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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염의 피닉스-414화 (414/1,497)

〈 414화 〉1부 17장 22

히드라는 자포자기 상태였다.

'시안이 피닉스였다니.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있어.'

시안을 만난 순간부터 아지트에 들어온 마지막 순간까지, 히드라는 철저하게 피닉스에게 농락당했다. 순정을 짓밟힌 숫처녀마냥 마음이 아려오는게 너무나도 슬펐다. 피닉스는 히드라의 마음을 짓밟았다.

'하지만 여기서 끝낼 수는 없지.'

그러니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다. 어차피 피닉스가 결계를 친 순간부터 히드라의 패배는 확정이었다. 아무리 히드라가 난리를 치더라도 아지다하카, 펜릴이 이곳 지하까지 올 방법은 없을 것이며, 피닉스도 이전처럼 갑자기 의식을 잃고 결계에 갇히지 않을 것이다.

'사실상 여기서 저항은 불가능해. 무식하게 힘만큼은 강한 년이니까.'

애초에 3중 결계를 혼자서 탈출한 시점부터 히드라는 피닉스로부터 철저히 피해다녔다. 아지다하카는 손을 잡고 피닉스를 상대로 전면전을 펼쳐야한다고 주장했지만, 괴인체에서 뱀머리가 마주잡이로 뽑혔던 악몽이 있는 히드라는 피닉스와 다시 싸우기가 두려웠었다.

'지하에 꽁꽁 숨어있을껄. 괜히 이상한 마력 느껴져서 나왔다가 이게 무슨 꼴이야.'

그래서 히드라는 지하로 숨기를 선택했다. 설령 피닉스가 이 지하 도시를 발견하더라도 지하에서는 쉽게 히드라를 쫓지 못할 것이다. 발견이 안 되면 그것대로 좋고, 발견이 되더라도 쉽사리 찾아오지 못할 터.

'...그치만 잘생긴 걸 어떡해!'

그랬어야 하는데 그만 히드라는 시안을, 피닉스를 초대해버리고 말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제 스스로. 피닉스의 말마따나 남자에 홀려서 이성적 판단을 하지 못하게 된 것이 패착이었다.

'결국 이게 내 운명이었던 거지.'

20년전의 피닉스가 말한 대로였다. 다크 레기온의 간부였던 자신들에게 '정령'임을 자각시키고, 자신도 정령으로 각성하겠다며 하와이 화산섬에 스스로를 봉인했던 그는 이 세상에 없다. 혼란스럽겠지만 꼭 이겨내길 바란다며 간부들을 응원하고 사라졌던 그는 사라지고, 왠 이상한 또라이같은 존재가 피닉스가 되어 히드라를 능욕했다.

피닉스는 히드라를 죽이려 한다.

피닉스는 히드라를 정령 지륜으로 각성시키려 한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피닉스의 행동은 정말로 철저하다싶을 정도로 자신을 유혹하려고 갖은 애를 썼다. 자신의 아지트까지 다가와 본방 직전에 정체를 밝히고 결계를 치는 악랄함에 히드라는 모든걸 포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림도 없지.'

딱 하나, 포기할 수 없는게 있다. 그리고 그건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이었다. 20년 간부인생 동안 단 한 번도 해보지 못했던 행위를 하지도 못하고 죽을 수 없다. 다행히 피닉스는 그쪽으로 어찌나 문란하게 지냈는지 남자로서 여자를 희롱하는 온갖 방법을 마스터하고 있었다. 키스 실력만 봐도 허리 놀리는 실력을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처녀로 죽을 수 없어.'

내일 당장 지구가 멸망한다면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말도 있지만, 이왕이면 히드라는 딱 한 번만이라도 제대로 해보고 싶었다. 어차피 히드라가 죽으면 자신의 인격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정령 지륜이 자리를 잡을 것이 아닌가.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고!!'

그러니까 히드라는 염치를 불구하고 피닉스에게 부탁했다. 뚫어달라고. 자신의 처음을 가져가달라고. 어차피 남성체로 아무한테나 박고 다녔을테니, 거기에 간부 하나 늘어난다고 해서 달라질게 무엇 있다는 말인가. 막말로 카르나나 다른 간부들도 아랫도리로 낚아서 배신시켰을 지 누가 안단 말인가.

그리고 이왕 할 거라면 선택지는 하나 뿐이다.

'처녀 떼고 죽는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나니 히드라의 마음은 가벼워졌다. 저항하던 힘을 포기하고 가만히 피닉스를 올려다보고 있으니, 꼭 신혼여행의 첫날밤에 남편에게 야한 웨딩 드레스를 입혀져 강제로 벗겨지는 새댁같은 기분이라 마음이 두근거렸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자.'

히드라는 피닉스가 무언가 대답을 하기를 기다렸다. 아무리 자신이라도 지난 번처럼 뱀머리가 하나씩 뽑혀서 죽는다거나 불에 타 죽는 건 싫었다. 이왕이면 복하사라도 되기를 바랐다.

"......너 왜 가만히 있어?"

히드라는 설마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너 동정이니?"

"......동정은 아닌데."

피닉스는 대답을 얼버무렸다. 동정은 아니지만 직접 하기를 꺼려한다? 키스는 그렇게 격정적으로 해놓고? 심지어 시안일 때 그 거대한 구렁이가 딱딱하게 굳어있던 걸 이마로 직접 느끼기까지 했는데?

"...너 솔직히 말해."

히드라가 서서히 상체를 들어올렸다. 피닉스는 손목을 붙잡고 있으면서도 고개를 위로 들어올리며 히드라의 얼굴을 피했다. 시안이라면 아마 입술을 찍어내렸을 피닉스는 어째선지 히드라와의 입맞춤을 피하고 있었다.

"지금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가정만 아홉개거든? 그 중에는 내 입으로도 차마 얘기하기 힘든 가정이 있어."

피닉스 고문성애자설.

피닉스 고자설.

피닉스 시안 둔갑설.

시안의 별개 존재설.

피닉스 여성 혐오설.

피닉스 동정설.

시안의 구렁이 가짜설.

시안 조루설.

그리고 마지막, 지륜까지 나서서 의견을 나누었지만 절대로 서로 아니라고 확신한 그 설.

"...너 남자로 하고 싶어하는 게 아니라 설마."

"......그래요."

한참동안 눈을 감고 있던 피닉스는 귓불까지 붉어진 얼굴로 울먹거리며 답했다.

"저, 여자 좋아해요."

피닉스, 레즈비언설.

***

창염은 계단을 내려가며 탭댄스를 추고 있었다.

***

히드라는 하필 제일 힘든 부분을 찔렀다. 아무리 백청화의 몸을 되찾았다고 하더라도 내 물건 주인은 따로 있다는 것을.

'박으라고 명령해도 안 해.'

창염이 허락을 해줄 리가 만무하고, 나도 그럴 수 없다. 하지만 상황은 최악의 상황에 빠지고 말았다.

"너 왜 그래? 딱 한 번. 한 번만 해주면 순순히 죽어준다니까? 일생 일대의 부탁이야. 죽기 전에 부탁 하나 정도는 들어줘도 괜찮잖아?"

히드라가 지륜으로 각성하는 계기.

그것은 히드라가 생을 포기하기 직전에 얘기하는 하나의 부탁을 들어주는 걸로 끝난다. 플레이어의 선택과 둘 사이의 관계에 따라서 쉬운 부탁이 될수도, 어려운 부탁이 될수도 있었다.

당연히 미연시인 만큼 쉬운 부탁의 최고봉은 큥큥이었다. 죽기 직전에 사랑을 한 번 나눠달라는 히드라의 애절한 마음에 누가 그 부탁을 들어주지 않겠는가.

그런데 그 부탁이 하필이면….

"왜 하필이면 죽기 직전 마지막 부탁이 쇼타 섹스에요? 당신 철컹철컹하고 싶어요?"

"실제로 미성년자도 아니잖아! 나도 그 정도는 알아! 내가 아지다하카처럼 막나가는 줄 알아?"

그건 그렇다. 적어도 히드라는 전세계 생방으로 분수쇼를 펼치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거야 당연한 거죠. 쇼타콘 취향이 밝혀지면 사회적으로 매장이니까."

"시끄러워. 너는 내 마음을 가지고 놀았잖아. 알고 그런거지? 응?"

"당연히 아니까 일부러 그랬죠."

"......진짜 싫다. 퉷."

히드라는 침을 모아 내 얼굴을 향해 뱉었다. 나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히드라의 침을 피했다.

"뭐 다른 부탁이라면 얼마든지 들어줄게요."

"죽어달라고 부탁하면 죽어줄 거니?"

"당연히 안 되죠. 죽기 전에 태평양 구경을 가고 싶다거나 우주 여행을 하고 싶다거나, 그도 아니면 담배 한 대 태우고 싶다거나."

"죄다 내가 싫어하는 것들이네. 너 진짜 성격 더럽구나. 그런데 왜 내 부탁은 안 들어주는 거야?"

그거야 당연히 네 부탁이 정상적인 범주가 아니니까 그런 거지. 나는 턱밑까지 차오른 숨을 참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 순간.

"......너무해."

울먹거리면서도 음울하고 깊은 목소리가 히드라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히드라와 비슷하지만 다른 목소리.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지륜?"

"사람이 죽기 전에 하는 부탁인데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잖아?!"

지륜이 오히려 히드라를 옹호하기 시작했다.

"잠깐만요. 당신은 또 왜 깨어있어요?"

"20년 전에 네가 간부들 정령인 거 다 까발려서 우리 다 각성했는데? 나는 지륜 잡아먹고 내가 주도권을 얻었지."

"......."

나는 눈을 감았다. 창염은 아무리 불러도 대답하지 않았다. 도대체 20년 전에 무슨 짓을 하고 다녔길래 이렇게 나를 힘겹게 만드는 것인가.

"...그래. 좋아요, 그래서 왜 여태까지 가만히 있었던 거죠?"

"히드라한테 졌어. 봉인 당했고. 20년 동안 히드라 허락 없으면 나오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나와?"

"그래서 지금은?"

"한 소리 하려고 허락맞고 나왔다. 왜? 너 진짜 나쁘다, 어떻게 애한테 그렇게 대할 수 있니? 사람이 죽을 각오하고 죽기전에 하는 부탁인데 그걸 못해줘?"

"그냥 잡아 죽이면 히드라 죽고 당신이 튀어나올텐데 제가 왜 들어주고 싶지도 않은 부탁을 들어줘야하는데요?"

"어머머 얘좀봐. 어째 말뽄새가 창염이랑 똑같네."

"......."

혹시 지륜도 뭔가 알고 있는게 아닐까? 지륜은 콧방귀를 뀌며 나를 비웃었다.

"네가 정령인 창염이 아닌 건 훤히 알겠어. 세뇌된 간부 피닉스의 인격이 뭐 자아로 남아서 활동하는 거겠지. 그런데 너 말이야, 여자 좋아하면 여자랑 박으면 되지 뭘 그렇게 빼는 거야?"

덥썩!

내가 잠깐 방심한 틈을 타서 히드라가 내 뒤로 다리를 걸었다. 설마 집게처럼 다리를 걸어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히드라는 내 장골 뒤에 발목을 걸었다.

"이거 놓지 못해요?!"

"싫어. 히드라한테 박아준다고 약속하기 전에는 안 빼."

어째 정령이라는 것들은 하나같이 간부랑 편먹고 트롤링을 하는 걸까. 나는 오히려 히드라, 아니 지륜에게 잡혀버린 신세가 되었다. 손목을 놓는 순간 지륜은 팔을 뻗어 나를 붙잡으리라.

"당신 미쳤어요? 히드라한테 박으면 처녀 잃는 건 당신도 마찬가지인 거 몰라요?"

"흐아아아아앙! 시안이 불러줘어어어어! 누나 시안이 아니면 안 놀거야아아아아아아! 누나 시안이 꺼어어어어!"

"이런 미친."

"뭐? 미친? 지금 욕했어? 이거 용서 못 해. 지금부터…."

지륜은 도도한 얼굴로 입꼬리를 비틀었다.

"시안이 아니면 입도 뻥긋 안 할 거야."

"......아오, 정령들이란 것들은 하나같이 왜 이 모양 이 꼴이지?"

이래서야 성주가 세뇌를 하며 간부의 인격을 만든게 사실은 폐급 정령들을 구제하기 위한 응급처리라는 설이 힘을 얻게되는 셈 아닌가. 나는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설야도 환룡도 개천광도 다들 어딘가 나사가 빠졌다.

창염은 지랄맞기는 해도 그 지랄맞음 조차 사랑스러웠지만.

"...뭐, 좋아요."

화륵.

나는 우선 괴인형으로 바꿔 지륜의 구속을 벗어나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바로 마력을 이용해 지륜의 사지를 침대에 묶었다. 푸른 불꽃의 사슬이 지륜의 사지에 채워졌다.

"...이러면 이제 대화를 좀 할 수 있겠어."

나는 지륜과의 대화를 위해 10세 백청화로 변했다. 지륜은 그제서야 고개를 돌렸다.

"니들 진짜 뭐하는 거야?"

목소리가 날카로운 걸 봐선 히드라였다. 얼척없는 목소리였지만 나를 올려다보는 눈동자는 독기가 풀려있었다. 나는 히드라의 배 옆으로 다가가 침대에 걸쳐앉았다. 내 손이 히드라의 배 위로 올라갔다.

"크흠흠. 히드라 누나. 내 물건이 못 쓰는 건 아닌데, 주인이 있거든? 그러니까 미안하지만 이건 못 써."

나는 내 코어를 가리켰다. 히드라는 그제서야 뭔가 깨달은 얼굴이었고, 허탈한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일생 일대의 기회가 이리 허망하게…."

"대신 다른 거 얼마든지 해줄게. 들어줄 수 있는 부탁이라면. 아니면 지륜이 직접 말해도 좋아."

히드라가 눈을 감았다. 눈동자의 색은 지륜의 색이었다. 지륜은 굳은 얼굴로 내게 담담히 속삭였다.

"응 쇼타 섹스."

"성범죄자년."

"어차피 너도 어른이잖아! 미성년도 아니면서 자꾸 빼지 말자, 응? 여자끼리 하는 것보다 남녀가 하는게 더 낫지 않겠어? 음양합일!"

"야. 너는 좀 들어가있어. 히드라 누나 불러."

"왜 나는 누나라고 안 불러주는데에에에---아오 시끄러."

히드라는 금방 지륜을 안쪽으로 밀어넣었다. 차라리 대화는 통하는 히드라 쪽이 훨씬 나았다.

"하아…. 정령 각성 시키러 올 때마다 정령은 깨어있는데 죄다 이상하고…. 이대로 계속 가면…."

"시안."

히드라가 담담히 입을 열었다. 그 표정에는 죽음을 눈앞에 둔 이의 회광반조 같은 것이 스치는 것 같았다.

"...꼭 내 부탁을 들어주지 않아도 돼. 패자가 무슨 할 말이 있겠어. 누구 말처럼 남자에게 홀려서 이렇게 되어버린 멍청한 년인 걸. 하지만."

히드라는 슬며시 미소지으며 눈을 감았다.

"히드라가 죽는 순간, 처음으로 관계를 나눈 남자가 시안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사라지고 싶어. 내 마지막 기억의 순간에 네가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시안. 하지만 말이야…."

히드라는 웃으며 살벌한 겁박을 했다.

"내 마지막 기억 속에 나를 죽인 시안이 내게 행복이 아니라 고통만 주고 끝난다면, 내 기억 속의 시안은 영원히 나쁜 사람으로 남게 될 거야."

그리고 그 순간.

내 의식이 어두워졌다.

푸른 신전.

창염은 옥좌에 비스듬히 걸터 앉은 자세로 나를 내려다보며 한 마디만 남겼다.

"하고 싶으면 하세요."

데드 오어 데드.

어딜 선택해도 죽을게 뻔한 이지선다가 내 앞에 놓였다.

그리고 나는 망설임없이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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