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8화 〉1부 16장 13
8월 22일.
나는 중국 쪽에서의 문제를 해결한 이후, 이번에는 러시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스크바에 방문했다. 모스크바는 8월 중순임에도 찾아는 시기 때문인지 날씨가 무척 쌀쌀했다.
"........"
아니다. 나를 바라보는 수보르프의 시선이 싸늘했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딸기 샤베트를 퍼먹었고, 수보르프는 성난 얼굴로 보드카를 거칠게 내려놓았다. 과연 러시아. 물 대신 술을 마신다더니.
"이보시오, 피닉스."
"예. 말씀하세요."
"평양의 위협을 제거해줘서 고맙네."
수보르프는 내게 고개숙여 인사했다. 평양에서 뉴클이언이 폭사하면 러시아도 무사하지는 못했다. 특히 체르노빌 사태를 겪은 이들로서 그 충격은 더할 것이다.
"별 문제 없었어요. SS급 넷이 달려들었으니까."
"그만큼 무서운 존재였단 말인가."
"그렇다기보다는 후폭풍이 신경쓰인거죠."
나는 뉴클리언의 특징과 무서움에 대해 간략히 언급했다. 대외적으로는 혼돈보다 더 강한 존재이며, 생김새가 심장을 떨어지게 만드는 맹수라고 말하며 정보를 은폐했다.
"그런가. 다행이군. 하랑이는 안전한가?"
"네. 몹시 안전해요."
나는 뉴클리언 레이드 이후 바로 다음 날에 석하랑의 멘탈을 케어하였음을 적극적으로 어필했다. 수보르프는 석하랑의 상태를 전해듣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랑이는…정말 강한 아이군."
"예. 세계 최강의 히어로인 걸요."
"그리고 나는 그걸 자네에게서 이야기를 듣고 말이야."
수보르프가 혀를 찼다.
"조금만 참아봐요. 이제 곧이니까."
"그래, 결심이라도 해서 정말 다행이지. 아무튼 다시 한 번 더 말하지만 고맙네. 우리 쪽에서도 옛 북한 땅은 한국의 영토라는 성명을 내도록 하고 지지하겠네."
"그냥은 아닐텐데요."
수보르프는 씩 웃었다.
"그런 의미에서 철길을 깔 생각없나? 괴수들로부터 안전한 라인을 만들어내면 부산까지 철길을 깔 수 있지 않은가. 으허허."
"노골적이네요."
수보르프가 우리와 야합을 한 만큼, 러시아의 온갖 악재에 대하여 적절히 조절할 것이다. 여러모로 나중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고보니 자네는 일본쪽으로는 그닥 손을 뻗지 않던데?"
"손을 뻗을 이유가 없으니까요."
제일 중요한 인재인 히카리가 본국을 신경썼다면 모를까, 히카리부터 본국을 싫어하니 신경을 써줄 이유가 없었다. 수보르프는 보드카를 마시며 잠시 컵을 두드렸다.
"그런데 말이야, 대마도 문제에 우리 딸을 동원한 이유는 뭔가?"
수보르프는 드디어 딸문제를 거론했다. 그는 대마도를 후쿠오카로 밀어내는데 딸이 직접 나섰다가 마력 부족으로 기절한 것에 상당히 불쾌감을 드러냈다.
"그래서 유성에서 전용기 태워서 보내드렸잖아요. 내릴 때에는 마력도 회복되었는데."
"끙."
루살카가 마력을 회복하는 방법은 광검으로부터 마력을 공급받는 것이었다. 수보르프는 그걸 몹시도 불편해했다.
"왜요. 너무 많이해요?"
"......."
수보르프는 두 손을 얼굴에 덮으며 좌절했다. 모든 데이트가 운우지정을 위한 과정인 만큼, 수보르프는 두 부부의 행위에 대해 여러모로 싫은 기색을 풀풀 풍겼다.
"어떻게 방법이 없나?"
"네. 둘이서 좋다고 하는 걸 누가 막아요?"
"자네가 딸아이의 그...선생이라고 들었는데."
"아하. 그게 제일 불편하셨구만."
외형은 여성체인 내가 두 부부의 큐피트라는 것에 수보르프는 오해를 하는 듯 했다. 나는 그 오해를 확실히 정정했다.
"저는 박는데 특화되어있는 사람이에요. 제가 직접 코칭하는 건 광검. 루살카는 그냥 자세만 조정해주죠."
"...허허. 이 화제, 계속할수록 내가 더 불편해지는군."
수보르프는 목이 타는듯 보드카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나도 샤베트를 퍼먹으며 숨을 돌렸다.
"그래서 다시 대마도 문제로 돌아가지. 지금 일본에서 어떤 이야기가 나오는지 아는가?"
"뭐예요?"
"광검 벨로보그의 아내 루살카 아나스타샤가 대마도에 뭔가 수작을 부린게 아닌가 악의적인 루머를 퍼트리고 있다네."
"광검 벨로보그?"
"광검이 허윤환이고 부산 출신이라는 건 공공연한 사실인데 무얼. 이쯤되면 안 믿고 있는 자가 대단한 거지."
"하긴 그렇죠."
네티즌들 대단하더라. 허윤환의 졸업사진과 젊은 시절의 사진을 어떻게 입수했는지, 그 얼굴과 벨로보그의 얼굴을 대조하여 금발 염색에 엄청 더 잘생겨진 광검이라는 걸 발견해냈다.
"괴수도 사람으로 만드는데 죽은 자도 살려낼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겠느냐고 아주 난리야. 죽인 자는 피닉스인데 살려준 자는 청화라니. 정말 통탄할 일이군."
"그거 좋은 날조네요. 채택."
"이런 젠장할."
수보르프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푹 숙였다. 자신의 말이 현실이 될 거라는 걸 직감한 좌절이었다. 나는 수보르프의 아이디어를 적절히 조정하여 세간에 퍼드릴 생각이었다.
"다시 또 돌아가지. 대마도 문제. 벌써 이 말만 세 번을 꺼내는데, 이번에는 좀 이야기를 진행하자고. 우리 딸, 이제 어떻게 할 텐가?"
"일본의 말이라면 걱정마요. 루살카라는 의심이 쏙 들어가게 만들어줄테니."
"뭔가 방법이 있나?"
"네. 지금 수속성 S급이 둘, SS급이 하나 대기 중이거든요. 자질만 그 상태고 실제로는 아직 S급도 돌파하지 못했지만."
"......그, 강화 말하는 건가?"
수보르프는 헛기침을 하며 머쓱한듯 머리를 긁적였다. 나는 그의 몸에서 풍겨오는 마력이 상태를 파악하고 절로 웃음이 나왔다.
"루살카가 도와줬네요?"
"...부정은 하지 않겠네."
대원수 수보르프. 괴수와의 전투에서 내상을 깊게 입었다고 하는 상처입은 호랑이는 딸의 도움으로 S급 히어로로 부활하는데 성공했다. 나는 그에게 손을 뻗었다.
"축하해요."
"고맙군."
나는 수보르프와 악수를 나눴다. 그리고 빠르게 수보르프의 마력 패턴을 훑었다.
"......?"
"방금 뭐한 건가?"
"루살카랑 광검 잘부탁한다는 의미에서 뇌물 좀 드렸어요."
"뇌물?"
딱.
나는 손가락을 튕겼다. 내 손 위에는 푸른 불꽃이 타올랐고, 수보르프는 창염의 기운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
"긴가민가했는데 다시 확인하니까 맞아서. 제 우군이니까 서비스 좀 넣어드렸어요. 이제 당신 화, 수 이중 S예요."
"허."
수보르프는 혀를 내둘렀고, 나는 그에게 엄지를 척 들어올렸다.
"정령의 힘입니다. 정령을 딸로 들인 것에 감사하십시오, 휴먼."
"것참. ...일단 고맙다고 해두지. 아, 혹시 광검도 이런 식으로 강화해줬나? 그래서 그 따위로 강한겐가?"
"아뇨. 광검은 원래부터 강했어요. 평양사태 이후로 온전한 SS에 올랐지만 내부의 정치적 문제로 힘을 숨기고 있었다고 해야할까요."
힘숨찐이라는 말이 틀린게 없었다.
"대마도 문제로 돌아가죠. 그래서 바다를 밀어낸 범인은 루살카가 아닌 다른 이가 총대를 멜 거예요. 석하랑은 원탁이고, 루살카는 모스크바에 있었다고 끝까지 주장하면 되죠."
"그 사람이 누구인가?"
"그건 비밀. 최종병기를 그냥 가르쳐드릴 리가 없잖아요? 푸흐흐."
"김누리, 강하백. 둘 중 하나인가."
"......."
당했다. 수보르프는 역시 마냥 쉬운 남자가 아니었다. 딸에게는 쉽지만 역시 러시아 전역을 지휘하는 남자 다웠다.
'누리야 하랑이의 제자가 되었고, 우사야 국뽕 삼대장 중 물속성이니까 합리적 추론이네.'
대마도를 밀어낸 권능을 가진 동해 용왕이 되기에 가장 적합한 존재였다. 하지만 수보르프의 추론은 거기까지인 모양이었다.
"다른 후보예요. 누구인지는 비밀. 그럼 이제 제가 질문할 차례에요."
"...뭔가?"
"굳이 나를 따로 부른 이유는 지금 둘이서 떡치고 있어서 그런 거죠?"
"........"
수보르프는 침묵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베란다밖으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다리 너머 별궁, 베란다에 알몸으로 가슴을 딱 붙이고 박히고 있는 루살카가 보였다.
아, 방금 눈이 마주쳤다. 루살카는 황급히 결계를 치며 벽을 쳤지만 나는 이미 다 봐버렸다.
"갑니다."
나는 달음박질로 베란다 난간을 밟고 뛰어올랐다. 날개를 펼치며 하늘 높이 뛰어올랐고, 다리끝에 마력을 모았다.
"피닉스 킥!"
나는 루살카의 방 유리창을 깨부수며 안으로 굴러들어갔다. 낙법을 취하며 두 다리로 서니, 침대에는 광검과 루살카가 단정한 옷차림으로 다소곳이 앉아있었다.
"루살카."
"왜 그러니?"
"방에서 당신 야한 냄새가 풀풀 풍기네요."
"......."
성희롱이지만 사실적시다. 방 안에는 루살카의 샅내와 광검의 밤꽃냄새로 가득차있었다.
"모처럼 일찍 온 김에 석하랑이랑 일찍 만날 생각 없나해서 왔더니."
"그, 그게 무슨 말이니?"
"...자세하게 말해보겠나."
나는 8월 26일부터 사흘간 있을 백희아 가문의 개인 소유 섬에서 있을 바캉스에 대해 언급했다. 당연히 석하랑도 참여할 예정이었으며, 성주 외엔 누구든 참가가 가능한 바캉스였다.
"준비는 애들이 알아서 다 할 거예요. 몸만 오면 되죠. 원탁회의 때 만나는 건 혹시 바빠질 수 있잖아요? 그래서 미리미리 얘기하라는 거죠. 원탁 회의 때 서로 데면데면한 상태로 마주보면 어쩔려고 그래요?"
"......."
몇 살 차이나지 않는 모녀지간이 하필이면 같은 직장에 적을 두고 있다. 나는 불상사가 일어나는 건 싫었다.
"결심만 하고 계속 미뤄두는 것보다는 낫겠죠. 뭣보다 하랑이도 속 편하게 바캉스를 즐길 수 있을테고. 어때요? 좋은 제안 아닌가?"
"...잠깐 정도는 들를 수 있을 것 같은데."
"서방님."
광검이 먼저 긍정적인 반응을 내비쳤다.
"오래는 있지 못 해. 하랑이와 하룻밤 함께 지내기도 뭣하지. ...하랑이에게 꼭 사죄하고 싶다."
"만약에 하랑이가 같이 있고 싶어한다면?"
"그렇다면 당연히 장인께 양해를 구하고 하루 함께 시간을 보내야겠지."
역시 어른이 옆에 있으니 못 본 사이에 정신적으로 상당히 성숙해졌다. 나는 광검을 이제 어엿한 아버지의 계단에 올려주게 된 수보르프에게 다시금 감사를 표했다.
"원래는 지금 가는게 어떨까 싶었는데."
"흠흠."
지금은 도저히 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둘의 마력은 상당히 흐트러져있었고, 이 상태로 하랑과 만나러갔다가는 100% 마력의 잔향에서 부부생활을 읽어낼 것이 분명했다.
"당신들 딸한테 어떤 체위로 플레이 한지 들키고 싶은 생각은 없죠?"
"당연하단다."
"물론."
"그럼 루살카, 당신은 앞으로 떡치지마요. 광검은 SS라서 안 들키지만, 루살카 당신은 하랑이보다 약해서 마력 읽혀요."
"......너 우리 죽일 생각이니?"
루살카는 진심으로 소름 돋는다는 듯 눈을 흘겼다. 나는 내가 날짜를 착각했나 달력을 꺼내 확인했다. 날짜는 8월 22일. 길어봐야 일주일도 되지 않았다.
"고작 그 짧은 기간도 못참아요? 당신들이 무슨 남고딩도 아니고 매일같이 안 하면 못 견뎌요?"
"하루라도 거르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단다!"
"걱정마라. 하다가도 혹시 괴수 나왔다는 정보가 들어오면 하던거 멈추고 바로 잡으러 가니."
"자랑이네요. 그러고 다시 돌아와서는 더 강하게 해댔을 거면서."
"...너 이 땅에도 그 조그만 새들 깔아둔 거 아니지?"
"당신들 움직임은 전부 내 손바닥 안이에요. 모든 행동방식의 전제에 떡을 집어넣기만 하면 바로 정답이 도출되는 문제라고요."
두 부부는 침묵했다. 그래도 하다가 멈추는 절제력이라도 가지게 되었으니 장족의 발전이었다.
'진짜 여러모로 깬다.'
카리스마의 대명사, 광검 허윤환이 어찌 이지경이 되었단 말인가. 이건 모두 허윤환을 괴인으로 되살린 은유하의 문제였다.
'어떻게 광속성들은 하나같이 이 모양 이 꼴이지.'
음란한 속성인 빛속성과 음란한 종족인 정령이 한데 모이니 안좋은 의미로 시너지가 폭발했다. 아무리 세계관이 사랑이 넘치는 미연시 세계관이라고 할지라도, 둘의 사랑은 너무 과했다.
"이러다 당신네들이 제일 먼저 싱크로 하는게 아닐까 몰라."
"우리는 매일 싱크로하는데?"
"이제는 서로 눈만 마주쳐도 뭘 원하는 지 알 수 있지."
"피닉스 보는 앞에서 떡치고 싶다고요? 뻔하지."
두 부부는 또다시 침묵했다. 억울한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며 변명을 일삼았다.
"하랑이 보러갈 거라고 다짐했단다! 네가 방금 얘기했잖니! 참으라고!"
"우리가 예전의 그 부산에서 난동을 피운 시절인 줄 아느냐."
"하랑이 문제만 없었으면 바로 벗어던졌을 거면서."
"......."
다시 침묵. 나는 두 부부가 불쌍해서 하루 정도는 도와주기로 했다.
"모처럼 러시아까지 왔으니까 오늘은 마음껏 해요. 오늘은 내가 흔적 지워주고 갈테니까."
"그러면 네가 당일에 지워주면 되지 않겠니?"
"마력의 잔향을 읽지 못하도록 마력을 태워버린다는 얘기였는데."
"...그건 안 되겠네. 아빠가 또 난리가 날 테니. 알았어. 참아볼게…. 오늘 하루 마음껏 하고! 서방님, 오늘이 지구 종말인 것 처럼 하는 거야!"
"물론이지. 나는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너와 한 번 더 할 거다."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면 성주를 죽일 아이디어를 생각해야지 무슨."
괜히 마력을 한 번 비워준다고 한 걸까. 두 부부는 아까 내가 봤던 그 플레이를 이어가기 위해 옷을 훌러덩 벗어던졌다.
"......."
나는 일단 결계를 쳤다.
…
…
…
간단한 코칭 이후, 나는 광검의 색이 진하게 물든 루살카의 마력을 모두 태워버렸다. 루살카는 지쳐쓰러진 상태로 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나 진짜 열심히 참아볼게. 하랑이를 위해서."
루살카의 의지는 결연했다. 나는 그 의지가 무너지지 않기 위해, 의지를 다잡을 좋은 보상을 걸었다.
"하랑이 볼 때 까지 참으면 제가 그거 선물로 드릴게요."
"......!!"
루살카의 눈에 의지가 충만해졌다.
"그럼 그거 지금 주고 내가 그걸로 하면 안 돼? 그럼 내 몸에는 서방님 흔적이 안 남을 것 같은데."
"이 인간이 진짜."
잔머리 굴리는게 영락없는 사람 다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