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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염의 피닉스-300화 (300/1,497)

〈 300화 〉1부 13장 17

우리는 고승의 인도에 따라 타지마할을 한 바퀴 쭉 훑었다. 군데군데 괴수의 난동에 의해 파괴된 흔적이 보였지만, 타지마할은 원형에 가깝게 보존되어 있었다.

"여기는 어떻게 이렇게까지 잘 보존되어 있죠?"

"수 년 전부터 이 근처에서 활동하는 이능력자 한 분이 계십니다. 종종 다른 곳으로 떠나실 때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이곳에서 상주하시죠."

고승은 타지마할의 외곽에 작게 마련된 천막을 가리켰다. 금방이라도 낡아 쓰러질 것처럼 옹기종기 모여있는 천막은 난민촌같아 보이기도 했다.

"저기서요?"

"예. 따로 재산을 모으시지 않기 때문에, 천막만으로 충분하다고 하십니다."

"......흐음."

수상쩍다. 몹시 수상쩍다. 나는 발길을 돌려 천막으로 향했다. 고승은 나의 걸음을 제지하지는 않았다.

"음…."

인기척이 없다. 천막에서 지내는 이들은 꽤 오랫동안 자리를 비운 것 같았으나 누군가에 의해 쭉 관리는 된 흔적이 엿보였다. 내 뒤를 따라온 고승은 인자한 미소로 주변을 가리켰다.

"지금은 아무도 없습니다. 수행을 떠나셨거든요."

"수행요?"

"예. 비정기적으로 제자분들을 이끌고 떠나십니다. 인도 전역을 돌아다니시죠. 한 번 나가시면 최소 일주일입니다."

일주일을 넘게 자리를 비운다면 천막 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나는 계속해서 고승에게 질문했다.

"음…. 그럼 그 사람들은 여기를 무단점유하는 거잖아요. 협회나 정부에서는 뭐라고 안 해요?"

"부끄러운 말이지만 그들이 이런 문화재를 관리할 여력은 없습니다. 사람들이 사는 도시를 보호하기 바쁘지요."

"그렇기는 하죠."

한국도 신서울과 부산 말고는 전부 박살이 났다시피 했으니, 다른 국가들도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인도는 중국 다음으로 지켜야할 민간인이 많았고, 히어로의 수도 많았지만 그만큼 괴수도 많았다.

"혹시 언제쯤 돌아오는 지 알 수 있을까요?"

"......그건 무슨 이유로 물으시는 겁니까?"

고승은 눈썹을 찌푸리며 나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내 옆에 있던 덕배는 내게 작게 속삭였다.

"지금 깽판 각이냐?"

"아뇨. 왜 그렇게 사람이 폭력적이에요?"

나는 덕배를 한 차례 나무란 뒤, 다시 손을 모아 고승에게 합장했다.

"이 곳을 지키시는 분에게 인사라도 드리고 싶었거든요. 혹시 연락은 따로 안 되나요?"

"......예. 워낙에 청빈하시어서 스마트 워치를 들고 다니시지 않습니다. 어떻게 연락을 드릴 방법도 없죠."

"그게 말이나 되냐?"

덕배는 자신의 손목에 걸린 마도기어를 가리켰다. 히카리의 연구 덕분에 마도기어는 이제 굳이 벗었다 끼지 않아도 괴인의 손에 걸렸다.

"요즘 세상에 스마트 워치 없는 사람이 어디있어? 알려주기 싫어서 핑계대는 거 아냐?"

빠악.

나는 덕배의 오금을 발로 차서 넘어뜨렸다. 덕배는 기습적인 내 공격에 무릎을 꿇고 앞으로 고꾸라졌고, 나는 덕배의 후드를 뒤에서 누르며 고승에게 사과했다.

"죄송해요. 얘가 좀 공격적인 친구라."

"...마음에 화가 많으신 분이군요. 괜찮습니다."

고승의 경계는 풀렸지만 여전히 알려줄 생각이 없어보였다. 하지만 나는 고승의 말 덕분에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면 저희 그냥 쭉 둘러보고 있을 게요. 안내해주셔서 감사해요."

"별 말씀을. 아.... 혹시 위험하다 싶으면 소리쳐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금방 달려가겠습니다."

고승은 합장하며 자리를 떠났다. 우리는 천막촌에서 물러났고, 자리에서 일어난 덕배는 씩씩거리면서도 목소리를 낮췄다.

"뭐냐, 한 판 붙으려고 온 거 아니었어?"

"맞기는 한데, 지금은 아녜요. 당사자가 없잖아요. 그리고."

나는 타지마할의 사원으로 들어가는 고승의 뒷모습을 가리켰다.

"저건 인간이에요. 진짜 인간 상대로 싸울 이유는 없죠. 빌런도 아닌데."

"응?"

덕배의 표정이 요상하게 변했다.

"빌런이 아니라고?"

"네. 오히려 빌런이라기보다는 자경단 같은 존재? 방금 얘기했잖아요. 무슨 일이 벌어지면 소리 질러서 자기 불러달라고."

나는 손바닥에 알파벳 A를 그렸다.

"저거 이능력자예요. 개천광 카르나의 은총을 입은 광속성 이능력자."

".....잠깐만. 나 이해가 안 되는데."

덕배는 자신의 코어를 가리켰다.

"은총을 입었는데 괴인이 아니야?"

"네. 개천광이 좀 특이한 애라서."

특이하다못해 아주 독특하기 짝이없다. 다른 정령들이 성주에게 세뇌를 당해 간부가 되면서 모든 인간은 '죽여야 할 대상'으로 여기는 반면, 유일하게 개천광 카르나만이 인간에게 우호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

"어차피 멸망시킬 세상이라면, 그 전까지 마음껏 싸우다 죽어보겠다고 난리피우는 싸움닭이에요."

"그게 인간의 이능력자로 강화시켜주는 거랑 무슨 관계가-"

덕배는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것처럼 인상을 찌푸렸다.

"설마 키워서 잡아먹으려는 거냐?"

"네."

나는 허공에 주먹을 슉슉 내질렀다.

"카르나는 자신을 쓰러뜨릴 영웅을 찾고 있어요."

누군가가 말했다. 괴물을 쓰러뜨리는 건 언제나 인간이라고.

"상대가 인간이라면 자신도 인간으로서 싸우겠다. 정정당당한 걸 좋아하는 전투광입니다."

그래서 '카르나'다.

펜릴이나 히드라같은 괴물의 이명이 아니라, 똑같은 인간으로서 지구의 이능력자를 상대하여 전 인류를 상대로 명예로운 승리를 거두려는 악당.

"다행히 잘 찾아왔네요. 혹시나 싶어서 제일 먼저 와봤는데."

타지마할은 카르나와 일전을 벌이는 장소이자, 1:1 대결을 통해 카르나를 개천광으로 각성시키는 장소이기도 했다. 아쉽게도 본인이 지금 자리를 비웠지만,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으면 곧 돌아올 것이다.

"그럼 이제 어쩔 거냐? 수소문해서 찾아다녀? 너 적어도 외형은 알 거 아니냐."

"아뇨. 여기서 싸울 거니까, 집주인이 돌아올 때 까지는 기다려야죠. 제가 손님인데. 푸흐흐."

나는 마도기어에서 일정표를 꺼냈다. 이전에는 빼곡히 차있던 일정표는 인도로 도착하는 날짜인 오늘 이후로 텅텅 비어있었다.

"인도에 있는 S급 괴수들 처리하면서, 카르나가 올 때 까지 느긋하게 기다리자고요."

"언제까지?"

"음...이틀?"

"한 번 나가면 최소 일주일이라고 하던데?"

덕배의 말은 지당했다. 카르나가 무슨 이유로 수행을 나가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 당장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 인도에 있는 S급 괴수들을 하루에 하나씩 처리한다고 해도, 그동안 카르나가 돌아오지 않으면 이후의 일정은 차질이 생기고 만다.

"연락없는 집주인을 불러내려면 뭐가 제일 좋겠어요?"

나는 엄지부터 중지까지 손가락을 살살 비볐다. 덕배는 내 손가락에서 타오르는 불씨를 보고 인상을 찡그렸다.

"너 돌았냐?"

"에이, 걱정마요."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손가락을 튕겼다.

"어차피 카르나랑 싸우다 보면 다 망가질 곳인데, 내가 먼저 태운다고 달라지는 게 있겠어요?"

화륵.

아주 작은 불씨가 화단에 피어올랐다. 나는 덕배를 데리고 햇빛에 숨어 자리를 이탈했고, 마력의 구를 뭉쳐 하늘 높이 띄웠다.

"태양이 하나 더 있으면 두 배로 더 잘 타겠죠?"

발화점에는 내 마력이 살짝 담겨있을지 몰라도, 햇빛에 의해 확산될 붉은 화마(火魔)는 어디까지나 자연의 불꽃이 될 것이다.

"야, 방화범. 너 전과 하나 더 늘었다?"

"당신 말고 아무도 모르잖아요. 피닉스야 뭐 이미 빨간줄 가득하니까 상관없고, 청화는 집행유예나 다름 없는 상태인데...."

나는 뉴델리의 협회 지부에서 한창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청화-가을을 스크린에 올렸다.

"알리바이는 이걸로 충분하잖아요?"

적어도 청화는 용의선상에서 벗어날 것이다.

"푸흐흐."

나는 불꽃이 터져나가 집주인에게 닿을 것을 상상하며, 인도 협회의 본부를 향해 하늘을 날았다.

* * *

마하트마의 기만 아닌 기만에 대해, 집행관은 상황의 이점을 살려 소위 '갑질'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인도 땅에서 저희가 처리하는 괴수는 온전히 저희가 챙기도록 하겠습니다. 코어, 부산물 모두다."

"끄응...."

집행관은 강짜를 부렸다. 불평등하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집행관이 내세운 조건은 일방적이었다. 웃으며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집행관은 사실상 청화를 위시한 이능력자들의 힘을 이용해 마하트마를 겁박하고 있는 것이다.

-너희 힘으로 괴수 잡을 수 있어? 우리가 잡아줄게. 대신 괴수 잡은 거 우리가 챙겨간다.

"꼭 그렇게 다 가져가셔야 겠습니까?"

마하트마는 마지막 자존심을 세웠다.

"S급 괴수를 레이드한다면 최소 대대 단위의 히어로가 필요할 겁니다. 서울 수복 작전에서 최정예로 100여명의 히어로를 편성했던 이유도 그렇지 않습니까? 괴수나 빌런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S급 괴수를 쓰러뜨리기 위함이었죠."

마하트마는 지원 부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원정대가 주력이라고 할지라도, 10명이 채 되지 않는 인원인 만큼 대대적으로 지원 병력을 파견하겠다는 말이었다.

"예. 하지만 저희에게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이번에 원정에 참가한 히어로들만으로도 S급 괴수는 충분히 상대가 가능합니다. 기억하시나요? 청화 양이 흑염룡을 이용해 물지기를 쓰러뜨렸던 것."

그에 집행관은 도움은 전혀 필요없다고 강하게 나섰다. 옆에 있던 히어로들이 다소 난감해할 정도로 집행관은 생떼에 가깝게 인도측의 지원을 거부했다. 마하트마는 울컥한 듯 했으나, 고개를 숙이며 집행관을 진정시켰다.

"그야 당연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후의 흑사갈 소동 때문에 빛이 바래기는 했으나, 분명 S급 괴수를 조종해 다른 S급 괴수를 쓰러뜨린 위업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흑염룡이 갑옷을 입은 거인으로 변신해 물지기를 때려잡았죠. 그건 정말 멋졌습니다."

마하트마는 속이 타들어가는 듯 연신 컵을 들어올렸다. 그의 잔에는 연노란빛 레모네이드가 한가득 담겨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10명도 안 되는 인원으로 움직이는 것은 너무 위험합니다. 물론 청화 양께서 도움을 꺼려하시는 건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만, 그래도 저는 인도의 협회 대표로서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건 이해합니다. 그럼 이렇게 하죠. 저희의 인원수가 적어서 괴수 레이드가 불안하다고 하신다면 어쩔 수 없죠. 청화 님,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네?"

집행관은 잠자코 있던 가을에게 공을 넘겼다.

"청화 님께서 바라신다면 본국으로 돌아가 중대, 아니 대대 단위의 원정대로 재편성을 하겠습니다. 서울 수복 작전 때보다 더 많은 규모의 히어로가 원정대로 참가하게 될 것입니다."

"저, 저기…."

가을은 진심으로 당황했다. 어차피 피닉스가 개천광 카르나의 문제를 해결하기 전까지는 사실상 인도에 묶여있어야 하는 셈이었는데, 집행관은 오히려 인도를 떠나겠다고 강수를 놓아버린 것이다.

"그러니까…."

가을은 우물쭈물하다가 집행관의 표정을 읽었다. 냉막할 정도로 단호하였으나 가을은 아주 미세하게 떨리는 동공을 보고 말았다.

적당선에서 타협은 하겠으나, 마하트마가 간섭하려는 건 원천봉쇄하겠다.

집행관은 작전의 진행에 있어서 완전한 독립적인 부대를 운용하고 싶어했다. 가을은 그것을 직감했고, 고개를 살짝 떨구며 마하트마에게 부탁했다.

"지, 지금 계신 분들로도 괜찮을 거예요. 하지만 이미 다들 합을 맞춰본 분들이니, 여기서 더 늘어나면 또 그만큼 시간이 늦춰지겠죠?"

"음…."

가을의 말에 마하트마는 침묵했다. 늘어나는 사람이라는 의미에는 비단 한국의 히어로 뿐만 아니라 인도의 이능력자들도 포함하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청화 님께서 그리 말씀하시다면야…. 제가 너무 욕심을 부렸습니다."

"아녜요. 이해해요."

마하트마는 순순히 물러섰다. 그에 집행관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지원에 대한 규모는…."

"레이드에 있어서 지휘 권한은…."

마하트마와 집행관의 연이은 입씨름 끝에 결론이 나왔다.

인도의 협회에서는 히어로 부대를 지원하지만, 집행관은 원정대로 참가한 히어로들에 대하여 독자적인 지휘권을 가지게 되었다.

"대신 야차를 잡아도 코어는 양도하겠습니다. 다른 괴수들에 대해서는 저희가 모두 가지는 걸로 하죠."

"...알겠습니다."

S급 괴수 야차를 우선적으로 처리하고, 그 뒤에 혹시나 있을 S급 괴수들이 있다면 나머지는 전부 가져가겠다. 마하트마는 확정적으로 야차의 S급 코어를 확보하고자 했고, 집행관은 있지도 않을 S급 괴수의 모든 것을 가지겠다고 정했다.

"흑사갈 소동이 다시금 일어나리라 생각하십니까?"

"글쎄요. 이 넓은 인도 땅에 S급 괴수가 적어도 하나는 더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진작에 나왔겠죠. ...좋습니다. 원대한 호의, 감사드립니다."

길고 긴 협상이 끝났다. 마하트마는 이전의 인자한 얼굴로 돌아가 손으로 얼굴을 부채질했다.

"역시 이런 쪽은 저와 성미가 맞지 않는군요. ...후우. 그래도 이 정도면 다행-"

삐비비빅!

마하트마의 스마트 워치가 갑자기 크게 울리기 시작했다. 단순한 전화나 문자라고 하기에는 어딘가 소름이 끼치는 문자. 마하트마는 양해를 구하고 문자를 확인했다.

"타지마할에...화재 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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