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염의 피닉스-392화 (392/1,497)

〈 392화 〉1부 16장 27

세계가 혼란에 빠진 시각.

갈색 머리칼의 여인은 마천루의 꼭대기층 창문으로 지상을 내려다보며 숫자를 세고 있었다. 한 손으로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어서 두 손을 동원하고도 두 손가락을 더 접어야 할만큼, 전 세계에 열린 차원문은 많았다.

"아, 짜증나게."

여인, 히드라는 곱슬거리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전세계에 열린 12개의 차원문에서 나온 마룡들은 열심히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이능력자들을 먹어치우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기습은 기습인데 적진 한 가운데에 떨어뜨리면 어쩌자는 거야?"

히드라는 아지다하카의 전술에 기가 막혔다. 자신에게 상의도 없이 일을 처리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 처리하는 방식도 어이가 없고 짜증만 날 뿐이었다.

S급 히어로 12명의 격살.

셀 수 없는 재산 피해.

그리고 각 마룡들을 물리치는 히어로들이 입는 중경상.

그게 아지다하카가 부른 12마리의 마룡들이 차원문 발생 30분 동안 일으킨 피해의 전부였고, 히드라는 기적이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냥 그 피해로 끝날 것으로 예상했다.

"인간 세상에 깊게 침투한 괴인들을 이리도 허망하게 패로 써버리다니. 거기에 기껏 부른 마룡을 적진에다가 소환하면 바로 대처해버리잖아. 아지다하카 이 멍청이가."

히드라는 속된 말로 쪽팔렸다. 마천루 아래에서 소환되어 날뛰고 있는 암마룡 한 마리가 수많은 히어로들의 합공에 힘없이 당하고만 있었다. 절로 얼굴이 붉어져서 지구 내핵까지 숨어버리고 싶은 지경이었다.

"...이러고도 위대한 다크 레기온의 총수를 자처하다니."

일종의 하극상이었다. 자신이 성주, 그러니까 지구의 주인을 자처하며 위대한 주인의 자리를 참칭했다. 간부들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성주가 후에 지구에 돌아왔을 때 의식을 거행할 수 있도록 큐브를 모으는 것.

아지다하카는 그 임무를 버리고 스스로 지구를 정복하고자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 돌발적인 행동의 이유에 대하여 히드라는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다.

"흠, 어쩐다."

이 기회를 이용할까, 아니면 아지다하카에 편승하여 성주에게 반역을 일으킬까. 히드라는 손에 든 차가운 레모네이드를 홀짝이며 걸어가 침대의 앞에 섰다. 그에 옆에 앉아있던 작은 키의 소년이 잽싸게 바닥에 엎드렸다.

"그래, 잘한다."

히드라는 소년의 등을 계단처럼 밟고 침대에 올랐다. 피닉스의 것을 이미테이션한 듯한 황색의 사제복이 소년의 등을 쓸며 나풀거렸다.

"나는 이제 어쩌면 좋을까."

회심의 대마도 어택은 무위로 돌아갔다. 이미 히드라는 자신의 몫 만큼의 대륙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지구의 1/7. 그 모든 영토는 히드라의 눈과 귀가 닿는 영지였다.

[오호호호! 가소로운 인간 놈들!]

TV에는 부채를 열심히 휘두르며 깔깔대는 아지다하카가 보였다. 경박스러워보이기는 하지만, S급 이능력자의 심장을 한 손으로 터뜨리고 그 피를 뒤집어쓴 모습은 세계를 멸망시키는데 미친 악녀와도 같았다.

"세련되지 못하게. 쯧."

"주, 주인님?"

계단 역할을 했던 소년이 몸을 일으켜 쭈뼛거리며 침대맡으로 다가왔다. 히드라는 소년을 보다가 피식 웃으며 몸을 뒤로 눕혔다.

"그래. 너는 올라와서 마사지나 해."

"아, 알겠습니다."

소년은 히드라의 허락을 받자마자 침대위로 올라와 히드라의 등허리부터 손으로 누르기 시작했다. 이능력에 의해 강화된 마사지에 히드라는 누워 엎드린 채 고개를 침대에 파묻었다.

"하아. 어쩌면 좋을까. 내가 나서야 하나? 나 할 거 다 했는데."

"주인님께서는-"

"너한테 대답하라고 말하는 거 아니야."

"...예."

소년은 시무룩한 얼굴로 다시 마사지에 집중했다. 히드라는 엄지를 접고 여덟 손가락으로 침대 시트 위를 간지럽히듯 긁어댔다.

"나중에 성주님오셔도 나는 내 할당량을 채웠으니까 혼날 일은 없고.... 그렇다고 아지다하카가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뛰는 걸 그냥 두고보자니 다크 레기온의 명예가 실추되고.... 흥, 어쩐다."

히드라는 손가락 끝을 맞추며 손등을 교차로 쓸었다.

"나머지 간부들 내 아래에 놓고 밟아주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 흥, 어쩐다."

히드라의 고민은 깊어졌다. 소년은 히드라의 눈치를 보며 서서히 히드라의 사제복 아래의 피부를 강하게 자극하기 시작했다.

"아, 그래. 그러면 되겠다."

히드라가 손뼉을 치며 활짝 웃었다.

"아지다하카가 세계를 정복하면 뒷통수쳐서 낼름 먹어버려야지."

히드라의 섬뜩한 발언에 소년은 숨을 헛들이켰다. 너무한 거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소년은 히드라를 주인으로 섬기는 몸. 히드라가 무슨 계획을 세우든 그 계획을 따라야만 하는 입장이었다.

삐빅.

소년의 스마트 워치가 울렸다. 히드라의 위에서 애를 태우던 소년은 당황했고, 히드라는 소년을 자신의 옆에 놓으며 검지를 입술에 올렸다.

"주인님?"

"비-밀."

히드라는 소년의 반바지를 벗기며 싱긋 웃었다. 소년은 스마트 워치를 살짝 누르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의 반바지 아래에는 어지간한 성인 보다도 더 큰 물건이 꼿꼿하게 세워져 있었다.

"어머, 나한테 밟히는 동안 이렇게 된 거니? 후후, 어서 전화 받으렴. 중요한 곳에서 온 전화잖니."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소년은 헛기침을 하며 스마트워치를 눌렀다. 소년이 보는 스크린에는 다크 서클이 짙게 내려앉은 남자, <집정관> 유영호였다.

[상황 보고계십니까?]

"물론이지."

소년의 목소리가 변했다. 방금 전까지는 외형에 걸맞는 어린 아이의 목소리였다면, 지금은 충분히 나이를 먹은 원숙한 노인의 목소리였다.

"걱정하지 말게. 언젠가 일어나야할 일이 지금 일어났을 뿐이야. 고작 12마리의 암마룡 아닌가. 지마룡도 아니고 걱정할 필요 없네."

[그렇기야 합니다만....]

"신입이, 이제는 히어로들을 믿으시게. 자네가 그렇게 불안해하면 다른 이들도 불안해 한단 말이야."

[그래도 저희 차원에서 뭔가 해야하지 않겠습니까? 다크 레기온이 공식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말았는데. 원탁도-]

"신입이."

소년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우리 <원로원>의 역할이 무엇인가. 우리는 현역에서 물러난 사람들이야. 자네도 현역에서 물러나 집행관에게 모든 역할을 넘기지 않았는가? 아니면 현장에 돌아가고 싶은가?"

[...그건 아닙니다. 실언을 했습니다.]

집정관은 금방 꼬리를 말았다. 소년이 엄한 질책을 이어나가려던 찰나, 히드라가 소년의 남근을 손가락으로 튕기며 장난을 쳤다.

"...음, 뭐 됐네. 자네도 이런 사태에 당황해서 그런 거라 이해하지. 걱정마라. 히어로들을 믿게. 그들은 무난히 이 위기를 넘길 수 있을게야."

[알겠습니다. ...그러면 원로원은 공식적으로 이 일에 따로 성명은 내지 않으실 겁니까?]

"아니지. 제일 중요한 일이 있지 않나. 우리가 해야할. ...흐흣."

소년은 귀두를 튕기는 히드라의 손장난을 웃음과 함께 흘려보냈다.

"이 사태의 이름을 명명해야지?"

['아지다하카 게이트'라고 부르는 건 어떻습니까?]

"......좋은 이름이구만. 쯧."

소년은 혀를 차며 스크린을 흐트려버렸다. 대화를 제대로 이어나가기에는 여러 모로 무리가 있었다.

"아지다하카 게이트라. 유영호라고 했지? 이름 짓는게 빠르고 간결하네. 마음에 들었어. 다음에 내 괴인으로 만들까?"

"주, 주인님. 저를 버리지 마시길, 허억...!"

히드라는 소년의 귀두 사이에 날카롭게 기른 손톱을 찔러넣었다.

"너는 그냥 조용히 닥치고 따르기만 하면 돼. 알겠니?"

"아, 알겠습니다...!"

히드라는 소년의 물건을 손가락으로 희롱하며, 천장에 스크린을 펼쳐 전 세계의 영상을 훑었다.

"그럼 그 잘난 아지다하카 게이트가 어떻게 막히는 지 구경이나 하자. 아, 다 끝날 때 까지 참으면 상을 줄게. 후후."

"흐허억...!"

소년은 아지다하카가 일으킨 난동이 빨리 끝나기를 바랐다.

* * *

우우웅.

괴물은 다리를 절며 의자까지 기어갔다. 아직까지 인간 나부랭이에게 입은 상처는 회복되지 않았지만, 괴물은 불안한 낌새를 느꼈다.

지구에서 이상 반응을 감지.

그리고 그 이상 반응은 다름 아닌 괴물 본인이 모시고 찬양해 마지않는 절대적인 존재의 반응이었다.

그분께서 지구에 있다.

자신이 만든 그릇에 들어가계신지, 아니면 완전히 기억을 잃고 별개의 존재로서 살아가고 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분명히 멀리 떨어진 이곳까지도 그 분의 흔적이 느껴진다는 것.

화신이나 아바타가 아닌, 진체(眞體)가 지구에 있었다. 괴물은 먼저 손을 모아 진심으로 사죄하고 뉘우쳤다.

자신의 의식은 역시 실패하지 않았다. 그 인간 놈들의 방해만 아니었다면, 괴물은 신을 지구에 모시는데 성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당장이라도 돌아가야했다. 자신의 몸이 회복이 덜 되었건, 방주에서 기르는 괴물들이 아직 덜 여물었건, 지구에 파견한 간부들이 뭘 어찌하건 간에 일단 지구에 돌아가야했다. 괴물은 의자에 앉아 수하들에게 손짓했다.

키기기긱.

박쥐를 닮은 듯한 이형의 괴물들이 나타났다. 괴물은 수 백에 이르는 괴물들을 방주의 뒤로 보냈다.

뒤에서 날개짓을 해서 밀어라.

괴물들은 명령을 받고 행성을 뒤에서부터 밀기 시작했다. 빠르게 날개짓을 하며 행성으로 위장해있던 방주는 서서히 궤도를 이탈하여 지구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속도는 원래의 속도에 비하면 더디다 못해 굼뜨기 그지 없었지만, 지금은 파리같은 날갯짓이라도 이용을 해야만 했다.

한시라도 빨리 지구에 가야만 한다.

자신이 모시는 신을 곁에서 자신이 직접 모셔야만 했다.

괴물, 명왕성(星)의 주(主)인은 아직 완치되지 않은 몸을 끌어안았다. 신의 마지막 흔적인 황색의 로브. 주인의 것을 입고 있는 자신의 불경에 사죄해야만 했다.

* * *

"전세계가 난리났다냥."

김펜릴은 창문을 꽁꽁 잠그며 몸을 부스스 떨었다. 서울에 온 사람들, 그중 특히 여의도에 있던 이들은 혼란과 패닉에 빠져있었다.

"사장님. 혹시 무슨 일 있으면 하늘에 대고 '김펜릴!!'하고 불러달라냥."

"...자네는 괜찮나? 어제 왔을 때부터 안색이 안 좋던데."

"아르바이트를 갔던 곳이 건물주니까 여러모로 신경이 많이 쓰였다냥."

"다음에는 아르엘을 보내도록 하는게 어떤가?"

김펜릴은 기겁을 하며 손을 흔들었다.

"그건 안된다냥. 아르엘은 지금 가출 중이다냥. 누구든 알면 찾으러 올게 뻔하다냥. 사장님, 비밀을 지켜주기로 했지 않냥."

"그래도 상황이 이러니.... 가웨인 경이 멘체스터로 갔다고 하지 않은가."

"앗, 그 말 하면 안 되는-"

"네?!"

창고에서 비명소리가 들렸다. 김펜릴은 이마를 손으로 누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이고...."

"아빠가요?! 지금 마룡이 있는 곳으로 갔다고요?! 어디요?!"

"아무리 공식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다고 해도 딸이 부친을 걱정하는 건 당연한 게지. 끌끌. 아무래도 자네는 인간을 조금 더 알아봐야 할 것 같단 말이야."

"20년을 넘게 봐왔는데.... 끙, 알았다냥. 아르엘, 설득할 준비는 됐냥?"

김펜릴은 침을 꿀꺽 삼키며 바닥에 주저앉아, 자신의 몸을 바람으로 구속했다. 그리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아르엘은 김펜릴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본좌를 무슨 연유로 또 부른 게냐. "

"도와주세요."

아르엘은 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숙였다.

"...아버지랑 어머니, 그리고 사람들을 지킬 수 있게 제게 힘을 빌려주세요. ...제발요."

절풍은 빤히 아르엘을 노려보기만 했다.

* * *

<????>

푸른 여인은 구슬 속에 파묻혀 멍하니 누워있었다. 코어만한 구슬은 여인의 몸 전체를 감싸안을 만큼 양이 많았고, 여인은 그 속에서 편안히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여튼 그걸 또 못 참고.

여인은 빈 구슬 하나를 집어들고 하늘로 던졌다 잡기를 반복했다. 여인은 분노를 넘어 해탈한 것 같기도 했다.

뭐…. 이번에는 제가 좀 심했으니까 넘어가도록 하죠. 마침 슬슬 끝도 다가오는 것 같고.

여인은 삭제해버린 기억의 뒷부분을 만지작거리며 절로 미소가 나왔다, 아마 여인이 꼭 쥐고 있는 기억들을 보여줬다면 전면전이 벌어졌을 것이다.

아…그게 어디있더라?

여인은 손을 구슬 사이로 집어넣어 뒤적거렸다.

형형색색으로 빛나는 구슬 중 붉은색으로 반짝이는 구슬은 마치 화속성의 S급 코어를 보는 것 같았다.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몰랐다.

해피엔딩이라…. 푸흐흐.

여인은 엄지로 구슬 표면을 살포시 쓸었다. 손등에 도드라진 힘줄은 구슬을 손아귀 힘으로 깨버리고 싶은 듯 했으나, 여인은 금방 손에 힘을 풀고 피식 웃었다.

흐, 겨우 이정도로 화내면 안 되죠. 그래, 그래요. 진정하는 거예요. 음.

여인은 구슬 속에서 그 어느 구슬보다도 푸르게 반짝이는 구슬을 꺼내들었다.

하아....

여인은 달뜬 한숨을 내쉬며 구슬을 품에 안았다. 무엇보다도 소중하다는 듯, 여인의 얼굴에는 홍조가 피어올랐다.

이런 저를 두고 다른 여자랑 놀아나고 말이죠.... 계속.

여인은 분통을 터트리듯 이를 악 물었지만, 곧 쓰게 웃으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좋으실대로 하세요. 결국에는, 결국에는.

여인은 스스로에게 세뇌하듯 읊조렸다.

결국 이번에도 승리하는 건 나예요. 그러니까...제발 좀 포기하시지.

여인의 몸이 구슬 속으로 파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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