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2화 〉1부 11장 22
잠시 뒤. 환룡의 장원에 도착한 나는 주인인 환룡과 정원을 산책했다. 사람 한 명 없는 정원은 우리 둘이서 따로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충분했고, 마력으로 결계까지 쳐서 대화가 빠져나가는 것을 막았다.
우리 둘은 한동안 말없이 정원을 걷기만했다. 환룡은 이 짧은 시간을 즐기고 싶기라도 한 듯 내 옆에 서서 내가 걷는 속도에 맞춰 걸었고, 나는 걸음걸이가 느린 환룡을 위해 아주 천천히 걸었다.
그렇게 서로 이야기도 없이 걷기만을 30분. 결국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는 네가 누구든 네 곁을 지킬 것이다."
"맞아. 내가 백청영에게 전하라고 했어."
나는 거두절미하고 본론으로 들어갔고, 환룡 또한 괜히 나를 떠보거나 하지 않았다. 우리리 둘은 아름드리 나무의 그늘 아래에서 서로를 마주보며 멈춰섰다.
"무슨 의미지?"
"당신. 이름모를 너 말이야. 네 곁을 지키겠다는 거지. 마치 가을이가 네 옆을 지키는 것 처럼."
"......."
이 세계에 오고나서 처음으로 '나'의 존재를 알아차리는 자가 나타났다. 나는 절로 식은땀이 흘렀고, 속으로 온갖 경우의 수를 생각해야했다. 역시 정령이라서 그런 걸까, 아니면 환룡이 특별해서 그런 걸까. 내 고민이 깊어질수록 환룡은 내 고민을 즐기듯 옅은 미소만 머금고 있을 뿐이었다.
"지금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테스트 하고 있는 거지?"
"그래. 알면 말해라. 어디까지 알고 있지?"
나는 환룡이 먼저 자신의 패를 꺼내놓기를 강요했다. 환룡이 과연 얼마나 알고있느냐에 따라, 내 대응방식도 달라질 것이다. 단순히 창염의 속에 내가 들어온 것이라 생각하면 그에 맞추어 대응하면 되고, 이 세계의 진실에 대해 알게 된다면....
'정령도 괴인으로 만들 수 있을까.'
"지금 엄청 무서운 얼굴이야."
내 속내를 짐작이라도 한 듯, 환룡은 게슴츠레 웃으며 나를 떠보기 시작했다.
"무슨 생각인지는 몰라도 나를 어떻게 하려는 속셈이지?"
"그래. 대답을 하지 않으면 가만히 놔두지 않을 거다."
"그래, 알았어. 얘기해줄게."
협박이나 다름없는 내 강요에도 불구하고, 환룡은 순순히 자신의 패를 꺼내놓았다.
"창염의 피닉스, 화속성 정령 안에 다른 누군가가 깃들었다는 거? 내가 아는 건 그게 다야. 그 이상은 몰라."
"......."
거짓말일까, 아니면 진실일까. 환룡의 표정이나 기색, 흘러나오는 마력에는 그의 말이 거짓이 아닌 진실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하지만 의심하고 또 의심해야했다. 환룡의 눈동자에는 딱딱하게 굳은 내 모습이 보였다.
"그렇게 긴장하지 마. 나는 내 스스로 눈치를 챘을 뿐이야."
"눈치?"
"네가 하는 행동들이 내가 아는 걔랑 다르거든."
환룡은 어깨를 으쓱였다.
"다른 인간들이야 너를 다크 레기온의 간부로서 만났지만, 나는 아니잖아? 죽음으로서 자신을 자각한 루 언니도 그렇고. 한 마디로 얘기해서...."
환룡이 내 가슴을 손가락으로 콕콕 찔렀다. 코어가 타오르고 있는 심장을 향해.
"너 나름대로 막나간다고 행동한 것 같지만, 내가 아는 걔는 그 이상으로 개차반이거든."
"......개차반이라."
도대체 창염은 테라에 있을 때 얼마나 막장 행위를 한 걸까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네게 개차반이라고 욕먹을 정도로 막 나가는 사람은 아니야."
"어머, 편드는 거 봐. 콩깍지라도 씌였어? 세상에. 남의 몸 빼앗아놓고 미안해서 그런가?"
"빼앗다니. 그건...."
설마 내가 빙의했다는 걸 눈치챈 걸까? 환룡을 고개를 가로저었다.
"타인의 몸을 빼앗는 전문가의 눈썰미야. 그렇게 긴장하지 않아도 돼. 이미 '본인'이랑은 얘기가 잘 됐거든."
"뭐?"
이게 무슨 소리지. 나는 깜짝 놀라서 환룡의 어깨를 붙잡았다.
"자세하게 설명해."
"......별건 아니고, 내가 네 몸에 깃들려고 시도했을 뿐이야."
내 시선을 피하던 환룡은 한숨과 함께 충격적인 진실을 꺼냈다. 나는 환룡의 말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나는 환룡이 내 몸에 빙의를 시도했다는 기억이 없었다.
"언제?"
"너 중국에서 떠나기 전 날에. 가을이가 너를 사랑한다고 확신했고, 그럼 네 몸을 빼앗으면 그 사랑이 나한테 오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지. 그래서 시도했어. 그랬는데…."
환룡이 몸서리를 쳤다.
"나는 네 정신 속에 있던 걔를 만났어. 그리고 거기서...엄청 두드려 맞고 제압당했지. 설마 네가 걔가 너한테 그런 감정을 품고 있을 줄은 몰랐어."
"그런 감정?"
"너도 짐작하고 있잖아. 걔가 너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
그렇다면 정말로 다행이지만, 동시에 의문이 들었다. 나는 정동진의 일출 속에서 창염이 내 입술에 남기고 간 온기를 떠올렸다.
"정령적으로 판단하건데, 너는 어떻게 생각하지? 창염이 나와 싱크로하지 않으려는 것에."
"이유는 알고 있지만 말 안할래. 그건 입밖으로 조금도 내지 않기로 약속했거든. 영혼을 걸고."
"......결국 열쇠는 창염이 쥐고있다는 건가."
창염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나는 확신할 수 없었다. 내게 애증으로 대하는 건지, 나를 도와주는 척 하다가 마지막에 나락으로 떨어뜨리려는 건지, 그도 아니면 나를 돕고 싶으나 모종의 이유가 있어 이렇게 몽니를 부리는 건지.
"좋아. 어찌됐든 답은 간단하다. 정령들 다 각성시키고 큐브 다 모으면 얘기해주겠지."
결국 달라지는 건 없었다. 창염도 내가 모든 임무를 마치면 언젠가 자신이 숨겨둔 진실을 얘기해주리라.
"너 되게 속 편하게 생각하네. 걔 짜증안나? 너한테 숨기고 있는게 지금 한 트럭일텐데."
"애초에 기억을 빼앗기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어. 그리고...."
나는 자조하며 내 어깨에 올려진 환룡의 팔을 치웠다.
"그런 거 다 알고 있다. 뭐...어디까지 숨긴 건지는 모르지만."
"참 너희 사이 그렇고 그렇네."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게 무슨 말인지 좀 확실히 말해주지 않겠나."
이미 모두 까발려진 시점인 만큼 나는 본색을 드러냈다.
"설마 누구한테 얘기한 건 아니겠지. 샤오린이나 백청영은 아나? 혹시 다른 누구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가는 가만 두지 않을 거다."
환룡은 내 불안감을 읽었는지, 고개를 가로저으며 내 손을 붙잡았다.
"아직 아무한테도 말 안했고, 어디가서도 얘기 안 해. 샤오린에게도. 그게 걔랑 약속한 거니까. 음, 자꾸 우리 호칭 정리 좀 하지 않을래?"
환룡은 나와 창염을 구분하는 것에 상당히 난감해했다. 나는 먼저 엄지로 나를 가리키고, 검지로 심장을 가리켰다.
"나는 '피닉스'라고 불러라. 그 아이는 '창염'이니."
"창염…. 음, 그렇구나. 이제 이해가 되네. 창염, 창염이라."
내 말에 환룡은 창염이라는 이름을 계속 곱씹었다. 나는 절박한 심정으로 환룡의 어깨를 흔들었다.
"좀 혼자서 아는 척 하지 말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얘기하지 않겠어? 말할 수 있는 부분이라도 좋다."
"안 돼. 그랬다가는 나 죽어. 너도 걔, 그러니까 창염 성깔 알잖아."
"설마 그정도로 죽이기야 하겠냐. 절대로-"
"절대로 죽여. 걔는."
환룡이 내 말을 끊었다. 고개를 숙인 환룡은 몸을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었다.
"지금도 그 속에서 나한테 얘기하고 있을 걸? 거기서 한 마디라도 뻥긋하면 당장 뛰쳐나가서 나를 태워버리겠다고."
"허."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럴 리가 없어. 창염은 그 정도로 막나가지 않아."
"너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구나. 됐어. 알고싶으면 나중에 본인한테 직접 물어봐. 나는 여기서 더 말하지 못해. 너한테는."
환룡이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내 손을 잡았다.
"하지만...."
저벅, 저벅.
환룡이 내게 다가와 나를 끌어안았다. 우리의 키는 서로 엇비슷했고, 환룡과 나는 주먹 하나 들어갈 정도로 얼굴이 가까워졌다.
"선전포고 정도는 가능하지. 후후, 그래. 네 안에 있는 그 '창염'이라는 년 한테는 말이야."
나는 나도 모르게 환룡의 등을 손톱으로 찔렀다. 등의 살갗을 파고드는 손톱은 내 의지가 아니었다. 환룡은 그 고통을 감내하고 내 얼굴을 쓰다듬으며 요염히 웃었다.
"자기 장난감 뺏길까봐 겁나? 그럼 나와. 나와서 얘기해. 왜, 또 죽인다고 협박하려고? 이젠 안 도망쳐. 아니면 내가 또 들어가 봐?"
"너 도대체 무슨?"
환룡은 내 두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탁한 눈동자에 회색 마력이 들끓기 시작했고, 환룡은 내 육체에 빙의를 시도했다.
"거기 꼼짝말고 있어, ■."
내 의식은 끊어졌다.
***
"......어라."
정신을 차리니 처음보는 천장이다. 나는 벤치의 의자에 누워있는 상태로 의식을 차렸다.
"정신이 들어?"
환룡은 나를 내려다보며 살포시 미소지었다. 그의 머리칼은 왠지 모르게 상당히 헝클어져 있었다. 옷도 군데군데 찢어져 있었고, 몸에는 상처가 가득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홈그라운드 들어가서 싸웠다가 졌어. 대단하더라. 미친 년 진짜."
"욕하지 마라."
"......."
환룡은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나를 내려다봤다. 환룡이 다쳤건 말건, 나는 목소리에 힘을 담아 다시금 환룡에게 확고히 말했다.
"창염 욕하지 마라."
"......예, 예. 알겠습니다, '피닉스' 씨. 당신 사랑하시는 분 욕 안할게요. 됐어?"
"그래."
사과하라고는 하지 못했다. 내가 생각해봐도 창염은 그런 존재가 맞으니까. 그래서 나는 화제를 돌렸다. 이이상 얘기를 하면 창염에게만 불리한 얘기가 계속될까봐.
"그래서 남의 머릿속에서 둘이 무슨 얘기를 한 거지?"
"그냥 네 얘기. 별로 오래도 얘기 안 했어. 봐봐. 너 잠든 지 10분밖에 안 지났는 걸."
환룡은 눈으로 내 마도기어를 가리켰다. 실제로 내가 의식을 잃은지 고작 10분도 채 지나지 않았다.
"10분이면 둘이서 충분히 얘기했을텐데."
"응. 창염이 일방적으로 떠들었지만."
환룡은 귀가 아프다는 듯 손으로 귀를 손바닥으로 막았다가 뗐다.
"들어가자마자 나를 패대기치고 깔고 앉은 다음에 입을 막고, 자기 하고 싶은 말만 죽어라 하던데 멈추지를 않더라."
"......."
상상이 가지 않았다. 아무리 심정적으로 싫다고는 해도 같은 정령끼리 이렇게까지 사람을 반죽음으로 만들 수 있을까 싶었다.
"어때? 걔가 나쁘지?"
"아니, 창염을 화나게 만든 네가 나쁘다."
"이 상황에서 창염 편을 드는 네가 제일 나쁘네. 그러면."
환룡은 짜증이 난다는 듯 자신의 허벅지를 튕겼고, 나는 번쩍 몸을 일으켜 환룡과 마주앉았다.
"그래. 나 쓰레기 맞으니까 뭣 좀 물어보자."
"이제 숨기지도 않네?"
"다 알면서 뭘."
창염이 어디까지 얘기했는가 궁금하기는 했지만, 창염도 이 세계가 '게임'이었다는 걸 굳이 얘기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궁금한 게 많은 것 같은데 하나씩 차근차근 물어봐. 내가 답할 수 있는 건 답해줄게."
...막상 판이 깔리니 묻고 싶은게 너무 많아서 머리가 혼란스럽다. 안 그래도 카르나와 루살카에 엮인 문제로 머리가 지끈거렸는데, 환룡과 창염까지 나서서 나를 괴롭혀대니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창염 왈, '아무렴 16명에 저까지 공략하려고 했으면서 편하게 사는게 될 줄 알았어요?'라고 하더라. …피닉스 씨, 참 대단해."
"이건 수치사 시키려는 속셈이군."
"응. 맞아. 아주 부끄러운 짓을 하셨더라고. 나한테."
환룡은 자신의 관자놀이를 두드렸다.
"......봤냐?"
"응. 하나부터 끝까지. 세상에, 미래의 내가 그런 상태로 너를 유혹하다니. 말도 안 돼 미쳤다고."
"......."
"너도 참 대단하다. 미래에서는 나한테 그렇게 사랑한다고 외쳐놓고 이제는 창염 좋다고 갈아타고 말이야. 아, 너한테는 내가 과거의 여자려나? 거기에 가을이도 그렇고 다른 여자들도 그렇고-"
나는 손을 뻗어 환룡의 입을 막았다.
"부끄러우니까 그만하지."
"내가 더 부끄럽거든? 흠흠. 그래도 나는 내 것만 보고 왔어. 창염이 다른 건 안 보여주더라."
"아."
얘 내가 주인공 상태로 자기랑 사랑을 나누는 걸 봐버렸구나. 나는 절로 부끄러워서 뭐라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괴인형을 굳이 남성체로 한 이유가 있었네. 후후, 아. 나는 어느쪽이든 좋아. 네가 그 육체를 계속 쓰든, 아니면 남성으로 바꾸든. 나는 너 따라서 맞춰줄게."
"......이건 또 뭔 소리야?"
"직설적으로 말해줘?"
환룡이 내 귓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내가 네 마음 빼앗아보겠다는 거야. 그리고 앞으로 영원히 내 곁에서 살 수 있게 하겠다는 거지. 영원불멸의 반려로."
"......창염은 뭐라고 말하더냐."
"......자기 거 뺏을 수 있으면 빼앗아보라던데?"
"그런가."
나는 환룡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튕겼다.
"번지수 틀렸으니까 다른 사람 찾아봐라."
"씨이, 아프잖아! 너 싱크로 하고 싶다며! 내가 해줄게! 일루 와!"
환룡은 얼굴을 붉히며 두 팔을 벌렸다. 내가 저 품에 안기기만 하면, 나는 창염의 정수를 손에 넣고 환룡과 아주 쉬이 싱크로를 하게 될 것이다.
나와의 싱크로를 거부하는 창염과 당장에라도 자신의 모든 것을 넘겨주려는 환룡.
내 선택은 당연히, 한 명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