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3화 〉1부 13장 20
환룡이 청소를 받는 사이, 나는 밀실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이상하게 교성은 울리지 않았고, 방 안에는 십 수개의 코어에 묻은 끈적한 액을 닦아내는 봉효가 나를 맞이했다.
"이 시간에 어쩐 일로...?"
"코어 좀 받으러 왔는데요."
"그렇습니까? 잘 오셨습니다."
봉효는 장갑을 벗고 옆에 놓인 골판지 상자를 들어올렸다. 달걀을 보관했던 모양인지 닭이 캐릭터가 되어 붙어있었고, 그 안에는 칸칸마다 흑사갈의 코어가 담겨있었다.
"라스푸틴 덕분에 만들어진 A급 10구입니다. 오늘 나온 따끈따끈한 물건이죠."
"코어가 무슨 달걀이에요?"
"적어도 그 정도의 생산량은 장담할 수 있습니다. 피닉스 님이 구해주신 라스푸틴의 성기 덕분에, 거의 하루에 S급 하나는 확정적으로 나오고 있지요. 전반적으로 생산되는 코어의 품질도 향상되었구요."
"......그거는 좋은 소식이네요."
나는 침대 위로 고개를 돌렸고, 그곳에는 흑사갈이 다소곳한 자세로 잠들어있었다. 환룡이 라스푸틴의 성기로 캘리펠라와 재미를 보고 있었던 이유는 아무래도 흑사갈에게 휴식을 주기 위함이었던 모양이다.
"오늘 생산은 이걸로 끝?"
"예. 여러 번의 시행착오 끝에 깨달은 건데, 24시간 돌리는 것 보다는 충분한 운동과 수면 시간이 확보된 상태에서 생산하는 게 더 품질이 좋았습니다."
"......완전히 가축이 되어버렸네요."
이제 흑사갈에게도 근무 시간이 정해진 걸까. 근무 시간에 열심히 일하면 휴식이 보장되는 시스템이 된 모양이었다.
"그럼 이제 저러고 그냥 쉬어요?"
"아닙니다. 라스푸틴을 받아들이는 게 8시간이고, 중간중간 환룡단 단원들이 쉬다 갑니다. 본인도 그 정도는 느긋하게 즐기고 있고요."
"역시. 정신은 몸 따라가기 나름이니까요. 고마워요, 봉효."
"...별말씀을."
새삼스럽지만 정말로 고마웠다. 비록 S급 코어는 내가 지난번에 몇 개 챙겨가 남은게 없었지만, 덕분에 A급 코어를 상당량 확보할 수 있었다.
"고마워요. 이건 잘 챙겨갈게요."
"별말씀을. 피닉스 님 덕분에 제가 이렇게 즐겁게 살아갈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하."
백청영은 손가락을 살짝 비볐다.
"이번에는 또 어떤 의도로 불태우신 겁니까?"
"그야 여러 의도죠. 잠깐, 이번에는?"
"국회의사당 불태우신 거,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후후."
역시 이 놈은 문제가 많은 녀석이다. 죽이기에는 그 능력이 너무나도 아까웠다. 뭣보다 환룡의 옆에서 이런 식으로 보좌해주는 것만으로도 조금은 고마웠다.
"아 참. 오신 김에 두 가지 알려드리겠습니다."
"왠지 들으면 더 스트레스가 늘어날 것 같은데."
"하나는 천자에 관한 것이고, 하나는 서울에 관한 것입니다."
"천자는 관심없고, 서울 쪽만 얘기해요."
설령 천자가 환룡에게 뒤가 뚫리더라도 나는 관심이 없다. 백청영이 서울에 관해서 얘기할 거라는 건 도대체 무엇일까.
"흠흠. 피닉스 님께서 서울을 너무 살기 좋게 만드신 바람에, 아무래도 전세계에서 서울로 몰려들 것 같습니다."
"이미 신서울만 하더라도 올라오려는 사람으로 수두룩한데요?"
"그것이...."
백청영은 상당히 곤란한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배를 타고 밀항하는 것은 애교고, 직접 목선을 만들거나 수영을 해서 바다를 건너가려는 자들이 요 근래 자주 발생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서울에 대량의 외국 난민들이 모여들 것으로 예상됩니다.
A급 코어 여럿과 캘리펠라를 데리고 인도로 돌아가려는 내 발걸음에 상당히 무게가 실리는 말이었다.
* * *
중국에서 돌아오는 내 날개는 천근만근처럼 무거웠다.
'벌써부터 난민이 생기면 안 되는데.‘
서울로 모여드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나는 것은 이해가 갔다. 빌런이기는 해도 세계 최강인 내가 상주하고 있고, 아키택트의 힘에 의해 서울은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 인구 천 만은 커녕 그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시설도 만들어지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난민을 안 받을 수는 없어.'
전부다 괴수의 위협으로부터 살아남으려고 목숨을 걸고 넘어오는 자들이다. '굳이 난민을 받아들여야 하나'라는 물음에 대해서는 당연히 나도 재능있는 사람만 받아들이고 불필요한 사람은 쫓아내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나중에 큰 반동으로 돌아오게 된다.
'영역 밖의 인간들이 전부다 괴인이 되어버리지.'
그것도 성주의 영향을 직접 받아 폭주하기 시작하는 괴인들로, 방주를 몰고 도착한 성주는 전 인류를 괴인으로 만드는 바이러스를 뿌린다. 이를 그나마 막을 수 있는게 SS급이나 S급들이 자신의 마력을 주변에 퍼뜨린 무형의 결계였다.
원작에서 괴인이 된 인류의 수는 대략 5억. 성주가 극단적인 수단을 사용해 그 수가 다소 과한 감은 없잖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괴인이 되는 인간의 수는 엄청나게 많았다.
'인간의 부정한 감정을 먹고 괴인은 태어난다.'
살의, 공포, 질투, 탐욕 등등. 온갖 부의 감정을 머금고 태어나는 괴인들의 대부분은 빌런이었고, 이것이 원작 극후반에는 도심 밖의 난민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게 되어 지구는 종말의 직전까지 이르게 된다.
'그렇다고 무작정 막지는 못 해.'
그러면 히로인 한 명이 한국에 들어오지 못하게 된다. 서남아시아 일대에서 밀항과 망명을 수 차례 거듭하며 정착할 장소를 찾는 집시 소녀-슈리. 그가 한국에 들어온 배경이 하필이면 난민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일단 돌아가면 캠프를 구축해야겠네요."
서울에 들어온 난민들은 청화단의 하수인이 되어 괴수와 싸우는 최전선에 서게 될 것이다. 적어도 그 정도의 각오가 없다면, 5년 뒤-혹은 그보다 더 당겨질 수 있는 시기-에 생지옥이 될 서울에서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진짜 시간이 부족해...."
안 되겠다.
돌아가는 즉시 야차를 잡고, 킨나라를 잡으러 가야겠다.
나는 태양빛에 몸을 숨겨, 인도 공군 전투기의 레이더에 걸리지 않게 백나로 호에 안착했다.
* * *
귀환한 나를 반기는 것은 무수한 시안의 홍수였다. 히어로들은 저마다 슈트를 그려 내게 건넸고, 나는 종이를 받아들며 슬쩍 팬텀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설명 제대로 한 거 맞아요?”
“응. 이것처럼 방어구 만들 수 있다고 말했어.”
팬텀은 내가 두고간 베일을 들어올렸다. 팬텀이 입고 있던 백색의 코트는 히어로들의 손에 들려 한창 연구당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게 A급 코어를 갈아서 만든 옷이라는 말이지....”
“우리도 이런 거 가능한 겐가?”
우사와 풍백은 팬텀의 코트를 요리조리 뜯어보다 내게 질문했다. 나는 그들이 건넨 슈트 디자인을 보고 비웃음이 나왔다.
“당신들, 사실은 이명 마음에 든 거죠?”
“.......”
둘은 침묵했다. 신화 속 존재라는 삼사에 걸맞게, 우사와 풍백이 그린 의복은 여러모로 진짜 당시 하늘을 모시던 사제와도 비슷했다. 우사나 풍백이나 그림은 괴발개발이었지만, 나는 종이에 실린 마력을 통해 그들이 원하는 의복을 머릿속에서 그릴 수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빌런이 도와주는 건데 안 부끄러워요?”
“세상에 히어로에게 장비를 챙겨주는 빌런이 어디있나?”
“그건 그렇지. 껄껄, 더군다나 공짜로 선물 받는 거 아닌가. 설마 방어구 안에 스위치를 누르면 폭발하는 장치가 들어있는 건 아니겠지?”
“설마요.”
나는 괜히 찔렸지만 둘에게 그런 수작을 부릴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선의로서 제공하는 방어구이며, 이 장비들을 통해 S급 괴수에 대한 레이드는 더욱 쉬워질 것이다.
“아참. 색은 검은색 베이스 청색이 포인트예요.”
“...그래서야 완전히 청화단의 색이 아닌가?”
“의도한 건 아니예요. 옷의 색깔은 코어가 베이스가 되는데, 제가 원료로 쓸 코어는 다 이거라서.”
나는 품에 안고있던 달걀 포장의 껍데기를 열었다. 각각의 구멍 안에는 따끈따끈한 A급 코어가 영롱히 빛나고 있었고, 가장 충격을 받은 이는 집행관이었다.
“...도대체 어디서 이런 걸 가져온 거예요?!”
“중국이라고 했잖아요. 어떻게 가져왔는지는 비밀.”
흑사갈에 대한 것을 알게 되면 히어로들의 나에 대한 신뢰도는 바닥을 칠 것이다. 그냥 정체불명의 조력자가 있다고 오해하게 내버려 두는 것이 훨씬 나았다.
“그래서 이제 인당 두 개 씩 쓰면 될 것 같은데....”
내가 꺼낸 A급 코어는 열 개였다. 고로 이것을 적당히 나누면 화권에게 둘, 풍백에 둘, 우사에 둘, 궁성에 둘. 그리고 나머지 두 개. 딱 맞아 떨어졌다.
“나는?!”
템페스트 레이디가 종이를 들고 성질을 부렸다. 하지만 나는 템페스트 레이디가 혼신의 힘을 다해 그린 도안을 받지도 않았고, 그에게 코어를 배정하지도 않았다.
“방문 값 해결되기 전까지는 없어요.”
“아, 아니! 너 지금 내가 방문 부수고 들어갔다고 짜증내는 거야?”
“네.”
나는 어깨를 으쓱이고 히어로들을 하나하나 가리켰다.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마력에 나에 대한 경계심은 있어도, 적어도 당장은 그리 적의가 심하지 않았다.
“제가 저 싫어하는 사람한테 뭐하러 좋은 거 주겠어요?”
하지만 템페스트 레이디는 처음부터 내게 반감은커녕 적의까지 보였다. 함께 서로 도와 이계신에게 맞서 싸워야 함에도 불구하고, 템페스트 레이디는 나를 향한 적의를 숨기지 않았다. 그런데 굳이 템페스트 레이디를 도와 줄 필요가 있을까?
“청화 님. 부탁드립니다. 템페스트 레이디가 워낙 광검 님을 잘 따르던 사람이라 그렇습니다.”
“아, 그렇지. 이상형이라고 아주 쫄래쫄래 따라다녔었지, 끌끌!”
“누, 누가 광검 님을 따라다녀요?”
템페스트 레이디가 얼굴을 붉히며 격하게 성질을 부렸다. 다른 히어로들은 템페스트 레이디를 놀리느라 한창이었지만, 나는 내가 알고 있던 것과 상이한 정보에 절로 고개가 갸웃했다.
“......? 당신 마포랑 결혼한 거 아니었어요?”
내 의문에 템페스트 레이디가 입이 쩍 벌어졌다. 나는 직감했다.
“아, 스포했다.”
“크허허! 싫다고 아주 생 난리를 부리더니, 결국에는 결혼하는 구나!”
“그, 그딴 미래 인정할 수 없어! 내가 그 놈이랑 왜 결혼을 해?!”
“미안해요. 5년 뒤에 쌍둥이들이 몇 살인지 기억이 잘 안나서. 벌써 결혼하신 줄 알았네요. 죄송! 푸흐흐.”
템페스트 레이디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나는 미안한 마음에 주머니 속에 넣었던 코어 두 개를 다시 꺼냈다.
“이건 사과예요. 당신 몫이죠.”
“.......”
템페스트 레이디는 워낙 충격적인 스포에 코어를 챙길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물고빨고핥고 하면서 10년을 사귀었다가 자기가 차버렸던 전남친과 다시 결합하여 결혼까지 한다는 게 그리도 충격적이었을까.
“...어쨌든 당장은 같이 싸워야 할 팀원이니까, 개인적인 불편함은 제가 넓은 마음으로 묻어두기로 하죠. 적어도 저 싫다고 뒤에서 쏘거나 하지 마요. 그 때는 빡 돌아서 죽여버릴 수도 있으니까.”
“.......”
나는 템페스트 레이디의 도안을 받았다. 여전히 몸매에는 자신이 있는지, 몸에 딱 달라붙는 바디 슈트 타입이었다.
다음은 화권과 궁성. 둘은 순순히 내게 도안을 건넸다. 궁성은 단촐하기 그지 없는 디자인이었지만, 화권은 백지였다.
“뭐예요? 하기 싫다는 거?”
“...아닙니다. 정하질 못해서.”
“30분이나 시간이 있었을텐데?”
“예.”
화권은 겸연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렇다고 해서 템페스트 레이디처럼 완강히 거부하는 건 아닌 듯 했고, 진짜로 정하지 못해서 백지로 제출한 것 같았다.
“좋아요. 당신 거는 내가 알아서 해줄게요.”
이걸로 다섯 명에 대한 코어 배분은 끝났다. 내가 종이를 거두고 있는 사이, 팬텀이 내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우리는?”
“우리?”
팬텀은 자신과 집행관, 그리고 운사를 가리켰다. 셋 모두 내색하지는 않지만 은근히 기대하는 눈치였다.
“우리 거는 없어?”
“......푸흐흐.”
나는 주머니속에 손가락을 집어넣으며 씩 웃었다.
“왜 없겠어요?”
내 손에 흑사갈이 낳은 S급 코어 셋이 손가락 마디마다 끼워져 있었다.
“이거 차별 아닌가...?”
우사가 코어의 마력을 느끼고 어이가 없어했지만, 내가 더 어이가 없었다.
“당신들은 덤인데요.”
“.......”
어디까지나 셋을 챙겨주려다 안 해주기는 뭐 해서 A급이라도 맞춰준 것이건만.
“집행관. 콜커타 도착까지 얼마 남았어요?”
“이제 1시간 남았습니다.”
시간은 아주 넉넉했다. 나는 야차를 원활히 잡기 위해, 남은 시간동안 히로인과 기타 히어로들을 위한 장비를 만드는데 주력했다.
‘보스전 전에 장비 갱신하는 건 기본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