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9화 〉1부 12장 25
도시락.
나는 중국에 있는 큐브 중 하나를 회수하지 않았다. '나중에 해도 되겠지'하는 생각도 있었지만, 당장 급한게 아니기 때문.
하지만 히카리가 연구하고 있던 큐브와 석하랑이 가져온 큐브가 창염에 의해 소멸하게 되면서, 내 수중에는 더이상 큐브가 없게 되었다. 선후관계의 문제는 없었기에, 나는 루살카의 문제가 해결되고 난 뒤에 큐브를 회수하려고 했다.
"그래서 도착했습니다. 호로관 던전."
"아주 그냥 지 멋대로네."
괴인으로 부활한 덕배는 궁시렁거리며 내 뒤를 따랐다. 후드까지 뒤집어쓰고 발로 땅을 차는게 분명 불만이 서려있는 행동이었다.
"어린애도 아니고 지금 어디서 짜증이에요? 이러다 방문이라도 있으면 쾅! 하고 닫으시겠네요?"
"있으면 그렇게라도 하고 싶다. 야, 너 왜 모스크바에서 나 안쓰고 뒷짐지고 있었냐?"
"그렇게 날뛰고 싶었어요?"
내가 덕배트를 휘두르는 건 덕배에게도 대리 만족이었다. 말로는 싫은 척 툴툴거려도, 속으로는 늘어나는 경험치에 분명 기뻐하고 있을 것이다.
"아쉽네. 라스푸틴부터 시작해서 차원문에서 쏟아지는 것들 내가 다 잡았으면 A급 됐을 거 아냐."
"사람이 다 나설 때와 장소가 있는 법이에요. 거긴 루살카가 활약할 전장이지, 우리가 나설 곳이 아니었어요."
비록 내가 몇 차례 지원을 하기는 했지만, 엄연히 싸움의 주역은 루살카와 광검이었다. 뒤에 튀어나온 잔챙이들을 질풍객이 다 처리하기는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메인 디쉬라고 할 수 있는 라스푸틴과 차원문을 제압하고 난 부스러기 같은 것들이었다.
"큐브가 있었으면 저도 난입했을 거예요. 하지만 큐브는 없었죠."
"그러니까 이제 큐브 있는 놈을 잡으러 간다는 거냐?"
덕배는 두 팔을 벌려 주변을 가리켰다. 괴수에 의해 파괴된 옛 호뢰관의 터는 괴수들의 침입에 파괴되어 허허벌판이 되었고, 큐브를 얻을만한 곳은 아무리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누가 가지고 있는데?"
"호로관 메뚜기, 그러니까 <캘리펠라>라고 불리는 놈이에요."
원작에서는 중국의 던전 보스로 S급에 이르는 괴물이었다. 보통 스토리 상으로 샤오린을 동료로 영입한 최초의 전투가 호뢰관 던전이었다.
"호로관? 호로같은 놈이라도 나오냐?"
"네. 애비가 셋이나 되는 놈이죠. 부하 2호, 책 안읽었어요?"
"퍽이나."
책은 읽지 않아도 게임이라도 한 번 즈음은 해봤을텐데, 덕배는 아무래도 그런 세계와는 거리가 상당히 멀었나보다. 나는 주변에 마력을 흩뿌리며 '문'의 위치를 살폈다.
"아무튼 진짜 호로같은 놈이 나와요. 이게 원래는 샤오린이 운장으로서의 자신을 벗어던지는 이벤트인데, 그건 진작에 이루어졌으니 패스."
"운장을 벗어던지면서 다른 것도 많이 벗어던진 것 같은데."
"그건 샤오린을 죽인 모택평 탓입니다. 쬬가 나쁜 거예요. 그러니 복수하러 가죠."
파밧. 허공에 푸른 불꽃이 튀었다. 나는 불꽃을 거두어들였고, 타원형의 거울같은 문이 하나 나타났다.
"이거 뭐냐?"
"과거의 기억, 또는 미래의 던전. 현생에 태어난 메뚜기가 과거를 잊지 못하고 방황하다가 과거로 돌아갔어요. 마침 손에 넣은 큐브를 이용해서. 이건 과거로 연결되는 게이트인 거죠."
"별 희안한 일이 다있네...."
"말했잖아요. 큐브의 힘은 무궁무진하다고."
그걸 데이트권으로 사용하는 내 현실이 조금 우스웠지만, 나는 그 용처에 대하여 일말의 후회도 없었다. 애초에 놔둬봐야 야릇한 분위기만 만들어서 나를 좀먹어들려고 하니, 차라리 창염과의 짝짜쿵에 쓰는게 백배 천배는 나았다.
"그럼 큐브로 나 속성 바꾸거나 하는건.... 아이 씁."
"호오."
모처럼 모르모트가 좋은 아이디어를 냈다. 스스로 내뱉었으면서도 입을 막는게 자신의 운명을 직감한 듯 했지만, 이미 내뱉은 말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진짜 당신가지고 실험해봐도 돼요? 그거 진짜 위험한 건데."
정령의 힘으로 마력의 각 속성에 대한 친화율을 높이는 건 안전하고 손쉬워도, 인간의 고유한 속성을 바꾸어버리는 짓은 원작의 그 어떤 간부들도 저지르지 않았다.
"나 화속성으로 바뀌면 바로 S급, 아니 SS급 될 수 있는 거 아니냐?"
"당신이 화속성이라면 말이죠. 하지만 당신은 지속성이잖아요?"
우연이기는 하지만 덕배는 지속성의 마력 패턴을 가지고 지속성의 코어로 재탄생한 괴인이다. 단지 그를 괴인으로 만든 내가 화속성일 뿐이었다.
"큐브로 속성 바꾸는 건 진짜 위험해요. 당신 완전히 소멸할 수 있을 정도로. 그 정도 각오는 되어있으신가?"
"......성공 확률은 몇 퍼센트냐?"
"100%."
"그럼 무조건 가능하네. 알겠다. 이거 속성은 바뀌는 데 뭔가 다른 악재가 따라오는 거지? 나 지금 감이 팍 하고 왔다고."
덕배는 자신의 관자놀이를 검지로 톡톡 건드리며 으스댔다. 고개를 치켜드는 턱 아래에 탄환을 박아넣을까 생각도 들었지만, 모처럼 정답을 말했으니 나는 그를 죽이지 않기로 했다.
"맞아요. 속성 변환을 하면 키메라가 돼요."
"카메라?"
"키메라. 혼합마수. 몰라요? 이게 말만 키메라지, 보는 것 만으로도 정신이 오염될 징그러운 부정형의 괴생물체들이에요. 대가리는 뱀이랑 새랑 개로 세 개 달리고, 몸은 달팽이같은데, 꼬리는 촉수같은게 다발로 흔들거리는 괴생물체."
"......그럼 됐다. 난 안 할래."
덕배는 자신이 어찌 변할지 상상한 뒤 몸서리를 쳤다. 겁을 먹었냐고 도발하기에는 키메라의 위험성이 너무나도 높아서, 나는 그를 자극하는 대신 담담히 그를 겁먹게 만들었다.
"나중에 직접 상대할 기회가 있을거예요. 푸흐흐."
"......라스푸틴보다 징그럽냐?"
"그건 더러운 거죠. 키메라들은...정신이 깎여나간다고 해야하나? A급 수준이 아니면 사진만 봐도 어지럽고 토하고 난리가 나요."
정신력이 강하지 않으면 키메라에게 당할 뿐이다. 다행히 키메라들은 성주의 방주에서만 들끓을 뿐 지구에 직접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우리가 제때 '요격'을 할 때의 이야기지만.
"아무튼 우리 조덕배 씨, 큐브 얻으러 가는 김에 겸사겸사 A급으로도 만들어줄테니까 너무 삐지지 마요."
"안 삐쳤는데?"
"그럼 안 삐진 걸로 알고, 무기로 바꿉니다."
나는 덕배의 등을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신체를 구성하던 마력이 코어로 빨려들어갔고, 곧 덕배는 내가 바라는 대로 모습이 바뀌었다.
우우웅.
"역시 되네."
그립감이 찰지다. 나는 덕배를 내가 생각했던 무기로 바꾼뒤, 호로관 메뚜기가 날뛰고 있을 던전-큐브에 의해 만들어진 세계로 손을 뻗었다.
치지직.
다행히 나도 진입은 가능했다. 행여나 '나'는 '이세계의 주민이 아니니 진입할 수 없습니다!'하는 제한은 없었고, 나는 수월하게 이계로 진입했다.
와아아아아아!!
장병들의 함성이 귀를 찌른다. 두 다리를 내딛은 지축이 불규칙적으로 흔들린다. 군마들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황무지를 달리고, 눈먼 화살과 쇠뇌가 하늘을 수놓았다.
찰칵!
나는 마도기어를 이용해 전장의 전경을 사진으로 찍었다. 큐브 덕분에 '기억을 바탕으로 구현된' 이계는 고증을 철저히 한 사극 드라마로도 재현하기 힘든 수천년 전의 광경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한 명 빼고."
"꺄하하하하하!!"
왠 여자의 경박한 웃음소리가 하늘에 울려퍼졌다. 나는 깎아지른 절벽에 서서, 호뢰관의 앞에서 마력을 마음껏 사용하며 난동을 부리는 은발의 미소녀를 내려다봤다.
"삼국지 시대에 히어로 슈트 입고 깽판을 부리다니."
소녀는 내 존재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눈으로만 훑어도 S+급은 되어보이는 소녀는 무한한 큐브의 힘을 이용해,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무장들에게 회색의 깃창을 휘두르며 난동을 부리고 있었다.
소녀의 망상이 구현된 이 세계적으로 표현하자면 '무쌍'을 벌이고 있었다.
'원래는 샤오린한테 패대기당한 엑스트라인데.'
"패배의 충격에 버림받아서 자살하려다가 큐브 덕분에 던전에 갇히는 빌런이죠."
냉병기로 창칼을 나누는 과거 세계에서 초능력이라 할 수 있는 히어로 무쌍으로 천하 통일을 노리는 소녀는 이 세계의 주인공이며, 스스로를 '여봉선'이라 칭하며 말그대로 '여포질'을 하고 있다.
"아하하하! 고작 그 정도냐!"
여봉선은 홀로 호로관의 입구를 틀어막고 병졸들을 도발했다. 과거 세계 기준으로 음란 치녀나 다름없는 현대 세라복 스타일의 히어로 슈트를 입은 여봉선은 피에 굶주린 괴물 그 자체였다.
"여, 여봐라! 누구 없느냐! 저 괴물을 쓰러뜨리란 말이다!!"
투구조차 쓰지 않은 콧수염 장군이 장졸들을 다독였다. 그러나 모두 여봉선의 무위에 공포에 질려있을 뿐 나서는 이 하나 없었다.
"아하하! 또 없어? 벌써 몇 번째야?! 지치지도 않아?!"
소녀는 방금 전에 쓰러뜨린 장수의 목을 잘라 깃창에 꽂았다. 그리고는 제자리에서 점프해 수십 미터는 훌쩍 넘는 성벽에 착지하여 깃창을 성벽에 꽂았다.
"이걸로 9명! 이름난 장수는 더 없어?!"
호로관의 성벽에는 수많은 이름난 장수들의 머리로 효수되어있었다. 개중에는 귀가 턱까지 내려오는 사내도, 수염이 무릎에 닿을 정도로 긴 사내도, 애꾸눈의 사내도 있었다.
'알짜배기 네임드는 다 죽였네.'
덕배에게는 미안하게 됐다. 저들이 모두 적이라면 경험치라도 쌓을 수 있건만, 이미 이름난 장수들은 여봉선에 의해 머리와 몸이 분리되어 까마귀 밥 신세가 되었다.
'이번에는 미쳐서 몰살 루트라도 타는 건가?'
"하긴. 이 짓을 골백 번 하다보면 미치고는 못 살겠죠."
반동탁연합군에서 시작하는 천하통일도 무한히 이어지면 사람이 미쳐버리는 법이다. 탈출하는 방법을 모르는 이상, 초반에는 즐거운 이세계 깡패 라이프를 즐기게 되더라도 나중에는 사람이 돌아버리는 건 당연지사.
여봉선은 큐브 때문에 과거 세계에서 빠져나오지를 못하고 있다.
'그러다 나중에는 진짜로 미쳐서 메뚜기같은 괴물로 변해버리고.'
"괴물이 되어 세계를 전부 먹어치우면 될 거라고 생각했겠지만 중국 땅이 워낙 커서야 말이죠."
그러니 이 세상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안식을 줘야 할 때다. 나는 햇빛속에 몸을 숨기며 호로관으로 숨어들었다.
* * *
"...승상께서 전하라 하셨습니다. 이제 괜찮으니 낙양으로 돌아오시라고…."
"싫어. 안 가. 여기 지키고 있으라며?"
여봉선은 더듬이같은 자신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의자에 몸을 눕혔다. 비단에 파묻혀 옆으로 누운 소녀는 영락없는 미인이었으나, 실상은 불과 몇 시진 전까지만 하더라도 저 갸냘픈 손목으로 무장 하나의 목을 따온 괴물이었다.
"승상께 전해. 내가 여기서 다 모가지를 잘라줄테니까, 승상부에서 굿이나 버고 떡이나 치시라고."
"그, 승상께 그런 말씀은…."
"뭐?"
여봉선이 눈을 부라리자 전령은 머리를 조아렸다.
"죄, 죄송합니다!"
"죄송하면 당장 승상께 달려가. 나 좀 있다가 낙양 들어갈 건데, 나보다 늦으면 너는 진짜 죽을 거야. 알겠어?"
"존명!"
전령은 쪼르르 뒷걸음질치며 막사를 빠져나갔다. 여봉선은 낄낄 웃으며 협탁 위에 올려진 호리병을 집었다.
"하아, 이 맛도 이제 질리네…."
현대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탁한 술은 물리다 못해 입에도 대기 싫었으나, 그나마 자신의 경지에서 취할 수 있는 술이라고는 이 독하디 독한 탁주밖에 없었다.
"크하아…. 천하통일이고 나발이고 이제 좀 안 했으면 좋겠다…."
여봉선은 현대에서부터 유일하게 가져온 현대의 문물, 히어로 슈트를 만지작거리며 숨을 천장을 향해 내뱉었다.
"동탁군도 조조군도 유비군도 다 실패했고…. 그렇다고 손권같은 놈 밑에 있자니 그건 또 싫고…. 아, 진짜 누구 열쇠가 되는 사람이 있는 건가."
혼잣말만 자꾸 늘어갔다. 여봉선은 자신의 상징이자 애기인 방천극의 창대를 손으로 쓸며 무료한 시간을 보냈다.
똑똑똑.
노크 소리가 울렸다. 여봉선은 무례한 병졸의 행동에 방천극으로 모가지를 그어버릴까 고민했다가, 문 너머의 존재가 '노크'를 했다는 것에 깜짝놀랐다.
"드디어…!"
이 세계를 탈출할 기회가 온 건가. 여봉선은 반색하며 몸을 일으켰고-
퍼억!
머리가 띵했다.
여봉선이 처음으로 아프다고 느낀 순간이었고, 시야의 사이에는 짙은 회색의 돌도끼가 박혀있었다.
"아-"
여봉선은 의식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