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3화 〉1부 13장 10
<7월 23일 11시 23분, 피닉스 개인실.>
훈련실에서 돌아온 나는 곧장 방에 결계를 쳤다.
'이러면 이제 여기는 아무도 없다.'
방안에는 그 누구도 들어올 수 없었고, 심지어 백희아마저도 결계 안의 영역을 확인할 수 없었다. 거기에 나는 두 개의 귀걸이마저 빼서 잠시 천가을에게 맡겼다.
"조덕배랑 흑염룡까지?"
"그래요. 잠시 맡아줘요."
"맡기야 하겠지만 도대체 뭘 준비하려고 하는 거야...?"
가을은 내가 하려는 계획을 추궁했다. 터뷸러스가 들어간 위치가 위치인 만큼, 가을이 나를 의심하는 것은 당연했다.
"걱정마요. 불건전한 방법은 아니니까.
"흠.... 수상한데. 나 진짜 옆에서 보면 안 돼?"
"네. 혹시 모르잖아요. 터뷸러스 안에 넣고 싶어요?"
가을은 안색을 굳히며 고개를 도리질쳤다. 가을이 환속성 다음으로 가장 높은 마력 친화율이 풍속성이었다. 유이신보다는 낮았지만, 혹시나 터뷸러스가 가을의 질 좋은 마력을 먹어치우려 들 수도 있었다.
"그러니까 믿어줘요. 내가 걔들한테 무슨 엄한 짓을 하겠어요?"
"알았어. 무슨 일 있으면 바로 들어갈 거야."
"걱정마요."
나는 마지막 관문인 천가을을 보냈다.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고, 조덕배와 흑염룡까지 사라진 이 7평짜리 방은 온전히 나만 있게 된 공간이었다.
'여기서 이러는 것도 진짜 오랜만이네.'
"중국에서 돌아갈 때 한 번 썼으니까 한 달 전인가...."
나는 예전 주인공이 쓰던 방에 나 홀로 남게 된 것이다. 나는 뽀송뽀송한 매트리스의 시트를 손으로 쓸었다.
'여기서 정말 많이 했었는데.'
이 푹신한 매트리스 위에서 정말 많은 역사가 이루어졌다.
'침대 시트를 하루에 한 번은 무조건 갈았지.'
기본적으로 히로인들과의 '씬'은 이 방에서 한 번씩은 무조건 이루어졌고, 가상현실이 어느정도 보장되던 만큼 정해진 씬 이외에도 자유롭게 행위를 할 수 있는 날에도 나는 여기서 히로인들과 사랑을 나누었다.
나의 테크닉은 이 퀸 사이즈 침대에서 갈고 닦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는 더 누구도 없을 거다.'
나는 이제 어떤 히로인도, 어떤 이도 내 옆에 들이지 않을 것이다. 만약 나의 사랑이 책으로 구성된다면, 이 세계에서 만큼은 그 역사의 마지막 페이지에 창염이 있기를 원했다.
'마지막 페이지니까 그 전까지는 얘기가 다르지.'
아직까지 빈 페이지는 많지만 그 모든 페이지가 창염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을 터. 창염의 말마따나 10000페이지 중 9900페이지는 창염의 것일지라도, 나머지 16명이 약 6페이지 정도는 가지고 있다.
나는 그 6페이지 조차도 창염으로 쓰고 싶었지만, 히로인들에게 있는 '문제'를 해결하려면 어쩔 수 없이 내가 누운 침대에 그들을 들여야 했다.
'세계가 이렇게 생겨먹은 걸 내가 어떻게 하겠어.'
대형 마수 토벌계 게임이었으나 액션 RPG였다면 모를까, 이 세계는 기본적으로 19금 미연시를 베이스로 한 세계였다.
'결국에는 히로인의 문제도 19금 적으로 해결할 수 밖에 없다는 거지.'
박라온에게서 터뷸러스를 꺼내지 않으면 박라온은 영영 터뷸러스에게 풍속성 마력을 빼앗기게 될 것이며, 그 끝에는 터뷸러스에게 몸을 강탈당해 자연발생괴인이 되고 말 것이다.
'그건 절대로 안 되지.'
나는 그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창염에게 허락을 먼저 구하기로 했다. 나는 누워있던 상태 그대로 마력을 허공에 피워 푸른 카나리아를 만들어냈다.
- 왜 불렀냐는 거시야.
미니피닉스는 내 손바닥 위에서 나를 오연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창염의 의식 일부가 구현화된 미니피닉스는 은근슬쩍 창염으로서 나와 대화하고 있었다.
"이유가 있으니 불렀지."
나는 미니 피닉스를 내 얼굴 옆에 놓고 고개를 돌렸다. 몸을 옆으로 뉘이고, 미니피닉스에게 먹이를 주듯 안주머니에서 작은 물건 하나를 꺼내 건넸다.
"안 나올 거냐?"
나는 나와 미니피닉스 사이에 큐브를 떡하니 놓았다. 미니피닉스는 옆으로 누워 나와 얼굴을 마주한 채 딴청을 부리고 있었다. 큐브를 눈앞에 두고도 멀뚱멀뚱 나를 바라보는 모습에 나는 기가 막혔다.
"언제는 의견도 안 묻고 불태우더니."
- 왜 불렀냐고 묻는 거시야.
"알면서 뭘 물어? 안에서 내 생각 읽고 있을 거 아니야?
- .......
나는 큐브를 집어 미니피닉스의 부리 앞에 놓았다. 그에 미니피닉스는 고개를 훽 하고 돌려 반대로 누웠다. 내게서 등을 보인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나는 큐브로 미니피닉스의 등을 쿡쿡 눌렀다.
"진짜로 안 나와? 아니면 내가 무슨 부탁을 할 지 알고 진짜로 삐진거냐? 맞지? "
미니피닉스는, 창염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이제와서 시치미 떼도 소용없어. 큐브 있으면 네 의식이 밖으로 나오는 거 알고 있다고."
- 모른다는 거시야.
큐브 하나의 영향으로 이미 창염의 의식이 미니피닉스에 깃들어 있다는 걸 내가 뻔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창염은 나와의 대화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진짜 어떻게 안 되겠냐?"
- .......
내가 창염의 입장이어도 솔직히 거부할만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 번 더 부탁했다.
"그.... 내가 정말로 염치없기는 한데, 그래도 박라온의 도움을 엄청 많이 받은 건 사실이잖냐."
"그건 어디까지나 게임 속에서 있었던 일이잖아요."
드디어 창염이 대답했다. 목소리에는 날이 서있고, 나는 반가운 마음에 창염의 날개를 향해 손을 뻗었다.
찰싹-!
내가 손을 뻗기가 무섭게 날개를 펼쳐 내 손을 쳐냈다.
"건드리지마요. 성질 뻗치니까."
"알았어. ...그래도 말이야."
나는 손가락을 살짝 떼고 창염을 설득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게임 속 일이라도 엄청 고생시킨 건 사실이지. 내가 걔를 뭐 내 것으로 만들겠다 그런 것도 아니고, 그냥 보답하는 마음으로 SS로 만들려는 거야. 수속성 SS로 둬봐야 뭐하겠어? 히드라 속성 카운터 치고 펜릴이랑 싱크로 시키려면 풍속성 SS급이 되야 하잖아."
"그래서 박라온이랑 그렇고 그런 짓을 하시겠다?"
"......."
유구무언이다. 하지만 그게 박라온이 내건 조건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본인이 아픈 건 참을 수 있지만, 유이신을 아프게 할 수는 없다잖아."
"허이고, 참 잘난 히어로 나셨네."
"히어로들이 착해빠진 건 너도 잘 알고 있잖아."
박라온은 터뷸러스를 자신의 안에서 제거하는 것은 수용했다. 하지만 그걸로 인해 터뷸러스가 다른 이의 속에 들어가 고통을 주는 것은 단호히 거절했다.
설령 그것이 죽어도 다시 부활하는 괴인 유이신임에도 불구하고.
"남들한테 피해를 끼친다면 그냥 자기가 평생 안고 가겠다고 강짜를 부리는데 어쩌겠어. 그나마 괴인은 부작용이 덜하잖아."
"궁성은 마력이 먹혀도 괴수의 코어로 그만큼 회복할 수 있겠죠. 앞으로 평생동안 마력이 깎여나갈테고, 매일같이 코어를 먹어야하겠죠."
창염의 말대로, 유이신에게 터뷸러스를 집어넣어 숙주로 삼는 것은 유이신을 희생양으로 내세우는 일이었다.
"터뷸러스를 이용해서 궁성을 성질변환 시키려는 생각이군요."
"그래. 일종의 인챈트나 칭호같은 거지. 가을이가 촉수꺼비의 힘으로 촉수를 사용했던 것처럼, 터뷸러스의 힘이 들어가면 분명 유이신은 강해질 거다."
인간인 박라온은 터뷸러스에게 먹히는 마력을 보충할 방법이 없어도, 괴인 유이신은 코어 섭취를 통해 마력을 늘릴 수 있지 않은가.
"유이신은 또 왜 그렇게 챙겨요? 이제는 히로인 아닌 사람이랑 해볼려고 생각을 바꾸셨나?"
"무슨 소리야. 내가 부하 여자를 왜 탐해? 나는 어디까지나 청화단 간부니까 잘 대해주는 거야. 실제로 본인도 잘 노력하고 있고."
비록 유이신이 히로인은 아니어도 여자였지만, 그 이전에 내 조직의 조직원이자 간부였다. 유이신 본인도 그만큼 노력을 하고 성과를 내고 있으니, 나는 유이신에게 그럴듯한 보상을 내려줘야 했다.
"잠깐만요."
창염이 날개를 들어 내 말을 막았다. 뭔가 마음에 걸리는 게 있나보다.
"부하 여자?"
"어. 몰랐어? 유이신, 김지화랑 아주 질펀하게 하던데."
"......흐음, 그래요? 그러면 좋아요."
창염은 유이신의 화살이 다른 이를 향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마음을 놓은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는 어떨 지 모르지만.
"그러면 이제 허락해 주는 거냐? 터뷸러스 이식하는 거."
"...취지는 이해하겠어요. 당신이 히로인 또 죽게 내버려두게 하면 욕은 내가 먹을테니까, 박라온을 살리는 것 까지는 이해하죠. 하지만."
창염이 몸을 바르게 뉘이며 내 목젖을 향해 날개끝을 겨눴다.
"근데 왜 그 방법이 그 둘을 절정으로 보내버리는 거죠?"
"......아프게 안 하려면 그게 최고 아니냐."
"쾌락으로 고통을 덮어버린다?"
"고통을 고통으로 덮어버릴 수는 없잖아. 다행히 내가 그건 할 수 있고."
수면제를 투여한다?
이능력자에게는 수면제가 소용이 없었다. 설령 수면제를 투여해서 재운다고 하더라도, 박라온은 고통에 잠에서 깨버릴 것이다.
기절시켜서 작업을 한다?
어지간한 괴수도 아니고 S급 괴수가 뱃속에서 튀어나오는데 안 아플리가 없다. 분명 후유증이 장난 아닐 것이다. 심장이 꿰뚫리는 고통 정도여야 파과의 고통을 덮을 수 있지 않을까.
"뭣보다 한 시간 뒤면 인도 도착하는데 아픈 상태로 인도에 가게 할 수는 없지않냐."
"생리라고 하고 쉬게해요. 다리 절뚝거리면서 아픈 티 팍팍 내면 누구든 속아넘어갈 거예요."
"이거 완전 사람 다됐네. 생리도 안하면서. 박라온 아픈 건 생각 안 하냐?"
"흥. 아프던지 말던지. 그것까지 내가 왜 신경써줘야 해요."
"그건 그렇네."
나는 창염의 날개에 손을 올렸지만, 창염은 여전히 내 손을 쳐내며 내 손길을 거부했다. 결국 나는 침대로 몸을 날려 창염과 얼굴을 직접 마주했다.
창염은 나를 올려다보고 있다.
"그러지말고 허락해주라. 응?"
"웃기시네. 그걸 허락구하고 하려는 이유가 뭐예요? 내가 허락을 해 줄거라고 생각했어요?"
"그야 도의적으로 네 허가를 받아야 하니까."
"도의? 푸흐흐, 결국에는 당신 마음 편하자고 그러는 거 아녜요."
맞다. 괜히 창염에게 말하지 않고 저질렀다가는 뒷감당을 할 수 없으니, 속 편하게 창염에게 허가를 구하고자 부른 것이다.
"그래. 나는 마음 편하게 선택할 거야. 그러니까 네가 결정해."
나는 큐브를 미니피닉스의 부리 앞에 놓았다.
"큐브 없이 그걸 하면 분명 박라온은 엄청 아파할 거야. 큐브로 이계신의 미연시 버프가 없다면, 분명 쾌락에 고통을 잊기는 커녕 뱃속이 찢어지도록 아프겠지."
"진짜 치사하네요."
창염은 도끼눈을 뜨며 나를 노려봤다.
"내가 이걸 막으면 어쩌실 거예요? 큐브를 먹어버린다면."
"박라온은 펜릴을 찾을 때까지 끊임없이 터뷸러스에게 잡아먹히겠지. 탐식운이 괴수들을 뜯어먹었던 것처럼, 언젠가 박라온도 잡아먹혀서 괴인 터뷸러스가 될 거야."
"그렇다고 내가 이걸 안 먹으면 당신 외도를 허락하는 거 아녜요."
"외도까지는 아니지. 산부인과 의사 선생님이 산모분들 돕는다고 바람나는 건 아니잖아."
내 비유에 창염은 진심으로 어이가 없다는 듯 혀를 찼다. 새의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하, 이게 의료행위예요? 세상에."
"엄청난 대수술이 될 테지."
창염은 나를 눈으로 흘기더니 결국 큐브를 입에 물었다.
"진짜 말이라도 예쁘게 하면 몰라."
"예쁘게 하면 허락해 주냐?"
"아휴, 짜증나."
창염은 인상까지 찌푸리며-새였지만-나를 향해 눈을 치켜떴다. 한참동안 나를 노려보는 눈빛에, 나는 창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이번에는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알았다, 알았어. 안 할게. 미안하다. 내가 너만 나쁜 사람으로 만들었네. 다른 방법 찾아볼테니까-"
퉤-
무언가가 내 미간을 때렸다. 큐브였고, 창염은 큐브를 입에 물었다가 내 얼굴에 침을 뱉듯 뱉어버린 것이다. 큐브는 창염의 옆으로 굴러떨어졌다.
"쓰레기."
"......할 말이 없네."
"알면 됐어요. 결국에는 박라온도 불합리한 이 세계의 설정에 의해 만들어진 피해자니까요. 천가을이 그런 고통을 겪지 않도록 했던 제가 박라온이라고 거부하면 안 되겠죠. 좋아요. 하세요."
"진짜 고맙다."
나는 고마운 마음에 창염에게 입술이라도 선물하려 했지만, 지금의 몸이 창염 본인의 것이라는 것에 아쉬워졌다.
"괴인형으로 바꿔서라도 해줄까?"
"됐네요."
창염은 매몰차게 거절했다.
"이왕 하는 거 제대로 하세요. 당신이 박라온 굴렸던 거 생각하면, 박라온이 당신 천 번은 죽여도 모자라니까. 아니다, 그냥 제가 말해줄까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러지 말자."
언제나 그렇지만, 나는 창염에게 꼼짝도 할 수 없었다.
"푸흐흐. 쫄기는."
창염은 내 마음이라는 가장 큰 약점을 쥐고 있었으니까. 그러니 창염이 아무리 짜증나게 해도, 나는 이해할 수 밖에 없었다.
"큐브 하나만 더 있었어도 불러내서 만지작거리는 건데.... 하아."
"......뭐, 그건 다음 기회에."
이렇게 의식만이라도 불러서 대화하는 것 만으로도 감지덕지였다.
"아 참. 그러고보니 원작에서도 박라온이랑 제일 먼저 하지 않았어요?"
"......."
제일 큰 약점은 내 마음이 아니라 기억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