
"네. 그런 거죠."
백희아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내가 준 반지가 있는 왼손을.
"앞으로 잘 부탁해요. 당신은 이제 제 명령을 듣는 일개 이능력자니까."
"아니, 잠깐만. 이걸 나보고 받아들이라는 겁니까? 나 잠깐 전화를 좀.... 아니, 기다리세요."
나는 창문을 활짝 열어 날개를 펼쳤다. 내 등 뒤로 펼쳐진 불꽃의 날개에 백희아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
"뭐요, 제가 피닉스인 거 밝혔는데 아직도 의심해요?"
"......아뇨. 그, 뭐랄까."
백희아는 어색한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설마 신서울 불태우러 가시는 건 아니시죠...?"
"안 그래요. 문제를 일으킨 당사자랑 조금 '이야기'를 나누려고 하는 거지."
나는 백희아를 내 펜트하우스에 둔 채, 전속력으로 하늘을 날았다.
약 3분.
그 어느때보다도 빠르게 신서울에 도착한 나는 유성의 저택을 습격했다.
"은유하!"
"어서오세요, 고객님."
유성의 진짜 회장, 은유하는 정장까지 갖춰입고 나를 반기고 있었다.
"주변은 다 물렸어요. 평소대로 얘기하셔도 돼요."
"너 도대체 무슨 생각을!"
"어머. 고객님. 저에 대해 잘 알면서 왜 자꾸 싸우려고만 하세요?"
"......?"
나는 은유하의 생각을 읽을 수 없었다. 은유하는 싱글벙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우리 사랑하는 고객님이랑 만나기 전에 벌었던 제 투자금, 거의 대부분 협회에 기부나 후원 방식으로 들어가있거든요? 거의 조 단위의 천문학적인 돈이 투입되었단 말이에요. 협회의 히어로들에게."
"......야, 너 지금?"
"나중에 은퇴하면 제가 쏙쏙 유성의 일원으로 쏙쏙 빼먹으려고 했던 사람들인데, 고객님이랑 트러블 생겨서 상이은퇴하는 건 제가 보고 싶지 않다는 말이에요. 대놓고 싸워서 죽기라도 하면 그 사람들 다 고객님한테 괴인으로 빼앗기는 택이니까. 뭐.... 한 마디로."
은유하가 검지와 엄지를 동그랗게 붙이며 입꼬리를 씩 올렸다.
"제가 침발라놓은 히어로들한테 상회입찰하지 말라는 겁니다. 청화단이든 협회든 제 돈 들어간 조직들끼리 치고박고 하는 건 최대 투자자로서 볼 수 없습니다. 고객님, 저랑 금전적 문제로 트러블이 생기고 싶으세요?"
"......."
돈귀신이 우군에서 벗어나기 일보직전이었다.
나는 돈귀신을 상대로 최악의 조건에서 새로운 협상에 임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