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8화 〉1부 19장 4
11월 8일.
나는 흑사갈 베이스의 바이오로이드에 빙의한 앙그와 함께 신서울의 한 다세대주택 정문에 도착했다. 차는 내가 몰았고, 조수석에는 앙그가 타고 있었다. 우리는 오늘의 주인공, 누리가 내려올 때까지 기다려야했다.
"그...누리가 여기 사는...?"
"그쵸. 정확히는 다시 집을 샀어요."
멕시코에서 마약왕을 제압하고 마룡과의 전투에서 막대한 활약을 한 누리는 어마무시한 배당금을 받았다.
히어로가 아닌 청화단의 헌터로서 등록되어 있었기에 마약왕에 걸린 현상금이라거나, 멕시코 인근의 괴수들을 잡고 번 코어 대금이라거나, 그리고 마룡 처치에 대한 멕시코 정부의 사례금이라거나. 누리는 정말 막대한 돈을 쓸어챙겼다.
"원래 누리 집은 경제적으로 쪼들려요. 왠지 알아요?"
"나야 모르지...."
"또 그런다. 그럴 때는 '왜 그러는데? 무슨 일이 있는 거야?'하는 식으로 맞장구를 치라고요. 그런 식으로 대답하면 누가 계속이야기를 해주고 싶겠어요?"
"...미안."
앙그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쭈뼛거렸다. 나는 헛기침을 하고 마도기어를 통해 네 명, 누리 가족의 얼굴을 전부 띄웠다.
"김누리의 부모는 돈이면 뭐든지 다 된다는 물질만능주의자예요. 돈을 많이 벌어서 자녀들에게 부유한 삶을 누리게 해주고, 많은 돈을 상속시켜주는게 부모의 도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죠."
"...그럴 수 있는 거 아냐?"
"그렇긴 한데, 언제나 욕심이 과해요. 당장 서울 노량진 건물 건만 하더라도 그렇잖아요? 있는 돈 없는 돈 팔아서 노량진에 건물을 죽어라 샀고, 결국 원래 살던 집을 팔고 장판도 안 깔린 곳에 텐트치고 잠을 잤죠. 지금이야 가정집 수준은 되었지만."
김누리 가출 사건 당시, 오죽하면 흑염룡의 보살핌을 받던 누리보다 집에서 텐트에 잠을 자던 가온이 더 힘들게 자고 일어났을 정도였다.
"딸들에 대해서 물질적으로는 챙겨줘도 정신적으로는 안정감을 주지 못하느 사람들? 덕분에 누리는 어려서부터 혼자서 의젓하게 자라야했어요. 친구를 사겨봐야...어차피 부모님 따라 집값 비싼 곳으로 이사가야 했으니까 친구도 잘 사귀지 못했고."
"......."
친구가 없다는 말에 앙그는 바로 반응을 해버렸다. 아무리 미성년자라고 하더라도 정령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 나이가 무엇이 중요하겠는가. 마음만 맞으면 친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누리에게는 정서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보금자리가 필요해요. 지금은...청화단이죠. 누리는 헌터 생활을 정말 즐겁게 즐기고 있답니다. 이 건물, 원래 누리 부모님이 팔아치운 거거든요? 근데 누리가 다시 산 거예요. 자기가 헌터 하면서 번 돈을 탈탈 털어서."
나로서도 정말 인연이 깊은 곳이기는 하지만 어차피 이제는 별 의미는 없었다. 단지 주차장이라거나 골목길 인근이 상당히 익숙한 곳이라는 것 말고는 별 감흥이 없었다.
"이정도면 누리에 대해서 잘 알게 되었죠? 나머지는 직접 이야기 해보자고요."
삐비빅.
1층 주차장으로 통하는 엘레베이터가 막 열렸다. 현관문이 열렸고, 안에서 교복을 입은 여중생이 차를 향해 급히 달려왔다. 나는 반사적으로 차를 조작해 차문을 열었다.
"단장님, 달려!"
나는 누리가 문을 닫기도 전에 엑셀을 밟았다. 계단에서 황급히 누리 부모가 내려오는게 보였고, 나는 빛처럼 주차장을 빠져나가 대로로 질주했다. 누리는 마력을 이용해 시속 50km를 넘어가는 차 안에서 아무렇지 않게 문을 닫고 숨을 골랐다.
"후아, 씨발 좆될 뻔 했음."
"...김누리?"
"......아, 단장님 진짜 꼰대처럼 그러기 있음?"
여전히 140cm인 누리는 안전벨트조차 매지 않고 타자마자 불평불만을 터뜨렸다. 하지만 내가 백미러로 슬쩍 눈을 흘기자, 누리는 바로 꼬리를 말았다.
"또 욕해서 죄송합니다. 반성하겠습니다."
"욕은 하지마요. 그래서 이번에는 무슨 일이에요?"
"엄빠가 글쎄...근데 이 언니야는 누구?"
석하랑이랑 같이 지내더니 부산 사투리가 옮았구나. 앙그는 조수석 등받이 너머로 고개를 내민 누리에 어깨를 움츠렸다. 누리는 앙그의 가슴을 보고 깜짝 놀랐다.
"와, 대박. 이 언니야 뭐 새로운 헌터예요? 청화단 뉴페이스? 아니면 단장님 새 여친?"
"...여친?"
"단장님, 이 년은 어제부로 눈이 멀어서 아무것도 보지도 듣지도 못하옵니다. 청화단 간부분들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겠사옵니다. 특히 가을 언니야나 하랑 언니야에게는 더더욱 비밀-"
"얘, 아지다하카."
"헐."
나는 차를 잠시 갓길에 세웠다. 누리의 동공이 격하게 흔들렸고, 앙그는 손을 무릎에 딱 붙인 채 사색이 되었다.
"...였던 존재."
"대박, 대박 사건."
"아지다하카의 인격 아래에 봉인되어있던 존재, 앙그라고 해요. 지금은 보시다시피 가짜 몸에 깃들어있는데-"
"그럼 단장님, 저도 이 언니 힘을 빌리면 이렇게 쭉빵 글래머가 될 수 있는 거죠?! 네?! 그렇다고 해주세요, 제발!!"
누리의 눈에 스위치가 들어갔다. 아직은 성장기지만 미래를 알고있는 나로서는 누리가 신체에 얼마나 트라우마가 있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아무 망설임없이 누리의 미래를 스포했다.
"SSS급 찍으면 키 170에 C컵."
"언니, 앞으로 저랑 친하게 지내요."
"으, 응."
누리는 바로 앙그에게 손을 내밀었고, 앙그는 누리의 검지 손가락만 잡고 살짝 흔들었다. 앙그는 당황한 얼굴로 내게 도움을 요청했다.
"왜요. 생각보다 누리가 사교성이 좋아서 당황했어요?"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누리는 굳이 따지면 인싸예요. 애가 친해질 기회가 없어서 그렇지."
앙그는 배신감이 가득한 얼굴로 나를 노려봤다. 하지만 연이어 이어진 누리의 말에 앙그는 당황했다.
"언니, 한 번 만져봐도 됨?"
"...뭘?"
"찌찌."
노골적인 단어에 앙그는 고개를 푹 숙였다. 부끄러움에 대답을 하지 못하다가 고개를 들어올려 뭔가 말하려던 순간.
"올. 감사."
누리는 그걸 허락으로 듣고 바로 앙그의 가슴을 붙잡았다. 경악한 그 표정은 마치 어린아이가 생전 처음으로 콜라의 맛을 깨달은 듯한 얼굴이었다.
"와, 씁, 대박, 미친, 어우야."
"아, 아니, 자, 잠...흐읏."
앙그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누리의 순수한(?) 손길에 금세 얼굴이 붉어졌다. 나는 미안한 마음에 누리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만해요. 얘 되게 사람 손에 민감한 몸이니까."
"아...인정. 미안해요, 너무 신기해서."
"아, 아녜요...."
"편하게 말하셔도 돼요."
"그, 그래도 될까...?"
"헐. 앙그가 바로 말을 놓다니."
역시 최고의 시너지를 자랑하는 조합이라는 말인가. 비록 자리는 의자 등받이로 막혀있지만, 둘은 벌써부터 제법 잘 어울리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버튼을 조작해 조수석의 문을 열었다.
"오늘 하루 드라이브 해드릴게요. 뒤에서 누리랑 좀 친해져봐요."
"저, 저기...?"
"언니, 뒤에 잠깐 와볼래요? 언니는 왠지 나랑 얘기 잘 통할 듯."
누리는 아예 차에서 내려 앙그를 잡아다가 뒷좌석으로 잡아당겼다. 앙그는 졸지에 조수석에서 뒷좌석으로 끌려들어갔고, 나는 마력으로 문을 닫아 차를 다시 출발시켰다.
"앙그 언니, 들어봐요. 오늘 우리 엄빠가 저한테 뭐라고 했냐면 말이죠...."
* * *
약 3시간.
나는 길따라 바람따라 차를 몰았고, 둘은 화기애애하게 이야기꽃을 피웠다. 물론 2시간 30분 가량을 누리가 떠들고, 내가 한 25분 이야기하고, 5분 정도 앙그가 맞장구 친 것이 대화의 전부였다.
"아하하, 언니 진짜 대박. 그럼 언니 본체를 만나면 나 바로 암속성 S각이네요?"
"그런 셈이죠. 어떻게, 지금 바로 날아갈까요? 차 꺾어서 서해로 들어가면 되는데."
"그, 누리야. 나 아직 마음의 준비가...."
"단장님. 앙그 언니 부담스러운 듯. 다음에 가죠, 다음에."
누리는 이제 앙그를 배려할 정도로 자연스레 대화를 이어나갔다. 앙그는 십년감수한 얼굴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느덧 해는 뉘엿뉘엿 산 너머로 떨어졌고, 나는 누리네 저녁 시간에 맞춰 누리의 집까지 차를 몰았다. 누리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면서 자신의 마도기어를 앙그에게 내밀었다.
"언니, 우리 번호 교환해요."
"으, 응. 그래."
둘은 서로의 손목을 맞대었다. 내장된 마력이 서로의 마도기어에 넘어갔고, 자연히 둘은 고유패턴을 교환했다.
"그럼 앙그 언니, 다음에는 그 얼굴로 보는 거임. 약속?"
"...그래."
누리는 앙그와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했다. 누리가 살갑게 앙그와 이야기를 나눈 덕분에, 앙그는 부담감을 덜고 본체-아지다하카의 얼굴로 누리와 직접 마주하기로 마음을 다잡았다.
"단장님, 조심히 들어가셈!"
"당신도요."
누리는 문을 닫고 공동현관문을 열고 쏙 들어가버렸다. 나는 지체없이 차를 돌려 신서울을 빠져나왔다.
"누리 재미있죠?"
"...친구없다더니."
"친구가 없는 거랑 사교성이 좋은 거랑 다르죠. 그리고 지금은 친구 많아요. 청화단 애들이랑 얼마나 친하게 지내는데."
청화단 모두가 누리의 가정환경을 알고 있지만, 그 누구도 누리의 환경에 대해 동정을 하거나 위로하지 않는다. 누리의 능력이나 배경이 뛰어난 것도 있지만, 누리 본인도 한 명의 헌터답게 지내기에 미래처럼 열등감에 빠져있지는 않다.
'그새 가슴에 열폭하기는 했지만.'
자기가 각성해도 왜 흑사갈만큼 안 되냐고 짜증을 내기도 했지만, 그 정도는 애교로 넘어갈 수 있다. 왜냐하면 이미 앙그는 반쯤, 아니 벌써 2단계를 넘어가버렸으니.
"누리 어때요?"
"...이게, 친구라는 건가...?"
앙그는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헤실거렸다. 나는 앙그가 처음으로 제대로 사귄 인간 친구와의 대화를 곱씹도록 여운을 즐기게 내버려뒀다.
"......."
나는 조용히 핸들을 잡은 손을 내려, 오른손으로 왼손 손목의 마도기어를 조심스레 두드렸다.
"응? 누구 연락해?"
"잠깐 일 때문에. 내일은 희아 만나러 가야하는데, 희아는 일정 조정이 좀 필요하거든요."
"아.... 희아랑도 친하게 지낼 수 있을까?"
"물론이죠."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앙그는 손으로 얼굴을 아예 엎고 고개를 숙였다. 나는 앙그가 흐느끼는 사이, 몰래 누리에게 돈주머니를 튕겼다.
[야발누리 : 칭구비 ^^7 ]
[야발누리 : 아 근데 저 계속 친구해도 되나요? 저 언니 진짜 재미있는데.]
"하여튼."
나는 돈주머니를 한 번 더 튕겼다.
[연장계약 콜?]
[야발누리 :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피닉스 충성충성.]
"흐흑, 나도 드디어 인간 친구를...흐끅!"
앙그는 아무것도 모른다.