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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염의 피닉스-267화 (267/1,497)

〈 267화 〉1부 12장 13

응접실, 다리, 별궁.

세 군데서 난리나 난 그 시각, 수보르프의 집무실에서 대기하고 있던 다섯 명의 특사단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초조하게 시간만 흐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경보가 끝날 기미가 보이질 않는데."

"이거…. 위험한 상황 아닌가?"

우사와 풍백은 시시각각으로 들어오는 정보들을 취합하며 눈짓을 주고 받았다. 협회를 통해 들어온 정보는 그저 별궁에 정체불명의 괴한이 나타나 '녹아내렸다'는 정도였으나, 둘은 이미 그러한 특성을 지닌 존재의 정체에 대해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이보쇼."

다리를 떨며 사용인들의 눈치를 보는 우사는 좀처럼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

"혹시 아는 거 있수?"

"자네들이라면 뭔가 들은 게 있을 것 같은데…."

풍백이 스틱을 두드리며 청화단의 간부들을 눈으로 흘겼다. 미약하게 마력까지 실린 목소리는 간부들을 추궁하고 있었다.

"조금 의심스러운데."

"꿍꿍이가 느껴져. 아주 뜨거운 꿍꿍이가."

두 히어로는 이 경보를 울린 범인은 청화단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 추궁에 세 간부들은 당연히 발뺌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글쎄. 적어도 나는 전달받은 것이 없어서."

"나도 마찬가지야. 하늘성이 같이 와달라고 해서 왔지."

"저는 방송찍으러 왔습니다만."

전혀 말도 안 되는 변명을 하는 김지화에게 넷의 시선이 모였다. 카메라맨을 자처하는 그는 특사단이라고 하기에는 가장 이질적인 존재였다.

"자네는 분명 청화단의 단장이었지…?"

"지금은 카메라맨 겸 하늘성을 보좌하는 이로서 따라왔을 뿐입니다. 굳이 말씀드리자면 하늘성과 함께 가서 블라디미르 가문을 잘 다독여라는 임무를 가지고 왔습니다만…."

등대는 그럴듯한 변명으로 상황을 모면했다. 두 히어로는 긴가민가하면서도 의심의 끈을 놓지 않았고, 그들의 말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판명해줄 사람에게로 눈이 돌아갔다.

"화권은 뭐하는 거야? 우리 몰래 출동했나?"

"그럼 뭔가 기척이라도 있었겠지 않겠느냐. 아까부터 계속 조용하기만 하구만. ……."

풍백이 슬쩍 자리에서 일어났다. 특사단의 뒤에 서있던 사용인들이 한껏 경계하며 그를 막아섰다.

"무슨 짓을 하시려는 겁니까?"

"예끼 이 사람들아. 노인네 소피도 못 보러가나?"

"상황이 상황인지라 이해해주십시오. 이능력자시니 그 정도는 참으실 수 있지 않으십니까…."

풍백을 막아서는 집사장도 자신의 말이 억지에 가깝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리에서 일어나던 풍백은 금방이라도 무언가 저지를 것 같은 얼굴이었고, 집사장은 괜히 이들까지 날뛰는 게 아닐까 두려웠다.

"이 친구야. 내 나이가 환갑을 넘겼어. 이능력자라도 세월은 이기지 못 해. 자네 요실금 앓아봤는가? 자네는 내가 원수 각하의 집무실에 지리는 꼴을 보고 싶은 겐가?"

"......실례했습니다."

무언가를 저지르는 게 아니라 지리는 얼굴이었던 모양이다. 집사장은 벽에 서있던 젊은 집사를 풍백의 뒤에 붙였고, 풍백은 고개를 끄덕이며 성큼성큼 걸어갔다.

응접실을 향해.

"...! 화장실은 그 쪽이-"

벌컥! 풍백은 다짜고짜 응접실의 문을 열어젖혔다. 그 순간 우사가 안주머니에서 얇은 지팡이를 꺼내들었고, 하늘성이 전신의 근육을 부풀렸다.

"왜 이렇게 조용하나 싶었더니만!"

풍백이 응접실 한 가운데 있는 검은 직육면체를 향해 스틱을 휘둘렀다. 끈적한 점액같기도 하고 라텍스같기도 한 외형이었으나, 풍백의 공격은 수포로 돌아갔다.

"지금 무슨?!"

"자네는 느껴지지 않나? 저 검은 무언가로부터 느껴지는 악의가."

"화권이 안에서 싸우고 있다."

응접실 안의 온도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뜨거웠다. 마치 찜통에 들어온 것만 같은 더위에 특사단과 사용인들은 죄다 땀이 흐르기 시작했고, 바람을 일으켜 환기시키던 풍백이 워치에 대고 소리쳤다.

"여기는 한국의 히어로 <풍백>! <화권>과 <라스푸틴>의 마지막 위치를 알고 싶네!"

-히어로 협회 러시아 모스크바 지부에서 연결. A급 이능력자 확인. <라스푸틴> 권한 없음, 거절. <화권>-본인 허용, 모스크바 블라디미르 가문 저택.

"이런 육시럴!"

풍백이 스틱을 휘두르며 검은 무언가를 때리기 시작했다.

"이 안에 화권이 있어! 상대가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싸우고 있는 게야!"

"라, 라스푸틴 님은 어디로…?!"

"그게 중헌가?! 화권이 지금 침입자랑 결계 속에서 싸울 수도 있는데!"

"비켜!"

하늘성이 어둠의 벽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마력이 실린 주먹이 벽에 부딪히며 무거운 소리가 울려퍼졌으나, 벽은 결계라도 되는 것 마냥 흔들림조차 없었다.

"이거 설마…."

등대가 선글라스를 살짝 내렸다.

"안에서 화권과 싸우고 있는 사람…. 라스푸틴 같은데요…?"

특사단과 사용인들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 * *

괴인 DD의 짙은 어둠의 결계 안은 흰 불꽃에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으아아악!!"

화권은 젖먹던 힘까지 짜내어 마력을 방출했다. 몸의 앞에서 뿜어져나오는 흰 불꽃은 DD의 손길이 닿지 않게 밀어내려고 했고, DD는 불꽃에 타들어가면서도 화권을 향한 손길을 거두지 않았다.

[흐하하! 그래! 저항하는 맛도 있어야지! 그분은 고분고분한 것도 싫어하시거든!]

"시끄러워!"

DD의 오른손이 화권의 머리칼을 살짝 움켜쥐었다. 화권은 머리채가 잡히기 전에 붙잡힌 머리칼을 태워 잘라냈다.

[언제까지 이 줄다리기가 가능할 거라고 생각은 마라! 넌 나보다 약하다!]

DD의 말대로 화권은 DD에게 시종일관 밀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권이 저항을 멈추지 않는 이유는 단 하나.

"누가 네게 당할 줄 알고!!"

어떤 의미에서든 히어로는 빌런에게 당할 수는 없었다. 눈앞에 있는 이는 세계를 멸망시키려는 악의 조직 다크 레기온의 하수인이며, 삐뚤어진 관념으로 타락한 히어로의 전형이었다.

"결코 질 수 없다!"

히어로로서, 남자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 패배할 수 없었다. 화권은 아주 천천히 DD를 벽으로 밀어붙이고 있었다.

"우오오오오!!"

화권의 백염이 결계 안의 공간을 반절가까이 메웠다. 가슴이 타들어가던 DD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섰고, 그에 따라 DD의 여러 손길도 뒤로 물려졌다.

'이대로 계속 마력을...!'

[흐흐. 장난은 그럼 여기서 끝이다.]

DD가 혀로 입술을 핥았다. 화권의 눈동자가 그 어느때보다도 커졌다.

푹!

등 뒤에서 어둠의 손길이 튀어나와 화권을 끌어안았다. 십 수 개의 손길이 화권의 어깨, 가슴, 배, 허벅지, 종아리를 살포시 감싸며 날카로운 손톱을 박아넣었다.

"크윽?!"

[네가 등지고 있는 결계도 나의 어둠이지. 제법 반항은 거칠었어. 합격이다. 역시 넌 그 분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어.]

DD는 화권을 자신의 눈앞에 끌어당기며 활짝 웃었다.

[자, 나와 함께 신인류가 되자꾸나...!]

DD가 두 팔을 벌리며 화권을 서서히 감싸안았다. 화권은 온몸을 비틀며 끝까지 저항을 멈추지 않았으나-

꾹.

닿았다.

"으아아아아아악!!!"

그 순간, 갑자기 천장에서 빛무리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뭐라고?!]

결계가 갑자기 뚫렸다. DD는 고개를 치켜들었고, 동시에 닿은 것 또한 더 앞으로 쏠렸다.

♩♪♩

맑은 새의 울음소리와 함께, 화권의 전신이 푸르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 * *

콰--앙!!

청백의 불꽃이 사방으로 솟구쳤다. 굳게 닫혀있던 어둠의 결계는 청백색의 불꽃에 사방으로 찢겨나갔고, 폭발의 반동으로 특사단과 사용인들은 한 걸음 크게 물러섰다.

"뭐야?!"

"파란 불꽃...?"

청화단의 상징인 푸른 불꽃 만큼은 아니지만, 엄연히 푸른색을 머금은 불꽃이 눈앞에서 터져나오자 간부들은 어안이 벙벙했다.

"이승형 색깔이 흰 색 아니었나...?"

"앗! 저기!"

등대가 하늘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결계 조각을 부리에 물고 잘근잘근 씹던 푸른 카나리아-미니 피닉스가 있었다.

♪♬

미니 피닉스는 결계를 부수고 바닥을 굴러 난로에 처박힌 이승형의 정수리 위에 착지했다. 막대한 마력을 쏟아내어 그런지, 땀을 뻘뻘 흘리는 이승형의 얼굴은 사색이 되어 있었다.

"화권! 도대체 무슨?!"

"빌런입니다! 라스푸틴이 타락했어요! 괴인입니다!"

이승형은 고개를 치켜들며 괴인 DD를 가리켰다. 모두의 시선이 라스푸틴-이였던 것, 괴인 DD를 향했다.

"윽!"

"이런 씹!"

2.5m 라택스 괴인에 모두가 비명을 질렀고, 고간을 본 이들은 하나같이 혐오감을 숨기지 못했다.

[이 놈들! 네놈들도 똑같은 놈들이구나! 사람을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는 구태 놈들이야!]

시선에 민감했던 괴인 DD는 괴성을 지르며 땅을 굴렀다. 그의 육중한 몸이 크게 흔들렸고, S급 이능력자의 난동에 사람들은 충격과 공포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저게.... 라스푸틴 님?"

특히 수도승같은 그의 모습만 보던 블라디미르 가문의 사람들은 충격이 더했다. 화권이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 믿고싶었지만, 유감스럽게도 라스푸틴의 마력 반응은 괴인 DD의 위치에서 나오고 있었다.

[흐흐흐! 외형 따위에 현혹되는 구시대의 인류여! 내가 신인류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주마!]

DD는 마력을 더욱 펌핑하며 근육을 끌어올렸다. 주변을 향해 달려들려는 DD의 움직임에 가장 먼저 반응한 이는 '괴인에 가장 익숙해져 있던' 청화단의 간부들이었다.

"성!"

"물러서라!"

아키택트가 땅을 내리치며 대리석 벽들을 세웠고, 하늘성이 중절모를 벗어던지며 근육을 키웠다.

"상대는 빌런입니다! 정신 차리고 요격하세요!"

등대는 뒤로 물러서며 굳어버린 이능력자들에게 일갈했다. 이능력자들이 하나 둘 정신을 차리기 시작하는 사이, 아키택트가 세운 석벽이 한순간에 파괴되었다.

[으하하! 가소롭구나!]

DD는 마력을 두른 돌진만으로 십 수 cm 두께의 벽을 박살내었다. 셔츠가 전부 찢어진 하늘성이 두 팔을 뻗으며 DD의 손을 붙잡았다.

"큭, 으오오오!"

하늘성은 기합을 내지르며 손아귀에 힘을 불어넣었지만, S급 직전이라도 A급의 힘으로는 도저히 진짜 S급의 힘을 이겨낼 수 없었다.

"하앗!"

"놈!"

우사와 풍백이 저마다의 무기를 휘두르며 옆에서 DD를 찔렀다. 블라디미르 가문의 사용인들도 하나둘 무기를 들어 DD를 겨누었다.

타다다당!

코어웨폰을 가진 경비병들까지 합세하여 DD를 점사했다. DD의 손아귀에서 풀려난 하늘성은 뒤로 물러서며 화망을 피했고, 십 수명의 이능력자들이 DD에게 집중포화했다.

[신의 은총 앞에서는 전부 무용지물...!]

DD는 아무런 데미지가 없었다. 오히려 자신의 근육들을 흔드는 마탄과 공격들을 전부 몸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런 미친!"

"흐아아아!"

이능력자들 사이로 청백의 빛이 스쳤다. 오른 주먹을 어깨 너머로 넘긴 이승형의 화권은 그 어느때보다도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타올라라---!!"

[......!!]

DD는 이승형의 주먹에 모인 심상찮은 기운에 가드를 세웠다. 전방에 어둠을 둘러 기막을 만들고, 두 팔을 붙이며 가드를 단단히 세웠다.

"푸른 불꽃이여---!!"

순간, 이승형의 주먹에 푸른 카나리아가 내려앉았다.

화륵.

화권이 DD의 배리어에 닿기 직전, 아주 짧은 순간이나마 화권의 백염은 완전히 푸르게 물들었다.

그리고.

□□□□□□□□□---!!

막대한 폭음과 함께, DD는 이승형의 주먹에 방어막 째로 창밖으로 튕겨나갔다.

와장창!

유리창이 깨지고, DD는 포물선을 그리며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호수의 한가운데에 풍덩 빠지고 말았다.

"하아, 하아."

이승형은 손에 깃든 푸른 카나리아가 전한 힘에 오한이 들었다. 힘의 출처를 알게 된 이상, 사용하기에는 께름칙하였으나.

"지금만큼은....고맙...."

털썩.

마력을 모두 사용해버린 이승형은 앞으로 고꾸라지며 기절했다.

* * *

쿵!

전신이 불에 타버릴 뻔한 DD는 물속에서 뛰쳐나와 땅에 착지했다.

[방금 그건.... 뭐였지?]

그 어떤 공격도 통하지 않던 두 팔이 걸레짝이 되었다. 신의 은총을 바탕으로 금방 회복이야 할 수 있었지만, DD는 구시대의 인류가 자신에게 피해를 입혔다는 것에 크나큰 충격을 받았다.

[신께서 주신 몸을 상하게 하다니.... 이런 불경이! 하지만....]

DD는 수 십 미터 넘게 날려진 본궁을 올려다보며 입맛을 다셨다. 다른 인간 따위에게 당했다면 수치스러운 일이었으나, 함께 신을 모실 동지에게 당했다고 생각하면 큰 문제는 없었다.

[흐흐흐. 이거 점점 뜨거워지는데...!]

"공공외설에 따른 형벌이 어떻게 되는 지 알고 있나?"

갑자기 등 뒤에서 고운 미성이 들려왔다. DD는 아무런 기척도 없이 자신의 등 뒤를 점한 남자의 존재에 소름이 돋았다.

"사안이 경미하면 훈방조치로 끝나고는 하지만...."

철컥.

금발의 청년은 날카롭게 벼려진 검으로 DD의 고간을 겨눴다.

"괴인은 법의 심판을 받지 않지. 그러니 내가 심판하마. 너는 궁형이다."

[오호라.]

DD는 금발의 청년-광검을 위아래로 훑으며 숨을 토해냈다.

[그대는 신의 반려로 부족함이 없도다! 그렇군! 그대가 운디네의 목줄을 쥔 자인가! 그대라면 내가 모시는 신을 만족시킬 터!]

"......미안하지만 내가 만족시켜야 할 신은 저기 계시지."

광검은 등지고 선 별궁의 첨탑을 엄지로 가리켰다.

"네가 모시는 신에게 전해라. 만족하고 싶으면 혼자서 해결하라고."

[신성 모독이다!!!]

호수위에 굳건하게 세워진 다리 위.

서로를 노려보던 두 괴인이 서로의 신앙을 증명하기 위해, 각자의 무기를 들고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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