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8화 〉1부 15장 6
히메지 히카리는 해킹의 천재다.
오사카에서 부산으로 오는 배편의 티켓을 해킹을 통해 하나 구했던 만큼, 히카리가 마음만 먹으면 사람 하나를 전산적으로 몰락시키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
그걸 굳이 하지 않는 이유는 크게 흥미가 없기 때문이다. 히카리가 마도공학쪽에 관심이 없고 해커가 되는 길을 걸었다면, 아마 전 세계의 핵버튼은 히카리에 의해 제어당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히카리에게 정부의 데이터베이스를 뒤져봐라고 말한 건 엄연히 범죄였다.
"흥, 흥흥~? 단장님 전 아내분들은 지금 어디서 뭘 하고 계시나~"
그리고 히카리는 자신이 무단으로 정보를 열람한다는 것에 전혀 개의치 않는 회색같은 아이였다. 광, 암, 환. 세 가지 속성 전부 A급이라는 재능을 가지고 있지만, 그걸 숨기고 협회의 전산망을 해킹하여 자신을 무능력자로 숨겼다.
"아, 단장님."
"네."
"저는 어떤 아내였어요?"
"......여기서 갑자기 기습을?"
히카리는 김누리에 관한 정보들을 데이터베이스에서 전부 뽑아내면서도 내게 질문했다. 미래의 히카리가 발견한 연구 성과에 대해서는 그 이론을 듣기 꺼려했지만, 미래의 자신이 어떤 식으로 연애를 하는 지에 대해서는 궁금해했다.
"음, 별반 다를 게 없죠? 온천 좋아하고, 연구 좋아하고."
더 말하고 싶은 건 많았지만 히카리 또한 현재 미성년자였다. 그 이상의 내용을 말하는 것은 위험했다.
"그럼 저희 오빠는 저랑 단장님의 결혼을 가만히 놔뒀어요? 우리 오빠 성격 봐서는 단장님이고 뭐고 썰어버리려 했을텐데."
"네. 아주 제대로 썰어버리려 했죠. 오빠가 언니가 돼서 못하게 됐지만."
오죽하면 사람들이 그러더라. 히카리 엔딩의 진히로인은 히토미라고.
"그럼 단장님, 저희 오빠 언니로 만들어 드릴까요?"
히카리는 제법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당연히 히카리의 뒷통수에 손가락을 쿡쿡 찔러 히카리의 말도 안 되는 상상이 현실이 되지 않도록 막았다.
"그런 농담은 하는 거 아녜요."
"왜요? 이런 말하기는 그렇지만 우리 오빠 엄청 예쁜데."
"얼굴은 예쁘더라도 사람 성격이 개차반이잖아요."
"단장님, 그거 아세요? 그 말 가장 많이 듣는 사람은 따로 있다는 거."
이게. 히카리는 실실 웃으며 나를 돌려서 깠다. 물론 내가 내 편한대로 행동하는 경향은 있지만, 그래도 질풍객이랑 비교될 정도는 아니다. ...아닐 것이다.
"히카리, 지금 나 저격한 거예요?"
"아뇨? 청화 님 저격한 건데요."
"청화가 왜 개차반이죠?"
"사람들이 다 그러더라고요. 가루라 님이 인간 세상에 적응 못하고 어린애처럼 난동을 부리는게, 사실은 가루라 님의 성격이 아니라 청화 님 본성이 아닐까 막 그러더라고요. 히히."
"......."
히카리는 검색을 하는 도중에도 여유롭게 한 손으로 타이핑을 하며, 내게 가루라가 일삼은 온갖 행패가 담긴 영상을 보였다.
[가루라! 속옷만 입고 신서울 대로 활보. "수영복이니까 문제 없는 거시에요."]
[괴수의 본성은 음란? 가루라, 자꾸만 화권에게 엄한 손.]
[충격! 가루라, 화권과 동거 중! 괴수와 하는 남자가 있다?!]
"다 진짜네."
가루라 녀석, 이승형 옆에 붙여서 인간 세상에 적응하라고 했더니 이계에서 온 망나니 짓을 일삼고 있다. 천가을에게만 맡겨놓을 수 없으니 이승형에게도 때때로 맡겨놓았는데, 그 때마다 이런 사고를 치고 다니고 있다.
"단장님, 안 불편하세요?"
"뭐가요?"
"그래도 몸은 거의 비슷하고, 얼굴은 똑같은데."
"음...."
나는 말할까 말까 잠시 고민했다. 미래의 치태같은 걸 밝히는 셈이고, 그 대상은 아직 어린 존재였다. 하지만 히카리도 아는 건 다 아는 아이였고, 천가을-마스커레이드의 비사도 어느 정도 알고 있다.
"히카리."
"네."
"만약에 질풍객의 동영상...흠흠. 그런게 나돌아다닌다면 어떨 것 같아요?"
"생각만해도 싫죠."
히카리는 몸서리를 치며 질색했다. 나도 그 기분은 이해가 됐다. 질풍객과 히카리는 눈동자 색을 제외하고 얼굴만 보면 쌍둥이라고 의심될 정도로 닮았으니까.
"하지만 만약에 그 영상의 당사자가 그런 것에 전혀 개의치 않다고 생각하면 어때요?"
"......세상에 그런 사람이 어디있어요?"
"그쵸?"
그런 사람은 없어도 그런 정령은 있다. 사람들이 태양을 보면 눈이 멀면서도 때때로 태양을 바라보는 건 당연한 거라나 뭐라나.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지만, 당사자가 그렇게 이야기하니 어쩔 수 없다.
"그러니까 가루라가 저러고 다녀도, 크게 신경쓰이지 않는다 그 말입니다."
"흠.... 단장님도 참 특이하신 분이네요. 정령들은 다 그런가?"
"아마도 창염의 피닉스만 그럴 듯?"
"......알겠어요. 일단 다 찾아봤는데 말씀드릴게요, 가출하기 전의 상황을 보니까 왜 가출했는지 이해가 돼요."
검색이 끝났다. 히카리는 김누리 가족에 관한 모든 전산 데이터를 긁어모았고, 나는 김누리 일가의 자금 흐름과 GPS 위치의 변화를 확인했다.
"서울에 집사고 애들만 두고 신서울에서 직장을 다녀? 그러니까 애들이 당연히 엇나가지."
"심지어 서울에 초등학교랑 중학교 빨리 개교하라고 독촉하는 시위에도 나가고 있어요. 아마도 중학생인 두 자매의 학업이 끊기지 않게 두려는 것 같아요. ...부부 모두 찜질방에서 출퇴근 하는 모양인데요?"
"세상에."
원작에서도 그랬지만 정말 돈 욕심 하나는 독하다 싶었다. 자식들에 대한 내리 사랑을 물질적 부분으로 채워주고 싶어하는 건 이해가 가지만, 정작 두 자매에게 필요한 건 정신적 안정감이라는 걸 두 부부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괴인이 되지.'
박라온은 불행이 본인에게 점철되어 있다면, 김누리는 자신이 아닌 가족으로 인한 불행으로 점철되어있다. 그래도 중학생 시절은 행복했다고 들어서 그 때 까지는 그냥 놔두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김누리를 거두어야겠다.
"히카리.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어쩌시려고요? 은하대학교 응시 원서 몇 부나 모집되었는지 오피셜로 떴어요. 여기서 원서 하나 더 추가하면 난리가 날 걸요? 내정자가 있는 시험이었다면서."
"은하대학교는 어디까지나 발판이죠. 양성을 위한 전문 교육 기관. 히카리는 인터넷에 썰을 좀 풀어줘요."
U튜브를 통해 네트워크를 뒤집어놓는 것도 히카리의 전문이다.
"청화단에서 인턴 모집한다고."
"네. …? 단장님, 어디 가세요?"
히카리는 막 자리를 떠나려는 나를 불러세웠다.
"서울. 직접 찾아보려고요."
"아무리 그래도 사람 찾으려면…. 아하."
"네. 부탁 좀 하려고 합니다."
서울에서만큼은 김서방 찾는데 특화되어있는 존재가 있다. 이럴 때 써먹으려고 아군으로 만든 만큼, 드디어 진가를 발휘할 때다.
'히로인들이랑 숨바꼭질 하는 것 만큼 빡치는 미션이 없지.'
어느새 내가 없어도 청화단 전체를 지휘하는 우수한 지휘관이 된 등대에게는 미안하지만, 사실 그를 괴인으로 만든 가장 큰 이유는 '사람찾기'였다.
"아 참.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있는지 좀 확인해줄래요? 노파심이 생겨서."
"얼마든지 말씀하세요. 히히, 다른 언니들한테는 절대로 얘기 안 할게요."
히카리는 입에 지퍼를 꾹 채우며 실실 웃었다. 나는 창틀에 발을 올렸다가 고개를 돌려 히카리를 노려봤다.
"다른 오빠한테 말할 거면서 무슨."
"...."
"됐어요. 어차피 알려질 거였으니까."
나는 날개를 펼치며 히카리에게 '세 명'의 이름을 넘겼다. 히카리는 마지막 이름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이 이름은?"
"한 번 알아봐줘요. 그 이름 없으면 제가 챙기려고 하니까."
"어…. 단장님! 저 유하 언니, 사장님한테 배팅했는데요!!"
"...그런 의미에서 찾는 거 아니니까 오해하지 마요."
분명히 시끄러워질 일이었지만, 이제 찾긴 찾아야한다.
김누리를 제외하고도 아직 행방을 찾지 않았던 이들이 몇몇 존재하니까.
<아그니> 슈리 정.
<성녀> 이유나.
그리고…. <신관>, 백청화.
* * *
<그 시각, 여의도 카페 Padre Juan>.
"서울까지 와서 가출? 너도 참 대단하다."
천가을은 김누리의 머리칼을 헝클이며 헛웃음을 지었다. 김누리는 뚱한 얼굴로 천가을의 손을 쳐냈고, 천가을은 깔깔거리며 김누리를 위아래로 훑었다.
"정말 중2야? 초딩인 것 같은데?"
"아줌마랑 다르게 저 존나 클 거거든요? 대세는 베이글인 거 모름?"
"어머. 얘 말하는 싸가지가 딱 중딩이네?"
천가을이 대번에 적의를 보였다. 어른스럽지 못하게 나이를 지적당하자마자 바로 짜증을 부렸지만, 김누리와의 나이 싸움에서 지는 건 천가을이었다.
"제가 지금까지 먹은 밥그릇 두 배는 더 늘려야 아줌마 나이 따라잡을 걸요?"
"얘가 뭐래니. 나 14년 동안 식단관리하면서 살았어. 네가 다이어트의 괴로움을 알아?!"
"많이 먹으니까 그만큼 살이 쪘겠죠? 어휴, 가슴봐. 살 빠질 때 가슴만 안 빠졌어요? 드럽게 크네."
"흠, 흠흠."
김누리는 나름 공격을 넣었지만, 천가을은 오히려 고개를 치켜들며 가슴을 활짝 열어젖혔다.
"애도 아니고...."
유이신은 아이처럼 티격태격하는 천가을의 모습에 새삼스럽기도 하고 한심스럽기도 했다. 천가을이 이렇게 감정적으로 나오는 경우는 그리 흔치 않았다. 모처럼 상식적이고 정의감 있는 사람을 찾았더니, 아무래도 인선을 잘못 선택한 것 같았다.
"팬텀, 일단 부모부터 찾아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긴 하지. 너, 빨리 말해. 엄마 아빠 어디있어?"
"......빼애애애액!!"
김누리는 일부러 빼액 소리를 내며 난동을 부렸다. 목덜미까지 붉히면서, 카페 안에 손님이 '여자 넷'밖에 없다는 걸 무기로 삼아 떼를 쓰기 시작했다.
"어머. 얘 쪽팔리는 거 알면서도 지랄하는 것 좀 봐. 보통 철판이 아니네?"
"싫어어어어! 나 청화단 들어갈래에에에! 집에 들어가기시러어어어어어어!!"
"한 번만 더 시끄럽게 하면 서비스 안 준다냥."
김누리의 등 뒤에 있던 녹색 미소녀 고양이귀 메이드 아르바이트생이 김누리의 옆에 조각 케이크를 들이밀었다. 녹색으로 쭉 찢어진 날카로운 눈동자에는 살기가 번들거렸고, 김누리는 침을 꼴깍 삼키며 기가 죽었다.
"...죄송합니다."
"맛있게 먹으면 된다냥. 대신 이거 꼭 다 먹어야 한다냥."
냥냥 말투의 알바생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음료들을 내려놓았다. 일행은 메이드복에 고양이귀, 거기에 사뿐사뿐한 발걸음으로 사라지는 알바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사장님 취향 한 번 독특하시네. 알바 안 쓰던 이유가 다 있구나."
"직업정신이 투철한 사람이군요."
"서울에서는 저렇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거야? 무섭네. 역시 청화단 들어가는 게 답인 거임."
"......."
흑발의 여인은 홀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외형은 청화단의 일원인 '청화'를 몹시 닮아있었으나, 행동은 몹시 조신하고 어색해보였다.
"너 왜 그래? 오랜만에 인간으로 돌아와서 어색하니?"
"......."
검은 여인은 펜과 종이를 꺼내 빠르게 휘갈겼다. 여인은 도저히 목소리를 낼 생각이 없어보였다.
[너는 지금 이게 인간의 문제라고 생각하나?]
여인은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가 얼굴이 시뻘게졌다. 변신과 함께 나타난 검은 고딕 드레스는 노출도가 상당히 심했고, 드레스에는 망사같은 프릴이 달려있었다. 천가을은 입꼬리를 들어올리며 비웃었다.
"쯧. 그러니까 왜 숨기고 있었어? 진작에 인간형으로 돌아갈 수 있었으면 이렇게 걸리는 일은 없었을 거 아냐."
[나라고 이러고 싶겟-]
북북북. 여인은 말을 글로 적다가 종이가 모자랐다. 결국 머리를 쥐어 뜯으며 고개를 처박았고, 한숨을 푹 내쉰 뒤 입을 열었다.
"......나라고 이러고 싶겠나."
"어, 방금 피닉스랑 거의 비슷했다. 하지마, 그거. 말투 바꿔."
"...이런, 씁."
"이해합시다. 원래 흑염룡이었던 사람이니. 흐흐흐."
유이신은 여인, 흑염룡을 보며 마찬가지로 입꼬리를 비틀었다. 검은 머리칼에 쭉 찢어진 붉은 눈동자는 말 그대로 흑염룡이 인간의 모습을 갖춘 듯 했다.
"가루라랑 똑같은 거잖니? 깔깔, 너도 이제 청화 페이스란다."
"나는 원래 몸이 있었다고...!"
"그럼 너도 진짜로 S급 달면 되겠네. 나 기억안나?"
천가을은 코트 뒤를 가리키며 어깨를 으쓱였다.
"확실히 경지에 오르기 전까지는 내놓고 다녔죠."
"그래. 너도 네 수준에 이르면 네 원래 몸을 되찾을 수 있을 거 아냐. 이건 네가 자초한 일이다?"
천가을은 손가락을 흔들며 흑염룡을 비웃었다.
"아직도 A급에서 못 벗어나니까 그런 거 아냐. S급 되면 몸도 바꿀 수 있을텐데."
"말이 쉽지...!"
"......."
세 간부들의 대화에 김누리는 포크를 입에 문 채 눈을 초롱초롱 빛내고 있었다. 유이신이 제 몫으로 나온 연녹색의 케이크를 슬쩍 김누리에게 밀었다.
"그래서 이 아이, 어떻게 하실 겁니까?"
"당연히 부모님한테 보내야-"
"빼...애...액...."
김누리는 아주 조용한 목소리로 떼를 썼다. 가출일자가 무려 2주가 넘어가는 여중생의 독기에, 천가을은 그만 기가 질려버렸다.
"좋아. 네 의지가 어느정도인지 한 번 보자고."
천가을은 자신들의 앞에 놓인 서비스, 민트초코 케이크를 전부 김누리의 앞에 밀었다.
"이거 다 먹으면 내가 특별히 우리 단장한테 너 소개시켜줄게."
"어, 진짜요?"
김누리는 바로 포크를 들었다.
"개꿀."
으적. 으적, 으적.
"......."
천가을은 그 날 걸신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