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1화 〉1부 11장 21
백청영의 작전은 내 마음에 쏙 들었지만, 아쉽게도 다른 이들의 공감대를 형성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었다.
- 미래에는 빌런이지만 지금은 히어로인데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가?
청화단 내에서도 이견이 갈렸고, 백희아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며 의견을 밝히기를 보류했다.
그래서 그 동안 나는 내가 중국에 방문한 세 번째 이유, 큐브의 회수를 위해 옛 호뢰관 터를 찾았다. 나는 봉효와 함께 언덕에서 넓은 평야를 내려다보며 그에게 물었다.
"봉효. 당신은 삼국지 좋아해요?"
"반반입니다."
내 옆에 따라온 백청영의 입에는 쓸쓸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어린 시절에는 좋아했죠. 하지만 커서는 달랐습니다."
"모택평이 삼국지 덕후라서?"
동창의 히어로들은 전부 모택평이 이명을 정했고, 그 대부분이 삼국지 속 명장들의 자(字)를 빌려온 것이었다.
"예. 저는 봉효, 샤오린은 운장이라는 이름을 부여받은 순간, 저희들은 모택평에게 올가미가 씌인 존재가 되어버렸죠."
"그런 것 치고는 모택평 아래에서 제법 열심히 일했던 것 같은데."
"일단은 친아들이었으니까요. 괴인이 되면서 그런 감정도 다 사라졌습니다."
"......."
백청영이 모택평에 대해 지독하리만큼 괴롭히는 이유가 바로 그가 지금 '괴인'이기 때문이었다.
"......모택평이 먼저 잘못했으니 전 뭐라고 안 할게요."
"괜찮습니다. 저도 지금의 제가 썩 나쁘지는 않습니다."
백청영은 환룡이 처음으로 만든 괴인이라 그런지, 자신에 대해 객관적인 시각에서 바라보며 자신의 이상성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이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고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청영은 변한 자신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가 살아가는 삶의 목표는 주군이라고 할 수 있는 환룡, 그리고 이복동생 샤오린.
"혹시 환룡이나 샤오린 상대로 욕정하고 있어요?"
"......"
봉효는 흑우선으로 입을 가렸다. 그건 부끄럽다거나 정곡을 찔린 게 아니라, 내 질문에 욕지기가 튀어나오려던 걸 미연에 방지하려는 행동이었다.
"피닉스 님, 미쳤습니까?"
"그나마 참은게 미쳤다는 거면 원래는 얼마나 더 심한 욕을 하려고 했던 거예요?"
"해도 됩니까?"
나는 백청영에게 귀를 보였고, 백청영은 속삭이듯 내게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을 전했다.
소곤소곤.
"......야."
"소곤소곤."
"장난할래요?"
이 새끼, 진짜 입으로 '소곤소곤'이라고 말했다. 백청영은 낄낄거리며 내게서 물러섰으나, 흑우선을 내리며 표정을 굳혔다.
"제가 어찌 피닉스 님께 험한 말을 하겠습니까. 다만 피닉스 님도 그건 이해하셔야 합니다. 저는 주군과 제 여동생에게 그런 욕정을 품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면요? 솔직히 둘 다 미인이잖아요. 환룡은 모택평 몸에서 나오면 되고, 샤오린도 지금은...."
"피닉스 님."
백청영은 그 어느때보다도 환한 미소를 띄고 있었다.
"저는 주군에게는 충의를, 동생에게는 가족으로서의 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욕정이라고 부르시면 저로서는 상당한 모욕입니다. 저는 결코 두 사람에게 욕정을 품거나 하는 일이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겁니다."
"......미안해요. 내가 말 실수를 했네요."
백청영이 정색하며 나를 혼냈다. 나도 순순히 내 실수를 인정했다.
"저는 오히려 피닉스 님께서 두 사람에게 욕정을 품으셨던게 아닐까 생각됩니다만."
"...'셨던'?"
"예. 그야...."
백청영의 눈은 나를 꿰뚫어보고 있었다.
"당신께는 과거라고 부를 수 있는 저희의 미래. 그곳에서 당신은 그분들과 연인이셨지요?"
"......."
나는 내 진실을 꿰뚫는 백청영의 물음에 뭐라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아마도 모종의 이유로 과거로 돌아오기를 반복하시는 것 같은데.... 제가 그 이유를 감히 추측해봐도 되겠습니까?"
"예. 한 번 말해보세요."
워낙에 진지한 모습에 나는 나도 모르게 백청영의 도전을 허락했다.
"사랑하시는 분을 지키지 못하셔서 돌아온 것이지요? 과거로."
"......푸흐흐."
절로 웃음이 튀어나왔다.
"그 반대예요."
"예?"
나는 내 가슴 위에 손을 올렸다.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과거로 왔다고 생각해주세요."
"......분명 뭔가 숨기시는 게 있는데, 끄응. 알겠습니다. 거기까지 말씀하시면 저도 이이상 캐묻지 않겠습니다."
백청영은 두 손을 들며 시원하게 웃었다.
"흐아! 괴인의 명령이라는 거, 정말 무섭군요. 제 의도와는 다르게 몸이 강제로 움직이는 거."
"......예?"
이건 무슨 귀신 시나락 까먹는 소리인가. 내 의문에 백청영이 헛기침을 하며 입꼬리를 들어올렸다.
"흠흠. 파랑새의 순정이 누구를 향하고 있는지 궁금해하는 분이 제 옆에 두 분 있어서 말입니다. 만약에 제가 제정신이었으면, 이런 건 묻지도 않았을 겁니다?"
백청영의 말에 나는 전말을 파악했다.
"환룡이 명령했어요? 나한테 내 사랑이 누구인지 떠보라고?"
"예."
백청영은 순순히 내 질문에 답했다. 그리고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내게 답했다.
"행여나 당신께서 이 문제에 대해 물어볼 것 같으면, 이 말을 전하라는 환룡님의 명령이 있었습니다."
백청영은 헛기침을 하며 내게 환룡의 전언을 읊었다.
"'나는 네가 누구든 네 곁을 지킬 것이다'...? 피닉스 님. 이거 무슨 말인지."
"허."
절로 웃음이 나왔다. 역시 육체를 버리고 혼백으로서 살아가기를 선택한 자라서 그런지, 창염의 피닉스 속에 있는 '나'의 존재를 눈치챈 모양이었다.
"환룡, 지금 어디있어요?"
"...곧 돌아오실 겁니다. 집무실에서 기다리시죠. 아, 오신 김에."
백청영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흑사갈도 구경하시겠습니까?"
"......."
결코 흥미가 있어서 집무실로 가는 건 아니다. 절대로.
* * *
<오후 5시, 북경 중앙당 괴수관리대책국 국장실.>
"일찍 퇴근하나 싶었더니 왠 업무 덩어리가 나타났네."
환룡은 나를 보자마자 기함하며 도망치려했고, 허공에서 목덜미가 잡혀 내 앞에 집어던져졌다.
"잘했어요, 샤오린."
"별말씀을."
"......내가 만든 괴인인데 왜 너를 더 잘 따르는 거지."
환룡은 자신을 집어던진 샤오린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영체에서 실체를 갖춘 샤오린은 몸에 착 달라붙는 래쉬가드 수영복을 입고 있었고, 보다못한 백청영이 전포를 위에 입혔다.
"또 그러고 갔었느냐."
"어차피 저 볼 수 있는 사람 없는 걸요."
"내가 있잖아, 내가."
"주군은 이해해주시잖습니까. 하지 말라고 하시지도 않으셨으면서."
환룡이 샤오린에게 질색하며 혀를 찼다. 샤오린은 괴인이 되면서 브레이크가 고장났는지, 아무래도 수치심이라는 감정이 마모된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당신."
환룡의 전신을 위아래로 훑었다.
"살 좀 빠졌네요?"
"아. 계속 배불뚝이 중년으로 있으려니 보기 흉해서."
환룡은 셔츠를 살짝 들어올렸다. 배불뚝이 중년 남자는 사라지고, 탄탄한 복근이 자리잡은 근육질의 몸매로 바뀌어 있었다.
"......진짜 남의 몸으로 제 2의 삶을 만끽하시네."
"뭇, 여성을 만족시키려면 체력이 좋아야한다고 해서 말이야. 후후."
환룡이 나를 향해 게슴츠레 눈웃음을 쳤다. 턱살이 전부 빠지고 선이 살아난 그는 마치 80년대 홍콩 느와르 영화에서나 볼법한 주연 배우의 외형이 되어있었다.
"성형했어요?"
"원래 이런 얼굴이었지? 아들 딸 보면 모르겠어."
환룡이 백청영과 샤오린을 가리켰다. 생김새는 둘이 다르지만, 얼핏보면 환룡의 얼굴을 제법 닮아있었다.
"아.... 진짜 모택평이 몸을 막 쓴 거네요."
"젊은 시절부터 그 많은 여자들을 후리고 다닌 이유가 있었지. 얼굴 권력이 있으니 말이야."
긁지 않은 복권의 전형적인 예시같았다. 동시에 이런 얼굴을 그 뒤룩뒤룩한 살에 파묻히게 하고, 얼굴을 이용해 뭇 여러 여성들의 마음을 후리고 다닌 원본에 대해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역시 모택평은 빌런이네요."
"이참에 이름도 아예 개명을 할까 생각중이다. 아예 대놓고 '환룡' 어떠냐."
"......모택평이라는 이름을 계속 사용하기 힘들면 그러셔도 돼요."
"후후. 안 그래도 그럴려던 참이다. 이 이름의 주인은 따로 있거든."
환룡이 자리에서 일어나 국장실 책장의 비밀 장치를 해제했다. 마력으로 이루어진 방음벽이 해제되기가 무섭게, 안에서 열락이 가득한 교성이 터져나왔다.
"하으아앙! 그, 그마안! 더, 더는 못 먹, 크히이익!!"
"......저 자를 계속 흑사갈로 부를 수 없어서 말이야."
환룡은 어깨를 으쓱이며 방음벽을 다시 둘렀다. 문틈 사이로 환룡단의 단원들 사이로 흑전갈 괴인이 한창 흑사갈을 즐기고 있는게 보였지만, 나는 애써 내색하지 않았다. 정기적으로 S급 코어를 수급받는 곳이 어디 흔하지도 않으니. 대신 다른 걸 물었다.
"출입은 영체로?"
"예. 코어를 챙길 때만 문을 열고 들어갔다가 나옵니다."
백청영은 국장실 벽 한켠에 놓인 또다른 금줄을 잡아당겼다. 환기구의 틈이 살짝 열리더니, 벽에 레일처럼 놓인 장식을 타고 검은 구슬 하나가 툭 책상위에 굴러떨어졌다.
"생산된 코어는 이렇게 하는 중입니다. 낳는 양은 하루에 수 십 개인데 비해, S급 코어는 하루에 그리 많이 나오지 않아서 아쉽습니다. 많으면 두 개 정도? 어쩔 때는 아예 나오지 않을 때도 있고요."
"......수 십이라는 말은 나머지가 대부분 D급이나 E급이란 말?"
"예. 하루에도 수 십번을 가는…. 흠흠."
"아. 이해했어요. 그렇구나. 가는 정도에 비례해서 코어가 나오는 구나."
백청영이 라스푸틴의 성기를 찾는 것도 이해가 가는 순간이었다. 흑사갈은 괴수인 만큼 내구도도 S급일테니, 라스푸틴의 것으로 만들어낸 괴인 또한 아주 대단할 것이다.
"좋아요. 알겠습니다. 당신들을 위해 라스푸틴의 것을 잘라오도록 하죠. 대신 백청영을 데리고 갈게요. 적토도 같이."
"예?"
내 말에 샤오린이 더 놀랐다.
"제가 아니라요?"
"예. 아무래도 여자를 데려가기에는 걱정되는 부분이 있어서."
"피닉스 님. 이건 저에 대한 모독입니까? 저는 여성이기 이전에 무인입니다."
"라스푸틴은 여성 상대로 승률 100%인데요."
나는 대충 라스푸틴의 능력에 대해 설명했다. 내 설명이 이어질때마다 샤오린의 표정이 기괴하게 뒤틀렸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남성기에 패배하는 그런 미래가-"
"죄송합니다. 오라버니, 부디 피닉스 님을 잘 부탁드립니다."
샤오린은 대번에 꼬리를 내렸다. 아무리 무인이라고 해도 순수한 전투가 아니라 매혹이라는 사술에 당하는 패배는 용납할 수 없었나보다.
"...피닉스 님, 혹시 남자는 괜찮습니까?"
"네. 다행히 라스푸틴은 그 쪽으로는 취향이 없어서요."
백청영은 진심으로 다행이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나는?"
성별을 취사선택 가능한 환룡이 애매모호하게 웃었다.
"이 몸에 있으면 굴복하지 않고, 여자의 몸에 있으면 굴복하게 되는 건가?"
"어, 음…. 그렇지 않을까요?"
"그럼 너는?"
환룡의 손가락이 나를 가리켰다. 내 하복부를.
"죽을래요?"
"아니. 합리적인 의문이지. 샤오린이 걱정되는 사람이 본인은 생각하지 않나? 너도 일단은 여성의 육체로 살고 있는데, 막말로 큥큥당하면 너도 매혹당할 수 있는 거 아닌가."
"......."
합당한 지적이었다. 나는 환룡의 지적을 충분히 이해했다.
"으음…. 확실히 걸릴수도 있으니 불안하긴 하네요."
"피닉스 님께서 작전을 주도하셔야 한다고는 해도, 이번 작전 만큼은 성별에 제한을 두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 그래요. 괜히 피닉스 님이 라스푸틴 아래에 깔려서 적이라도 됐다가는…."
백청영과 샤오린은 내가 괜히 라스푸틴에게 앙앙거릴까봐 두려운 눈치였다. 둘이 이렇게까지 주의를 주니 나도 괜시리 걱정이 됐다.
"음…."
라스푸틴의 이능이 정령에게도 미치는 지에 대해서는 의문이었다. 그가 한창 빌런으로 활약하던 시기에는 이미 주인공이 동료 남자들을 몰고가서 퇴치했으니까.
이른바 '하렘 브레이커'. 남자를 배제한 채 여자 동료들만 모은 하렘형 플레이어에게 있어서 그야말로 최악의 적이었다.
'여기서 원작 준수를 하게 될 줄이야.'
"좋아요. 사람 하나 살리는 셈 치고, 조만간 라스푸틴 거기 자르러 가죠. 그럼 샤오린, 백청영. 잠깐 자리 좀 비워주실래요?"
"......후후. 아니, 우리가 자리를 비키도록 하지. 둘이서 얘기하기에 좋은 정원이 하나 있거든."
환룡이 자신의 가슴에 손을 올렸다. 잠시 회색의 마력이 들끓기 시작했고, 모택평의 몸에서 환룡이 스멀스멀 기어나왔다.
"참 보기 그런 장면이네요."
"괜찮아. 어차피 나온 동안은 그냥 자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소녀의 실체를 갖춘 환룡은 편안한 말투로 모택평의 몸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환룡이 빠져나온 동안 그는 잠시 눈을 붙인 채 움직이지 않으리라.
"그래서 말하는 정원이 어디예요?"
"내 집."
"당신 집?"
환룡이 모택평의 육체를 가리켰다.
"그래. 내 집."
...나는 환룡의 장원에 초대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