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8화 〉1부 15장 16
뉴클리언이 전신에 방사능을 두르고 달려온다. 단순무식한 돌격이었고, 체내의 방사능을 방출하며 달려드는 뉴클리언의 돌진은 분명 위협적이었다.
하지만 위협적이기만 할 뿐, 오히려 피하기는 입에서 레이저를 쏠 때 보다 쉬웠다.
[느려.]
쾅!
뉴클리언이 이마를 결계에 처박았다. 얼음장벽이 크게 흔들리며 얼음조각이 우수수 떨어졌고, 뉴클리언의 이마에는 약한 서리가 내려앉았다.
[멍청이.]
나는 날개를 펼쳐 빠르게 뉴클리언에게서 도망쳤다. 뉴클리언은 짐덩이를 세 개 달고 있는 나의 속도를 쫓아오지 못했다.
"마! 천천히 날아라!"
"그럼 들이박을텐데?"
"피닉스여! 멈춰라! 화살을 쏘지 못하겠다!"
세 정령이 내 몸 위에서 옥신각신했다. 나는 카르나와 석하랑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꽉 붙잡았고, 둘은 나를 마주보는 환룡의 몸을 잡고 지탱했다.
[아 글쎄, 지금 공격하면 반격 세게 잡히는 돌진패턴이라니까.]
"패턴이 뭐가 중요한가! 때려잡으면 그만인 것을!"
[지금 딜 넣어봐야 안 박히니까 그냥 좀 참아라.]
카르나는 회피가 강요되는 패턴에도 맞상대를 원했다.
하지만 뉴클리언의 몸에는 체내에서 방출된 방사능 소용돌이가 불꽃처럼 휘감겨 있었고, 이미 브라흐마스트라를 먹어치운 것처럼 공격을 전부 무효로 만들었다.
"이, 이거 놓아라! 내도 하늘 날 수 있다!"
[느려터져서 레이저 패턴도 못 피하던 애가 무슨.]
석하랑은 자신이 직접 날기를 원했다.
"나도 날라카면 빨리 날 수 있다!"
[네가 제일 느리니까 좀 가만히 있어라.]
그러나 석하랑은 유유자적하게 날아다니는 나비같은 타입이지 결코 그 속도가 빠르지 않았다. 뉴클리언의 속도가 석하랑을 훨씬 상회했고, 나는 가장먼저 석하랑부터 낚아챈 다음 하늘을 날아야했다.
"둘 다 그냥 시키는 대로 하면 안 돼? 정신 사나워 죽겠네."
오직 환룡만이 가만히 달라붙어있었다.
환룡은 둘을 나무라는 것 같았지만, 나 혼자 움직이면 충분하다는 걸 눈치챈 이후로 하품까지 하며 두 명에게 안겨있었다.
환룡은 움직이기 귀찮아했다. 그래서 내가 둘을 붙잡고 나는 것에 꼽사리껴서 패턴이 끝날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을 요량인 듯 했다.
날아서 피하고자 하는 나.
자기 혼자서 날려고 하는 석하랑.
화살을 쏘아 공격하려는 카르나.
아무것도 하지 않는 환룡.
정말 말그대로 환장할 것 같았지만, 나는 속에서 끓어오르는 분을 마력으로 태워 전속력으로 날았다.
"니, 그냥 놓아버린다!"
"응, 그래봐야 영체화."
"에이, 이렇게 된 이상-"
석하랑과 환룡이 티격태격하는 사이, 카르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나는 식겁하며 날개를 수직으로 세워 몸을 뒤집었다.
[환룡! 쟤 눈 가려!]
"뭐? 눈은 왜-"
"브라흐마스트라---!!"
카르나가 눈을 번쩍 떴다. 안광이 번쩍였고, 카르나는 네발로 달리는 뉴클리언을 향해 '눈빛'을 쏘았다.
□□□----!!
카르나가 눈으로 브라흐마스트라를 발사했다. 눈에서 발사된 금빛의 레이저는 초점이 모이듯 뉴클리언을 향해 발사되었다.
지지지지직!
방사능의 소용돌이를 뚫은 카르나의 안광이 뉴클리언의 미간을 찔렀다. 뉴클리언은 괴성을 지르며 고통스러워했지만, 미간에 그을음이 생겼을 뿐 별다른 데미지는 없었다.
끄아아앙!!
오히려 카르나가 쏜 브라흐마스트라의 마력을 먹어치우며 달리는 속도가 더 빨라졌다. 나는 날개를 뒤틀어 카르나의 공격을 빗겨나가게 하고 싶었지만, 카르나는 환룡이 얼굴을 덮은 손가락 사이로 안광을 쏘고 말았다.
"......음, 더 빨라졌군!"
"그게 기뻐할 말이야?!"
"야, 야 더 빨리!"
[석하랑아.]
나는 뒤를 살짝 흘기고 날개를 더욱 세차게 펄럭였다.
[너 살쪘구나.]
"야!"
[가슴쪘다고.]
"...그게 지금 할 소리냐!"
석하랑은 얼굴을 붉히며 짜증을 냈다. 초조해보여서 여유라도 찾으라는 말에서 한 말이었고, 석하랑은 아주 잠깐 여유를 되찾았다.
[걱정하지마라. 이제 패턴 거의 끝나가.]
뉴클리언이 결계에 대가리를 박은 횟수만 무려 아홉 번. 그 때마다 뉴클리언의 이마에는 서리가 내려앉았고, 복슬복슬하던 형광색의 털은 물에 젖어있었다.
[나의 창염, 설야의 서리, 둘다 지속적으로 데미지를 넣기에 아주 좋지.]
나의 창염이 뉴클리언을 안쪽에서부터 지지고, 석하랑의 결계는 뉴클리언을 막아세우는 장벽임과 동시에 또하나의 공격수단이었다.
쩌적, 쩌저적.
뉴클리언의 앞발에 묻은 서리가 점점 그 크기를 키워나가기 시작했다. 뉴클리언의 이마에 난 불꽃 모양의 머리털은 이제는 아예 딱딱하게 얼어붙어있었다.
[이제 한 번 정도만 더-]
뀨르륵, 뀨륵.
뉴클리언이 드디어 지쳐서 쓰러졌다. 환룡이 잘라낸 뒷꿈치에서는 계속 피가 철철 흘렀고, 뉴클리언은 달릴 때마다 불꽃 섞인 피를 흘리며 괴로워했다.
풀썩.
뉴클리언이 비틀거리며 옆으로 쓰러졌다. 눈동자에 새겨진 녹색의 마력이 소용돌이처럼 빙그르르 돌았다.
"...1페이즈 끝?"
[그래. 드디어.]
뉴클리언은 기절했다. 혼자서 3D 애니메이션에서 튀어나온 외형의 괴수는 더이상 일어나지 못했다. 나는 날개를 접고 셋을 뉴클리언에게서 멀찍이 내려놓았다.
[그럼 이제부터 해야하는 일이 뭔지 알지?]
나는 셋을 내려놓고 TAT를 꺼내들었다. 마탄이 장전되며 언제든지 총구가 불을 뿜을 준비를 마쳤지만, 다른 정령들은 마지막 순간에도 머뭇거리고 있었다.
[각자 위치로.]
나는 하늘을 날아 뉴클리언을 가로질러 날았다. 정령들은 머뭇거리며 각자의 방위에 섰고, 다들 마력을 일으켜 마무리 일격을 넣을 준비를 마쳤다.
[.......]
나는 미리 예고한대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른 정령들도 다른 정령들의 눈치를 보며 마력을 갈무리했다.
환룡은 언월도를 높게 치켜들어 사선으로 내려 벨 자세를 잡았고,
카르나는 황금 갑옷의 마력을 모두 화살 하나로 변환시켜 시위를 당겼고,
석하랑은 자신의 머리 위에 얼음으로 된 창 하나에 모든 마력을 쏟아붓고 있었다.
철컥.
나 또한 TAT의 총구를 뉴클리언에게 겨눴다. 마탄이 다시 장전되었고, 초격을 날렸던 소태양이 다시 탄환으로 장전되었다.
"......."
지금부터는 눈치싸움이다. 뉴클리언은 이미 2페이즈로 넘어갈 준비를 마쳤고, 정령들은 모두 각자 자존심을 내세우고 있다.
10분.
20분.
모두가 마력만 궁극기에 모으며 서로의 눈치를 봤다. 우리는 어제 하룻밤동안 어떻게 싸울 지 전략을 짰으나, 2페이즈의 돌입을 누가 개시할 것인가 합의를 보지 못했다.
[슬슬 아무나 말하지?]
나는 괜히 초조해져서 먼저 입을 열었다.
[랜덤일 뿐이다. 그냥 아무나 말해. ]
"싫다. 그러면 최약체와 싸우는 거 아닌가."
카르나부터 강하게 반발했다. 카르나는 강자와 싸우고 싶어했고, 그건 괴수가 상대일 때도 마찬가지였다.
[석하랑. 네가 총대를 메라. 히어로잖냐.]
"싫은데? 나도 자존심이 있지! 평양 사태를 잠재우러 온 히어로가 따까리를 상대해서야 되겠나?"
[따까리라니. S급 괴수인 것을….]
석하랑 또한 강하게 반발했다. 석하랑도 싸움꾼은 아니었지만, 나름 또 SS급이라고 자존심을 세웠다.
[환룡아.]
"나는 괜찮은데, 내 안의 샤오린은 싸우라고 하고 있는데?"
환룡은 눈썹을 으쓱였다. 샤오린은 자신의 육체를 기탄없이 환룡에게 넘겨주는 대신, 2페이즈의 시작을 알리기를 거부했다.
[야.]
나는 잠시 총구를 내리고 이목을 집중시켰다.
[니들 나보다 다 약하면서 이러기냐?]
"지랄. 웃기시네. 나중에 한 판 뜰까?"
"피닉스여. 그대의 강함은 인정하나, 그때의 나는 비쟈야가 없었다! 지금의 내 준비는 만전이니라!"
"나도 샤오린도 다시 싸우면 이길 걸? 후후."
[이것들이 진짜.]
어떻게 하나같이 양보를 하지 않지. 나는 절로 한숨이 나왔고, 결국 변신을 해제하고 총구를 다시 뉴클리언에게 겨눴다.
"후우."
원래 이건 김누리 전문인데. 나는 속에서 천불이 났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뉴클리언이 2페이즈를 들어가기는 커녕 상처를 회복하여 1페이즈로 돌아갈 것 같았다.
그러니 내가 포문을 열어야했다. 세 정령들은 침을 꿀꺽 삼키며 내가 입을 열기를 기다리고 있었고, 기절한 뉴클리언까지 내 선언을 기다리는 듯 했다.
"......."
결국 나는 2페이즈의 시작을 알리는 영창을 읊었다.
"...해치웠나?"
뀨아아아아앙!!
뉴클리언의 몸이 일곱가지 마력의 색으로 반짝이기 시작했다.
***
그 시각, 유성 일가 저택 내 개인 연구실.
"오, 슬슬 나온다."
히카리는 X로이드 하나를 해킹하여 자신만이 볼 수 있는 영상으로 전환했다.
화속성, 수속성, 광속성, 환속성 네 개의 결계가 펴진 평양의 전장은 인간과 기계의 눈으로는 볼 수 없었으나, 히카리는 아무렇지 않게 내부를 구경할 수 있었다.
"아, 방금 패턴 바뀌었네? 흥흥~"
히카리는 바로 X로이드의 시각 정보를 바꾸었다.
"화속 4 줄이고, 광속 2 줄이고, 환속은 전환, 수속은...됐다. 히히."
불과 5초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만에 X로이드의 시각 정보는 업데이트되었다. 외부의 시야를 차단하는 결계는 히카리의 빠른 분석에 의해 패턴이 읽혔고, 오직 히카리만이 내부의 전투를 볼 수 있었다.
"와…."
SS급 넷이 괴수 하나를 벌이고 싸우는 전투는 가히 압도적이었다. 피닉스가 힘을 가감하지 않고 싸우는 것도 히카리로서는 드문 광경이었다.
"이게 정령들의 진가…."
결계를 친 이유는 명백했다. 지름만 1km에 이르는 구형 결계를 치지 않았다면, 방사능이 유출되기 전에 정령들의 힘에 의해 평양은 커녕 한반도 북쩍이 전부 날아갈 수준이었다.
"귀엽긴 하네. 한 마리 키우고 싶다."
히카리는 털이 복슬복슬한 뉴클리언을 보고 입맛을 다셨다. 저런 반려 동물이 있다면 평생동안 옆에서 돌봐주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근데 쟤는 좀 그렇네.'
아무리 귀여운 동물이라고 하더라도 괴수는 괴수이며, 그게 방사능을 흘려대는 놈이라면 심적으로 상당히 꺼려졌다.
"아, 뭐가 두 개 나올까~"
대신 히카리는 행복한 미래를 생각하며 기대감에 부풀었다. 뉴클리언을 공략하면 호문클루스 연구도 진척을 보일 것이며, 루살카의 두번째 육체 제작도 훨씬 수월할 것이다.
출력이 똑같은 S+급의 코어 일곱 개.
뉴클리언은 자신의 코어 이외에도 평양 일대에서 S급 괴수나 히어로들을 잡아먹고 각 속성별로 하나씩 코어를 만들어 저장했다고 피닉스는 말했다. 뉴클리언 전투가 끝나면 히카리는 그 코어들을 이용해 호문클루스의 코어를 만들 것이다.
<그노시스>.
히카리가 임시로 이름을 붙인 호문클루스만을 위한 코어.
'이유나라는 언니 못 만나는게 아쉽네.'
히카리는 입맛을 다시며 입학 원서를 살폈다. 차분한 인상에 서글서글한 미소는 사진을 보는 히카리마저도 마음이 안정되게 하는 모습이었다.
"이 언니만 연구했으면…. 아, 아니지. 명색이 <프로페서>가 남의 연구결과를 표절할 수는 없지. 흐흐흐."
히카리는 미련없이 이유나의 데이터를 중요 데이터 보관함에 넣은 뒤, 손을 비비며 뉴클리언 레이드로 눈을 돌렸다.
"아, 시작한다."
[해치웠나?]
결국 히카리의 예상대로 피닉스가 직접 2페이즈의 시작을 알리는 주문을 읊었고, 뉴클리언을 구성하고 있던 마력은 8개로 분화되었다.
"오, 오오오!"
히카리는 눈을 반짝이며 화면을 붙잡았다. 각각의 속성을 형상화한듯한 형형색색의 귀여운 네발 짐승들이 모습을 드러냈고, 그 한 가운데에는 SS급 코어를 가진 '뉴클리언의 본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력 패턴의 분석결과, 그 속성은-
뚜둑.
영상이 끊겼다. 히카리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아, 뭐야?!"
갑자기 해킹이 끊겼다. 누군가의 간섭도 없었고 들키지도 않았는데, 화면이 전부 나가버렸다.
"씨, 잘보고 있었는데 미치겠네. 도대체 뭐야?"
히카리는 황급히 다른 X로이드들로 연결을 시도했으나, 그 사이 또 결계의 패턴이 바뀌어버렸다.
"아아악!!"
히카리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좌절했다. 10시까지 남은 시간은 이제 대략 1시간.
"하나 해킹하는데 2시간 걸렸는데에!!"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다. 히카리는 이를 악물고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
뀨아아앙!!
뉴클리언의 몸에서 튀어나온 일곱 마리 형형색색의 괴수들이 입을 벌리며 울어댔다. 지수화풍광암환. 일곱 가지 속성을 형상화한듯한 괴수들은 1m가 채 되지 않는 초소형 사이즈였다.
♬♩♪.
그리고 그 일곱 괴수들의 한 가운데, 다른 괴수들보다 조금 더 큰 형태의 형광색 네발짐승은 오연한 얼굴로 사방을 훑었다. 크다고는 해도 1.5m가 되지 않았지만, 풍기는 마력과 방사능은 SS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
'벌써 SS가 되었을 줄이야.'
2020년 시점부터 SS였을지는 몰랐다. 원작보다 이전이니 S급이 아닐까 예상하고 있었는데, 그 예상은 보기좋게 빗나갔다.
♬♬.
'진짜' 뉴클리언은 네 방위로 둘러싼 정령들을 눈으로 흘겼다. 누구에게 어떤 괴수를 붙일 지 심사숙고 하는 눈치였고, <해치웠나>를 언급한 나는 그 중 최약체의 두 마리를 맡아야 했다.
뀨앙!
방금전까지 우리가 싸우던 거대 뉴클리언이 적색과 황색으로 줄어든 화속성 뉴클리언.
꺄앙!
그리고 꼬리가 나뭇잎처럼 되어 살랑거리는 연녹색의 뉴클리언.
"아니 이 새끼가?"
암만 최약체를 보낸다고 해도 어찌 대우가 안 좋은 놈들만 골라서 보낼 수 있다는 말인가.
'한 놈은 풀타입이지 풍속성도 아니잖아!'
풀타입이든 풍속성이든 불에 약한만큼, 내게는 너무 상대하기 쉬운 것들이 배정되었다.
"쯧."
빨리 끝내고 다른 정령들의 전투가 끝나기를 기다려야겠다. 일곱 마리 괴수들은 저마다 각자 위치를 잡았고, 마지막으로 뉴클리언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
나는 네 방향으로 펼쳐지는 결계속에서, 화속성과 풍속성의 뉴클리언과 함께 갇혔다.
탕.
탕탕.
"이래서 내가 본체랑 싸우겠다고 한 건데…."
과연 누가 어떤 속성과 싸우고, 또 뉴클리언은 누구를 최강자라고 생각했을 것인가.
"...왜 내가 깍두기를 해야하는 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