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8화 〉1부 11장 18
<오전 9시 30분, 청화단 아지트 회의실.>
아침 식사를 하고 평정을 되찾은 우리는 다시 긴급 회의를 재개했다.
공주님 보쌈 계획이 첫 삽을 뜨기도 전에 무너진 이후, 나는 간부들과 머리를 맞대고 광검을 구원할 아이디어를 바랐다.
"일단 우리 불쌍한 SS급 괴인 동지가 아내를 극태자지 서양남에게 NTR 당하지 않도록 지혜를 모아봅시다."
나는 라스푸틴에 대해 간단히 설명했고, 남녀할 것 없이 라스푸틴에게 공포를 느꼈다.
"아니.... 그게 사람이야?"
"그러니까 그...."
"아, 진짜 더러워서 이야기를 못하겠네."
덕배는 아예 자리를 피해버렸다. 내가 불꽃으로 형상화한 라스푸틴의 성기는 홀로그램처럼 테이블 위에서 돌고 있었다.
"저, 잠시만요...."
궁성이 침을 꼴깍 삼키며 홀로그램 성기를 집어들었다. 분기탱천한 라스푸틴의 성기 모형을 자신의 배에 가져다 대는 행동에 간부들의 시선이 불편해졌다.
"히익."
제법 경험이 많은 궁성조차 비명을 질렀다. 라스푸틴의 귀두는 궁성의 배를 훌쩍 지나, 명치에 이를 정도였다.
"보시는 바와 같이 이 대물은 엄청 흉악하답니다. 루살카라도 버티지 못할 거예요."
"거 남사스럽게 원.... 아무리 그래도 루살카가 굴복할까."
"그리고 이게 자궁구를 큥큥하는 순간 상대는 무조건 매혹에 걸려요."
"좋아. 역시 죽여야겠군. 일단 반으로 가르는 것부터 시작하지."
"가르려면 일단 러시아로 가야하지 않습니까. 지금 러시아로 가신다고요?"
등대가 폭주하려는 광검을 막아세웠다. 광검은 나나 석하랑처럼 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질풍객처럼 하늘을 달려 외국으로 갈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검술로서 SS급에 이른 양반이니, 탈 것이 필요했다.
"샤오린 양에게서 적토를 빌려오면...."
"적토 타고 암살하게요? 안 돼요. 걔 유니콘 베이스라 처녀만 태운 다구요."
"걔 처녀였어? 와, 대박이네. 자기 처녀라고 전세계에 광고하고 다니는 거잖아."
"......적토가 유니콘인 건 다들 몰랐을 거예요."
샤오린도 반쯤 처녀기는 했지만, 적토는 아마 샤오린이 처녀를 잃게 되더라도 끝까지 주인을 태우고 하늘을 달릴 것이다.
이제는 주인이 더 빨리 달리게 되었지만.
"광검 당신을 러시아에 보내 줄 수는 있어요. 하지만 당신이 라스푸틴을 죽이면 어떻게 될 것 같아요?"
"아나스타샤가 기뻐하겠지."
"그야 물론 사랑하는 서방님이 오신 것에 기뻐하겠지만, 행여나 정체가 드러난 이후의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그래요? 제가 당신 죽이고 나서 아직까지도 광검 살해자라고 온갖 쌍욕을 들어먹고 있는데."
빌런 <피닉스>가 다크 히어로로서 추앙받지 못하는 이유도 '히어로 살해'에 대한 전과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무작정 죽이는 건 보류. 진정하시고, 어떻게 다른 방법을 찾아봅시다. 다행히 우리가 인도로 가기에는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요."
카르나에 대한 문제도 중요하기는 했지만, 당장 인도로 비행정을 타고 한국을 떠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나는 백희아에게 연락을 하여 인도로 가겠다고 주장했고, 백희아는 약 한 달여만에 청화가 외국에 공식적으로 방문하겠다는 것에 상당히 반색을 했다.
- 국격 상승을 위한 좋은 기회네요. 알겠습니다. 그럼 언제 출발하면 될까요?
- 당장 한 시간 뒤도 가능한가?
- ...백나로 호 띄우는 게 그렇게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이 가능한 게 아녜요. 절차상의 문제도 있고, 최소 이틀은 필요하다고요.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이렇게 막무가내로 부탁하시면 안 돼죠.
- 마음이 급해서 그래. 급해서. 그럼 최대한 빨리 부탁하마.
나는 백희아와의 전화 통화를 끊고, 우리에게 최소 하루 정도의 시간이 있음을 알렸다.
그리고 나는 그 시간을 이 불쌍한 부부를 위해 사용할 예정이다.
"우선 러시아로 들어가는 방법. 정공법으로는 밀입국을 하거나, 유하의 전세기로 입국하는 방법도 있어요."
"뭘 그렇게 답답하게 그러냐. 그냥 까발려. 이 아저씨가 석하랑 앞에 가서 무릎꿇고 미안하다아아아!! 하면 되는 거 아니냐?"
"갑자기 석하랑?"
역시 누가 조덕배 아니랄까봐 광검에게도 하는 말이 개차반이다. 뜬금없이 석하랑에게 사과하러 가라는 덕배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덕배에게로 모였다.
"들어봐, 그냥 다 오픈하면 러시아에서도 이해할 거 아니야! 어? 아나스타샤가 한국에서 남편을 구해왔다고? 어? 그게 SS급 이능력자에 죽은 줄 알았던 광검이라고? 어? 근데 광검 딸이 SS급 이능력자인 설화령이라고? 이러면 러시아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냐?"
덕배가 테이블을 내리치며 소리질렀다.
"와! 아나스타샤가 한국에서 SS급 두 명을 데려왔다! 한국에 계속 있으면 막 SS급들 다 후리고 오겠네! 이러겠지!"
"뭔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고 있어요. 앉아요. 광검이랑 석하랑 만나게 하는게 그리 쉬운 일이었으면 진작 했겠지."
덕배의 말은 과격하기 이를데 없어 실행하기에 애로사항이 많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광검, 당신이 잘했다는 건 아녜요."
"......이해한다."
하지만 언중유골이라고, 조덕배의 말은 광검의 심장을 송곳처럼 후벼팠다. 하지만 덕배는 목이 막히는 듯 가슴을 탕탕 두드렸다.
"이참에 내가 하고 싶은 말 좀 하자. 석하랑한테 왜 말을 못 해! 왜 말을 못하냐고! 네가 내 딸이다! 허윤환이 네 아버지다 왜 말을 못하냐고!"
"어떻게 말하니? 12년을 보육원에 맡겨놓고 지켜보다가 데려왔더니 제자라고 키운 양반인데."
가을까지 신랄한 어조로 덕배의 비난을 거들었다. 광검의 영웅적인 행보와는 반대로, 그는 가정에 대해 소원하기는 커녕 방폐하다시피 살아왔다.
가족이 없다시피 살아온 조덕배.
가족과 사랑을 나누며 살아온 천가을.
전혀 다른 가정환경에서 자란 둘의 다른 시각에 놓인 광검은 그저 이리저리 치일 뿐이었다.
"......백번 욕을 먹어도 할 말이 없다."
사랑하던 아내를 잃고, 세상에 대한 분노와 애증이 자식-석하랑을 향했지만, 광검이 석하랑에게 잘못한 것은 명명백백했다.
"어디보자. 일단 석하랑 보육원에 놓고 온 것부터 시작해서, 12살까지 얼굴 한 번 직접 못 마주치고, 혹시나 유전자 검사 할까봐 검사결과 조작하고, 어, 또...."
"그래. 내가 죽일 놈이다."
"그래서 죽여드렸습니다."
......석하랑 루트 태반이 광검에 대한 석하랑의 뒷담을 듣는 것으로 시작하니까. 오죽하면 과거로 돌아가면 자기 아빠 반 죽여달라고 청하기까지 하더라.
"......음, 사람마다 가정사는 복잡하니 왈가왈부 할 일이 아니지."
"저희도 답답한데 본인이야 오죽하겠습니까."
광검이 너무 침울해하자, 간부들은 미안함에 위로의 말을 건넸다. 아키택트가 광검의 쳐진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했다.
"20년 동안 여자 하나 안 만나고 죽은 아내만 바라보며 살아온 남자 아니냐. 보스, 이 인간 미래에 혹시 새 살림 꾸려?"
"둘이 언제 그렇게 친했어요?"
"술 친구. 나이도 비슷하고 하니 금방 친해졌지."
접점이 없어서 몰랐다. 아키택트는 루살카가 사라진 동안 술로 적막함을 달래던 광검과 대작을 하며 조금 친해졌음을 알렸다.
"...아뇨. 25년 동안 섹스 한 번 도 안하고 자살해요."
"......."
허윤환에 대한 여론이 비난에서 동정으로 흘러들어갔다. 특히 아키택트의 시선이 불쌍한 아이를 바라보는 눈빛으로 변했다. 광검이 고개를 푹 떨구고 한탄했다.
"......그저 미안하군. 나도 노력중이다. 하지만 쉽지 않아. 그나마 내 최선이 하랑이를 12살에 데려오는 거였다."
"그것도 제자로 들였죠."
"미안하다는 말을 저희 말고 설화령께 하시면 되잖습니까."
"그럼 석하랑도 아나스타샤랑 친하게 지내고, 그럼 러시아 사람들도 안심하겠네."
"그걸 했으면 벌써 석하랑은 신이 되었을 걸요. 누가 가족 아니랄까봐 이런 부분은 참 닮아있어요. 어휴."
광검이 내 비난에 눈을 희번득 뜨며 으르렁거렸다.
"......자리만 제대로 깔리면 나도 루살카도 하랑이와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할 수 있어."
다른 간부들의 말은 뼛속깊이 들으면서 왜 내 말에는 이리도 날 선 반응을 보일까. 나는 광검의 말꼬리를 잡았다.
"진짜 해드려요?"
"뭐?"
설마 내가 이런 식으로 받아칠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는지, 광검이 당황해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나 진짜 농담 안하고 당신 석하랑이랑 만나겠다고 하면 루살카 납치해올게요. 빌린 피닉스는 SS급 히어로도 죽이고 다니는데, 결혼식 장의 신부 납치하는 것 정도는 쉽잖아요? 그리고 발표하는 거죠."
나는 소파에서 일어나 하늘을 향해 양 팔을 뻗었다.
"러시아의 국보, 아나스타샤 공주는 이 피닉스가 신부로 삼겠다! 대외적으로는 말이에요."
"대외적으로...말이죠. 피닉스가 청화단에서 벗어난 존재이니 직접적인 항의는 하지 못할 겁니다."
청화단과 다크 레기온의 분리.
여러모로 뒷공작을 하기에는 이점이 많았다.
"물론 블라디미르 가문도 마냥 멍청이는 아니니, 저희와의 관계가 상당히 악화될 건 어쩔 수 없군요."
지화가 안타까움에 혀를 찼다. 지화가 내 말에 자신의 의견을 덧붙인 것으로, 다른 간부들도 하나 둘 제 의견을 밝히기 시작했다.
"그냥 나라 전체에 노발대발 할 수도 있지. 이건 어떤가? 광검 자네가 아내를 납치한 뒤, 전세계를 도망치는 거야."
광검보고 신부를 보쌈해 도망가라는 의견 하나.
"무슨 수를 써서든지 파혼시키면 안 돼? 애초에 정략결혼이잖아. 자주 못 찾아온 건 죄송합니다. 하지만 앞으로 러시아에도 자주 들리겠습니다. 결혼은 없던일로 하겠습니다. 하면 끝 아냐? 결혼만 안 하면 되지."
수단과 방법 가리지 않고 파혼시키자는 의견 하나.
"이렇게 생각해보시면 됩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이 <청화>와 <화권>을 엮어 외국의 마수로부터 청화를 지키려했던 것처럼, 러시아 사람들도 <운디네>와 <라스푸틴>을 결합시켜 다른 곳으로 못 가게 막는 겁니다. 그렇다면 라스푸틴보다 더 좋은 약혼자를 만드는 거죠. 광검 님을 러시아인으로 만드는 겁니다. 빅토르 허 라거나."
21세기에 혼약자 경쟁을 하라는 의견 하나.
"한국 땅에 좀 오래 있기는 했지. 러시아 한 번도 안 돌아갔다며? 설화령이 한 달 정도 미국에서 지낸다고 생각해봐. 나같으면 갑자기 망명 소식 날아올까봐 불안해서 잠 못잤다. 그냥 한국에 집 사라고 해. 내가 건물 멋지게 지어줄게."
한국에 별장을 차려 왔다갔다하라는 의견 하나.
"......하나하나 반박을 했다가는 날이 샐 것 같은데."
광검은 간부들이 내는 의견이 하나같이 켕기는 모양새였다. 묵묵히 간부들의 의견을 듣고 있던 덕배가 테이블을 내리치며 몸을 일으켰다.
"계속 이렇게 지리멸렬하게 얘기할 거면 난 갈란다. 야, 나 좀 잠깐 보자."
덕배가 검지만 까딱거려서 나를 따로 불러내려했다. 간부들은 그 폭거에 깜짝 놀랐지만, 나는 손을 들어 그들을 제지시킨 뒤 몸을 일으켰다.
"좋아요. 저도 잠깐 바람 좀 쐬고 싶었으니까, 10분 휴식."
결국 비생산적인 회의는 중단되었고, 나는 덕배의 독대 제안에 따라 옥상으로 올라왔다.
"뭐 궁금한 거 있어서 그렇죠?"
"그래. 내가 눈치를 그렇게 줘도 네가 버팅기질 않았냐."
사방이 탁 트인 옥상에 나와서 그런지 덕배는 숨을 크게 토해내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자꾸 광검 스스로 석하랑과 마주하도록 유도하는데, 너 말이야. 광검이랑 석하랑이랑 강제로 만나게 하지 않는 거 무슨 이유라도 있냐?"
"네. 역시 부하 2호. 맥을 잘 짚네요."
광검이 듣는 자리에서는 할 수 없는 얘기였다. 나는 그 누구도-특히 광검이 듣지 못하게 결계를 쳤다.
"정령이 사랑으로 각성한다는 건 제가 얘기했죠?"
"그래. 도대체 뭔 사랑인지 감도 안 오지만."
"그게 꼭 이성간에 대한 사랑은 아녜요. 그게 베스트기는 하지만, 간부마다 중요시하는 사랑이 따로 있죠."
나는 불꽃으로 석하랑 일가의 모습을 묘사했다. 각자 서로 떨어져서 사는 3인 가족은 분명 단란하거나 화목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부모님 없이 자란 석하랑이 가장 결핍되어있는 게 뭘까요?"
"애미애비."
"참 말뽄새 하고는."
"어디 부모가 부모다워야 고운 말이 나오지. 지들은 만나서 좋다고 떡치고 다니면서, 자식 보기 무섭다고 벌벌 떨면서 피하는 부모가 어디 부모냐? 내가 욕만 할 수 있었으면 방금 ㅆ소리만 한 일곱 번 했어. 애미애비가 뭐 잘못됐냐?"
"......맞는 말, 맞는 말이기는 한데, 그걸 좀 더 아름답게 표현을 바꿔보도록 하죠."
나는 세 가족의 형상을 움직였다. 마치 가족사진을 찍는듯한 배치로 움직여, 사진을 찍듯 은은한 미소를 짓게 했다.
"가족애."
불꽃으로 형상화된 석하랑의 얼굴은 더없이 활짝 웃고있었다.
"석하랑에게는 가족이 필요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