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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염의 피닉스-240화 (240/1,497)

〈 240화 〉1부 11장 10

청화단의 조직 개편 이후, 나는 큐브의 회수를 위해 히카리를 찾았다. 서울에서 잠깐 올라와있던 히카리는 신서울로 내려가기 전 내 호출에 응했고, 나는 큐브의 반환을 요구했다.

"네. 알았어요."

의외로 히카리는 순순히 큐브를 내게 건넸다. 나는 만능의 물건을 너무나도 쉽게 내미는 히카리가 달관한 도인처럼 느껴졌다.

"도대체 왜?"

"연구할 수 있는 부분은 다 연구가 끝났거든요. 세계 멸망 스위치 같은 거, 더 연구해봐야 괜히 사고만 나요. 이런 건 재미가 없어요."

"......뭐라고?"

"어제 다 연구 끝났어요. 다른 큐브가 있으면 교차검증만 하면 되는데, 별로 다를 것 같지는 않네요. 잘 썼어요. 단장님…. 아, 이제는 피닉스 님이라고 했죠?"

나는 내 손에 올려진 큐브가 갑자기 하찮아보였다. 히카리는 하품을 하며 관악으로 떠나려했고, 나는 관악에 마련된 정류장으로 떠나려는 히카리를 불러세웠다.

"내가 데려다줄테니까 잠깐만요. 당신, 큐브를 다 해석한 거예요?"

"해석할 수 있는 곳 까지는? 애초에 이거, 95렙은 되어야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이잖아요."

"S+."

"에이, 용어에 대한 혼용은 사람들 이해하기 쉬운 쪽이 낫다니까요? 절충해서 S급 끝자락에는 닿아야 조금이나마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이라, 저는 쓰고 싶어도 쓸 수가 없네요."

히카리는 입맛을 다시며 나를 노려봤다.

"오히려 저는 피닉스 님한테 흥미가 있는 걸요?"

"예?"

"단장님이 신체를 구성하는 방식…. 엄청 흥미로워요. 그래서 말인데요, 단장님이 제 실험 대상이 되어주셨으면 하는데요."

"도대체 무슨 연구를 하려고요?"

5년 뒤의 미래 기술을 키워드만으로 깨달아 개발해 양산형을 만들고, 고작 한 달 여 시간 만에 외계의 이물인 큐브를 완전해석-본인 말로는-한 천재다.

그런 천재가 내 몸을 가지고 어떤 실험을 하려는 걸까. 나는 절로 입안에 침이 고였다.

"흐흐흐, 별 건 아니고요."

히카리는 음험한 얼굴로 내 손을 잡고 쓰다듬었다.

"마력을 빚어내 이렇게 신체를 구성하는 기술에 대해 알게 된다면 말이에요, 정령 뿐만 아니라 일반 이능력자들도 신체를 변형할 수 있지 않을까요?"

"변형해서 어디에 써먹으려고요?"

"우리 오빠 남자답게 만들어주려고요!"

히카리가 두 팔을 활짝 들어올리며 제 연구 계획을 떠벌리기 시작했다.

"오빠가, 음, 질풍객의 최대 트라우마가 외모거든요? 솔직히 이런 말 하기 싫지만 저보다 예뻐서 엄청 보기 그래요. 사랑하는 오빠기는 한데, 꼭 오빠가 아니라 때때로 언니같은 느낌? 자꾸 어디 가면 자매지간이냐고 놀림받고, 오빠는 또 그것 때문에 빡쳐서 사람 목을 날리려 했던 일이 한 두번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살인귀로 불리다가 원탁에 강제로 들어가게 됐죠."

가웨인이 직접 검으로 때려잡아서 하야테를 원탁에 들인 일화는 전세계 몇몇 여성진들의 장밋빛 망상에 불을 지폈다.

"네! 덕분에 오빠는 고향도 들어오지 못하고, 저는 이지메 당하, …...말 실수예요. 어차피 피닉스 님은 미래에서 다 들으셨겠지만."

"네. 당신한테 직접 들었어요."

히카리도 히로인 중 한 명이었던 만큼, 나는 그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히카리도 이미 자신이 그 후보 중 한 명이라는 걸 눈치채고 있었다.

"역시. 그러면 저 있잖아요."

"네."

"오빠 마초 만들어주기 프로젝트는 성공했나요?"

"......그게 궁금해요?"

히카리답다면 다운 질문이지만, 그래도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반응이라 상당히 기분이 묘했다.

"당신은 미래의 당신이 저랑 무슨 사이였는지 안 궁금해요?"

"? 그걸 왜 궁금해해요. 어디까지나 있을 수도 있는 가능성에 불과한 건데. 확정된 미래라는 건 있을 수 없어요. 전부 사람들이 유기적으로 만들어가는 관계 속에서 가장 가능성이 높은 일이 현실로 다가오게 되는 거죠."

"하지만 세계 멸망은 100% 확실한 건데."

"에이, 모순이다. 피닉스 님은 그 100%가 불확실하다고 믿으시니까 세계 멸망 막으려고 하시는 거잖아요."

"......그건 맞는 말이네요."

15살에 불과한 히카리에게 현답을 들었다. 나는 히카리의 머리를 쓰다듬어줬고, 히카리는 내 손길에 입을 쩍 벌렸다.

"미래의 저는 이런 걸 좋아하던가요?"

"네. 엄청. 무지."

나데포라고 하던가.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일본을 도망쳐나와 한국으로 넘어왔는데 청송 강소연에게 납치당해 연구만 하던 어린 시절이라는 불우한 과거를 겪을 뻔 해서 그런지, 원작의 히카리는 상당히 애정을 갈구하는 타입이었다.

"음...이것도 나쁘지 않네요! 헤헤."

히카리는 내 쓰다듬을 즐기며 방글거렸다.

"히카리. 뭐 원하는 거 있어요? 들어줄게요."

"음, 저…. 오빠 만나게 해주실 수 있어요?"

"질풍객? 지금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아뇨. 승형 오빠. 화권 말이에-아얏!"

나는 나도 모르게 히카리의 정수리를 손톱으로 긁었다.

"미안해요."

빠르게 사과를 한 뒤, 손을 가지런히 모아 히카리의 헝클어진 머리칼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히카리. 제가 그를 싫어하는 걸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을텐데요."

"하지만 피닉스 님, 그 분은 저를 구해주신 분인 걸요? 여러모로 돕고 싶어요, 그 분."

"......하아."

누가 DLC 주인공(추정)이 아니랄까봐, 벌써부터 히로인에게 플래그를 강하게 박아버렸다.

"......진짜 이승형 좋아해요?"

"생명을 구해준 은인으로서 좋아해요. 음, 피닉스 님이 생각하시는 남녀관계라면.... 푸훗."

히카리는 자신이 생각해도 웃긴지 코웃음을 쳤다.

"제가 누구 좋아한다고 하면 그 사람 목이 날아갈 걸요?"

"......하긴, 당신한테 러브레터 보냈다고 손목 자르는 미친 놈이 하나 있죠."

"그 미친 놈이 제 유일한 혈육이며 우리 오빠긴 한데, 워낙 미친 짓이라 가족이라도 실드쳐주고 싶은 생각은 안 드네요. 그러니까 일단 피닉스 님이 좀 도와주시면 안 되요?"

히카리는 간곡한 얼굴로 내 손을 붙잡았다.

"우리 승형 오빠 모가지, 우리 오빠 칼에 안 날아가게."

"......살다살다 이런 부탁은 또 처음인데."

"우리 오빠 성격 아시잖아요. 아무리 제 목숨 구해준 분이라고 해도, 저랑 조금만 썸타면 노발대발하면서 칼 뽑을 사람이라고요."

히메지 하야테를 정상인의 시각으로 바라봐서는 안 된다. 그건 명실상부한 빌런을 강제로 원탁이라는 자리에 앉혀놓은 놈이니.

그 유일한 혈육을 눈앞에 두고 이런 말을 하기에는 그렇지만, 히메지 하야테도 단단히 미친놈이었다.

"그러니까 이승형을 강화시켜달라?"

"꼭 강화까지는 아니더라도 승형 오빠가 목숨 부지할 수 있도록 하려는 거예요. 승형 오빠를 강하게 해주거나, 저희 오빠 성질머리를 죽이거나."

"어떻게요?"

"근육 마초로 만들어주려고요. 이능력자의 신체를 변형시키는 법을 터득해서 말이에요."

......나는 중대한 문제에 봉착했다.

"히카리."

"네."

"예전에 제가 했던 말 기억해요?"

"어떤...거요?"

내 진지한 목소리에 히카리는 잔뜩 긴장해 몸이 굳었다. 하지만 나는 그 긴장을 풀어주기는 커녕, 마력까지 사용하며 히카리를 더욱 압박했다.

"오빠가 오빠일 때 잘 하라는 말."

"......잘 이해가 안 가는데요. 혹시 미래의 제가 무슨 짓을 저질렀나요?"

"네. 당신이 동생이었으니까 살아남았을 만한 천인공노할 짓을."

"......힉."

히카리의 숨이 멎었다. 나는 히카리의 등을 토닥여 정신을 가다듬게 했으나, 히카리는 좀처럼 진정하지 못했다.

"도대체 미래의 저는 무슨 짓을 저지른 거예요...?"

"여러모로 지금보다 더 열악한 환경에서 자랐죠. 그것과는 별개로 미래의 당신도 질풍객을 남자 답게 만들려고 갖은 연구를 했어요. 그러다가 그만...."

나는 미성년자에게 이 얘기를 해야하나 정말 깊은 고민이 되었지만 중간에 멈출 수는 없었다. 히카리를 위해서라도, 질풍객을 위해서라도.

"......연구가 실패해서 오빠가 언니가 되어버렸어요."

"헉."

히카리의 얼굴이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일그러졌다.

"미래의 저는 병신인가요? 어떻게 그런 연구 실패를 일으키죠?"

"......내가 아는 히메지 히카리 욕하지 마요. 그 아이, 당신이 지금까지 겪은 고통보다 수 십배의 고통을 겪었으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런, 하아, 이...."

현재의 히카리가 미래의 히카리 때문에 혼이 난 격이 되어버렸지만, 히카리는 자신이 '실패'했다는 것에 수긍할 수 없는 눈치였다.

"혹시 어떻게 실패했는지 아시나요?"

"아뇨. 하지만 그거 하나는 알아요."

나는 히카리에게 미래의 가능성에 대해 잠깐 언급했다.

* * *

원작.

그러니까 내가 과거 회귀라고 주장하는 5년 뒤의 미래. 히카리는 신관 일행에게 구조를 받아 큐브의 위험성을 만천하에 알린다.

지금의 백나로 호에 승선한 히카리는 연구원으로서 일행의 무기나 슈트를 개조, 강화하며 이능력을 더욱 향상시키는 역할을 맡은 NPC같은 동료였다.

당연히 히로인인 만큼 개인 루트도 있고, 오빠인 질풍객은 유일하게 히메지 히카리의 루트에서만 동료로 영입할 수 있었다.

여자로서.

히메지 하야테는 동생의 개인 루트에서 실험 실패로 인해 성전환 당하게 되고, 결국 주인공의 마수에 의해 자매덮밥을 당하고 남자로 돌아오게 된다.

히메지 하야테(女)라는 별개의 캐릭터를 만들어 달라고 할 정도로 성전환 당한 질풍객은 인기가 많았다. 히카리보다 더.

......오마케 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를 한 번 탐하기는 했으나, 결코 나는 그를 남자로 알고 먹은 게 아니다. 무조건 해야만 하는 것이었다면 루트 자체를 포기했을 것이다.

정말로 다행히 제작진은 '스킵 기능'을 넣었다.

나는 차마 씬을 직접 체험할 엄두를 내지 못했고, 스킵을 누른 뒤 그 회상씬은 영원히 봉인해버렸다.

이후의 일에 대해서는 위키에서 누군가 체험한 내용만 확인했을 뿐이다. 상대가 전직 남자이건 말건, 일단 구멍이 있으니 할 수 있다는 불꽃가능을 외치는 이들은 세상에 정말로 많았다.

- 치사량에 이르는 수면제에 절여진 하야테를 주인공은 히카리의 부탁에 어쩔 수 없이 탐하게 되었고, 도중에 깨어난 하야테는 주인공을 죽여버리고 싶어하지만 여체의 쾌락에 떨어지고 만다.

- ...하지만 결국 하야테를 원래대로 돌리는 실험은 실패하게 되고, 하야테는 히메지 하야테의 이름을 버리고 새로운 이름으로 히카리와 자매로서 살아가게 된다.

그게 질풍객을 동료로 받아들이는 유일한 루트. 직접 체험한 자 만이 질풍객을 동료로 사용 가능한, 나로서는 불가능한 미션이었다.

......창염의 피닉스가 죽고 나서의 각성한 주인공에 의해 하야테(男)으로 살 지, 아니면 히토미(女)로 살 지 결정된다는 이야기까지는 굳이 말할 필요는 없었다.

* * *

"이름은 히메지 히토미라고 해요."

"......이거 뭔가 상당히 느낌이 추잡하고 더러운데요."

"미안해요. 너무 궁금해해서 그만."

'야마토 나데시코 자매 덮밥을 어떻게든 넣고싶어 하던 제작사의 추악한 욕망이지.'

그럴거면 차라리 하야테를 처음부터 여자로 만들면 어땠을까 싶었지만, 어찌됐든 하야테는 그런 비운의 운명을 가진 존재였다.

"그러니까 당신은 섣부르게 신체 변형에 대해 연구하지 마세요. 알겠어요? 오빠를 언니로 만들고 싶지 않으면."

"......아뇨. 그러니까 더욱 연구를 해야겠어요."

"얘는 내 말을 귓등으로 들었나."

왜 요즘들어 히로인이라는 것들은 하나같이 내 말을 안들어처먹을까. 요즘 내가 너무 유하게 대해줬나 스스로 반성하는 사이, 히카리는 자신의 허리에 손을 올리며 자신감 넘치는 포즈를 지었다.

"미래의 제가 실패한 실험을 과거-현재의 제가 성공한다! 그것만큼 저를 뛰어넘는 일은 없죠! 그러니 피닉스 님, 저희 오빠를 언니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 도와주세요!"

"그러니까 당신이 그 연구를 안 하면 된다니까?"

"에이, 그러지 말고~ 연구하다보면 우리 오빠 거기...도 키워줄 수 있는 거잖아요! 네?! 안 그래도 우리 오빠 작다고 은근히, 아니 대놓고 한숨 푹푹 내쉬는 사람인데!"

"그걸 당신이 어떻게 알아요?!"

"온천 혼탕 들어갈 때 봤으니까요!"

"허."

나는 입이 쩍 벌어졌다. 도대체 이 남매의 비현실성은 어디까지 판타지를 향해 날아가려고 하는 것이란 말인가.

"그렇게 오빠 거기를 늘려주고 싶어요?"

"그래야 오빠가 남자로서 자신감을 가지고 살 거 아녜요! 오빠가 비틀린 근원기 거기인데!"

"......하긴. 그렇긴 하지."

여성적인 외모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건 다른 이유가 아니다. 그곳에 자신감이 없어, 남성으로서의 자존감이 바닥을 치기 때문이다.

"오빠한테 여자같다는 소리는 말이에요, 오빠가 자격지심이 낮아서 그렇게 왜곡해서 듣는 말이긴 한데, 솔직히 말하면, 그, 그...."

히카리는 말하기 부끄러운 지 고개를 숙였다.

"거기가 작다고요?"

"꺄아아악?!"

히카리는 비명을 질렀다.

"조심하세요! 오빠는 좀생이라서 그런 거 들으면 다 마음에 담아둔 단 말이에요!"

"......알았어요. 쯧. 아, 아니다."

나는 생각을 바꾸었다.

"이거 잘하면 질풍객을 완전히 아군으로 만들 수 있을지도?"

동료를 영입하는 조건이 무엇인가. 상대가 가장 혹할만한 방법을 제시하는 것 아닌가.

"히카리. 당신 진짜 연구 잘 할 수 있어요?"

"네! 맡겨만 주세요!"

히카리는 그 어느때보다도 열의를 보이고 있었다. 이 연구에 따른 결과가 이승형에게도 영향을 미친다는 게 상당히 고깝기는 했지만, 이 한 몸 희생하여 원탁의 일원을 적이 아닌 아군으로 만들 수 있다면 충분히 값진 희생이었다.

"......하루에 1시간 정도밖에 못 내지 싶은데."

"그 정도면 충분해요! 꺄아악!"

히카리는 손뼉을 치며 방방 뛰었다. 무엇이 그리도 좋을까.

"이제 오빠 나한테 자기 거 작다고 히스테리 안 부린다! 아하하하!"

"......."

큐브는 회수 완료.

나는 일정에 히카리와의 약속 시간을 정한 뒤,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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