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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염의 피닉스-277화 (277/1,497)

〈 277화 〉1부 12장 23

잠시 뒤.

수보르프는 허윤환을 불러내 따로 이야기하기를 원했다. 나와도 나눌 이야기가 있었지만 우선 허윤환과 루살카 두 명을 상대로 이야기를 나누기를 원했고, 나는 그들에게 충분한 시간을 주었다.

얼마나 이야기가 길게 걸릴지 모르는 만큼, 나는 짬을 내어 백희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뭐죠?]

S급 원탁 이능력자를 얻지 못하게 된 백희아의 목소리는 살짝 쌀쌀맞았다. 허윤환이 지적한대로 나는 공수표를 날린 셈이 되었고, 거기에 더불어 허윤환은 벨로보그로서 러시아에 넘어가게 생겼다.

"약속은 못 지켜서 미안해요."

줬다가 빼앗는 것도 억울하지만, 준다고 해놓고 다른 이에게 줘버리는 것도 억울할 법 했다.

[알았어요.]

백희아는 다행히 내 사과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쿨하시네요."

[원래 히어로였던 것도 아니고, 당신 아래 사람이라면서요? 벨로보그…. 그가 한국인이라는 것만 다들 알면 돼요. 사랑을 위해 모든 걸 버리고 떠난 남자…. 당장은 손해같더라도 장기적으로 보면 이미지 개선에 도움이 될 거예요.]

백희아는 허윤환이 루살카를 만나러가기 위한 일대기가 상당히 마음에 들었나보다.

[거기에 화권 이승형의 활약까지. 다크 레기온의 실체를 밝힌 이는 역사서에 '한국인 이승형'으로 남게 되겠죠?]

"...그거야 그렇죠."

다크 레기온의 실상에 대해서는 내가 내 주변의 아군이나 우군들에게는 알렸으나, 당연히 아는 사람만 아는 정보였다. 그게 라스푸틴의 폭주에 대해 진상을 밝히게 되면서, 다크 레기온은 자연스레 대중들에 알려지게 되었다.

[별궁의 침입자와는 별개로, 화권은 라스푸틴의 이상을 감지하고 떠보다가 라스푸틴의 정체가 발각된 거죠. 지금 세간에서 화권을 뭐라고 부르는 지 알아요? 여신이 점지한 평화의 사자래요. 평범한 A급이었던 그를 S급으로 만들어서, 세계 평화를 위한 용사가 되라고 신께서 힘을 내려주셨다고.]

"......."

이승형이 들으면 기함할 소리임과 동시에, 그에게 힘을 준 당사자인 나로서는 그딴 망발을 지껄이는 존재의 모가지를 뽑아버리고 싶은 심정이 들었다. 하지만 백희아는 어디까지나 전해들은 바를 내게 전하는 것이기에, 나는 추후 은유하에게 추적해달라 부탁하기로 마음먹고 화제를 돌렸다.

"이제 세상 사람들이 모두 다크 레기온의 존재를 알게됐네요. 집행관으로서의 의견은?"

[별반 달라지는 건 없을 거예요. 아직 세계 종말같이 핵심적인 부분은 공개되지 않았으니까. 그저 다크 레기온이라는 조직이 있다는 정도잖아요? 일반 대중들에게는 조금 공포로 다가오겠죠. S급 이능력자가 세계 정복을 꿈꾸는 악의 조직 하수인이었다는게 드러났으니.]

"대신 간부들도 쉽사리 움직이지는 못할 거예요."

이걸로 세 간부의 활동도 위축될 것이다. 물론 내가 청화라는 위장신분을 만들었 듯, 그들도 또다른 위장 신분을 가지고 활동하겠지만.

[만약에 걱정하신 대로 꽁꽁 숨어버리면 어쩌실 거예요?]

"죽기 직전까지 찾아야지요. 스스로 뛰쳐나오지 않으면 못 배길 정도의 상황을 만들어서."

[그게 그 6민트 테러였어요?]

"설마 1트만에 뛰쳐나올 줄은 몰랐죠. 그렇게 하나둘 찾아다니면 나중에는 일곱 명 다 모일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백희아 아가씨. 출항 준비는 잘 되가고 있나요?"

현재 시각 모스크바 시 7월 22일 오전 7시. 시차가 있는 한국 시간으로는 오후 1시를 조금 넘긴 때 일 것이다.

[네. 당장 내일 아침이면 출발할 수 있어요.]

"좋아요. 거기 해 떨어지기 전에 귀국할 거니까, 차질없이 준비해둬요."

[알았어요. 준비해둘게요, VIP님.]

이왕 세 간부들의 활동을 억제시키는 동시에, 나는 기존에 예정된 계획을 강행하기로 마음먹었다. 다크 레기온이 밖으로 드러난다고 해서, 개천광 카르나는 스스로 건 승부를 피하거나 하지 않을 것이다.

"참. 출항할 때 하나 행사 만들어주실 수 있어요?"

[무슨 행사요? 서울 상공에서 퍼레이드라도 해주시려고요?]

"아뇨. 그냥 떠나는 이들을 위한 격려행사?"

나는 내 플랜에 대해 간단히 읊었고, 백희아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듯 내 제안을 승인했다.

[사기 진작에는 좋겠네요.]

"사기 진작 뿐이겠어요? 푸흐흐."

행사가 끝나는 순간, S급 이능력자를 둘이나 생길 것이다. 나는 행여나 백희아에게 미리 알리면 두 명의 예비 S급 이능력자들에게 선수를 칠까봐 일부러 뒷내용을 숨겼다.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것 같은데.]

"꿍꿍이라뇨. 떠나기 전에 남들 보는 앞에서 백희아 아가씨랑 악수 한 번 하고 싶어서 그런 거죠."

[말이나 못하면. 알았어요. 악수 한 번으로 끝나지 않을 거니까, 각오해두세요.]

"좋으실대로."

끝까지 한마디를 지지않던 백희아는 씩씩거리며 나와의 전화 통화를 끝냈다. 마침 타이밍 좋게 광검 부부와 수보르프의 이야기가 끝났고, 나는 광검의 안내에 따라 <원수>와 마주하게 되었다.

"이야기는 다 끝났어요?"

"그래.... <창염의 피닉스>."

"풀네임으로 불러주는 건 고마운데, 그냥 피닉스라고 불러요. 당신 딸이 지금 제 손발 망가뜨리는 바람에 제 정신이 남아 돌지를 않거든요."

첫 인사라면 모를까 일일이 창염의 피닉스라고 불리는 것은 사양이다. 나는 다크 레기온의 일원으로서 수보르프와 얼굴을 맞대고 앉았다.

"어떻게 얘기는 잘 되셨나봐요?"

"그래. ......여러모로 믿기는 힘들지만 그게 진실이라면 믿어야지."

수보르프는 한숨을 푹 내쉬고 내게 고개를 숙였다.

"딸아이를 살려줘서 고맙다."

"......?"

"내 딸 미래에서 죽는다며."

"아."

펜릴에게 잡아먹히는 원탁이 루살카이며, 공백이 된 원탁의 빈 자리를 꿰차야했던게 라스푸틴이었다. 아무래도 루살카는 그와 관련한 이야기까지 수보르프에게 이야기를 했나보다.

"좋아요. 괜히 또 구구절절 설명하는 것보다야 낫겠네요. 고마워 할 필요까지는 없어요. 그냥 어쩌다보니 구하게 된 거니까."

"그래도 나는 네 덕분에 딸을 두 번이나 잃지 않을 수 있었다. 그것만큼은 아버지로서 감사하지."

"......."

수보르프의 옆에 앉은 루살카는 쑥쓰러운 듯 고개를 돌리고 먼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 옆에 앉은 허윤환은 자신이 앉은 위치에 상당히 불편해하는 듯 했다.

"흠흠. 그럼 저도 감사의 인사를 드릴게요. 루살카는 제 입장으로서는 여동생같은 존재라-"

"누가 여동생이니?"

"......그럼 나는 딸이 하나 더 생기는 건가?"

부녀는 서로 다른 감상을 내뱉으며 내 말을 끊었다. 나는 수보르프가 은근히 기대하는 눈빛을 보이는 것에 질타했다.

"당신은 악당을 딸로 맞이하고 싶어요?"

"세계 최강의 이능력자라면 얼마든지 환영이다. 앞으로 나쁜 짓 못하게 잘 타이르고 훈육하면 되니."

"이래서 히어로들이란. 하나같이 다 빌런을 계도하려고 들고 말이죠."

나는 내 앞에 놓인 컵을 들어올렸다. 진한 홍차향이 코를 간질였고, 수보르프 또한 자신의 찻잔을 들어올렸다.

"일단 할아버지 되신 걸 축하-"

"얘!"

루살카가 비명을 질렀다. 나는 신경질적인 루살카의 비명에 내가 다 화들짝 놀랐다.

"할...아버지?"

수보르프의 표정이 심각하게 일그러졌다. 가능만하다면 손에 들린 찻잔으로 허윤환의 머리를 내리칠 기세였다.

"아, 얘기 안했어요?"

"......."

둘은 침묵했다. 나는 두 부부가 사랑의 결실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오해하지 마요. 루살카가 지금 처녀는 아니더라도 뱃속에 아이가 들어있거나 하지는 않으니까."

"그…. 무슨…?"

"한국의 SS급 히어로 석하랑, 이 부부 딸이에요."

쥬르륵.

수보르프의 입에서 홍차가 폭포수처럼 흘렀다.

* * *

충격과 공포의 딸밍아웃 이후.

수보르프는 새로 생긴 손녀의 존재에 기뻐하면서도, 이십 년 동안 딸을 방치한 두 부부를 호되게 꾸짖었다.

"어떻게 부모라는 것들이 그럴.... 아무리 상황이 그래도 그렇지 배아파 낳은 자식인데.... 홀애비가 되어서라도 키워야지.... 자고로 부모와 자식 관계란...."

수보르프는 인생의 선배로서 둘을 훈계했다. 나는 부부가 혼나는 사이 당당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내 할 일을 하러나왔고, 수보르프는 개의치 않고 나를 내보냈다.

"그럼 손녀딸을 잘 부탁하네, 피닉스 양."

"금세 적응하셨네요? 21살짜리 손녀딸인데."

"아무렴 어떤가. 손녀딸이 있는 것도 모자라서 세계 최강의 히어로라는데. 흐허허. 그래도 너희들은 안 돼. 어? 부모라는 것들이 말이야...."

나는 수보르프의 일장 연설을 피해 밖으로 빠져나왔다. 둘은 아주 제대로 임자를 만났다.

광검 허윤환은 아주 이른 시기부터 S급에 이르는 바람에 남들이 떠받들어주는 인생을 살게 되었다. 자신이 한 아이의 부모라는 것을 인식하기에는 그에게 주어진 환경이 너무 혹독했다.

루살카는 인간이 아니었기에 인간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시간 관념 또한 달랐고, 정령으로서 판단을 내렸다.

둘 다 자신에게 따끔히 말을 해 줄 수 있는 연장자가 없었기에, 두 부부는 부모로서 어떻게 해야하는 지 그 누구도 제대로 알려주지 못했다.

'이제 수보르프한테 닦이면서 잘 하겠지.'

"석하랑은 졸지에 할아버지 생겼네요. 푸흐흐."

행여나 더 어색한 관계가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석하랑은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나도 옆에서 보듬어 줄 것이고.

'그럼 이제 다른 곳을.'

러시아를 떠나기 전, 나는 청화단의 간부들이 섞인 특사단 일행을 찾았다. 풍백과 우사가 함께 있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나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등대에게 신호를 보냈다.

굿모닝-♩♬

처음 듣는 이에게는 새가 지저귀는 소리겠지만, 등대는 내 신호를 듣자마자 눈을 번쩍 뜨더니 자리에서 슬쩍 일어났다. 풍백이 방을 벗어나려는 등대에게 행선지를 추궁했다.

"어디가는겐가?"

"화장실갑니다."

"괴인도 화장실 가고 그러나? 껄껄."

"......그런 건 아닌데요."

등대는 퉁명스레 대답했지만 속으로는 식은땀이 날 것이다. 괴인은 화장실을 다닐 필요가 없는 존재였고, 등대는 말실수를 했다.

"됐네. 그렇게 경계하지 말어. 화장실가서 누구랑 연락하든 내 알 바인가. 끌끌."

풍백은 손을 흔들며 등대를 배웅했다. 함께 공투를 한 전우로서, 이번 한 번만 봐주겠다는 메세지같아 보이기도 했다.

"......그럼."

등대는 부리나케 화장실로 달려왔다. 나는 밖에서 그를 뒤따라다니며, 남들 보이지 않게 등대와 복도의 모퉁이에서 몰래 접선하는데 성공했다.

"미안해요. 놀래셨나?"

"...악취미입니다, 단장님."

"죄송. 푸흐흐."

아침이기에 모닝콜을 했건만 별로 효과는 없었던 모양이다. 나는 헛기침을 하고 등대에게 지시를 내렸다.

"특사단은 아마 며칠 더 여기서 머무를 거예요. 청화단의 간부들만. 히어로 셋은 전용기로 한국에 귀국합니다."

"장기 출장이 될 것 같군요."

"오자마자 귀국하는 것도 그렇잖아요? 이 난리가 났는데 하루도 안 지나서 짐싸면 보기 그렇잖아요. 히어로들이야 다른 곳에서 할 일이 있으니까 어쩔 수 없고."

우사, 풍백, 그리고 화권. 셋은 인도행의 핵심 전력으로, 러시아에 가만히 내버려 둘 수 없는 자들이었다.

"화권은 라스푸틴 건으로 찾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괜히 소란이 생기는 게 아닐지."

"오히려 그 소란이 생기기 전에 먼저 화권을 빼돌려야죠. 협회랑은 잘 이야기가 될 거예요."

수보르프가 일단 우군이 되었고, 백희아도 뒤에서 잘 조정을 해줄 것이다.

"당신들이 할 건 얼마 없어요. 추후 은유하가 보낼 다른 전용기에 당신들이 잡은 괴수의 코어를 싣는 것, 그리고 그 전용기에 광검과 루살카를 태워서 한국으로 귀국하는 것."

"전자는 그렇다치고 후자는 가능합니까? 광검님은 이제 벨로보그가 되었잖습니까."

"한국에서 소란을 피워 직접 와서 사과하고 싶다는 식으로 포장할 거예요. 그리고 겸사겸사 석하랑과도 따로 자리를 마련할 거고."

"......드디어 만나는 군요. 알겠습니다. 준비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떠나기 전, 나는 등대에게 마지막 명령을 내렸다.

"푸른 깃털들 코어 다 넘길게요. 이거 챙겨서 귀국 하세요. 그리고 따로 보관만 해두시고."

"하나가 비는 것 같습니다?"

"없앴어요."

"......알겠습니다."

등대는 더 추궁하지 않았다. 나는 코어가 들어간 주머니를 등대에게 건넸고, 자리를 벗어나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늦어서 미안해요."

"아냐. 얼마 안 걸렸는 걸."

블라디미르 저택의 인적 드문 공원. 환룡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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