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4화 〉1부 11장 14
<그 시각, 미국 팔로마산 천문대.>
언제나 항상 꿈은 세계가 멸망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 세계는 정말 좆같은 곳이야."
오라클은 또다시 폐허가 된 도심을 거닐며 한탄했다. 지난 몇 달간 중요한 의제가 있는 경우를 제외하면 수면제를 물 마시듯 먹으며 꿈을 꿨고, 그 꿈은 오라클에게 있어서 상당히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청화라는 아가씨.... 어휴, 소름."
꿈속에서 청화는 온갖 고통을 겪으며 죽었다. 특히 차마 입에 담기도 힘든 간살이 대부분이었다. 정확히는 남자나 여자, 심지어 괴수나 기계 할 것 없이 청화를 탐하며 그의 정신을 무너뜨렸다.
"솔직히 나같으면 자살했다."
원탁 회의에서 중립적인 위치를 고수하는 오라클이였지만, 이능력자가 아닌 인간 '윌리엄 H 드룸프'로서는 그저 안타까울 뿐이었다.
"한 가지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원탁의 수장, 가웨인은 자신이 피닉스가 초청한 회담을 통해 세계의 전말에 대해 알게된 내용을 오라클과 공유했다.
"청화가 피닉스인 건 차치하고, 꿈의 내용이랑 상당히 배치가 된다는 건데."
꿈의 내용은 대부분 세계가 멸망하는 것들 뿐이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폭주한 피닉스가 세계를 불태우는 일'이 다반사였다.
가령, 아끼는 부하를 잃는다거나.
가령, 사랑을 위해 세계를 지키는 걸 포기한다거나.
"......이거, 완전히 타락한 히어로 아닌가?"
살인자라는 건 부정할 수 없지만, 피닉스의 행보는 오라클의 흥미를 동하게 하는 내용이 많았다. 특히 '꿈'은 비참한 최후를 제외하면, 여러 사람들의 흥미를 끌만한 내용들이 대부분이었다.
"음, 그래. 어떻게 죽는 지는 걷어내고, 실패하는 과정만 기록으로 남기자."
오라클은 방금 자신이 꿨던 꿈을 상기해냈다.
"어.... 그러니까 질풍객을 상대로.... 음...."
피닉스가 미성년자인 히카리를 상대로 수작을 부린다고 오해한 질풍객이 난동을 부리다가 존속살해를 일으키고, 하야테는 분노한 피닉스에 의해 히토미가 되어 청화단의 간부들에게 굴려지는 정신나간 스토리.
"이건 뭐 언급이라도 했다가는 내가 질풍객한테 모가지가 날아가겠군."
오라클이 관측하는 미래 중 거의 6.25% 가량으로 항상 질풍객은 여자가 되는 미래가 있었다. 희안하게 외모는 변하지 않은 채 성기만 쑥 들어가는 일이 잦았지만, 오라클은 하야테를 히토미로 만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쯧. 그냥 은퇴해야겠다. 예언도 안 들어맞고.... 애초에 피닉스 그 놈이 깽판쳐서 이렇게 된 거 아니야."
오라클은 예언이 오류가 나기 시작한 시기를 상기했다. 놀랍게도 피닉스가 활동을 시작하던 시기와 교묘히 맞아떨어졌다.
"미래를 안다는 놈이 무슨 미래를 다 망가뜨리고 있어. 엿이나 먹어라. 젠장."
오라클은 자신의 이능이 쓸모가 없어진 것에 대해 한탄했다. 이래서야 원탁이 아니라 기상관측소로 이직을 해야할지도 모르는 암담한 처지에 놓였다.
"그냥 본업으로 돌아가서 영화나 찍을까."
이능력자 배우들의 도움을 받아, 자신이 직접 관측한 피닉스가 당하는 과정을 영상으로 제작하면 제법 재미가 쏠쏠....
"안 되겠네. 그냥 나만 간직해야지."
영상으로 만들었다가는 분명 불태워지거나 촉수에 범해지거나 모가지가 날아갈 것이다. 오라클은 몸서리를 치며 꿈의 내용을 마저 머릿속에 정리하기 시작했다.
삐빅.
스마트 워치에서 호출이 들어왔다.
"어, 왜."
[왜 그렇게 퉁명스럽니?]
스크린에는 한껏 수척해진 러시아의 원탁 히어로, <운디네> 아나스타샤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라클은 시선조차 돌리지 않고 펜을 끄적였다.
"그야 네가 나한테 먼저 전화할만한 일은 네 불행을 예언해달라고 할 때 밖에 없으니까."
[그럼 좀 알려줄래? 나 진짜 2021년에 죽는지.]
"안 죽더라. 그 피닉스인가 뭔가 하는 애한테 고마워 해. 걔들이랑 네가 중국에서 조우한 이후로, 네가 죽는 미래는 당장은 관측에서 소실되었어."
[그럼 다행이네. 정말....]
아나스타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오라클은 그의 손에 보드카가 더이상 없는 걸 확인하고 떨떠름해졌다.
"언제는 죽으니까 인생무상이라며 술만 마시더니."
[이제는 죽으면 안 될 이유가 생겼으니까.]
"......음, 그러셔?"
오라클은 입이 근질근질했지만 간신히 참았다. 관측한 미래를 천기누설하는 건 그만큼의 리스크가 따랐고, 조금만 실수를 해도 깎여나가는 건 오라클의 수명이었다.
[뭐야. 너 알아?]
"......글쎄다?"
하지만 이능력도 융퉁성은 있는지, 오라클이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하면 수명이 깎이지는 않았다.
"네가 피닉스를 새로운 남편으로 맞아들여서 기존의 남편이랑 2:1로 떡치는 미래같은 건 일어날 수도 있고 아닐수도 있으니까, 나는 모르는 일이지! 하하하!"
[알잖아. 이 변태 꼬맹이.]
아나스타샤의 떨리는 눈동자에는 경멸이 서려있었다. 악몽에 시달리다가 모처럼 즐거운 기분으로 낄낄거리던 오라클은 마음을 가다듬고 본론으로 돌아갔다.
"그래서 나를 부른 이유는 뭐야? 진짜로 미래 예언을 해달라고 부른 거야?"
[응. 그런 셈이란다. 그렇긴 한데, 관측해야할 대상은 내가 아니야.]
"그럼 뭔데?"
[피닉스.]
"......이봐."
오라클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빈정거렸다.
"이제는 네가 왜 자꾸 걔를 감싸고 도는지 이해는 하겠는데, 나도 말할 수 있는 부분이 있고 말할 수 없는 부분이 있어. 너도 알잖아? 네가 죽는 미래가 확정되었던 걸 얘기한 덕분에, 내 수명이 5년이 날아갔다고."
[그건 고마워. 정말로, 진심으로. 그런데 내가 묻고 싶은 건 그게 아니란다.]
"그러면?"
[네가 본 미래에서 피닉스 옆에 다른 누군가가 없었어? 남자든 여자든. 아니면 피닉스가 말하던 간부나 정령이든.]
"......."
오라클은 침묵했다. 침묵할 수 밖에 없었다.
'너무 많아서 누굴 얘기해야하는 건지도 모르겠는데.'
오라클이 본 미래는 비극만 있는 세계는 아니었다. 피닉스 나름 행복을 찾는 세계도 있었고,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는 세계도 있었다.
"그러니까...."
[있는지 없는지만 얘기해주렴. 그런 미래가 있는지 없는지.]
"......어디까지나 가능성의 이야기야. 응? 누구나 다 그렇잖아? 복권을 사고 1등에 당첨될 수 있다는 그런 망상이 현실로 일어나면 미래 예언인 거지. 그렇지?"
오라클은 밑밥을 깔았다.
"......있어."
[그래. 그렇구나....]
아나스타샤는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오라클은 어딘가 안도한 듯한 아나스타샤의 표정에 헛웃음이 나왔다.
"뭐야. 혹시 너 네 남편이라고 하는 놈을 빼앗길까봐 걱정하는 거야?"
[있니?]
"......아니, 그, 뭐시냐, 음...."
[허.]
이미 오라클이 대답을 머뭇거리는 것 만으로도 아나스타샤는 오라클의 속내를 짐작하기에 충분했다.
"......어디까지나 '가능성'이라니까? 막말로 당장 내일 모래 세계가 멸망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야. 0.00001% 확률일지도 모르잖아?"
[그런 미래가 있다는 것 조차 기분이 나쁜데. 그리고 지금 내 상황이랑 맞물려서 몹시 기분이 더럽단다.]
"아."
오라클은 눈살을 찌푸렸다.
"나한테 도와달라고 해도 힘이 없어. 너네나라잖아. 너는 러시아 공주님이고."
[대통령 아드님이 그런 것도 못해주니?]
"뭐래. 차라리 헐리웃 영화 감독으로 입국하는 게 더 낫겠다. 나 홍차 싫어하니까 미리 얘기한다?"
[말이나 못하면. 쯧. 하아....]
아나스타샤는 얼굴까지 두 손으로 덮으며 좌절했다. 그리고 손가락 사이로 오라클을 노려보며 말했다.
[진짜 나 <라스푸틴>이랑 결혼하는 미래가 있니...?]
"글쎄다."
오라클은 천장을 올려다보며 시선을 피했다.
"아직 그런 미래는 관측되지 않았는데, 일단 자고 와도 되냐?"
[부탁할게. 나, 진짜....]
아나스타샤의 목소리에는 물기가 서려있었다.
[지금 남편이랑 또다시 헤어지고 싶지 않단 말이야....]
"알았어. 알았어. 일단 좀 끊어봐. 자고 일어나서 얘기해줄게."
통신이 끊어졌다. 오라클은 다시 침대에 몸을 뉘이며 머리맡의 수면제를 확인했다.
"......내가 진짜 이능력자 아니었으면 수면제 과다복용으로 죽었을 거야."
오라클은 수면제를 한움큼 집어들어 물과 함께 삼켰다. 너무 많은 내성이 쌓여 한 두알로는 잠이 깊게 오지 않았다.
"......<라스푸틴>이라는 놈, 분명 미래에서...."
오히려 피닉스를 꿰뚫던데. 오라클은 예전에 꿨던 꿈을 되새기기 위해, 마력을 천천히 끌어올리며 수면에 빠졌다.
...
...
...
"히토미 꺼저라, 좀!"
잠에서 깨어난 오라클은 핏발이 선 눈으로 다시 수면제를 삼켜야 했다.
* * *
<인도, 바라나시.>
금발의 작은 소녀는 불상을 향해 합장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초라한 행색에 등에 맨 작은 배낭만 아니었다면, 소녀를 어디 여행을 다니는 배낭여행족으로 오해했을 법도 했다.
"꼬마야?"
인상이 좋은 남자가 소녀에게 다가왔다. 소녀는 햇빛에 그을린듯 살짝 까무잡잡한 피부였으나, 성장이 기대가 되는 상당한 미형이었다.
"너 이런 곳 혼자 다니면 위험해요. 빨리 들어가."
남자는 주변을 눈으로 흘기며 소녀에게 주의를 줬다. 주변에는 신문을 보거나 스마트폰을 보는 척 하며, 소녀를 예의주시하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
소녀는 그저 합장을 하며 남자에게 감사를 표했다. 남자 또한 얼떨결에 감사 인사를 했지만, 소녀는 인사만 하고 뒤돌아 불상을 향해 기도할 뿐이었다.
"아니, 그러니까 지금 너 위험한...."
"이 근방에서 가장 위험한 이가 누구일 것 같나."
소녀는 기도하는 자세 그대로 남자에게 물었다.
"무, 무슨 예의가...."
"소녀를 상대로 음심을 가진 무뢰한에게 예의를 굴 이유는 없지."
"......흣."
남자는 대번에 입꼬리를 비틀며 본색을 드러냈다. 남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커터나이프가 조끼 안에서 반짝였다.
"우리 잠깐 안에 가서 얘기 좀 하지 않겠어?"
남자가 가리킨 방향은 인적이 드문 으슥한 골목이었다. 소녀는 주변을 살핀 뒤, 자신이 스스로 나서서 골목을 향해 걸어갔다.
뚜벅. 뚜벅.
소녀의 걸음에는 거침이 없었다. 남자는 주변에 경계를 서고 있던 동료들에게 눈짓을 하며 골목 안쪽을 가리켰다.
"흐흐, 오랜만에 몸보신 좀 하겠는데. 신께 감사를 드려야겠어."
"흐음."
소녀는 자신을 앞뒤로 둘러싼 남자들을 눈으로 살폈다.
"17명?"
"걱정마라. 딱 하루만 데리고 놀아줄게."
"쯧."
소녀는 혀를 차며 배낭을 바닥에 놓았다. 허름한 배낭에서 절그럭 거리는 소리에 남자들은 흠칫 놀랐고, 배낭의 헐거운 틈 사이로 보인 황금빛에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와, 역시! 내 말 맞지?! 이 년 밀수꾼이라니까!"
"이거 어디 잘못 걸린 거 아냐? 다른 조직 심부름꾼이면 어쩌려고 그래?!"
남자들은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소녀의 배낭에서 삐져나온 물건은 척 보기에도 호화로워보이는 사치품이었다.
"누가 얘 건드리자고 했어?!"
"자, 잠깐만! 그냥 장물아비일수도 있잖아! 뭘 쫄고 그래?!"
"그래. 뭘 겁먹고 그러나."
소녀는 주먹을 불끈 말아쥐며 낡은 아날로그 손목시계를 흘겼다.
"한 명당 5초씩. 2분 안에 끝내주지."
"허."
"저 년 이능력자 아닌가?"
소녀의 도발에 남자들이 긴장하기 시작했다. 소녀는 무료한 얼굴로 팔을 양쪽으로 펼쳐 손을 까딱거렸다.
"이능력자면 어떻고 아니면 어떤가. 와라. 기다리는 동안 심심풀이나 좀 하지."
"......이 시건방진게!"
남자들이 소녀의 도발에 걸려들었다. 소녀는 귀찮은 얼굴로 주먹을 말아쥐었다.
"무기를 쓸 가치도 없나. 쯧."
금발의 소녀는 한숨을 내쉬며, 그야말로 '빛'처럼 움직였다.
잠시 뒤.
홀로 골목에서 나온 금발의 소녀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피가 묻은 손목시계만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빨리 와줬으면 좋겠는데...."
소녀는 기대감으로 살포시 웃고 있었다.
"아주 몸이 근질근질하단 말이다...!"
"꺄, 꺄아아악!!"
골목을 지나가려던 여자의 비명이 도심에 울려퍼졌다. 소녀의 몸이 빛이 되어 사라졌다.
이후.
경찰과 이능력자들은 17명의 시체가 골목에 널브러진 참상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 * *
석하랑과 하룻밤을 보낸 이후.
나는 석하랑의 품에서 벗어나 아침밥을 차려주고 새벽같이 빠져나왔다.
큐브 두 개의 확보.
그리고 개천광 카르나의 소재 파악.
원탁은 나에 대한 판단을 일시적으로 보류하였으며, 우선적으로 세계의 위협이 될만한 간부진들을 먼저 처리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러니 내가 가장 먼저 할 일은 단 하나.
"우리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또 부르시는 거예요?"
내 손에 큐브가 세 개 있으니, 히카리로부터 건네받은 큐브를 사용하는 일.
나는 남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강원도 정동진에서 창염을 불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